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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크니라
말씀: 요한복음 19 : 7~16
조선왕조를 세운 이 태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 태조가 새나라를 세운 뒤, 하루는 왕비와 개국공신인 이지란(퉁두란)과 더불어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세우기까지 어렵고 고생스러웠던 과거 담을 서로 나누던 중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 태조가 서로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보자는 제안을 하자 나머지 두 사람도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정자 앞에 있는 뽕나무를 증인으로 세웠습니다. 속마음을 정말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뽕나무가 흔들릴 것이고,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하면 미동도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이 태조가 말했습니다.
"나야 뭐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누가 나를 찾아 올 땐 빈손으로 오는 사람보다 뭔가 두툼한 걸 들고 오는 사람이 이쁘더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뽕나무가 마구 흔들렸습니다. 그게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태조의 뒤를 이어 개국공신 이지란이 입을 열었습니다.
"내 위에는 오직 한 사람뿐이요 내 아래에는 억조창생이 있으니 무슨 모자람이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한번쯤은 왕 노릇을 해 보고 싶습니다."
이번에도 뽕나무는 어김없이 흔들렸습니다. 이지란 역시 참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왕비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왕비는 선뜻 입을 열지 않고 얼굴만 붉힌 채 한참 뜸을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길어지자 이 태조와 이지란은 물론 정자 앞의 뽕나무까지도 바짝 긴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왕비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하중에 젊고 잘 생긴 남자를 보면 웬지 공연히 마음이 끌립니다."
그러자 뽕나무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구 흔들렸습니다. 왕비 역시 솔직했던 것입니다.
지위가 높아진다거나 소유가 많아진다고 해서, 인간의 욕망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망이란 밑빠진 독과 같아서 도대체 끝이 없다는 것이,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교훈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비록 바람직하지 못한 욕망을 갖고 있었을 망정 자신에 대하여 솔직하였고, 또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태조가 신하들에게 천문학적인 뇌물을 부당하게 요구했다는 기록도 없고, 이지란이 왕 노릇해보기 위해 쿠테타를 일으킨적도 없었고, 왕비가 젊은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 사람보다, 욕망대로 무슨 짓이든 서슴치 않고서도 자기 자신 마저 속이고 거짓말로 일관하는 현대인들이, 오히려 더 큰 문제를 갖고 있음을 발견케 됩니다.
바로 이 세 사람의 이야기와 빗대어서 시인 정해종씨는 현대인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라 안팎이 어수선해지자 이를 걱정하는 지도급 인사 세 명이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는 북한산 자락에 있는 요정에 모여들었어.
새나라당 김치국의원, 중견그룹의 총수인 문어발 회장, 고위관료 한미천 차관이 그들인데, 술이 몇 순배 돌자, 얼마 전 나라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금융특혜 사건으로 대화가 모아졌고, 요정 뜰 앞에 있는 튼실한 뽕나무를 증인으로 세워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기로 했지. 그 뽕나무가 이태조 정자 앞에 있었던 뽕나무 종자였다나 봐.
먼저 김치국의원.
"거 난 전혀 몰랐던 일이요."
그런데 뽕나무가 요지부동인 거야. 김의원이 다시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지.
"험 알긴 알았지만 당의 입장을 생각해서 모른 척했소이다."
그래도 뽕나무가 요지부동이자, 김의원의 얼굴이 흙빛이 되며 말했지.
"뭐, 우리끼리니까 얘기하는 건데 적당히 간여는 했소이다만 다 그렇고 그런것 아니겠소."
그때서야 뽕나무가 사정없이 흔들렸지.
다음 문어발 회장.
"도대체 기업을 그런 식으로 운영해서야. 난 그렇게 기업한 적이 없지요."
이번에도 뽕나무는 요지부동이었어.
"뭐, 조금 뿌리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기업을 하자면 "
그래도 뽕나무는 역시 미동도 않았어. 할 수 없어진 문어발 회장이 마지막으로 말했어.
"음 기왕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엄청 뿌렸지요. 그 액수를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벌렁 뛰어서 잠도 오질 않는다니까요."
그러자 뽕나무가 심하게 흔들렸지.
한미천 차관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어.
"정말 나라 일이 걱정이구료. 나란 사람은 워낙 주변머리가 없어서 "
역시 뽕나무는 꼼짝도 않았지.
"가끔 사과 상자를 보내오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제가 원래 과일을 싫어해서."
그래도 뽕나무는 요지부동인 거야. 한미천 차관 역시 다시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지.
"그냥, 떡값으로 조금 그래, 먹을 만큼 먹었다. 이제 됐냐?"
그제서야 뽕나무가 있는 힘을 다해 흔들거렸지.
이렇게 뽕나무가 세번 크게 흔들리는 동안, 무성했던 뽕나무 잎은 죄다 떨어지고, 튼실했던 뽕나무는 마침내 뿌리가 드러난 채 길게 드러누워 버렸다는 슬픈 얘기가 있어.
이 글 속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마침내 뿌리가 뽑혀 쓰러지는 뽕나무는 이 사회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이 글을 통해, 욕망에 사로잡혀 온갖 탈법과 불법을 자행하고서도 자신마저 속이며 거짓으로 일관하는 우리 모두에 의해, 마침내 뿌리 채 흔들리며 쓰러져 가고 있는 이 사회를 풍자,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1일 끝난 한보청문회를 두고, 그런 청문회라면 아니함만 못하다는 비판론이 만만치 않습니다. 출석한 증인들 대부분이 부인과 거짓으로 일관한데 비해, 그들을 심문하는 의원들의 한계로 인해 진실과 사건 실체 규명이 턱없이 미흡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는 선진국의 청문회를 예로 들며 이 땅에서의 청문회 무용론까지 제기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다 타당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그러하기 때문에, 이번 청문회는 우리 모두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교훈과 소득을 안겨 주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즉, 이번 청문회를 통하여 우리 국민 모두는,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비도덕적인지, 얼마나 거짓이 체질화 되어있는지,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에 대해 얼마나 게으른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청문회의 심문석과 증인석에 앉았던 그들은 우리와 다른 별천지의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 우리 자신들의 실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우리 모두가 정직하게 살면서 정직한 사회를 이루어 왔다면, 증인들이 그처럼 천연덕스럽게 거짓 증언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정직한 사회였다면 한보사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평소 우리 모두가 주어진 책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내 직업을 통해 사회 정의를 구현하려 애쓰는 자들이었다면, 국회의원들이 그처럼 준비없이 혹은 무책임하게 심문에 임한다든가, 철저하게 당리당략에 의해 청문회장에서 여야 의원들끼리 서로 싸우는 추태를 부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청문회장에 앉아 있던 사람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감사를 드려야 할 판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실체를 정확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 역할을 잘 담당해 준 까닭입니다.
이제 한보사건은 관련자 몇몇 사람들이 사법처리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 수순을 밟게 될 것입니다. 그 몇 사람들이 단죄 당하는 것으로 이 사회가 정의로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우리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불의와 거짓에 관한 한 우리 모두 공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정직해지지 않는 한, 두고 보십시오, 온 나라를 뒤흔들 대형 비리 사건은 앞으로도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형이 확정되는 사람들은 소위 유죄가 될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죄입니까? 그렇습니다. 현행법으로는 우리는 분명 무죄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건들이 우리 모두의 부정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우리가 요행히 세상법정은 피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법정을 모면할 수는 없습니다. 철저하고 완벽한 사전 준비없이 청문회장에 나와 호통이나 일장 연설을 일삼던 국회의원들은, 이 다음 선거 때가 되면 또 현란한 말솜씨로 선거구민들의 표를 모아 의원직을 계속 유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 시대의 의원직을 맡겨 주신 하나님의 냉엄한 평가만큼은, 어떤 경우에도 그들이 오도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평가는 사람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틀리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결과가 아니라 원인과 동기, 형태가 아니라 본질, 과녁판이 아니라 과녁을 향한 조준에 대한 심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망각할 때 우리가 세상의 법정은 용케 피해 갈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유죄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 11절 상반절을 통하여 주님께서,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라고 말씀하신 바,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하여는 지난 주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11절 하반절을 통하여 오늘 아침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권세를 `나의 것'으로 착각하여, 그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빌라도는 참으로 어리석은 죄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이신 성자 하나님을 못박아 죽이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빌라도보다 더 큰 죄인이 있다고 단언하고 계십니다. 그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을 죽여 달라며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였습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좁게는 이 살인극의 음모를 뒤에서 총지휘한 대제사장이요, 넓게는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며 함성을 질러 대었던 유대인 모두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모함하여 빌라도에 넘기고 빌라도에게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던 들, 빌라도가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할 리가 없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께서는 맡겨진 권세를 오용하여 진리를 못박은 빌라도의 죄를 묵과하지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무고히 넘긴 유대인들의 죄를 간과치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형을 언도한 빌라도의 죄보다도, 빌라도로 하여금 사형을 언도할 수밖에 없도록 원인제공을 한 유대인들의 죄가 더 큼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동기와 원인, 본질과 조준에 대한 심판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자는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 판결에 대해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 판결을 내린 빌라도의 책임일 뿐이었습니다. 그들 자신은 철저하게 무죄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7장 24절~25절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하면서 유대인들을 향해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니 너희가 피값을 당하라'고 말했을 때, 유대인들은 자신있게 `그 피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외쳤습니다. 자신들은 무죄이기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습니까? 그들은 그 직후 고향을 잃고 온 세계를 나라없이 유리하며 2천년 동안이나 도처에서 피흘리는 고통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원인과 동기에 대한 심판, 조준과 본질에 대한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청소년 문제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통제 불능입니다. 그러나 문제 청소년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청소년 문제는 곧 어린이 문제인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 뿌려진 문제의 씨앗들이 청소년기에 들어 발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어린이들의 심성은 날로 황폐화되어 지고 있으며, 정서는 더욱 불안해지고, 언행은 점점 거칠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어린이들이 이제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숫자가 소위 문제 청소년으로 전락할 것인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적발된 비행 청소년들은 법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청소년기를 지난 우리 어른들은 무죄입니까? 그렇습니다. 분명히 세상의 법정에서 우리는 완전한 무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은 다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땅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병들 수밖에 없도록 병든 사회를 만들어 놓은 우리 어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시고 중형을 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원인과 동기, 조준과 본질에 대한 심판인 까닭입니다.
이 도시에 어린이들의 심성을 순화시켜 줄 수 있는 숲이라도 하나 제대로 있습니까? 어린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한국 영화 한 편, TV프로그램하나 제대로 있습니까? 이 땅에 어린이들의 정서를 아름답게 개발시켜 줄 어린이들만의 공간이 있습니까? 이 땅에 어린이들의 인격을 포근히 감싸줄 참된 교육이 있습니까? 이 땅위의 크고 작은 집들은 모두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꿈과 행복을 심어주는 사랑의 공동체입니까? 이 땅의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믿고 맡겨 주신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진정 열심히 애쓰며 노력하고 공부하는 부모들 입니까?
어떻습니까? 들여다볼수록 이 도시는 거대한 욕망 덩어리 아닙니까? 범죄의 소굴이 아닙니까? 온통 콘크리트 감옥이 아닙니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태연히 거짓말을 일삼는 위선자들의 수용소가 아닙니까? 무엇을 만들던 어떻게 광고하든 상관없이 돈만 벌면 된다는 배금주의자들의 격투장이 아닙니까? 온 길거리와 극장, TV는 음란물이나 폭력물 아니면 저질 코메디의 전시장 아닙니까?
누가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부정직하게 살았던 우리 자신들 아닙니까? 우리 모두가 병든 아이들의 원인이요, 동기 아닙니까? 이러고서도 우리의 어린이들이 바르게 자라기를, 청소년들이 건전하게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그보다 더 큰 자가당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정말 참되고 바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 아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서도, 세상에서 무죄라 하여 하나님 앞에서도 무죄인 것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현실을 보면 너무 절망적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은, 우리에겐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내일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믿으시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소망이 또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제 잘못 살았던 결과로 오늘 이 땅의 어린이들이 시들어가고 있다면, 내일 그들이 건강하게 설 수 있도록 오늘부터 먼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십시다. 도마 위에 오른 몇몇 정치인이나 기업인을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공범이었던 우리 자신들을 진리 위에서 바르게 가꾸기 시작하십시다. 우리 모두 뛰쳐나가,진리 안에서 정직과 정의와 사랑으로 이 사회를 새로이 건설하십시다. 그것만이 어린이 주일을 맞는 오늘 이 땅의 어린이들을 위한 가장 값진 선물인 동시에, 우리를 믿으시고 당신의 자녀를 맡겨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답이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어린이들이 밝고 아름답게 자랄 수 있는 건강한 내일을 친히 일구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바른 원인과 동기, 참된 조준과 본질을 기뻐 사용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이 사회가 거짓과 불의, 부정과 부패로 가득찬 병든 사회라면, 이제껏 부정직했던 우리 모두가 공범이었음을 주님 앞에 고백드립니다. 이 병든 사회 속에서 사랑하는 어린이들이 무참하게 시들어가고 있다면, 우리 모두가 가해자였음을 주님 앞에 자복합니다. 동기와 원인, 조준과 본질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주님, 바로 우리가 유죄임을 알아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진리 위에서 우리를 먼저 바로 세우고, 나아가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이 나라를 새로이 가꾸는 주님의 참된 역군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 병들고 시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의 치유가 임하게 하옵시고, 그들이 밝고 아름답게 살수 있는 건강한 내일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심판과 평가는 언제나 원인과 동기, 조준과 본질에 관한 것임을 기억하며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 참된 부모가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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