당신 안에 하나님이 임하셨는가? (행 19:1-20)
중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신앙 논쟁을 자주 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냐 부처님이 진짜냐 하는 좀 유치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꽤 심각했습니다. 저는 당시에도 ‘하나님은 정말 계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부모님이 다 믿고, 성경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 믿는 나라들은 다 잘 사는 것 등이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실 것이라고 믿는 근거였습니다. 그렇다고 의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계시다는 분명한 체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너 하나님 봤냐?” 하고 물을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런 제가 고등학생 때 들은 설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오셨다.”는 말씀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믿음도 겨우 가진 때,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성령 하나님을 체험하고 말씀에 눈이 뜨이고서야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누리는 복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고 만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가장 놀라운 복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를 믿지만 정말 하나님은 내 마음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그런 분이 계실 것입니다. ‘교회는 왔고 예수 믿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계시다는 것은 잘 모르겠다.’ 하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에서 바울이 만난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에베소에 들렀습니다. 에베소에는 이미 제2차 전도여행 중에 들렀지만 더 머물며 복음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받고도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곳입니다. 저희가 성지순례를 갔을 때 에베소를 둘러보았는데 정말 대단한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려고 에베소에 들렀는데, 그곳에 제자들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무엇인가 부족한 듯 보여서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의 대답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하니 요한의 세례로라 하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하는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죄 사함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이 십자가와 성령의 말씀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치니, 저희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는데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성령 하나님을 모른 채 예수 믿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아직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저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저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려면 반드시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에 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임하시다!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저처럼 아직도 믿어지지 않으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고 분부하신 후,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에게 성령 하나님이 임하신 후, 초대교회, 로마 카톨릭교회, 종교개혁 후의 유럽 교회, 미국 교회를 거쳐 20세기에 들어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인도, 남미,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불길 같은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에 예언 된 일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사 40:5). 고 예언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두 가지 형태의 부흥, 곧 죄악의 부흥(세상 충만)과 성령의 부흥(성령 충만)이 동시에 빠르게, 뚜렷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하는 엄청난 죄악의 풍조에 휩싸여 있습니다. 반면에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한 성령 충만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중에 하나에 속하게 되어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흐름에 타든지 죄악의 흐름에 타든지 둘 중에 하나에 들어가게 되어있는데 여러분은 어떤 흐름 속에 있습니까? 성령의 부흥의 흐름 속에 있습니까?
중립인 것 같습니까? “목사님 저는 중립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말하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죄악이 충만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저는 중립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싶어도 중립은 없습니다. 착각입니다. 둘 중 하나에 속하게 되어있습니다. 성령 충만이 아니면 죄악 충만 속에 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성령이 충만한 흐름 속에 있지 않다면, 중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멸망으로 가는 죄악의 흐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성령 충만한 가운데 믿지 못하는 성도는 이런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반드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없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신앙 생활이 힘든 것은 성령 충만하지 않은 채 신앙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을 원하면서도 성령 충만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성령 충만에 대한 오해도 한 이유가 됩니다.
분명히 예수를 믿으면 성령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에 대해서 생각할 때 성령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성령 충만으로 일어나는 여러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를 혼돈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받는 것을 방언을 한다거나 황홀한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기대를 갖거나 거부감을 갖기도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 우리 눈에 보기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성령 하나님이 임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에베소 교회에 성령이 임하게 되니까 에베소 교회에 놀라운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11절에 보면 바울이 손을 얹고 기도하면 병든 사람이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 지니고 있던 손수건이나 병자를 고치기 위해 둘렀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 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물러가고, 악한 귀신이 쫓겨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사람은 ‘아,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구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셨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야, 이런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까?’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타나는 능력만 관심을 가졌지,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사람들은 자기는 확신이 없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예수 이름으로 명하니 귀신아 나가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생겼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유대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 같이 사도 바울의 흉내를 내면 그런 능력이 자기에게도 나타날까 하는 이들도 생겼습니다. 그들이 보니까 너무너무 신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좇아내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서 일곱 아들이 삥 둘러서서 바울기 하던 것과 똑같이 그들도 해보았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떠나가라!“ 그랬더니 귀신 들린 사람속에 역사하던 귀신이 얼마나 짜증이 나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사람들에게서 다 떠나야 되는 형편인데 너도 나도 그렇게 말을 하니까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그러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그러고 악귀 들린 사람이 달려들어서 스게와의 일곱 아들에게 뛰어올라 상하게 하니 벗은 몸으로 도망을 갔다는 에피소드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4절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그러나 이런 안타까운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 방언을 받았느냐 병고침을 받았느냐 귀신이 쫓겨났느냐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성경에만 있는 분으로 여기고 하나님은 내가 오래 믿었지만 한번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체험을 못하고 내 삶 속에 약속한 말씀의 증거나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 행적 다 전설처럼만 여겨지지 조금도 현실감이 없습니다. 오래 하나님을 믿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은 체험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실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히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이전의 삶을 완전히 회개하고 청산하고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고, 이제는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속죄 주님이시고 예수님을 내 생명의 주님이심을 고백하면 반드시 성령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령 충만함을 받는 이들이 적은 것입니까? 마음에 준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다 보니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목회가 안되었습니다. 기도하면 기도의 역사가 나타나고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병자가 고침받고 말씀의 능력이 있어 은혜가 되어 성도들이 모이는 역사가 일어나야 교회 부흥도 되고 목회도 되겠더라고요. 그것을 어떻게 얻는가? 그것이 성령 충만함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게 성령 충만함을 주옵소서. 이왕 목회하는 것 한번 능력있게 목회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성령 충만함이 능력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네가 정말 원하느냐? 네가 정말 나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성령 받으려면 간절히 기도도 해야 하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준비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함은 성령님이 정말 우리 마음에 오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저녁에 귀한 손님이 여러분 집에 오셔도 여러분은 집을 청소하고 음식도 준비하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성령님을 원하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려면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각오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뻐야 합니다.
결혼하려는 사람이 갖는 마음과 같습니다. 결혼하자면서 혼자 살 때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면 불행합니다. ‘나는 원해도 내 배우자가 원하지 않으면 나는 이젠 그것 안하겠다.’ 배우자와 함께 일평생 사는 것이 기쁘지 않다면 왜 결혼합니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함께 살게 되는 결혼 생활만 해도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시는 것입니다.
요즘에 결혼 주례를 해보면 옛날과 틀려서 얼굴 표정 속에 정말 좋아 기뻐하는 것이 역력합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혼자 사는 것과 함께 사는 것 중 어떤 것이 편합니까? 함께 살면 얼마나 포기하는 일이 많고 얼마나 버릴 것이 많습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것이니까 그렇게 좋아하면서 결혼식을 하는데 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신다는 것을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령 충만은 결혼 보다 더 놀랍고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맞이 할 마음이 먼저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셨다는 말은 이제부터는 성령님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도 마음대로 살 생각을 하는 사람은 무엇이 잘못 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기로 사모하십니까? 그것도 기쁘게 그리하기를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마음만 준비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꼭 오십니다.
흔히 예수님 우리 가정에 오소서. 우리 집에 오소서! 하고 기도하지만 가정이 변화가 없고 기쁨이 없고 가정 문제 해결이 안되며 성령 충만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만 우리 가정에 오시면 우리 가정이 변하고 천국 같을텐데 왜 예수님은 안 오시는가? 하는데,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 우리 집에 오소서!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 집 주인은 나라는 생각입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님 집에서 산다. 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쓰라고 하셨으니까 예수님 집에 들어가 산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잠을 자도 밥을 해 먹어도 주님의 허락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힐 것입니다.
많은 경우 성령님을 원한다면서 실제로는 방언이나 치유 등 체험을 원하거나 능력을 원하거나 축복을 원합니다. 정작 성령님은 부담스러워 합니다.
로마서 1장 28절에서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불신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솔직히 성령님을 모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 조차도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생각을 합니다. 능력 주시는 것은 좋고 복을 주시는 것은 바라는 일이고 방언도 하고 싶고 좀 신비한 성령 체험을 주시는 것은 좋아합니다. 그런데 성령님 뜻대로 사는가? 그것은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에게 완전히 순종하겠는가? 그것은 겁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밀한 죄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정말 마음으로 모시기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한다고 하면 두려움부터 앞섭니다. 하나님은 엄하시고,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 가시는 분, 하기 싫은 것은 꼭 하라고 하시는 분, 하고 싶은 것은 꼭 하지 말라는 분, 힘든 사명만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체험을 했어도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 체험을 하였지만 삶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성령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임하여 계십니다. 성령 체험을 했기 때문에 ‘야,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것이 맞구나. 성령님은 역사하시는구나!’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아직도 내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원하는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계시면 그 다음부터는 전부 하나님 뜻대로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대로 살 주장을 할 수 있습니까?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내 안에 들어오셨는지 모르지만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것은 결과를 보고 압니다.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여러분,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전혀 몰라고 바람이 부는 것은 아는 것처럼, 성령님이 어떻게 내 안에 들어오셨는지는 모르지만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주이심이 믿어지고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고백되고 은혜를 느끼고,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 뜻대로 기도못하고 십일조 생활 못하고 주일성수 못하면 내 마음에 근심이 생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소원이 생기는 것이 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 보면 전도해서 믿게 하고 싶은 것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심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멸시 받을 때가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께 대하듯이 하지 않습니다. 힘들면 못한다, 어려우면 안한다, 조금 부담되면 싫다고 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셔서 그동안 얼마나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셨지만 세상에 하나님이 이런 대접 받으시며 우리 안에 계신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정말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몰라서 그렇다!’ 인정하시니까 우리에게 오셔서 떠나지 않으시고 지금도 계속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 엘리 제사장에게 예언을 주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도 정말 어처구니없이 하나님 무시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듯한 언행을 할 때도 많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정말 이 마음을 바꾸셔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셨구나!’ 마땅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마음을 가지면 그때부터 얼마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사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에베소에서 강하게 역사하신 목적이 17-20절에 나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이제는 제발 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직장도 다니고 사업도 하고 가정도 꾸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눈을 뜨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예수님을 뜨겁게 찬양하며 예배하게 되고, 죄를 공개 자백하게 되고, 온갖 악한 것들을 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집에 가셔서 가만히 보십시오. 있어서는 안될 것들이 있으면 다 내놓으셔야 됩니다.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서 거실에 양주가 말이 됩니까? 주머니 속에 있는 담배, 그게 어떻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가능합니까? 명절 때 쓰려고 했던 화투, 그것도 다 버리십시오. 책꽂이에 옛날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사다놓은 테잎, 비디오 테잎이 있으면 다 태워 버리십시오. 성령이 역사하시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태워버리라 말라 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구나!’ 내가 거기에 전심으로 반응하기 시작하면 돈을 주고 그런 것을 가지고 있으라고 해도 가지고 있을 사람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의 태도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며 순종하지 않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성령님 아니면 세상의 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고전 12: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롬 8:1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여러분, 이따금 누구랑 싸우고 막 화를 내고 혈기를 내고 성질을 낼 때가 있습니까? 그때 즉시 거울을 쳐다보십시오. 여러분의 눈이 정상이 아닙니다. 영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무서운 영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합니다.
교역자 제자훈련 세미나를 할 때 질문 중에 여전히 악질이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나는 구원도 못 받은 사람인가요? 자신과 그 사람을 비교하지 말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를 보십시오. 그래도 나 보다 악질인 사람인가? 나랑 똑같습니다. 예수님 못 박아 죽인 죄인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똑같습니다. 눈이 뜨여야 됩니다.
“예수 믿어도 받은 복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모르겠습니다.” 하는 분이 있는데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을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 여러분이 부러워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십자가 앞에 서 보십시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가 눈이 안 열려서 그런 것입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미혹을 당해서 그렇습니다.
어느 사모님과 상담을 했는데 자살 유혹을 받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차라리 죽으면 되겠다. 이런 사람 안 만나고 이런 일 안 겪어도 되겠다. 죽으면 지옥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고 지금 내 처지와 형펀에서 이 사람들 속에서 떠날 수 있다면 차라리 지옥에 가는 것이 낫겠다. 는 생각이 들 정도라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사모님, 기도할 때 그냥 예수님만 부르세요.
소스라치게 놀라며 예수님! 부르는데, 눈물이 나더랍니다.
신앙 생활 잘하던 사람들도 영적으로 세상의 영 미혹의 영에 사로잡히면 판단도 다 그르칩니다. 정말 무서운 길로 가게 됩니다. 보지 못하게 되고 깨닫지 못하게 되니까 평생 후회할 길을 간다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밀한 죄를 끊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을 거부하고 세상의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영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실체를 알고 나면 죄를 짓고 싶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소아암으로 두 눈을 실명한 동진이의 어머니이신 강혜성 집사님, 동진이가 생후 9개월째 되었을 때 안구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두 눈을 다 실명하였습니다. 게다가 남편의 부도로 엄청난 빚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 겪었던 절망과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전도를 받아 교회를 나오게 되었답니다. 몸부림치며 기도도 해 보았지만 어려워져 가기만 하는 형편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 의심하는 마음도 생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훈련을 통해 회개의 눈물과 성령 충만의 감격을 경험하였답니다.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고 나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달아지더랍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고통 뿐이라고 생각되었던 일들에 대하여도 감사한 조건들이 깨달아져서 많이 울었답니다. 지금 저는 세상적으로 볼 때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이 보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과 남편 그리고 아직도 빚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활은 행복 그 자체입니다. 내게는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내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감사하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이미 우리 마음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신 사람으로서 마땅한 마음과 태도로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은밀한 죄 지으라고 돈을 주고 유혹해도 죄 못 짓습니다. 성화, 저절로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마음 준비를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내 마음에 와계시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인도를 받기를 원하면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놀라운 복이 여러분 삶에도 놀랍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 시간에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하나님, 하나님이시군요. 하나님이 제 마음에 오셨군요. 제가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겠습니다. 하나님, 제 삶을 주관해 주시옵소서. 제 삶을 다스려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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