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기다리는 마음(고전 11:17-29)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5.

<기다리는 마음> 고전11:17-29

 

 

본문 중 23-29절은 성찬식제정의 말씀으로서 성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듣곤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하여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나누신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 예수님의 성찬식제정의 말씀을 고린도교회의 어떤 상황에 연결시키고 있는가 하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성찬식제정의 말씀을 연결시키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본문 17-2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 17절에 보면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임"이란 다름 아닌 "성찬식 모임"입니다. 이 거룩하고 은혜롭고 유익해야 할 성찬식 모임이 왜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가 되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18, 19절에 보면 그들 가운데 있는 분쟁과 파당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그런 분쟁과 파당을 가지고는 함께 모여서 주님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행해진 그 성만찬을 성만찬이라 할 수 없게 만든 요인이 단지 분쟁과 파당이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더 심각하고 아주 부끄러운 일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21절에 보면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성만찬은 보통의 회식을 겸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각자 음식을 준비해서 가지고 오면 그것을 다 차려놓고 다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갖다 먹어버림으로써 남은 사람들은 먹지 못하고 배를 골아야 하는 일이 발생하곤 했던 것입니다. 음식이 베풀어진 식탁에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더 이상 남아있는 음식이 없어서 먹지도 못하고 있는데 먼저 다 갖다 먹은 사람들은 술까지 거나하게 취해 있곤 한다니 이게 무슨 주님의 성만찬이겠느냐는 사도 바울의 한탄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22절에서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했다고 한 것 보면 그 먼저 다 갖다 먹고 술까지 취하곤 했던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의 파당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렇다고 할 때 사태는 더 심각한 것입니다. 있는 사람들이 넉넉히 가져와서 없는 사람들이 먼저 충분히 먹도록 기다려줘야 할텐데 평소에 제 집에서 잘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더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바람에 가난한 사람들이 더 낙심하고 자존심 상하고 모멸감을 느끼며 분노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교회 안의 분쟁과 파당은 더 심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잊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런 짓은 단지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다함께 나누는 성만찬을 그냥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자리로 아느냐? 그렇다면 밥 먹을 장소가 없어서 교회에 나왔느냐?" 라고 질타하는 말이 22절 첫머리의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다시 한 번 바른 성만찬을 가르치기 위하여 "내가 당신들에게 전해준 성만찬은 당신들이 지금 행하는 그런 성만찬이 아니라"는 뜻으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 하면서 23절 이하의 말씀을 쓴 것이라 봅니다.

 

 

 

23-26절에서 성만찬의 의미를 설명한 사도 바울은 이어서 성만찬에 임하는 바른 자세에 관해 언급합니다. 먼저 27절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합당하게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떡과 포도주를 어떻게 먹고 마셔야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이 그 답을 28, 29절에서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한 것입니다. 떡과 잔을 받으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살피고" 또 "주의 몸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자기를 살피고" "주의 몸을 분별"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먼저 "주의 몸을 분별함"이란 어떻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는 성찬식에서 나누는 떡과 잔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대속적 죽음을 죽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살과 피를 상징함을 알며, 상징물로서의 떡과 포도주와 그것들이 가리키는 구원의 사건과 진리를 구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러므로 성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물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자기를 살핌"이란 또 어떻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는 나의 죄를 씻으시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의 고백과 함께 성찬식에서 내가 떡과 포도주를 받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성만찬이 그저 여럿이 모여서 함께 식사하는 행사가 아니라, 한 주님에 대한 같은 신앙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들 사이에 성도의 사랑을 나누는 교제임을 바로 알고, 내가 과연 한 형제자매 된 다른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 속에서 떡과 포도주를 취하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 태도를 확실히 지니고 성만찬에 임하는 것이 떡과 포도주를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만찬이 행해지는 교회가 그저 음식으로 배를 채우기 위한 회식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며 심령을 부요하게 하는 하나님의 집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모든 민족과 계층의 차별을 없애주던 것이 교회에서의 성찬식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민족과 계층의 차이 등 사람들 사이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지 않는 성찬식은 무의미한 것일 뿐 아니라 성찬식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하나됨의 의식과 의지와 실천적 노력이 없는 삶은 온전한 신앙의 삶이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27절에 있는 대로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며, 28절에서 말하는 대로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성찬에 참여하며 사람들 사이의 모든 장벽을 헐고 하나됨을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눔으로써 우리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나라의 백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0:16-17에서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했습니다. 교회 안에 파당이 있고, 또 그 파당이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으로 갈라진 파당이며, 게다가 가진 사람들이 먼저 다 먹고 갖지 못한 사람들이 늘 굶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찬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교회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가까이 있는 말씀인 33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한 것은 이런 모든 생각을 담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 기다리라". 기다리는 마음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기 전에 그 나의 행동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남을 먼저 앞세우는 마음입니다. 남을 위해서라면 내가 하고 싶고 나에게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는 여유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관심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 교회가 서로 기다릴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