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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을 당하는 것이 섬기는 길이다 눅22:24~30 (11)

by 【고동엽】 2021. 12. 16.

환란을 당하는 것이 섬기는 길이다 눅22:24~30 인터넷설교 스크랩, 녹취

 

 

▲도입/ 기독교인의 일반적 오해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나누는 만찬 자리에서

‘누가 크냐?, 누가 더 잘났느냐?, 누구의 공이 더 크냐?’는 다툼이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이 세상의 가치와 판단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다르다

이 세상에서는 큰 자들이 다스리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들이 섬기는 자다..’ 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오해는,

‘기독교가 진리를, 생명을 갖고 있고,

아예 안 믿는 세상 사람보다는, 그래도 낫게 믿음생활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마땅히 힘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우리는 본성적으로 갖고 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 신자들은, 선한 의도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헌신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성공주의자가 된다.

‘내가 더 돈을 많이 벌어서, 내가 더 출세해서,

이 진리와 생명을 세상에 나누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길이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높든지, 낮든지) 섬기는 자가 되어라고 하신다.

 

롬5장에서도, 바로 이 문제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현실은 <환란> -롬5장-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1절은, 기독교인들의 현실을 설명한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성도는 그 구원의 완성인 하나님의 영광을 약속받은 자이다.

여기까지는 듣기 좋은 내용이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러나 그런 영광스런 성도의 신분을 갖고 있지만,

성도의 현실은 <환란>이라는 것이다.

 

그 환란 속에서 인내와 연단 을 통과하여

소망 (구원)을 이루게 한다.. 는 것이다.

 

▲왜 하필 <환란>인가?

우리는 사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환란이 아니라, 축복을 받아서 힘을 가져야 한다고.. 우리 모두가 소원한다.

 

그런 와중에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은 일에 대하여.. 현실은 환란이 훨씬 많으니까

성도는 당황해 하며, 딜레마에 빠진다.

 

하나님이 현실 속에서,

세상 성공을 주시지 않고, 환란을 주는 이유가 있는데

출애굽 사건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광야 길에 들어섰을 때,

먹을 것을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40년간 만나를 주셨다.

 

신8:3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였노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존재와 능력의 근거와 기반을 스스로 갖고 계시는데,

곧 길, 진리, 생명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없다.

그래서 광야 40년 동안, ‘말씀으로 사는 훈련’을 시키셨다고 했는데,

자신의 존재와 능력의 근거와 기반이 되는 ‘말씀(진리)’을 가지는 훈련이었다.

 

쉽게 말하면, 물질과 세속적 힘만 갖고서, 하나님 나라 일을 하다가는.. 다 망한다.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오명을 끼쳐드리기 십상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려면, 자신의 존재와 능력의 근거와 기반이 필요한데

예수님은 ‘길, 진리, 생명’을 가지셨고,

우리는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가질 수 있다.

 

광야 백성들은, 40년간, 그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훈련’이다.

즉 자신의 존재와 능력의 근거와 기반으로서 ‘말씀’을 다지는 훈련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가지는 오해는 늘 이렇다.

자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바른 생각과 옳은 의도를 갖고 있는데.. 떡이 없다는 것이다. 실탄/자원이 없다고 한탄한다.

 

하나님이 ‘떡’만 나에게 풍족하게 주시면, 자기가 나서서,

바른 생각과 옳은 의도를.. 이 땅에 펼쳐서,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광야에서 40년 생활의 증거, 또한 인간 역사의 증거는,

인간에게 떡을 주었더니,

‘그 힘으로 거룩하거나 옳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싸움만 하더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누burden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떡’이 아니라

‘진리, 생명’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정신적 자원, 신앙적 자원(진리, 생명)은

광야 40년의 환란과 연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훈련’을 받는데, 그 기간이 걸린 것이다.

 

여러분, 마더 테레사가 했던 일은,

물질의 힘, 떡의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진리의 힘, 생명의 힘’이었다.

 

▲롬5장에서, 환란이 성도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이 부분의 해설에 의하면

 

‘환란을 만나면, 인간은,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한다’고 설명한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이란, 다른 말로 은혜이다.

 

우리에게는 길도, 진리도, 생명도, 은혜도.. 그 무엇도 없다.

그러나 환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간절히 구하게 되는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자원(길, 진리, 생명, 은혜)을 허락받을 수 있다.

그것이 환란이 하는 일이다.

 

인간에게는 세상 힘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 *요셉은 오랜 환란 후에 그 힘을 얻었다.

본인에게 길도, 진리도, 생명도, 은혜도, 분별력도, 거룩함도 없는데

힘만 갖고 있으면.. 큰일 난다. 오히려 망치기 십상이다.

 

이런 차원에서, 환란은 우리에게 매우 요긴하다.

환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만들고,

그래서 예수님이 가지신 자원들을 공급받게 해 주신다. 길, 진리, 생명, 은혜 등등

 

그래서 성도는 신분적으로 영광스런 구원을 얻었지만,

실제 삶의 환경에서는.. 환란을 겪게 하신다는 것이다. 롬5:3

쉽게 말하면, 광야 40년을 통과하게 하신다.

 

 

◑‘환란’은 성도로 하여금 ‘섬기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고후4장-

 

우리는, 아주 쉽게,

내가 누구를 도와주고, 누구를 격려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내가 먼저 ‘세상적 힘을 가져야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내가 건강해야.. 내가 여유가 있어야.. 남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은 ‘환란을 당하는 것이, 섬기는 길이다’라고 말씀한다. ↓

거기서 우리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데...

 

고후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이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를 섬기는 사람이라면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너희의 종이 된 것을 전파하고 있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이 대목을,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잘못 적용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기꺼이 섬기는 종이 되었다.

그러니 내가 섬기고 내가 증언하는 말을, 너는 잠자코 들어라’.. 는 고압적 자세가 된다.

 

내가 종이 된 것은, 너보다 못해서도 아니고,

또한 내가 전파하는 것은, 너를 위한 아주 고귀한 것이니

‘너는 반드시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우월한 의식을 가진 자세가 된다.

 

종이 된다는 것은,

상대방을 조작(조정)할 힘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대방을 강요할 힘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고후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이 일은, 누가 누구를 조작하거나, 누가 누구를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즉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해 주셔야 (하나님이 빛을 비추어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낮추는 섬김과 겸손으로

당신을 납득시키겠다고 종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빛을 비추어 주셔야 된다.

 

거기서 우리는 ‘종으로,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므로, 고압적 자세가 필요 없다.

오히려 ‘나의 섬기는 자세’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조연이 주연을 앞지르면 안 된다.

 

▲선뜻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사실 기독교 신자들이, 현실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는, 내 인생이 보다 쓸모 있어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쓰시지 않고,

우리가 세상적으로 보이는 영향력이나, 지위를 갖도록 우리를 부르지 않고,

‘섬기는 자’로 부르신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이고,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길이다.

종이란 그렇다.

진짜 종은 자기에게 일관된 일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일관된 일을 원한다.)

 

일관된 생각과 목적과 내용은 주인의 몫이고,

하인은 그때마다 불러서 쓰임 받는 것이다.

종은 무슨 자기 꿈을 실현하고, 기개를 보일 여지는 전혀 없다.

 

그 꼴을 당하는 것이, 종이다. (성도이다)

그래서 모두 당황하게 된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그런 자책을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는, 가장 우리 인간이 가지는 본성적 방법은

무속신앙처럼 비는 것이다.

금식기도, 철야기도, 어떤 자기희생적인 서약을 한다.

‘이번에 취직/승진만 시켜주시면, 1년 봉급은 몽땅 그대로 다 바칠 터이니..

이번에는 꼭 취직/승진을 시켜주세요’

 

그것도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이다. 간절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이진 않다.

 

▲그런 성도의 실상을, 좀 더 적나라하게,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영광스런 구원을 받은,

성도의 일상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느냐 하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것들이다. (예수를 죽인 것처럼, 세상이 우리를 죽이려 든다는 뜻)

 

우리는 다 답답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예수 믿어서 보란 듯이 사는 것은 없다.

 

만약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힘과 물질과 모든 것을 다 주셔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하게 된다면

‘십자군 전쟁’ 꼴이 복제되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환란을 통과하고 난 후에, 자기 자원을 충분히 갖춘 후에,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훌륭하게 섬길 사람도, 간혹 있을 것이다.)

 

▲고후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그것도 ‘항상’이다.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

 

시편88편을 보시라.

하나님을 믿는데도, 사는 게 너무 힘이 들어서,

거기에 이렇게 나온다.

 

‘하나님,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구원해 주십시오.

제가 죽은 다음에, 저를 도와주셔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살아있어야, 찬송도 하는 법이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살다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죽은 다음에, 제게 은혜를 베푸신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도 다르지 않다. 성도들의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정말 하나님 앞에서 '못할 말(협박, 하소연 등)'까지 하게 만드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 가운데서, 네 힘을 다 빼고, 섬기라는 것이다.

네 힘을 빼야, 하나님의 힘이 역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니,

네가 진정으로 섬기기 원한다면, 네 힘을 빼라는 것이다.

그게 스스로 쉽게 안 되니까, 강제로 빼게 만드신다.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 믿었더니 어떻게 크고 위대하게 되었더라’ ..는 것과 정반대이다.

그건 비복음이다.

 

이런 신자의 인생은

또한 고후6장에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여러분의 현실과 비슷하지 않는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으면,

보란듯한 지위와 힘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은

예수를 잘 못 믿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서 예수님의 자원(길, 진리, 생명, 은혜, 사랑)이 설 자리가 없다.

자기의 보란듯한 세상 힘만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건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이다.

 

 

◑환란이 있어야, 부활이 있다. -빌3장-

 

빌3장에서 사도바울은 좀 더 긍정적으로,

이 환란의 현실, 섬기는 인생에 대해, 보다 분명한 내용을 이렇게 소개한다.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고난)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서 부활과 고난이 대비되고 있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승리로 인해서 얻어진 열매들이다.

 

 

 

바울이 그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부활의 능력은.. 죽으심(고난)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날에도 목회나, 선교나, 셀그룹이나 마찬가지로

(부자되고 출세하는 영광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영광스런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먼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 사도바울이 그러했듯이

누가 먼저 죽음(환란)을 맛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가 생긴다.

 

예수님도 그 길을 가셨고,

바울이 먼저 그 길에 들어섰고,

성도는 그 길을 걸어가는 존재이라고.. 지금 빌립보 교인들을 가르치고 있다.

 

부활 승리의 역사는

누군가의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가는 인생길이다. 환란이요,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이다.

그런데 무슨 성공, 부자되는 길을 바라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본질적 기독교가 아니다.

 

이것은 성자 예수님이 먼저 걸으신 길이다.

사도 바울도 그 길을 걸으셨다.

그리고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하신다. 빌3:17

그것이 바로 <섬김의 길>이요, <환란의 성도의 인생>인 것이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러분이 ‘아멘’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정말 겉으로는 별로 ‘아멘’을 안 하시는 것 같다.

여러분이 속으로는 다 ‘아멘’ 하실 줄로 믿는다. *박영선목사님 눅58강 녹취, 정리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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