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닮은 얼굴
전도서 8:1~8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가리켜 소위 지식 홍수의 시대라고 합니다. 혹은 정보화 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서 세계 각국에 있는 정보를 얼마든지 입수할 수가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지식과 정보는 홍수처럼 넘쳐흐르지만 지혜는 많지 못한 것이 이 시대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까? 잠언 9장 10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그치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철학자들도 인간의 이성(理性)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며 그 뜻에 따르려고 하는 사람은 지혜의 사람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말하자면 지혜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왜요? 내 힘, 내 지식, 내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의지한다는 말은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닮는 생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그래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닮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집니까?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이란 말을 영어로 'exercise' 혹은 'training'이란 말을 쓰는데, 말하자면 '연마하여 익힌다', '습득한다'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연습이란 같은 일의 반복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리켜 풀무에 연단한 금으로 비유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연습을 통해서 그 믿음이 더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고 그 믿음이 빛난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갈고 닦는 연마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닮은 삶을 살려면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도 말하자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이 연습을 해야 합니까?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해야 합니다. 날마다 거듭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르게 되고,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심령은 말하자면 어린아이의 상태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가 장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는 지혜에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혜가 어린아이와 같다면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어린아이는 지나가는 사람이 사탕만 주어도 고맙게 생각하며 졸졸 좇아갑니다. 그러나 어른이 지나가는 사람이 지나치게 친절하게 한다고 좇아갑니까? 안 갑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지만, 완전한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계속 연습하고, 계속 성장하는 자리에 이르러야 합니다. 은혜와 진리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언제나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그대로 닮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생활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누구를 바라보기 위해서 예배당에 나오셨습니까? 목사 바라보기 위해 나오셨습니까? 아닙니다. 목사를 바라보다가는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신앙생활 하는데 교회의 지도자를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역자의 책임이 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본의 아니게 잘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잘못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라보는 동안 절대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주님을 바라보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닮아갑니다.
긴 세월 동안 부부가 해로하면서 사시는 분들을 보세요, 자신들도 모르게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닮아갑니다. 가정을 이루고 처음 생활을 할 때는 아무리 뜨겁게 연애해서 결혼을 했다고 하지만 서로 성격 맞지 않는 것이 발견되고, 취미가 맞지 않는 것이 드러나고, 그래서 티격태격 다툽니다. 그러나 이러기를 10년, 20년, 30년, 40년 함께 살다보면 남편은 아내를 닮아가게 되고, 아내는 남편을 닮아갑니다.
식성도 닮게 됩니다. 저는 평안남도 태생이고, 제 아내는 평안북도 산입니다. 같은 평안도인데도 북도와 남도의 식사가 달라서 서로가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같이 지나는 동안 이제는 어디 가서 식사를 해도 제 아내가 한 것만큼 입에 맞는 식사가 없습니다. 바라보면 닮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오도온이 쓴 {위대한 바위얼굴}(The Great Stone Face)이라는 책의 이야기를 다 들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책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느 계곡에 평화와 번영과 행복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산이 있는데, 그 산의 바위가 꼭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대자연의 신비로운 조화의 산물로 멀리서 바라볼 때 어딘지 모르게 지혜로워 보이고, 자비스러워 보이고, 평화스러워 보이고, 고귀한 사람의 얼굴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이 대대손손 살아온 것은 저 멀리 바라보이는 그 위대한 바위얼굴 때문이고, 그 돌의 얼굴과 똑같은 인물이 언젠가는 이 마을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가난하지만 정직한 어네스트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한테서 큰 바위얼굴의 전설을 듣고 기쁨이 넘치고, 꿈이 생기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랐습니다. 그는 날마다 나아가서 그 산을 바라보며 먼데서 그 큰 바위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언제 저 훌륭한 예언의 인물이 우리 동네에 나타날까? 그게 누굴까?' 그는 가난하기 때문에 학교도 별로 못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큰 바위얼굴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일하고 스스로 공부하고 성장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그 큰 바위얼굴과 똑같이 생긴 예언의 인물이 드디어 나타났다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마을의 사람으로서 외지에 나아가 많은 돈을 벌어서 갑부가 되어 온다는 것입니다. 그 예언의 인물이 드디어 그 마을에 돌아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기대를 가지고 나가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마을 사람들의 기대와는 너무 어긋났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실망했습니다. 그 사람은 저 큰 바위얼굴하고는 조금도 같은 데가 없었습니다. 어네스트는 섭섭했지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하던 손을 멈추고 그 큰바위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어네스트의 마음은 흥분되곤 했습니다. 그는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또 몇 해가 지났습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예언의 인물이 금의환향한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유명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군에게서 강철같은 의지는 보였지만 그 큰 바위 얼굴과 같은 고귀하고 인자한 빛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또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 해가 또 지났습니다. 이번에는 예언의 인물로 위대한 정치가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웅변으로 사람을 심취시키는 힘은 있었지만 정말 예언의 인물은 아니라는 판단이 생겼습니다.
어네스트는 어느덧 중년이 지나 노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깊은 사색에 잠기곤 했습니다. 또 시간이 있는 대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제 백발이 된 어네스트는 성실하고 순수하기가 천사와 같았고 그의 평화스러운 얼굴에는 언제나 지혜와 기쁨이 넘쳐 있었습니다. 그 큰 바위얼굴이 그의 스승이요, 그의 친구요, 감격과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그 날도 어네스트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석양녘에 일을 끝마친 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느 시인이 지나가다가 어네스트를 쳐다보았습니다. 석양에 서 있는 어네스트의 얼굴에 위대하고 고귀한 빛이 넘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네스트의 얼굴이 바로 저 큰 바위얼굴과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시인은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보세요. 저 어네스트야말로 큰 바위얼굴과 똑같은 분입니다. 예언이 말한 사람이 저 어네스트입니다." 모두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저 어네스트의 얼굴이 저 석양에 미치는 큰 바위얼굴과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네스트 자신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어네스트는 위대한 바위얼굴을 바라보는 동안에,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수십년, 노인이 될 때까지 바라보면서 '나도 저런 얼굴의 소유자가 되었으면'하고 바라보는 동안에 어네스트 자신이 그 위대한 바위 얼굴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호오도온의 이 이야기는 물론 하나의 상징적인 소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날마다 자기 자신의 얼굴을 조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늘 바라보면 닮아갑니다.
바라보는 것은 사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닮으려면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의 성품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의 인격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의 생활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사람은 바라보는 데 따라서 그 생활이 달라집니다.
옛날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방의 푸른 풀밭과 비옥한 땅만 바라보았습니다. 그 속에 얼마나 죄악이 넘친다는 사실은 보지 못했습니다. 바라보면 자연히 따라가게 됩니다.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면 자연히 세상 영광 따라갑니다. 세상의 향락을 바라보면 자연히 세상 향락을 따라갑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그 얼굴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사람들이 마주 대해 볼 수 없을 정도로 광채가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오늘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하나님을 바라보시므로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실 때는 광채가 나는 얼굴로 돌아가게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 바라보면 우리 얼굴의 광채가 없어집니다. 돈을 바라보면 욕심이 생겨서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명예나 권세를 바라보면 권세욕이 생겨서 얼굴에서 빛이 없어집니다. 육신의 쾌락을 바라보면 정욕이 생겨서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납니까?
히브리서에 보면 주님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늘 주님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길을 갈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을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말을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하며 말해야 합니다. 공부를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하며 해야 합니다. 장사를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주님을 생각하며 가르쳐야 합니다. 환자를 치료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밥을 지을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무를 볼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갈대와 같다." 갈대와 같은 인생, 약한 것을 의미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생각하는 갈대다." 약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각하는 데 따라서 사람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뭐랬어요?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합니까? 장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장사해서 돈 버는 생각을 합니다. 도둑놈은 밤이나 낮이나 남의 물건 훔칠 생각만 합니다. 사기꾼은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속일 생각만 합니다. 목사는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만 생각해야 합니다. 목사가 장사하는 생각을 하면 목사 하기는 틀린 겁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마음에 사랑이 없고, 기쁨과 평화가 없는 사람은 밤낮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생각, 원망하는 생각을 품고 있으니까 그 얼굴이 쭈그러집니다. 불평하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 시기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셨어요? 얼굴에서 빛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언제나 선한 생각,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속에 기쁨과 만족과 감사와 찬송이 있는 사람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그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썼습니다. 아주 유명한 고전문학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이 만일 이 일을 하신다면 하는 생각으로 사람의 생각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애쓰면 자연히 주님을 닮게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이시면 어떻게 하실까?'하는 것을 생각해보며 주님을 닮으려고 힘쓰는 생활, 그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너 성결키 위해 네 머리 숙여 저 은밀히 계신 네 주께 빌라. 주 사귀어 살면 주 닮으리니 널 보는 이마다 주 생각하리"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번은 미국의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중에 유능하고 훌륭한 보좌관을 소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러라고 하고 약속한 시간에 소개받은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링컨은 그 사람을 채용 안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내가 보기에는 그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쉽지 않은데 왜 채용 안 했나?" 그때 링컨이 "글쎄, 다는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 자네가 소개해준 그 사람의 얼굴이 나는 마음에 안 들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사람의 얼굴이야 어떻게 하겠나?" 링컨은 웃으면서 "적어도 사람의 나이 40쯤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어야지"라고 하더랍니다.
뜻이 있는 말입니다. 40이 될 때까지 생각하고 생각하노라면 사람의 얼굴이 생각하는 모습대로 달라집니다. 이 자리에는 젊은이들이 많으신데, 여러분 바라고, 생각하는 것을 언제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 생각을 늘 하면 그 얼굴이 시기에 가득 찬 얼굴이 되어 버립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헐뜯는 생각을 늘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의 빛은 사라지고 미움이 가득한 얼굴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어린애들의 눈을 보셨어요? 조용한 호수같이 잔잔하고 맑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나쁜 것 보고 좋지 않은 것 생각하는 동안에 이 맑은 눈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한번 화를 내면 눈에 핏줄이 더 생깁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답고 깨끗하고 잔잔한 호수 같던 눈이 충혈이 됩니다. 마음에 사랑을 품으세요. 평화를 누리세요. 기쁨을 가지세요. 그때 여러분의 얼굴이 빛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얼굴에 빛을 잃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 얼마나 살려고 얼굴에 핏대를 내고 빛을 잃어버린 생활을 하겠습니까? 내려오는 말에도 '일소일소 일노일노(一笑一少 一怒一老)'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내면 한 번 늙어진다는 말입니다.
전에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웃음을 잃어버린 우리 국민에게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벙글벙글 웃으며 삽시다." 참 재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있으면 그 얼굴에 벙글벙글 화기가 돈다는 말입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러분, 웃어보세요. 마음에는 여유가 생기고, 웃으면 웬만한 걱정은 다물러가고 맙니다. 반면에 얼굴을 찡그리면 별 것 아닌데 심각해집니다. 그러기에 잠언에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으로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끝으로, 주님의 얼굴을 닮으려면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온유와 겸손은 주님의 근본 성품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고 하는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배우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온유와 겸손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교만하고 강퍅한 사람의 얼굴에는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그 얼굴에 빛이 있습니다. 내 얼굴이 빛나는 것을 내가 아는 것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볼 때 주님의 얼굴을 닮아야지요. '저 분을 뵈면 참 하나님을 뵌 것 같애. 저 분을 만나면 예수님 만난 것 같애.' 이렇게 되면 얼마나 복입니까?
전에 아시시의 성 프랜시스는 모든 사람이 그 분을 보면 하루 종일 예수님을 뵌 것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았더니 그 얼굴이 천사처럼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는 태양처럼 빛나지는 못해도, 태양 광선을 반사하는 달빛처럼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사랑의 빛, 온유의 빛, 겸손의 빛, 봉사의 빛을 이 세상에 반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닮은 얼굴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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