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길
마가복음 8장 27-34절
< 주님을 누구로 알고 있습니까? >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이 나오는 본문이고, 십자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하는 본문입니다. 어디에서 이 고백이 있었습니까?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 새."
여기에서 나오는 가이사랴 빌립보는 지중해 연안의 해변도시인 가이사랴(팔레스타인에 위치한 로마의 행정수도, 로마 주둔군이 있었음)와 다른 곳이고, 또한 유럽에 있는 빌립보(사도행전 16장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해서 사울이 전도방향을 돌려 유럽으로 갔을 때 최초로 갔던 곳, 유럽 최초의 신자인 루디아를 중심으로 세워진 빌립보 교회가 있는 도시)와도 다른 도시로 갈릴리 호수 동북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고대 왕들은 자기 이름을 따서 계획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따서 붙인 도시이고, 빌립보는 필립 왕의 이름을 따서 붙인 도시이고, 가이사랴는 로마 황제인 가이사(Caesar, 시저)의 이름을 따서 붙인 도시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름을 붙인 도시가 곳곳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알렉산더는 자기의 점령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70여개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곳이 현재 이집트 지역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입니다.
그러면 가이사랴 빌립보란 명칭은 두 개의 명칭이 혼합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갈릴리 지역은 그 아들 중의 한 명인 헤롯 빌립이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 빌립이 자기 이름도 붙이고, 로마 황제인 가이사의 이름도 붙여서 명칭을 붙인 곳이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이고, 특별히 우상숭배가 심한 지역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까지 오게 되었는데 우상숭배가 만연한 그 땅의 분위기를 살피시고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두 가지 하셨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27절).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입니다(29절).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믿음생활의 형태와 교회생활의 형태가 현저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부부생활을 할 때에도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누구로 아느냐에 따라서 그 가정의 행복이 좌우됩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을 돈 벌어오는 기계로 안다면 문제입니다. 반대로 남편도 아내는 그저 밥 해주는 사람으로 안다면 역시 문제입니다. 내 배우자와 내 자녀를 하나님께서 나의 행복을 위해 내 옆으로 붙여주신 존재로 알 때 그 가정에 행복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청년혁명가, 어떤 분은 박애주의자, 어떤 분은 그저 좋은 분, 어떤 분은 복을 주시는 분 등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어야 할까요?
< 메시야의 진정한 사역 >
그 질문에 베드로는 아주 정확한 대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주님은 너무 흡족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요나의 아들 갈대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구세주란 뜻을 가지고 있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야라고 합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당신은 저희들을 구원한 메시야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고백을 듣고 흡족하게 생각하셨지만 실질적으로 메시야가 되는 길은 화려한 스타가 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스타가 되는 길, 축복 받는 길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의를 주십니다. 본문 3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예수님이 메시야다. 이제 우리는 운수 대통했다."라고 떠들고 다니며 너무 들뜨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속박에서 구원할 정치적인 메시야를 원했지만 진짜 메시야는 전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이고, 진짜 메시야의 사역은 그들이 생각하는 강력한 군사력과 힘을 가진 화려한 정치적인 메시야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진짜 메시야의 사역을 주님은 31절에서 가르쳐주십니다. 본문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진짜 메시야의 사역은 고난의 사역이라는 말입니다.
그 가르침을 듣고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마 이런 말이 들리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인자가 곧 영광을 얻어 이 민족과 로마 위에 올라서서 만국을 철장 권세로 다스리실 것이라." 그러나 그런 화려한 말씀은 안 하시고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화들짝 놀라면서 32절에서 예수님을 붙들고 그렇게 하시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하는 말 같지만 사실상 제자들의 기복적인 모습과 의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 의도를 보시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3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야 합니다 >
우리는 주기도문을 자주 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믿고 축복 받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런 베드로와 같은 기복주의적인 요소와 의도가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복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람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주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본문 34절 말씀을 보십시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는 이 구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구절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분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십자가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십자가라는 말은 많이 하고 십자가 목걸이 장식도 잘 하지만 실질적으로 십자가는 잘 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등에 자기 십자가를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힘든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높아지는 길이 아니라 낮아지는 길입니다. 그 길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길이 아니라 전부를 잃는 길입니다. 그처럼 십자가는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십자가라면 반드시 부활의 은총과 축복이 있게 될 것입니다.
왜 "진정 십자가라면"이라는 단서를 붙입니까? 아무리 봐도 십자가가 아닌데 십자가라고 오해하면서 자기 잘못과 단점은 고치지 않고 십자가를 내세워 변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인격적 결함으로 고난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면 고난을 통해 자신의 인격적 결함을 고치려고 해야 하지 그 고난을 십자가라고 여기면서 자기 반성도 하지 않고 고난 콤플렉스에 빠져서 고난을 계속 자초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십자가는 하나님 때문에, 신앙 때문에 내가 희생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성격적 결함이나 내 잘못된 태도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러한 잘못된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아무 것이나 어려움을 당하면 무조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나의 잘못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오히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란 하나님을 위해, 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십자가를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기꺼이 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기복주의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의 길을 갔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하면 더욱 삶은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면 오히려 그 삶에 행복이 꽃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즐겁게 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존재가 잊혀지고, 때로 소외당하는 것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는 놀라운 부활의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항상 십자가의 거룩한 대열의 선봉에 서서 부활을 은총을 예비하시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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