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by 【고동엽】 2021. 12. 12.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히브리서 12장 1-2절

< 주님만 바라보고 전진하십시오 >

깊은 산에서 큰 산불을 만나면 산꼭대기로 가야 합니다. 골짜기로 내려가면 불길의 방향을 몰라서 위험하지만 산꼭대기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불길의 방향을 알 수 있어서 불길을 피하는 길이 보입니다. 그처럼 믿음생활에서 길을 잃지 않고 승리하려면 하나님만 바라보고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전진해야 합니다.

‘갈매기의 꿈’을 쓴 리처드 바크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높이 오르는 사람만이 먼 곳을 볼 수 있다.” 성도는 신앙의 수준을 높이고 멀리 보아야 합니다. 자녀 교육이나 사업도 멀리 보고 해야 합니다. 우리의 바라보는 차원이 믿음의 차원이고 결국 축복의 차원과 연결됩니다. 그만큼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과 환경을 바라보면 실패하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꾸준히 전진하면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어느 날, 개구리가 논두렁 위에서 잠깐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늘을 쳐다보자 독수리가 큰 날개를 펴고 유유히 날고 있었습니다. 개구리가 물었습니다. “독수리 아저씨! 어떻게 하늘을 날죠?” 독수리가 대답했습니다. “날개를 달고 높은데서 뛰어 내리면 날 수 있네.”

그 말을 듣고 개구리가 근처에 있는 닭털들을 주워서 옆구리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절벽 위로 간신히 올라가 그곳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 이후에 그 개구리를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남을 부러워하며 비교하면서 사는 것은 죽는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만 바라보고 나의 은사와 장점을 살려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사는 길이 열립니다.

<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 >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이 죽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11장 3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믿음의 선진들이 왜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까? 11장 40절 말씀을 보면 ‘더 좋은 것’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더 좋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 ‘더 좋은 것’이란 ‘예수님으로 인해 얻는 구원’을 뜻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존재로서 이미 승리를 확정지은 상태에서 싸우는 존재입니다. 그 승리를 실제적으로 삶에서 나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본문 1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이 구절을 보면 인생의 가장 무거운 짐은 사업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남편과 자녀가 말썽부리는 것도 아니라 바로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 죄의 사슬에서 벗어납니까? 사실 죄를 벗어버리는 가장 중요하고 거의 유일한 방법은 죄의 사슬보다 더욱 큰 사슬에 매이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에 만화를 즐겨 봤습니다. 그렇게 만화에 빠졌다가 중학교 때 바둑에 빠지니까 저절로 만화를 멀리했습니다. 그 후 바둑을 끊지 못하다가 고등학교 때 기타에 빠지면서 바둑을 멀리했습니다. 그처럼 죄에서 풀려나려면 더 소중한 것에 매여야 합니다. 즉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교회에 매이고 사명에 매여야 합니다.

요새 미신이 성행합니다. 그러나 미신을 믿을수록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명문대를 나온 똑똑한 사람도 결혼 날짜를 잘못 잡아 불행하게 될까봐 벌벌 떱니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도 점을 치고, 심지어는 성도도 점을 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자유를 잃습니다. 반면에 주님을 확고히 믿으면 수많은 축복을 얻지만 무엇보다 자유의 축복을 얻습니다. 그 자유는 8.15 해방의 자유보다도 더 큰 축복입니다. 그처럼 믿음은 평안과 자유를 줍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새총을 잘못 쏴서 엄마가 기르던 애완견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실수이지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애완견을 죽인 후 야단맞을 것이 두려워서 그 죽은 애완견을 마당에 파묻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죄는 시작됩니다. 엄마가 물었습니다. “철수야! 강아지 못 봤니?” 철수는 모른다고 시치미를 뗐습니다. 그러면서 죄는 커집니다. 그때부터 철수는 자기 죄를 의식하고 눈치를 보며 엄마의 시선을 피했습니다. 그처럼 죄는 인간관계를 깹니다.

그때 파출부 아줌마가 말했습니다. “철수야, 기름 좀 사와라!” 철수가 말했습니다. “그건 아주머니가 할 일인데 왜 저를 시켜요?” 그때 아줌마가 은근히 협박했습니다. “너 강아지 죽이고 땅에 파묻었지.” 아줌마가 모든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결국 그 약점을 이용해서 아줌마는 수시로 철수에게 일을 시키고 자신은 집에서 낮잠을 잤습니다. 철수는 자기가 숨긴 죄 때문에 꼼짝없이 발목을 잡혀 주인집 아들이면서도 파출부 아줌마의 종이 된 것입니다.

철수는 매일 종처럼 사는 삶이 지옥 같았습니다. 결국 철수는 견디다 못해 맞을 각오를 하고 엄마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엄마! 사실은 제가 그 강아지를 실수로 죽였어요. 그리고 겁나서 땅에 파묻고 거짓말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때 엄마가 말했습니다. “철수야! 다 알고 있었다. 강아지도 중요하지만 네가 훨씬 중요하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데 그것을 숨기면 아주 힘들어. 얼마나 그동안 힘들었니.”

그 엄마의 말을 듣고 철수의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워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백한 줄도 모르고 아줌마가 또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철수야! 물 떠와라!” “싫어요!” 그 말을 듣고 아줌마가 “너 말 안 들으면 알지!”라고 협박했지만 그 협박이 더 이상 무섭지 않습니다. 그처럼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받으면 자유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사단은 나쁜 파출부 아줌마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면 사단이 와서 속삭입니다. “너는 어찌 그렇게 양심이 없냐? 어제 그렇게 죄를 짓고도 무슨 교회를 가냐? 네 모습을 생각해 봐! 너 참 뻔뻔스럽다.” 그처럼 사단은 과거의 죄와 허물을 들먹이며 협박합니다.

그런 사단의 정죄하는 음성이 마음에 들리거든 맞서 소리치십시오. “그래. 나는 죄도 많고 부족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분의 피로 내 죄를 용서해주셨다. 당장 물러가라. 나는 그래도 교회에 가서 충성할 것이다.” 그렇게 담대한 고백을 하는 것은 죄의 도피나 회피나 합리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다시는 죄의 종이 되어 자기를 학대하며 살지 말아야 합니다.

2. 목표를 가지고 인내해야 합니다.

본문 1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인생은 경주와 같습니다. 그 인생 경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발력이나 순간적 열정보다 꾸준한 인내입니다. 인생을 100미터 달리듯이 달리면 얼마 가지 못하고 처지게 되지만 꾸준히 인내하며 걸으면 결국 승리합니다. 기도도 폭발적인 기도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상관없이 꾸준히 기도하는 기도가 제일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그처럼 인내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 한 것은 어떤 경주를 해야 하는지, 그 꿈과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목적과 방향이 없이 인내하면 크게 실패하는 인생은 되지 않아도 크게 성공하는 인생도 되지 않습니다.

수정란 달걀을 어미 닭이 품으면 21일이 되면 부화가 되지만 무정란 달걀은 10년을 품어도 부화가 될 수 없습니다. 꿈이 없으면 10년을 인내해도 좋은 작품을 남길 수 없습니다. 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잘 사는 꿈,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꿈, 지금보다 더 좋은 배우자와 교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런 꿈이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 자양분입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꼭 해야 할 것이라면 귀찮아도 해야 합니다. 인터넷도 하고, 지금은 국제화 시대니까 지금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꿈도 꾸어야 합니다. “과거에 그렇게 공부해도 영어를 못하는데 나이가 들어서 하면 되겠어!”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늦었다고 할 때가 제일 빠른 때입니다. 제가 개발한 네트영어로 공부하면 나이가 든 사람도 상당한 수준까지 영어가 늘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유학을 가겠다고 죽어라고 TOEFL과 GRE를 공부했습니다. GRE 3000단어를 외우는데 흔히 쓰지 않는 어려운 단어들이기에 아무리 외워도 금방 잊어먹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식하게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에 가서도 영어가 딸려 공부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에 있는데 미국에 있을 때보다 영어실력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지금은 영어를 집념을 가지고 공부하지 않아도 네트영어의 원리를 활용해 영문을 보니까 계속 실력이 늘고 있습니다. 요새는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영문설교를 보고 들으면서 설교준비에 활용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영어 속독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14살에 영어공부를 시작한 이후부터 가장 영어실력이 늘었던 때가 입시공부를 할 때도 아니고,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도 아닌 대학에서 신학 영어를 가르치면서 네트영어를 개발한 때인 36세부터 지금까지입니다. 보통 나이가 20세가 넘으면 언어의 기능은 현저히 퇴화하는데 저는 36세 이후에 영어실력이 가장 늘었습니다. 그래서 네트영어를 자신하게 된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2008년 3월 3일에 시작되는 선교언어 훈련원에서 네트영어 강좌에 등록해서 공부해보십시오. 그러면 나이가 들어도 영어 정복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등록에 관한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으면 주로 메일로 해주시되 네트영어 대표메일(netenglish@hanmail.net)로 문의하시면 친절하게 안내할 것입니다. 메일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분들은 김정효 목사님(011-396-1189)에게 문의해주세요.

지금은 국제화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영어 하나만이라도 잘하면 유용하게 이용할 곳이 많습니다.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제까지 도저히 못할 것 같았던 영어도 잘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네트영어에 도전해보십시오. 좋은 꿈을 꾸는 것조차 하지 않고 “나는 못해!”라고 미리 포기하면 자신의 가능성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도는 항상 좋은 일을 꿈꾸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는 큰 꿈을 꾸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하는 꿈을 꾸고 그 꿈에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처음에는 그 꿈이 불가능한 줄 알았지만 지금 그는 흑인과 백인을 망라해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선각자로 꼽힙니다.

성도는 거룩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이 없으면 100미터 산도 올라가기 힘들지만 1000미터의 산을 올라갈 꿈을 꾸고 인내하면 500미터라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꿈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해야 합니다. 그처럼 좋은 꿈을 품고 인내하면 반드시 상황이 반전되어 역전 인생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고대 족장시대에 한 족장에게 4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첫째 부인은 얼굴이 못나서 평소에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았습니다. 둘째 부인은 일을 잘해서 일이 있을 때만 대화를 했습니다. 셋째 부인은 탁월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붙임성이 없었습니다. 넷째 부인은 예쁘고 붙임성이 있어서 그 부인을 맞이한 뒤부터는 거의 넷째 부인과 지냈습니다.

어느 날, 그 족장이 왕에게 잘못 보여 낙향하게 되었을 때 그는 가장 사랑을 많이 줬던 넷째 부인에게 같이 산골로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넷째 부인은 다른 부탁은 다 들어도 그것만은 들어주지 못하겠다고 거절했습니다. 실망한 마음을 가지고 셋째 부인에게 가서 같이 가자고 했지만 셋째 부인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원망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그 다음으로 둘째 부인에게 그 얘기를 하자 둘째 부인은 멀리는 못 가주겠고 동구 밖까지는 동행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준 일이 없는 첫째 부인에게 찾아가 그 얘기를 하자 첫째 부인은 남편과 함께 가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둘이 함께 낙향했지만 3년 후 그 족장은 왕의 사면을 받아 옛날보다 더욱 존귀한 위치에 올랐고, 첫째 부인과 함께 백년해로를 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봉사를 잘하는 것도 필요하고, 은사가 많은 것도 필요하고, 붙임성이 있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련이 있어도 사랑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교회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시련을 당한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존귀한 위치로 올려주실 것입니다.

3. 예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만 잘해도 승리하는 삶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요새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고난보다는 수치입니다. 고난은 지나가면 금방 잊히지만 수치는 후유증이 오래 가고 잘 잊히지 않습니다. 그 수치심을 치유하는 가장 놀라운 치료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어느새 수치가 사라지고, “그 정도의 수치는 당해도 좋다!”고 하는 믿음의 여유가 생기고, 어떤 고난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담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어떤 분은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라보기만 해도 큰 힘이 난다.” 예수님이 작게 보이면 문제와 고난은 크게 보이고, 예수님이 크게 보이면 문제와 고난은 작게 보입니다. 사실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뿐입니다. 결국 최고의 신앙은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헬렌 켈러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를 겪었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받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녀는 없는 것을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런 감사의 고백이 입술에서 끊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시골에 예수 잘 믿는 한 감사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하루는 그 할아버지가 고기를 사서 오다가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때 이웃집 개가 할아버지의 고기를 물고 달아났습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즉시 말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때 한 젊은이가 그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뭐가 그렇게 감사한가요?” 그때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고기는 잃었지만 입맛은 잃지 않았으니까 감사하지.”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게 범사에 감사하면 더 큰 감사의 조건이 주어집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불평과 원망이 있는 곳에는 마귀가 신나게 활동하지만 감사가 있는 곳에는 마귀가 무장해제를 당합니다. 결국 감사하는 삶이 가장 능력 있는 삶이고, 40일 금식 기도하는 사람보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더 영성이 깊은 사람입니다.

존 밀턴은 한참 일할 나이인 40세에 실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육신의 눈을 어둡게 하시고 대신에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영적인 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후 그는 실낙원이란 불후의 명작을 쓰게 되었습니다. 불평하면 불평의 조건이 늘지만 감사하면 감사의 조건이 늡니다.

왜 사람이 감사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환경과 조건이 나빠서가 아니라 결국 믿음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수 있는 환경을 주세요.”라고 기도하기 전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주세요.”라고 기도하십시오. 믿음이 떨어지면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면 반드시 승리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 내 마음은 내가 지켜야 합니다 >

저는 1991년 미국에서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을 알리겠다!”는 꿈과 비전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너무 가진 것이 없고 힘들고 외로우니까 수시로 ‘섭섭마귀’가 틈타 이런 생각을 불어넣었습니다. “왜 미국 교단에서는 한국에 관심이 없을까?”

가끔 저희 선교연맹의 한인감독 목사님이 한국에 들어오면 타 교단의 높은 분들을 만나고 그 교단 소속 큰 교회들로 가서 설교를 하면서도 정작 교단을 알리려고 애쓰는 저에게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날 때 공항에서 “이 목사님! 나 한국을 방문했다가 지금 돌아갑니다.”고 하고 훌쩍 떠났습니다.

또한 제도적인 미비로 미국 교단의 재정지원을 하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가끔 섭섭한 생각이 듭니다. “감독님이 높은 사람만 찾아다니고 힘없는 사람은 무시하는구나!”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수록 나만 손해다! 잊어버리자! 받으려고 하면 섭섭함이 틈탄다. 받을 생각은 버리고 줄 생각만 하자!”

그 뒤로부터 저는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미국에서 교단 출신 목사님이 오시면 없는 돈을 절약해서 대접을 했고, 선교사님들이 오시면 최선을 다해 마음과 정성과 물질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한때 교단 목사님 사이에 제가 부자 목사로 소문났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감독님이 우리 집에 약 2주간 지낸 후에 다른 목사님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다닙니다. “이 목사님이 많이 베풀어서 잘사는 줄 알았는데 월세로 사는 줄 몰랐습니다.”

그처럼 없는 중에도 같이 나누며 사니까 한국을 방문하신 목사님과 선교사님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고, 좋은 소문도 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받기보다는 주려고 하니까 ‘섭섭마귀’가 틈탈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제까지 선교사님들과 나누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미션센터를 위한 인테리어 공사처럼 목돈이 들 때 재정을 저축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어렵고 힘든 상황들을 거쳐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지금은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 선교연맹 회원 목사님만 46명이 되었고, 교단 소속 교회도 앞으로 가입할 교회까지 7개가 되었습니다. 그 정도만 있어도 지금은 외로움이 없습니다. 요새는 몇 교회가 모여 연합 체육대회도 하고, 목사님들이 모여서 식사도 하면서 즐겁게 지냅니다. 지금은 오히려 전직 감독님들이 전화를 자주 안 한다고 섭섭해 하십니다. 상황이 역전된 것입니다.

누구나 섭섭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처럼 섭섭한 생각이 들 때 먼저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이럴수록 나만 손해다! 내가 줄 생각은 하지 않고 받을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자리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지나친 것은 아닌가? 내가 특별한 관심을 받으려는 경향이 너무 강하지 않은가?” 그렇게 자신을 성찰하면서 끊임없이 마음을 넓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힘들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수치를 참으셨던 주님을 생각하며 힘든 상황을 이겨내야 합니다.

내 마음은 내가 지켜야 합니다. 얼마 전에 한 노 목사님이 대접이 소홀하다고 침착한 마음을 잃으시고 10여 명의 후배 목회자에게 목회자로서 하지 못할 말로 크게 꾸짖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후배 목회자들의 마음이 더 멀어졌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남이 내 마음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았을 때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고, 섭섭한 일을 당했을 때 섭섭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사명을 따라 최선을 다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기쁜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중세 시대 동유럽에 마을을 다니며 공연하는 한 순회악단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경제가 아주 어려워 사람들이 공연에 많이 오지 않는 상황에서 눈까지 심하게 내리자 한 단원이 말했습니다. “오늘 공연은 취소합시다. 이런 날에 누가 공연에 오겠습니까?” 옆 단원도 말했습니다. “어제도 몇 사람을 놓고 공연했습니다. 오늘은 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입장료를 돌려주고 공연을 취소합니다. 그래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처럼 대부분의 단원들이 공연을 취소하자고 할 때 단장이 말했습니다. “단원 여러분! 여러분들의 낙심한 마음을 잘 압니다. 저도 낙심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공연을 예정대로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적게 오는 것은 온 사람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공연을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결국 그들은 공연을 강행했고, 그날 가장 훌륭한 공연을 했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청중 중의 한 명이 단장에게 짤막한 메모를 건네주었습니다. 그 노트를 읽어줄 때 모든 단원들은 감격 가운데 울었습니다. 그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훌륭한 공연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싸인이 붙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왕(Your King).”

저도 청년 때 눈보라 치는 날에는 새벽기도를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제단에 나가면 나오는 인원은 적어도 눈보라는 헤치고 제단에 나온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되고 그때 더욱 주님의 함께하심과 위로가 넘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처럼 꿈과 비전을 향해 나갈 때 힘든 일이 있어도 예수님만 바라보고 자기 자리를 꾸준히 지키면 더욱 주님의 은혜와 축복과 위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