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길
누가복음 10장 25-37절
< 이웃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
한 수도사가 아라비아 사막에서 고행하고 금식하며 극기의 수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마귀가 붙어 그를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갖은 유혹을 다해도 수도사는 눈을 감고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먹는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것으로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마귀가 낙심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돌아오다가 늙은 마귀를 만났습니다. “야! 너 왜 이렇게 낙심해 있어?”
젊은 마귀가 수도사를 넘어뜨리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자 늙은 마귀가 “내가 좋은 비법을 아는데 그대로 해봐!”라고 하면서 비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비법을 듣고 젊은 마귀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습니다. 그리고 곧 수도사에게 돌아가서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수도사님! 수도사님 친구가 며칠 전에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되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수도사가 눈을 팍 뜨고 시기심을 얼굴에 드러내면서 넘어졌다고 합니다.
사람의 행복을 깨는 제일 요소는 비교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을 버리고 사랑하는 것은 신앙의 중요한 내용이며, 그처럼 사랑을 실천할 때 행복도 주어집니다. 무엇이 사랑의 실천일까요?
사랑의 실천을 나타내는 무수한 표식들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도 사랑의 표식입니다. 고난이 있어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말을 하면 주위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더 나아가 소리 없이 좋은 일을 위해 내 호주머니를 비우는 것도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을 실천하면 본인도 행복해지고, 곧 축복도 따라오게 됩니다.
< 영생의 축복을 얻는 길 >
사람에게 무엇보다 큰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축복입니다. 다른 모든 축복들도 바로 영생의 축복에서 비롯됩니다. 그 영생의 축복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며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이 되물었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율법에서는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본문에서 말하는 영생의 축복을 얻는 첫 번째 원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김으로 주일성수에 목숨을 겁니다.
왜 본문에서 강도만난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까? 본문 30절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을 상징하고, 여리고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것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면 실패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최선을 다해 주일성수하며 교회를 섬기면 반드시 축복도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그들은 전 세계 인구의 300분의 1도 안 되지만 노벨상을 탄 사람의 3분의 1이 유대인이고, 범세계적인 핍박과 고난을 극복하고 지금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정상에 그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다른 차이는 없고 오직 한 가지 차이뿐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승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째 관문과도 같습니다.
2. 이웃을 사랑하는 것
본문에서 영생의 표징이 되는 또 한 가지 표식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보이는 이웃 사랑을 통해 나타납니다. 특히 본문에서 주님이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 것은 가까운 사람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가깝다고 생각하면 사랑하는 노력을 게을리 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동료나 친구들에게는 그런 호인이 없는데 가족에게는 잘 못합니다. 그러면 가족들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밖에서 가끔 만나는 남에게 호인으로 알려지는 것보다 매일 보는 가족에게 먼저 호인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그처럼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의 차원도 깊어지고 인격도 높아집니다.
어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매일 새벽기도를 다닙니다. 어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동서를 칭찬할 때 “맞아! 동서는 칭찬받을 만해!”라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감격이 됩니다. 그것도 이웃 사랑입니다. 그처럼 진정한 이웃 사랑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시기심을 극복해야 가능합니다.
어느 날, 한 동료가 같은 직장에 일하다가 혼자 진급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진급하면 괜찮은데 아는 사람이 진급하면 더 열이 받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웃 사랑은 말처럼 쉽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시기심을 극복하고 동료와 동서가 잘 나가면 같이 신나게 좋아하고 축하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디에 가도 화목하게 지낼 수 있고, 평안이 넘치게 되고,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마음도 없고, 미래의 축복과 행복도 주어지게 됩니다.
3. 사랑을 실천하는 것
본문 28절에서 주님은 율법사가 영생의 원리에 대해서 대답을 잘한 것을 보고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산다.”고 하셨습니다. 즉 사랑의 중요성을 알고 있어도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다. 복은 감사할 때까지 복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다.” 그처럼 실천적인 사랑을 가르쳐주시려고 주님은 본문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는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거반 죽였습니다. 그때 제사장이 봤지만 그냥 지나쳤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그를 치료해주고, 주막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새며 돌보고, 다음날 떠나면서 주인에게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비용이 들면 그 비용까지 부담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특히 본문이 가르쳐주는 중요한 의미는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로 힘 있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도 “내가 여기서 무슨 도움을 얻을까?”를 생각하고, 사람을 사귈 때도 “내가 누구와 사귀어야 도움이 될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태도가 아닙니다.
축복을 받으려면 힘 있는 사람을 찾고, 힘 있는 단체를 찾을 생각부터 하지 말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을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인생에서 출세보다 축복이 더 소중합니다. 힘 있는 사람과 사귀면 출세는 해도 축복은 없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힘을 잃어버린 사람을 돌봐주면 출세는 늦는 것 같아도 축복의 가능성은 커집니다. 그러므로 주위에 고난을 당한 사람은 축복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거리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축복을 주시기 전에 축복거리를 주십니다. 그 축복거리를 놓치면 축복도 놓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하고 신음하는 자는 축복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진 ‘거룩한 미끼’입니다.
인생은 묘합니다. 이상하게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힘 있는 사람을 찾아가면 사실 거의 도움을 얻지 못합니다. 반면에 힘든 이웃을 찾아가면 하나님이 거꾸로 힘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신기하게 임하게 됩니다. 즉 동쪽에서 누군가를 도우면 서쪽에서 생각지 않게 축복이 임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비밀스런 축복의 법칙입니다.
<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까요? >
어떻게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본문은 이웃 사랑의 몇 가지 실천 원리를 말해줍니다. 첫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합니다. 그 정도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사람을 편견을 가지고 구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의 대리인과 같은 존재였지만 그들은 강도만난 자를 보고 피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갖은 편견에 시달리고 차별받던 사람들이었지만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이 장면은 학력, 인종, 지역, 성별 등으로 편견을 가지지 말고 한 번의 실수로 편견을 가져서도 안 된다는 것을 도전합니다. 편견의 벽을 잘 깨뜨리는 것도 중요한 이웃 사랑입니다.
셋째, 충고하는 자가 되지 말고 돌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소에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말로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겠지만 죽는 사람을 보고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실제로 그를 치료하고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봐 주었습니다. 그처럼 말로만 가르치기보다는 실제로 돌봐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랑은 고치는 것이 아니라 돌보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인색한 것, 불평하는 것, 은혜를 모르는 것 등 고쳐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자기가 고치겠다고 하면 속이 터집니다. 목회도 교인을 고치는 식으로 하면 목사도 괴롭고 교인도 괴롭게 됩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돌봐주면 스스로 제 길을 찾게 됩니다. 그처럼 언제나 남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마음이 약해 거칠고 사나운 양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양들은 여의도 순복의 교회나 영락교회로 보내소서.” 큰 교회에 가면 거대한 조직과 장로님들 때문에 목사를 괴롭힐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기도하는데, 곧 마음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종아! 나는 죄인을 구하러 왔는데, 너는 의인만 찾는구나! 너는 삯꾼이다.”
우리는 좋은 사람만 찾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자기의 마음에 맞는 사람만 찾으면 인격도 커지지 못하고 축복도 커지지 못합니다. 반대로 어디에 가든지 감사하고, 순종하고, 관심을 받기보다는 조용히 드릴 생각을 하면 반드시 축복의 크기도 커질 것입니다.
넷째, 교회에서 성령 충만으로 밝은 얼굴을 해야 합니다. 남을 미워하면 자기 얼굴도 점차 미워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할수록 사람은 인상도 좋아지고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얼굴이 됩니다. 자세히 보면 밝은 얼굴에는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고 소망도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 충만함으로 항상 밝은 얼굴을 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회는 나그네가 머무는 주막과 같습니다. 그런데 주막은 술 취한 사람이 많아야 번성합니다. 그처럼 영적으로 성령의 새 술에 취한 사람이 많아야 교회도 번성의 은혜가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새 술에 취해야 고난과 열등감도 쉽게 이겨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처럼 세상을 이기려면 성령의 술에 취해 얼굴에 천국 미소가 넘쳐야 합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생기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감사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기쁨을 줍니다. 웃음꽃이 피게 합니다.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는 말마다 예쁜 말만 합니다. 얼굴만 봐도 힘이 납니다. 같이 있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 사람은 건강의 축복도 받고, 사업의 축복도 받습니다. 그리고 전도도 얼마나 쉽게 하는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셨습니까? 생명을 살리고 돌보라고 부르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돌봐주고, 좋은 말로 서로 권면하고, 감사함으로 영혼을 풍성하게 하고, 세파에 찌들고 지친 교우들을 서로 일으켜주어야 합니다. 때로 살다보면 맘에 들지 않는 사람도 만나지만 그런 사람도 최선을 다해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처럼 서비스 정신이 투철해야 합니다.
왜 똑같은 커피지만 호텔의 커피 값이 훨씬 비쌉니까? 서비스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좋은 서비스를 하는 곳에는 한 번 더 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사업을 할 때 소비자들이 원하는 제품은 만들지 않고 소비자를 원망하면 실패합니다. 요새 성공하는 기업들은 자신들이 만들기 쉬운 제품보다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제품을 듭니다. 그래야 다른 커피숍이나 다른 제품에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성공하려면 2가지가 있으면 됩니다. 하나는 최고의 실력입니다. 그러나 실력이 부족해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친절입니다. 누가 친절합니까?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친절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자신감이 생깁니까? 실력이 있어도 생기지만 진정한 자신감은 믿음에서 생깁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미래의 큰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사소한 말에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난이 있어도 내일의 찬란한 비전을 바라보면서 얼마든지 인내하고 이겨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윗사람에게도 친절해서 윗사람에게 토씨를 잘 달지 않습니다. 그처럼 친절하고 순종적인 사람은 윗사람이 길을 열어주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합니다. 그처럼 상대방의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상대방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런 서비스 정신이 넘쳐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서비스 정신을 가지고 대하고, 자녀도 부모에게 서비스 정신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처럼 다른 식구들의 취향과 마음속의 소원을 잘 읽고 그 취향과 소원을 최대한 충족시켜주려고 할 때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어떤 남편은 자기가 돌보는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기보다는 아내의 사랑을 뜯어먹으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불평하고 요구합니다. “당신 어떻게 되라! 왜 내 기분을 모르느냐? 왜 당신은 사랑이 없느냐?” 그런 진드기 같은 남편이나 아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진드기는 먹을 것이 있으면 다투지 않고 먹이에 붙어서 실컷 갉아먹고 빨아먹습니다. 그러다가 먹이가 없어지면 서로를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도 가족을 뜯어먹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진드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진드기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때는 불평을 더 삼가고 더욱 서로에게 힘을 주려고 애써야 합니다. 지금 다짐하십시오. “이제 요구는 줄이고 헌신을 늘리며 살자! 이제 교회와 가정이 내 마음에 맞기만 바라지 말고 내가 교회와 가정의 필요를 더욱 살피며 살자!”
<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십시오 >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에서의 사랑의 경험은 그처럼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기를 사랑을 받지 못해 줄 사랑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구원받은 것은 이미 엄청난 사랑을 받은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주고받으면 하나님께서 그 앞날에 엄청난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18세기에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동을 주도했던 분이 있습니다. 바로 에드워드 요나단 목사님입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가 12명의 자녀를 낳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2백년 후에 보니까 그의 자손 8백 명 중에 부통령 1명, 상원의원 37명, 장관 30명, 대기업회장 120명, 대학교수 157명, 저명한 과학자 68명 등 약 3분의 2가 저명인사가 되었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한 인류학자가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가문이 되었는지 그의 가문을 면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유전적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그 인류학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론이란 에드워드와 사라 부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던 부부였기 때문에 위대한 가문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부부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항상 섬김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일하고 공부할 때도 보다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일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결국 그런 섬김의 삶이 위대한 가문을 낳은 것입니다. 위대함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그 위대한 일이 위대한 축복을 낳습니다.
이제 축복 받겠다고 너무 안달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얻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면 됩니다. 내 곁에 힘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의 손길을 베풀면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은 힘 있는 자의 편에 섭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힘없는 자를 돌봄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기만 하면 때때로 고난과 시험은 있어도 얼마든지 그 고난과 시험을 이길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영향력도 커지고,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결국 힘든 사람을 돌보는 일은 항상 생각지 않은 축복을 예비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하도에서 1000원짜리 복권을 사는 것보다 지하도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1000원을 주는 것이 훨씬 복된 일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으면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의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하나님이 축복 주시려고 내린 거룩한 미끼를 먼저 덥석 무십시오. 고통당하는 자가 있으면 남이 도움의 손길을 펴기 전에 내가 먼저 펴십시오. 그 축복의 전주곡을 흘려보내면 아무리 많은 축복 집회에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누군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에게 가까이 가면 축복의 때도 가까워집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시련이 수시로 다가옵니다. 어떤 때는 살 길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가까이 찾아온 선한 사마리아인들 때문에 지금까지 잘 목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힘들 때 제 곁에 있어준 분들을 위해 더욱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시련을 당해 사람들이 떠날 때 오히려 더욱 가까이 다가온 이분들을 축복하소서!”
이번에 저의 홈페이지가 해킹을 당해 망가졌을 때 처음에는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처럼 많이 속상해있을 때 한분 때문에 새롭게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전혀 모는데 분인데 그동안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홈페이지를 새로 개편하는데 도움이 되라도 약간의 헌금을 알아서 보내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홈페이지 개편 전체비용에 비하면 아주 작은 비용이지만 그 사랑의 후원을 받고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은 더욱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군가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내 차지’라고 하며 그를 도우십시오. 가정이나 교회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백기사처럼 나타나 돕고, 그때 공수부대처럼 낙하산 타고 와서 도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삶을 오래도록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사회가 어둡다고 하지만 아직도 선한 사마리아인은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가정과 교회에 힘이 되고, 어둔 세상에 빛을 전해주는 복된 심령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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