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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음을(빌 2:1-11)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6.

예수님의 마음을

빌립보서 2:1~11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대환영을 한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라고도 하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기념하는 '고난주일'이라고도 하는 날입니다.

 

언제인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마는, 특별히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이 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보고 그 주님의 마음을 우리도 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귀한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이 시간 생각하는 가운데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라는 말의 뜻을 우리가 잘 압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저 '부드러운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로 올라오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둘기 모양으로 임한 것은 비둘기의 순결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둘기의 온유한 성품을 표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증거하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소개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어린양에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이란 뜻이 내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냥 빈손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 대속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가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 모습 가운데서 온유한 성품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양은 본래 그 성품이 온유합니다.

 

그래서 성품이 유순한 사람을 가리켜 양과 같이 순한 분이라고 합니다. 양은 다른 짐승에게 해를 당하는 일은 있어도 다른 짐승을 해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거기서도 메시야를 가리켜 "양이 털 깎는 자 앞에 입을 열지 아니함같이 잠잠하였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의 예언을 인용했는데,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하면서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을 나타낸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보통 심지가 꺼져 가면 아주 비벼 꺼버리고 맙니다. 갈대가 상하면 아예 짓밟아 꺾어버리고 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하시기 때문에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보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보내는 나중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너희를 친히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주님을 생각할 때 그 온유한 마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할 때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온유한 마음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약한 분은 아니십니다. 그리스도는 강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이셨습니다.

 

옛날 초대교회 때에 예수님을 그린 것을 보면 보통 양을 품에 안고 있는 목자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목자처럼 온유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아기 엄마들은 예수님이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축복해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에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린애들은 조용하지를 못합니다. 시끄럽습니다. 떠들어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생각에는 어린애들이 가까이 오는 것이 시끄럽게 보여서 귀찮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늘나라에 있는 자들이 바로 이런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고, 어린아이를 영접하고, 그 어린애들을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어떤 때는 문둥병자들이 와서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서 어루만져달라는 요청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손을 내 밀어 그 더러운 문둥병자를 어루만져주시고 고쳐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여리고 지방을 지나가실 때입니다.

 

두 사람의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 멀리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고 주님께 가까이 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면서 소리질렀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따라오고 또 바쁜 행차인데 맹인들이 소리지르니까 시끄럽다고, 떠들지 말고 좀 잠잠하라고 야단쳤습니다. 그러나 맹인들은 계속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들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때 예수님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달려오니까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어이냐? 너희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맹인들이 뭐랬어요? "주여,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들의 간구를 들으신 주님께서는 당장 그들의 눈이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보실 때 그냥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가 로마의 속국으로 있으면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딱한 사정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목자 없는 양처럼 여기셔서 백성들을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한 것처럼 너희를 품으려 한 적이 몇번이나 되었더냐? 그러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이제 얼마 있지 아니해서 예루살렘이 망할 것인데, 그때는 돌 위에 돌 하나도 겹놓이지 아니할 정도로 다 망해버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원수들에게 붙잡히실 때 옆에 있던 베드로는 홧김에 차고 있던 칼을 빼서 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다시 칼집에 넣으라고 하시면서, 대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계하시고 조용히 체포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법정에 끌려 다니시면서 많은 곤욕을 당하셨지만, 예수님은 그의 제자 베드로가 친히 기록한 대로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잠잠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면서 못박히실 때에도 예수님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온유하신 주님의 성품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도 향기를 풍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이 온유하셨기 때문에 자기를 해치는 원수에게까지도 온유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약하셨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담대하셨습니다. 더구나 주님의 온유한 마음은 죄를 용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하지만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신 것은 그 온유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산상보훈을 가르치실 때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지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이깁니다. 온유한 사람이 마지막에는 이 땅을 차지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는 온 세상을 차지하게 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일생을 가만히 돌이켜 살펴보며, 그의 생활 가운데 조금이라도 교만했다든지 자기 자랑을 했다든지 하신 일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교만한 자취가 전혀 보이지 아니합니다.

 

가령, 예수님이 나신 곳이 어디입니까? 그는 마구간에 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가 왕궁에 나지 아니하시고 마구간에 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하지만 마구간에 나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보다 더 겸손하실 수는 없습니다.

 

나셔서 처음 누우신 보금자리가 말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이 젊어서 하신 생활 가운데도 사실은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볼 때 가난하게 지내셨습니다. 친히 말씀하신 대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실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사실 예수님만큼 가난한 사람은 오늘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벌 옷이 없었습니다. 한 벌뿐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옷 한 벌로 사시는 분은 아마 안 계실 것입니다. 갈아입을 것은 있을 것입니다. 겨울 옷 가지고 여름까지 입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벌 옷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일생 동안 사귄 사람들을 보면 어부 아니면 농부같이 별로 공부도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세력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교계에 나타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요사이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목사들 가운데도 대통령이나 장관과 자리를 같이하면 큰 대접받고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두고두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원수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실 때 빌라도 앞에 선 것 외에는 권력자와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뭐라고 비난했습니까?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자나 부자의 친구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 무식한 사람,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의 친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33년 사시는 동안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행동을 좀 달리하신 적이 꼭 한 번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따르는 사람들이 앞서고 뒤서면서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좀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세히 보게 되면, 나귀 중에도 제일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유대 나라의 나귀는 우리 한국 나귀보다 더 작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작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이 땅에 거의 닿았을 줄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지만 겸손한 왕이십니다.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도 그렇습니다. 제자들 사이에는 예수님의 사정도 모르고 "누가 우리 가운데 제일 높으냐? 누가 제일 크냐?" 하는 것 때문에 토론이 벌어지게 되고, 기분들이 상해서 아주 어색한 분위기였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는 먼지가 너무 많아서 밖에서 들어올 때면 꼭 발을 씻어야 했는데, 넉넉한 집에서는 종들이 주인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종이나 하는 일을 하나' 해서 누구 하나 발을 씻어주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내가 왜 종이나 하는 발을 씻기는 일을 해' 하고 생각하면서 서로 눈치만 보면서 버티고 앉아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손수 대야에 물을 떠다가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네 발을 내 놓으라. 내가 씻겨주마"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하나씩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생이 되어서 제자들인 너희의 발을 씻겠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너희도 겸손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높은 분이시지만 그것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낮아지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더러 겸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멸시의 눈을 보내는 사람들을 위해서 비유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를 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서 청산유수처럼 기도를 잘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다 자기를 자랑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하늘을 향해 감히 우러러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자기의 지은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겸손하게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는 받으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겠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사야 57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고 거룩한 곳에 거처를 삼으셨지만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같이 계셔서 겸손한 심령을 부흥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겸손을 최고의 덕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지혜와 어진 것, 그리고 용기를 덕으로 생각합니다. 서양의 윤리를 보아도 이 세 가지에 '절제' 하나를 더해서 소위 4덕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면서 겸손을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겸손을 가장 귀한 덕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르친 것만 아니고 예수님께서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의 도, 종의 도를 보여주셨습니다. 기독교 사상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어거스틴도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덕을 말하면서 "첫째가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한 말은 의미 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교만하기 짝이 없던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 준비했던 형틀에 자기가 목이 매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아주 교만해서 자기의 능력과 지혜로 모든 것을 건설했다고 장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지 얼마 안되어 정신이 나가 미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들로 나가 소처럼 풀을 뜯어먹고 머리털은 독수리 머리털처럼 되었다가 죽어버렸습니다. 벨사살 왕은 교만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빼앗아온 기명으로 고관대작들을 불러 술을 마시다가, 바로 그날 밤 메대와 파사 연합군이 들어와 베사살 왕을 죽였고 그 나라는 완전히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잠언에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교만은 모든 죄의 어머니입니다. 교만하므로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개인이나 나라나 반드시 망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교만할 조건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받은 것인데, 어떻게 받지 않은 것처럼 교만할 수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교만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위대한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제일 위대한 사람이 누굽니까? 아마 모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신약성경 중에도 예수님을 제외하고 누가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예수 믿기 전에는 아주 강퍅하고 교만했었습니다. 자기 이상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이 없다고 교만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믿지 않는 사람은 쫓아다니며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한 다음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주 겸손해졌습니다. 그의 신앙은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깊이가 있었고 놀라운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할 정도로 겸손해졌습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마음은 용서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해서 그럽니다." 여러분, 용서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통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얼마나 강퍅합니까? 사막과 광야 같아서 나무들이 가시가 돋쳤고 건드리면 찌르고 고통을 줍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꼭 품으면 사회가 달라질 것입니다. 백합이 찔리면 향기를 더 발하는 것처럼, 우리가 찔리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고난 주간에 우리 하나 하나가 주님의 마음을 품어서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 앞으로 초대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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