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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 요한복음 19:7~16

by 【고동엽】 2021.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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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씀: 요한복음 19:7~16

 

 

 

우리 나라의 상례법은 부모님이 돌아가실 경우 100일 동안 상복을 입도록 권하고 있니다. 요즈음은 상복이라고 해서 옛날처럼 격식을 갖춘 옷을 고집 하지는 않고, 대게 검은 색 옷을 입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일반적으로 상복이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살아 있는 자식들이 갖추는 예의인 것처럼 생각되기가 쉽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실제로 상복을 100일 동안 입다보면, 그 속에 더 깊은 뜻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8장 21~2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제자의 부친이 사망하였다면 응당 스승도 찾아가 조문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상을 당한 제자에게,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말씀하셨습니다. 얼핏보면 예수님은 인륜도 천륜도 무시하는 비도덕적 인간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장례예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역설적 표현인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살아 남은 자가 죽은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가 남긴 시신을 처리해 주는 일이 고작입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살아 남은 자들에게 훨씬 더 크고 많은 공헌을 합니다. 죽은 자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산 자들에게 죽음을 가르쳐 주는 동시에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을 바르게 일깨워 줍니다. 죽음을 알 때에만 생명의 참된 뜻을 제대로 터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 자들이 오직 죽음 앞에서만 자신의 삶을 바르게 가다듬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죽은 자의 죽음은 산 자의 생명의 질을 높여 주기에 죽음보다 더 위대한 메시지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부친 상을 당한 제자에게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케 하라 신 말씀은, 죽은 자만을 위해 장사를 치르는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부친의 장례식을 통해 살아 있는 네 자신의 인생을 진리 앞에서 바르게 정립시키고 돌아오라는 깊은 의미의 권고였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복이란,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주는 최후의, 그러나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100일간 상복을 입는 동안, 나 자신 역시 언젠가는 수의를 입고 관 속에 누울 존재임을 깊이 인식하므로, 남아 있는 내 생의 의미를 전혀 새롭게 승화시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입히는 옷을 '수할 수(壽)', 즉 생명을 뜻하는 수(壽)자를 사용하여 수의라 부릅니다. 이미 생명이 끝나 죽어버린 시신에게 입히는 옷을 '생명의 옷'이라니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 시신일 망정 땅속에서 오래오래 견디라는 의미로 수의라 부르는 것이라면, 천 중에서 제일 질기고 오래가는 천으로 만들어야 할 터인데, 그 반대로 정작 수의는 가장 쉽고 빠르게 썩는 삼베로 지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에게 입히는 옷을 생명의 옷이라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 또한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를 위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수의의 가장 큰 특징은 주머니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가 없는 탓입니다. 바로 이것이 죽은 자가 입는 수의가 산 자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호흡이 멎어 관 속에 드러눕는 그 순간,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그 무엇하나 가져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사는 순간부터, 우리 생명의 의미가 참다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릇 살아 있는 자들은 한결같이 '나의 것'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가져 갈 수 없는 것이라면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것'이란 과연 존재합니까? 정말 '나의 것'이라면 이 세상을 떠날 때 송두리째 들고 갈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아니 '나의 것'에 대해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해 죽어서도 '나의 것들'을 지닌 채 무덤 속에 묻히는 자들도 분명히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하기 때문에 그들의 무덤은 어김없이 파헤쳐져 그들의 '나의 것들'은 모조리 산 자들에 의해 노략질 당하므로, 죽은 자에게는 결코 '나의 것'이 있을 수 없음을 웅변해 줄뿐입니다.

 

그렇다면 상복의 깊은 의미는 무엇입니까? 왜 상복이 산 자를 위한 죽은 자의 위대한 선물일 수가 있습니까? 죽음으로 인해 죽은 자가 입는 옷이 수의라면, 그로 인해 산 자가 입는 옷이 상복입니다. 그러므로 상복이란 산 자가 입는 수의요, 산 자의 죽음 훈련복인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훈련복입니까? 이 세상에 '나의 것'이란 결코 있을 수 없음을 내 심령 속에 각인 하는 훈련복입니다. 그렇기에 상복은 위대한 선물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나의 것'이란 존재치 않는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으므로, 우리 생명의 의미가 비로소 구체적으로 참다워 질 수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도대체 무엇이 진정 '나의 것'입니까? 내 생명입니까? 내 생명이 '나의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인데 왜 내 마음대로 안 됩니까?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일평생 피땀 흘려 번 돈인데 죽어서 단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합니까?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밤을 세우며 쌓은 지식인데, 이 세상을 떠날 때 지식의 낱알하나 들고가지 못합니까?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지혜인지 아십니까? 이 세상 그 무엇하나 '나의 것'은 없다는 사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게 잠시 맡겨 진 것일 뿐이란 사실, 따라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주인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단지 그 관리인에 불과 하다는 사실―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인간의 모든 비극은 단순하면서도 엄연한 이 사실에 대한 무지에서부터 비롯되는 탓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유대인들이 사형에 처해 달라며 고발한 예수님을 심문해 보았지만 죽일만한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유월절이면 죄수 한 명을 특사로 풀어 줄 수 있는 관례에 따라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석방시키려 했지만, 유대인들이 강도 바라바를 요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로마군병으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가하게 한 뒤,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끌고 유대인 무리들 앞에 다시 나타나, 이 정도로 혼을 내어 주었으니 이제 풀어주면 어떻겠느냐고 그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방자하게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참칭하였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소리쳐 외쳤습니다. 그 말에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주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않으셨습니다. 이미 빌라도 총독에게 할 말을 다 하셨기에, 새삼스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의 침묵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심문을 받는 죄수가 자신의 물음에 침묵한다는 것은, 곧 총독인 자기 자신의 권위에 대한 무엄한 도전이라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0)

 

계속하여 침묵으로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킨다면 정말 죽일 수도 있다는 협박인 동시에, 총독으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권세의 과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침묵하시던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본문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11a)

 

예수님과 빌라도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빌라도는 자신의 직책, 자신의 권세와 권한이 자신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확실한 '나의 것'이라 믿었던 반면,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은 '너의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네게 잠시 맡겨진 것에 불과할 뿐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신 바 '위에서'란 빌라도를 총독으로 임명한 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뜻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천년 전 빌라도가 로마 총독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빌라도가 결코 우둔한 자가 아니었음의 반증입니다. 그는 당시 출중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는 것도 많았을 것이고 총독에 이르기까지 많은 경험도 필히 거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빌라도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내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나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진 것이요 나는 관리인에 불과하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법, 진리를 따라 행사하고 처분해야 된다는 사실에 무지한 자였습니다. 만약 빌라도가 이 중요한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는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옳지 못한 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 어리석은 죄를 범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에 무지하므로 인해, 빌라도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아 죽이는 가장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인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어리석은 빌라도야 말로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왜 아버지의 관을 옆에 두고 아버지가 남긴 유산 때문에 자식들이 다툽니까? 그 재산이 '나의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가깝던 사람들과 의절하면서까지 돈을 더 중시하여, 돈을 위하여 거짓과 불법을 일삼으며 심지어 살인까지 마다합니까?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있으리란 망상 때문입니다.

 

왜 자식이 갖고 있지 아니한 것을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강요하므로, 그들이 꽃 피울 수 있는 그들의 세계를 파괴합니까? 자식들이 '나의 것'이란 그릇된 인식 때문입니다.

 

왜 취임 초기 하늘을 찌를 것 같던 대통령의 인기가 불과 4년만에 바닥으로 떨어 졌습니까? 왜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국회 청문회에 불려 나가는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까? 권력을 '나의 것'으로 오인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인간의 모든 분쟁과 불행과 비극은 '나의 것'일 수 없는 것을 '나의 것'으로 오해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복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내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진 것임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태동됩니다. 그때에만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에 대하여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만 내게 있는 것으로 인해 교만해 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만 비인격적인 소유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때에만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만 내게 맡겨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뜻, 진리를 따라 관리하고 사용하므로 우리의 인생이 비로소 인격적이고 향기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만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수 있습니다. 그때에만 내가 죽은 뒤 내가 남긴 유산이 살아 있는 가족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는 화근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살 때에만,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살해하는 어리석은 빌라도의 삶으로부터 진정 자유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인 셋째 아이가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놀던 중 집 크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했는데, 중학교 1학년인 큰 아이가 보기에 그 정도가 심했던 모양입니다. 그날 저녁, 제 자신의 고백록을 직접 읽어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큰 아이가 셋째 아이를 조용히 불러, 앞으로 친구들에게 그런 자랑을 하는 게 아니라고 타일렀습니다. 셋째는 우리 집 내가 자랑하는 데 뭐가 나쁘냐며 형에게 따졌습니다. 큰 아이는, 우리보다 작은 집에 사는 사람에게 집 자랑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셋째는 이해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큰 아이가, 이 집은 우리 집이 아니라 고모네 집이므로 앞으로 그런 자랑은 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셋째가 펄쩍 뛰었습니다. 우리 집을 두고 형아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셋째가 제게 뛰어 오며 소리쳤습니다.

 

"아빠, 이게 우리집이예요? 고모네 집이예요?"

 

그것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임을 확신하는 반문이었습니다. 저로부터 고모네 집이란 대답을 들은 셋째 아이는 소스라칠 듯이 놀라며 도대체 제 말을 믿으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셋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이 세상에 우리 것이라고는 본래 아무것도 없단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을 빌려 쓰고 있는 거야. 이걸 알아야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란다."

 

세째는 무엇을 생각하는 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몇일이 지나 토요일이되었습니다. 위의 세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토요일이면 유치원을 가지 않는 7살짜리 막내만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위해 서재로 올라가려 하자, 막내가 가만히 다가오더니 두 손을 올려 자기를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습니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몸짓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올려 가슴에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러자 막내는 제 귀에 자기 입을 갖다 대고는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이 집이 정말 우리 집이 아니고 고모네 집이예요?"

 

아마 몇일전 들었던 이야기를 그 어린아이가 가슴 속에 꼭꼭 묻어 두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막내를 여전히 안은 채로 막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 그토록 진지한 표정으로 그처럼 진지한 질문을 던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아이가 난생 처음으로 아빠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졌으니, 아빠인 저도 아이의 이해 여부에 상관없이 진지하게 답변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막내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왜 우리는 고모네 집에 사는지, 왜 우리에게는 우리 집이 없는지, 왜 아빠는 우리 집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지 성의를 다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만약 이 다음에 네가 돈을 많이 벌어 네 이름으로 집을 산다고 해도, 그건 '너의 것.이 아니야.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일 뿐이야. 아빠는 아빠 아들들이 하루라도 빨리 이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 드린단다. 왠지 아니? 그 때에만 사람들은 정말 서로 사랑하면서, 진리 안에서 기쁨으로 바르게 살 수 있기 때문이야. 우리는 죽은 뒤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넌 절대로 잊어선 안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무슨 옷을 입고 있습니까? 무슨 색깔의 옷입니까? 주머니는 몇 개나 달려 있습니까? 그 속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까? 그러나 옷의 모양이나 색깔이나 그 속에 든 소지물에 상관없이, 이 시간부터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을 상복으로 여기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십시다. 죽음의 훈련복으로 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그래서 아침에 옷을 입을 때마다, 죽어서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음을 상기하십시다. 밤에 옷을 벗으면서는, 이 세상에 '나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가슴깊이 되새기는 자들이 되십시다. 나의 생명을 비롯하여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것이요 나는 그 분의 청지기임을 고백하며 살아가십시다.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진리가 주는 자유 안에서 영원토록 새로와 질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빌라도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권세를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아 죽이는 가장 어리석은 인간의 표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빌라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실상임을 이 시간 일깨워 주시니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세상에,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는 나의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헛되이 나의 것을 탐하느라 나의 양심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진리를 짓밟았습니다. 사람들을 무수히 해쳤습니다. 그 결과 나의 소유가 늘어나는 만큼 나의 심령은 더 황폐해지고, 나는 더 짙은 어둠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죄를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졌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이 시간부터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청지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시간 이후로 우리의 생명이 진리안에서 영원히 참다와지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진리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시사, 우리모두 이 혼탁한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로 승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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