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3:4-15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감동시켜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요즘 교회들마다 또 하나의 헌금이 있어지는 것을 보니 바로 일천번제예물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중에도 정성을 다하여 예배시간마다 드려지는 것을 봅니다. 일천번제를 드리는 분들은 저마다 소원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려집니다. 자녀에 대해 사업에 대해 건강을 그리고 온 가지 소망을 담아 드립니다. 그래서 일천번제 같은 예물의 형식을 소원예물이라 명합니다. 그렇다면 일천번제는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드려진 것일까요? 여러 기원이 있지만 성경에서 대표적인 일천번제의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오늘본문에 솔로몬의 일천번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일천번제와 요즘의 일천번제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물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에는 솔로몬의 일천번제나 요즘 성도들의 일천번제가 같을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에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드린 것이라면 요즘의 일천번제는 마음의 소원과 원함 그리고 목적을 갖고 드려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감사 감격이어야지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또 다른 목적을 갖고 하나님을 찾으면 결국 지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일천번제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천번제는 번제로 드려집니다. 그냥 헌금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번제는 헌신을 다짐하며 제물의 각을 떠 가죽을 벗겨 불에 태워드리는 제사형식입니다. 그렇다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루 한번을 해도 3년을 가까이 긴 시간동안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려진 것입니다. 잠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한두번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드려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솔로몬의 변함없이 드려지는 일천번의 번제에 하나님이 감동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합니다. 이 질문에 솔로몬은 망설이지 않고 지혜를 구합니다. 9절에 보니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합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고 10절에서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번 스스로 질문하고 말씀을 듣는 것이 좋으리라 여기면서 오늘 예배 중에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오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하신다면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분명하게 정리가 되어 있으신지요?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기를 원합니다. 또 하나 내가 구하는 그것이 주의 마음에 꼭 맞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솔로몬의 경우 무엇을 구했기에 주의 마음에 맞고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일까요?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기에 감동하신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의 나라와 주의 백성들을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는 왕인 솔로몬의 사명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슴에는 백성들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고 백성을 위해 솔로몬을 세운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원칙에서 무너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백성을 위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하시는 질문에 자기를 위해 구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을 위해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슴속에 있는 것이 솔로몬의 가슴속에서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긍휼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혜를 구해서 감동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소원을 아뢰서 감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구해서 감동하신 것입니다.
본문 3:10-11에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아마도 솔로몬이 부와 명예를 구하였어도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 말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구한 지혜만 구신 것이 아니라 13절에 보니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 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축복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이러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에 흡족하시기만 하면 필요이상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슴속에 있고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만 있다면얼마나 좋을까요? 언젠가 집회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도착했는데 막내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빠 아빠한테 드릴것 있다하며 자기 방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책상서랍을 열어 붕어빵하나를 주는 것입니다. 아빠 드릴려고 먹지 않고 며칠을 보관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감동이 되 변할대로 변한 붕어빵을 막내 보는 앞에서 한입물고 고마워하며 화장실에서 얼른 뱉었습니다. 변한 것이지만 아빠를 위한 막내의 마음이 너무나 고맙고 감동스러워 눈물이 났습니다.
지혜와 총명을 선물로 받은 솔로몬은 첫번째 재판에 당면합니다.
처음재판은 믿지 않는 자들 속에서도 회자될 정도로 아주 유명한 재판입니다.
바로 아이를 둔 창기들의 다툼입니다. 한 아이를 두고 서로 내가 이 아이의 생모라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지혜로운 솔로몬은 서로가 생모라 여기니 이 아이를 둘로 갈라 나누어 갖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해서 칼로 아이를 두동강낼려던 차에 진짜 생모가 만류하며 자기가 포기할테니 이 아이 생명만을 살려달라는 요청에 솔로몬은 살려달라 애원하는 이 여인이 진짜 생모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솔로몬의 지혜로 진짜 어미를 찾아낸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 재판에서 주목할 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솔로몬의 지혜를 주목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또 하나의 눈을 가지고 봐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처음재판이 창기들에 관한 재판이라는 것입니다. 왕인 솔로몬은 천한 창기들의 문제를 자신이 직접 관할하기보다는 밑의 사람들에게 맡길 수 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소자에 불과한 창기들의 문제들까지 직접 관할하는 것을 보면 결국 솔로몬의 지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금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향한 것입니다. 솔로몬왕은 좀더 귀한 사람들, 좀더 가치 있는 재판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창기들의 문제는 당시 법대로 하면 돌로 쳐 죽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마음이 백성을 긍휼이 여기고 있다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이행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에게 있어 사랑의 범위는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사람들 모두를 귀하게 여기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수준이 맞는 사람을 찾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함에도 실컷해야 내 울타리안에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왜 감동하십니까 솔로몬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가슴속에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주의 마음에 맞기만 해보라 하나님이 주신 솔로몬의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잠언을 보십시오. 수천 수만의 교훈들이 있습니다. 물에 사는 고기들 하늘을 나는 새들까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싶어 세계각국에서 몰려 들 정도였습니다.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구하지 않는 부와 명예와 더불어 경고까지 함께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구하지 않은 부와 명예도 주셨지만 경고를 함께 주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주목해야할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14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처음과 같이 한결같기는 쉽지 않은가 봅니다.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지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좀더 대단해지고 유명해졌을 때 차라리 작을 때 겸손한 것이 유익입니다. 잘된 뒤에 망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없다가 있는 것도 힘들고 있는 것이 늘 있게 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주변 목사님들은 저에게 요즘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유 목사! 초심을 잃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왜 장로 된 뒤에 변했다 합니까? 한결 같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작을 때 십일조도 열심히 하고 해서 복 받고 커지면 힘들어합니다. 안타깝게도 언제부터인가 솔로몬의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왕상11:1-4절을 보니 솔로몬은 많은 재산과 많은 여자를 처로 두었다 말합니다. 9절에 보니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돌이켜 저에게 진노하셨다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두번이나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한번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한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두번씩이나 하셔도 안 들입니다. 그의 부요함 주변의 사람들 또 더 화려해지고자 하는 마음은 더 이상 말씀이 말씀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들려진다는 것은 내게 복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해지면 새가 울 때에도 나뭇잎이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의 소리가 들립니다. 영적인 문둥병에 걸리면 죽어가도 썩어가도 모릅니다. 제사장 엘리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 합니다. 이는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어두워질 때로 어두워져 말씀이 말씀이 못 된 것입니다. 깨어 있는 어린 사무엘은 반대로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한 아이였습니다. 왕상12:4절에 보니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됩니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백성들의 탄원이 있어집니다.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이제 왕은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매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주소서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위해 지혜를 주셨는데 솔로몬은 오히려 자기 궁궐을 짓는데 13년을 소비했습니다. 13년동안 백성들은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처가 천명이면 정말 말 그대로 궁궐의 규모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가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 아름다운 지혜를 결국 자기를 위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처음 일천번제를 드리며 지혜를 구할 때와 달리 하나님의 마음에 맞을 때와 달리 자기를 위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변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있습니다. 세상의 종교는 아무리 열심이어도 결국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있습니까 무엇이 중요한 사람입니까? 믿음을 가장한 이기주의는 무섭습니다. 여기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립니다.
우리가 솔로몬처럼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달란트 비유에서 보면 얼마나 무엇을 받았느냐보다는 나는 내가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다를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내 관심도 다른 것이 아닌가.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에 관심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에 더 많은 관심이 있으십니다.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 어느 정도의 일을 하느냐에 있지만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 그가 어느 정도의 사람이 되었느냐에 있습니다. 사람은 더 큰 그릇이냐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크든 작든 그 안에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가 무엇을 담고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가졌느냐에 있고 무엇을 얼마나 받았느냐에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어떻게 쓰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지혜나 경험이나 물질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그 삶의 목적이 나라면 우리는 솔로몬처럼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큰 교회에 더 많은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은 더 큰 교회보다는 교회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가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너무도 풍성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신 분이십니다. 왜입니까? 주님에 마음에 맞아서 믿을만해서입니다. 백성들을 향한 마음을 보고 기대감이 있어서입니다. 은혜란 기대에서 보상으로 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부유함은 사람들의 칭찬은 처음마음을 잊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더 이상 말씀이 말씀되지 못했습니다. 우리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감이 상실감으로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에게만 멈추어 있으면 죽은 사해바다처럼 되지만 나를 넘어 또 다른 나를 향하면 갈릴리 바다처럼 생명의 바다가 될 수 있습니다. 에덴에도 선악과는 있었습니다. 이 경고앞에 열두제자중 유다는 무너지고 초대교회 일곱집사중 니골라는 무너졌습니다. 평생에 하나님의 마음을 잊지마십시오. 결코 내 울타리안에서 나만을 위한 것으로 가둔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리신 것은 백성을 위함이라 했습니다. 솔로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지만 결국 솔로몬은 그 기대를 무너뜨려버렸습니다. 자신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니 백성들이 솔로몬의 영광을 위해 이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안산빛나교회라는 공동체에 담임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저를 두고 많은 복을 받았다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저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해 나를 세우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는 얼마나 가졌느냐 이루었느냐 보다는 어떻게 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를 우습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가슴속에 있는 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다윗의 가슴속에 있는 하나님 여러분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솔로몬의 지혜처럼 여러분이 받은 남다른 축복과 은혜가 있다면 무엇보다 은혜가 은혜 되도록 해야 합니다.
출처/유재명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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