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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쳐 가로되 / 요한복음 18:15-27

by 【고동엽】 2021.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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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쳐 가로되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8:15-27

 

식용인 육계가 아닌, 달걀을 낳는 산란계를 30만 수나 양계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에 의하면 양계에서 중요한 것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종계입니다. 얼마나 건강하고 좋은 종계의 새끼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병든 여자나 나이든 여자는 건강한 아이를 낳기 어렵지 않습니까? 닭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먹이입니다. 어떤 사료를 먹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셋째가 환경입니다. 요즈음 양계는 고밀도 양계이기 때문에 환경은 더없이 중요합니다. 온도와 습도의 적절한 조절 및 청결성과 쾌적성에 따라 생산량의 증감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양계 선진국의 경우 닭 한 마리가 1년에 약 300여 개의 달걀을 낳는 반면에 우리 나라는 그보다 10%나 뒤떨어지는, 년간 270여 개밖에 낳지 못한다고 합니다. 닭 1마리가 선진국에 비해 1년에 30여개 덜 낳는다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30만 수를 가지고 있는 그 양계장의 경우 같은 규모의 선진국 양계장에 비해 1년에 무려 900만 개나 생산량이 뒤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양계 전체를 놓고 볼 때 그 차이는 실로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것입니다. 똑같은 노력을 기울이고서도 선진국에 비해 그만큼이나 뒤진다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나라의 경우, 종계, 먹이, 환경 중에 무엇이 미흡해서 그처럼 큰 차이가 나는지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먼저 종계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종계를 100% 외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입니다. 종계장에서 종계를 수입하여 알을 낳으면, 부화장에서 그 알을 사다가 부화시킨 뒤에 양계장에 분양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과정상 약간의 기술적인 차이가 있을수 있으나 종계 그 자체는 선진국과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환경은 오히려 우리가 선진국에 비하여 더 낫다고 했습니다. 계사를 한번 지으면 시설의 수명이 대개 30년 가량 가는데 선진국의 경우 계사가 이미 오래 되어 노후한 반면, 우리 나라는 불과 5년 전부터 전자동시스템을 갖춘 최신 계사를 짓고 있으므로 환경에 관한 한은 오히려 우리가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원인은 나머지 하나, 먹이 즉 사료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나라에서 직접 만든 사료를 먹이는 것은 아닙니다. 사료 역시 100% 수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에 원인이 있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똑같은 사료를 반드시 쪄서 먹이는데 비해 우리 나라는 그냥 먹이는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번거롭고 불필요해 보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료를 찜으로서, 만에 하나라도 있을 수 있는 경우에 대비하여 철저한 살균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결국엔 완전한 먹이가 되지못한 채, 엄청난 생산량의 감소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우리의 뿌리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도 더없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뿌리와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있느냐, 우리가 무엇을 양식으로 추구하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년전에 해남에 있는 대단위 다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같은 산자락에 광활하게 펼쳐진 농원 속에 같은 나무가 심기워져 있었지만, 유독 오른쪽 끝자락 부근의 나무는 모두 시들어 있었습니다. 이유인 즉은 그 곳만은 토양이 마치 반석처럼 단단해서 나무가 뿌리를 제대로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묘목을 심고 같은 비료를 주었습니다. 똑같은 물을 주었습니다. 똑같은 태양의 빛과 열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들이 처해 있는 환경이 좋지 못할 때 그 나무들은 병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뿌리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양식으로 삼고 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뿌리와 먹이가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에 따라, 혹은 우리가 우리 손으로 어떤 환경을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내일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농업 진흥청에서는 종자개량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농기법, 비료, 토양 등 모든 여건이 뛰어나도 종자의 가능성을 극대화 할 수 있을 뿐이지, 그 한계를 뛰어 넘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종자가 좋은 여건과 맞아 떨어질 때 더 많은 수확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열세인 종목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종목이 승마입니다. 한국에는 한 필에 수십억 원, 혹은 그 이상을 호가하는 좋은 종마가 없는 까닭입니다. 지금 한국에 있는 정도의 말로는, 아무리 좋은 먹이를 주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세계 기록 언저리에도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환경도 중요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양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양식과 환경이 아무리 출중해도 우리의 뿌리가 좋지 못할 때, 우리의 혈통이 부실할 때, 우리의 삶은 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학자 집안에서 학자가 더 많이 나오고, 법률가 집에서 법률가가, 의사 집안에서 의사가, 사기꾼 집안에서 사기꾼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배출된다는 통계야말로 우리의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들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어리석게도 낙원을 잃어 버렸던 인류최초의 밤죄자인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우리의 죄성과 욕망을 배부르게 할 것만을 양식으로 삼던 자들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악과 불의를 우리의 환경으로 삼았던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철저하게 악 속에서 악을 먹고 살아오던 악의 종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의 은총 속에서, 아담의 자녀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의 뿌리를, 혈통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마 4:4)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우리의 가장 귀한 양식으로 알고 주야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마 13:23)

 

 

우리의 삶이 풍성한 진리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도록 우리의 환경을 진리의 옥토로 쉬임없이 일구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진리를 양식으로 먹고 마시면서, 진리를 우리의 환경으로 삼아, 우리 자신을 진리의 종자답게 가꾸어 가는 구체적인 행동이요, 삶입니다.

 

 

 

종자, 먹이, 환경 이 세 가지는 양계장이나 농장, 혹은 승마장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교육에서도 이 세 가지의 중요성은 지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 세 가지는 더없이 중요합니다. 이 세 가지의 유무 여부에 따라 신 불신이 결정되고, 이 세 가지의 정도에 따라 신앙의 성숙도와 선진도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일깨워 주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된 예수님께서는 결박당하신 채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19)

 

 

자신의 집으로 끌려온 예수님을 본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는 즉각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왔었는지 그 내용을 이실직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을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20-21)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구체적으로 답변치 않으셨습니다. 정 알고 싶다면 당신의 말씀을 들었던 자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대제사장이 정말 주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트집잡기 위함임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이 부질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님의 답변이 끝나기 무섭게 그 집의 하속 한 명이 대제사장 앞에서 예수님의 답변 태도가 불손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손으로 쳤습니다. 예수님을 때린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한 인간에 대한 구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친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폭행이자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폭력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본문 속의 이 하속은 진리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최초의 인간―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짓을 행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까?

 

 

첫째 그의 뿌리가 나빴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통로인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벗어나 있던 그는 여전히 아담의 후예일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환경이 나빴습니다. 그가 거하고 있는 곳이 어디였습니까? 대제사장의 집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이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인간의 의만 드러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인간의 관습만 중요시 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명예만 드높여 지는 곳입니다. 그 곳은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결코 만날 수 없는 최악의 환경이었습니다. 셋째 양식이 나빴습니다. 그 하속이 그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양식이란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 아니라, 백해 무익한 탐욕 그리고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에 대한 증오가 고작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 뵙는 행운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에게 폭력을 행사한 최초의 패역한 인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고서도 회개조차 않는 비참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뿌리, 그런 양식, 그런 환경으로서는 죄를 짓고서도 무엇이 죄인지조차 알 수 없기에 회개가 아예 불가능한 까닭이었습니다.

 

 

이 불쌍한 하속에 비하여 볼 때 본문 속의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였습니다. 이를테면 이 하속과는 뿌리, 종자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하속과 뭐가 달라도 분명히 달라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베드로의 처신은 어떻하였습니까? 그는 주님께서 서 계시는 대제사장의 바로 그 뜰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주님을 욕하고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것 역시 주님에 대한 폭력이었습니다. 하속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하속은 주먹으로 폭력을 행사한 데 비해 베드로는 혀로, 말로 했다는 차이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에게 뿌리를 둔 예수님의 제자가 이처럼 하속과 똑같을 수가 있습니까? 첫째는 바른 양식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이전에 여러 번이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고난을 받고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셨댔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그 말씀을 믿고 삼켜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다른 그 말씀을 흘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 자기의 계산을 양식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지금 베드로가 처한 환경이 좋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그처럼 예수님을 부인했던 곳은 대제사장의 집 뜰이었습니다. 만약 그곳이 대제사장의 집이 아니었던들 베드로가 그처럼 어처구니없이 주님을 부인치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속과는 아무 다를 바가 없는 그가, 하속과는 확연하게 달리 언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했었습니까?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27)

 

 

새벽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만은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으리라 베드로가 호언 장담할 때, 오늘 밤 닭 울기전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란 주님의 말씀이 불현듯 기억 났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삼키는 순간 회개했던 것입니다. 어디에서 회개했었습니까? 대제사장의 집안에서 회개했습니까? 아닙니다. 마태복음 26장 75절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을 뛰쳐나가 밖에서 통곡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이란 환경을 벗어나서야 참된 회개를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의 하속과 베드로의 행적은 참으로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 할지라도 바른 양식을 취하지 않고 바른 환경 속에 거하지 않는 한 불신자와 아예 아무런 차이가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크리스천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입고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자들입니다. 뿌리가 바뀐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과 동일하다면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 바르지 못한 환경으로부터 벗어나거나 혹은 그 그릇된 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 하지 않고, 그 속에 안주하면서 오히려 거기에 적응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 한번 읽지 못하다가 최근에 창세기부터 통독을 시작하여 이제 구약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는 성도님이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보니, 그 동안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믿고 살아 왔는지 하나님 앞에서 수치스럽고 후회스러울 뿐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닭의 모이만을 먹고서는 사람 구실을 절대로 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합니다. 우리 자신이 정녕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의 양식으로 삼는 것으로 증명되어야만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지 않고서도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릇된 환경에서 벗어 날뿐만 아니라 잘못된 환경을 바로잡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역군들인 것입니다. 지금 한보 사태로 온 나라가 요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닙니다. 80년대, 70년대, 60년대, 50년대 신문을 뒤져보십시오. 단지 사건의 주인공과 제목만 틀릴 뿐 소위 한보 사태는 늘 있어 왔습니다. 어느 정권치고 새 시대, 새 사회, 새 역사를 소리쳐 외치지 않았던 정권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모두 새로운 환경을 일구자고 역설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라를 뒤흔드는 대형 비리는 끝없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모두 다른 사람을 고치려고만 했지 자기를 바로 세우는 것을 등한시한 까닭입니다. 나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이 세상이란 환경은 절대로 개선되지 않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이 나의 환경이 듯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내가 그들의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각각 타인의 환경인 우리 자신이 진리로 우리의 환경을 삼아 진리 안에 설 때에만, 자연을 포함하여 이 세상이라는 환경이 비로소 새로와 질 수 있고, 그 새로와진 환경 속에서 밝고 건강한 삶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대제사장의 집이라는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그가 그 이후 진리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환경으로 삼았을 때, 그에게 다가온 순교라는 최악의 환경이 그를 결코 무너트리지 못했고, 오히려 그에게 십자가 순교를 강요했던 로마제국이라는 세상의 환경이 그로 인하여 전혀 새로와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바로 세움 없이,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대로 였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믿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뿌리가 새로와 졌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진리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읍시다.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그분을 우리의 환경 으로 삼아 우리 자신들이 타인을 위한 바른 환경이 되십시다. 잊지 마십시오. 뿌리 먹이 환경의 바른 어우러짐 속에서만 개인의 역사도 민족의 역사도 새로이 구축됩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추악한 아담의 후예로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시므로 우리의 종자를, 우리의 뿌리를, 우리의 혈통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주셨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된 자답게 살아오지 못하였음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바로 내 아내의, 내 남편의 환경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근로자의, 경영자의 환경임을 인식치 못했습니다. 내가 내 형제와 이웃의 환경임을 자각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바로 세우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을 바로 세우려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치고, 법과 질서에 폭행을 가해 왔음을 이 시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답게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게 하옵시고,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환경 삼아 오직 그 분 안에 거하므로, 타인을 위한 바른 환경, 진리의 환경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종자, 양식, 환경이 바르게 어우러지는 삶을 살므로, 우리의 삶으로 인해 이 세상이라는 환경이 맑고 밝아지는 역사가 시작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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