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들어 주를 보라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23편은 가장 짧은 시편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편을 누가 썼는지 그리고 언제 더 썼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혹시 선지자 느헤미야 때에 지은 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읽고 그 시편을 읽게되면 영감이 통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느헤미야 선지는 본래 페르시아 궁정의 고관으로 있었습니다. 자기의 일신을 생각하면 포로 출신의 사람으로 외국에 와 있으면서 이런 높은 위치에서 대접을 받으며 호사하게 되니 고국을 잊어버릴 수도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조국 이스라엘이 말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되고 예루살렘이 비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될 때 그는 평안한 자리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안정된 그 위치에서 그 자리를 내어놓고 수 천리를 마다하지 아니하고 여러 달 걸려서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먼저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힘이 없이 맥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는 그의 백성에게 위로하며 격려해서 새 힘을 얻어 가지고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기로 한 것입니다. 사방의 원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다시 짓고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을 다시 수축하는 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호론사람 산발랏, 암몬사람 도비야 같은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여러 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의 성역을 방해하고 습격을 하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일하는데 와서는 "글쎄, 그게 될까요? 사실 어려울텐데요. 안될겁니다." 하면서 조소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맥이 빠지게 하려고 계속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 4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업신여김을 당하면서도 싸울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는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방해하는 원수의 습격을 막기 위해서 모든 역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 손에는 병기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쟁기를 들고 일을 계속 하게 한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는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했습니다."
눈을 들어 주를 본다는 말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11장에 믿음을 정의하고 믿음으로 산 우리의 선배들을 열거해 나가다가 12장에 가서 한 말은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이 있으니 모두 무거운 것과 얽메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봅니다. 바라본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눈을 들어 주를 본다는 말은 겸손의 표시입니다.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홍해가 가로막혔습니다.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얼마나 당황했고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까? 그 때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했습니다.
왜 눈을 들어 주님을 봅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실 것을 믿습니다." 라는 겸손의 마음입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본다는 말은 순종의 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나의 어느 혼인 잔치 집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잔치에 흥을 돋구는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요사이 같으면 가게에 가서 사오면 되지만 그 때는 잔치 집에서 미리 담가야 하는데 준비했던 것이 다 떨어졌으니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 사정을 말하면서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그대로 하라." 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의 물을 채우라." 하셨습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한 것뿐입니다. 그랬더니 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께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며 순종하므로 여러분의 삶 속에도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본다는 말은 주님을 앙망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앙망합니까? 이 험한 세상을 걸어가는 중에 피곤하고 지칠 때, 내 영혼이 자빠진 상태에 있을 때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건강해서 마음대로 활동할 때는 세상만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치 않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서 활동할 수 없게되면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갈 때는 내 능력과 수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불가항력의 실패에 부딪쳐 쓰러지게 될 때 우리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내 영혼이 쓰러질 때 소생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넘어지나 아주 자빠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면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새 힘을 얻습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소망이 넘칩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본다는 말은 기도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말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눈으로도 기도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은 간절한 소원을 표현하는 눈입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그 눈은 곧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는 그 많은 어려움 중에서도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으면서 그의 눈은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기도를 성경에서 종종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유대나라 여러 왕 가운데서 선한 왕 중에 하나였습니다.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였고 백성들을 바로 다스린 어진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개인의 생활과 국가적인 형편을 볼 때 종종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었습니다. 아마 그 가운데서도 국가적으로 제일 위험했던 때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공격해왔을 때였다고 생각합니다. 국제 정세로 볼 때 북방에 있는 앗수르 나라가 갑자기 강성하게 되었습니다. 인근의 적들도 호시탐탐 유대 나라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왕 산헤립이 말 머리를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북편에 있던 수리아와 심지어 사마리아 성을 중심한 이스라엘까지 앗수르 왕에게 정복을 당했습니다.
이와 같이 큰 세력을 가진 앗수르 왕 산헤립은 큰 군대를 이끌고 작은 나라 유대나라를 침범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유대나라의 운명은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와도 같았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자기 사자를 통해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는 내용의 서신이었습니다. 그 글 가운데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글도 있었습니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은 네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내 권세에서 네 나라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다른 나라의 신도 그 나라를 구원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네가 믿는 신이 너희 나라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하며 하나님까지 조롱하면서 모독했습니다.
이 글을 받은 히스기야 왕은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그 글을 가지고 올라가 하나님 앞에 그 글을 펴놓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간절하게 이 위기를 모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때 역사상 큰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18만 5천명의 앗수르 대군이 무슨 이유인지를 알 수 없지만 하루저녁에 소멸되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히스기야 왕은 자기 개인 생활에 있어서도 위기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아무리 약을 써도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도 히스기야 왕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에게 "모든 일을 다 정리하고 유언이 있으면 다 말하라"고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사람이 보기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 왕이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얼굴을 하나님께 향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 소망이 없던 그 병 가운데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5년 동안 더 살면서 많은 봉사를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 길을 걸어 가다가 어떤 때는 앞이 콱 막히는 막다른 골목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돌파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앞이 캄캄해서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눈을 들어 위를 바라 보아야합니다.
20여 년 전에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가 미국에 이민을 갔습니다. 이 젊은이는 미국을 개척한 청교도들이 신앙으로 살아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축복 받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도 꼭 그 정신으로 살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미국으로 이민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우선 주의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으로 가게된 직장이 구둣가게였습니다.
그 주인이 유대인인데 유대교인이니까 안식일을 지키기 때문에 회사 방침이 주일에 가게에 나와서 일을 해야된다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주일에는 일을 하지 않기로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인이 그러면 할 수 없으니 그만 두라고 해서 취직한지 두 달만에 그 가게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은 벌어 놓은 돈도 별로 없는데 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으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종일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기를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 청년이 일하던 가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주인이 좀 만나자고 해서 나갔더니 주인이 하는 말이 "자네가 가게에 나오지 않으니까 지난달 매상이 반으로 줄었네. 자네가 믿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과는 다른 모양이네. 앞으로 자네 형편대로 나오면 되니까 우리가게 좀 도와주게" 그래서 이 청년이 그 가게에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각국으로 다니며 구두를 사다가 파는데 주인이 고른 물건은 잘 안 팔리고 이 청년이 산 물건은 예상 밖으로 잘 팔려서 그때부터 이 회사가 확장되어 큰 회사가 되었습니다.
10년 전에 주인은 회장으로 취임하고 이 청년이 사장으로 임명되어 이제는 미국 동부에서 큰 구두 판매 회사가 되었는데 Mastys Shoes co.요, 사장이 전말용 사장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보면 맨 마지막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 요한 계시록이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아시지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요한은 연로 할 때까지 에베소 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하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나이가 많았을 때 교회에 대한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결국 에베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밧모섬이라는 아주 황막하고 나무도 없고 돌만 있는 그런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조그만 굴속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도 요한의 믿음은 자랐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곳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이미 구원받은 14만 4천의 선남선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어두움 속에서도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만 본 것이 아닙니다. 장차 오고 오는 인간의 역사도 보았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펑탄한것만이 아닙니다. 예기치 않았던 큰 풍파가 있습니다. 큰 환난이 있습니다. 큰 재난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짐승이 나타납니다. 뱀이 나타납니다. 붉은 용이 나타납니다. 어린 아이가 싸움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어린 아이가 승리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새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놀랍고 황홀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세상에 있는 보석들로 표현을 했는데 그것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업ㄱ기 때문에 그 표현을 사용한것입니다. 그가 본 것은 그걱과 사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여러분,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위를 바라보면,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면 노라운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근대 선교 역사를 읽어보면 위대한 선교사의 전기를 우리가 많이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명한 분이 한 분 계신데 중국에 가서 선교하신 영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라고 하는 분이십니다. 이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 사람으로 훌륭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명문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릴때부터 하나님께 그 몸을 바쳐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의 불모지인 중국에 선교사로 자원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어느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중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열심히 기도하고 부지런히 전도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한 사람도 믿는 사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다음달의 우리 교회에 오셔서 말씀 전하게 되십니다마는 우리 교회에서 10여년동안 후원하고 있는 방승호 선교사님은 브라질에 가서 복음을 전하시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겨서 얼마전에는 250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예배당을 지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허드슨 테일러는 전도는 열심히 했는데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영국 선교 본부에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선교 본부 총무한테서 온 것인데 그 내용을 보니 선교비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면서 여러 선교지 가운데 성적이 제일 안 좋은 곳부터 철수 시킬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생활비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마는 이제는 본국으로 돌아 오시기 바랍니다."하는 말하자면 소환장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허드슨 테일러는 민망해졌습니다. 머나먼 곳에 선교하러 왔는데 선교비가 없어서 돌아오라고 하는데 돌아가자니 민망하고, 계속 있자니 앞일이 캄캄했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셔서 여기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는데 열매가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고 돌아오라하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구약 성경중에 히브리어 두 말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서에 나오는 '에벤에셀' 이란 말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말로 '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말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하는 뜻입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에 성회로 모이라고 했을 때 이 정보를 입수한 불레셋군이 갑자기 습격하는 바람에 당황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나가 싸울터이니 사무엘더러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간절히 기도하고 백성들은 열심히 싸워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셋군대를 물리치고 그 곳을 에벤에셀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100살 나서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번제물로 드리려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사 드릴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제사 드릴 양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했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얼른 대답한다는 말이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과연 산꼭대기에 하나님께서 양을 준배해 주셨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까지 나를 도와주셨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실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남아서 계속 복음을 전파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옷도 중국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먹는것도 중국 사람들과 함께 먹고, 중국 사람들과 같이 자고, 중국 사람과 같이 살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릉 굶기지 않았습니다. 쓸것도 필요한대로 주셨습니다. 외롭게 혼자 전도하지 않고 중국인 동역자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결국 중국인 내지 선교회라는 단체가 구성이되고 이것이 허드슨 테일러의 신앙에 의지한 헤이드미션이라는 전도운동이 된것입니다.
여러분,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눈을 들어 위를, 주님을 바라보야야 합니다.
아직도 성경 다음으로 많이 보급되는 책이 '천로역정'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이 쓰여진 동기를 기억하시지요? 영국의 청교도 운동을 영국의 성공회에서 핍박했습니다. 한 청교도 청년이 성공회의 허락 없이 전도한다고 붙잡혀서 12년 동안이나 감방생활을 했습니다. 젊은이가 전도하다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으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 John Bunyan은 그 가운데서 은혜를 받아서 Pilhrim's Progress 라는 책을 써서 그가 12년 동안 다니며 전도하는 것 보다 명 배의 많은 생명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슬픈 일을 당합니다. 하늘같이 믿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천사같던 어머니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십니다. 주 안에서 한 몸이 되었던 아내가 남편이 먼저 갑니다.
여러분, 이렇게 큰 슬픔의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눈을 들어 위를 바라 보세요. 주님을 바라보세요.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세요. 우리로부터 반드시 위로가 내려옵니다. 새로운 소망이 우리에게 내려옵니다. 새 능력이 우리에게 입합니다. 새로이 갈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길을 다 걸어가면 마지막에 죽음의 막다른 골목에 당도합니다. 이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때에 어떻게 하시려 하십니까?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젊은 집사 스데반이 교회를 봉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다가 유대인의 큰 핍박을 받고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스데반이 어떻게 했습니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보좌가 보였고, 보좌 우편에서 예수님이 서서 자기를 내려다 보시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로 변했다고 했습니다.
생의 막다른 골목 죽음을 당할 때 우리가 바라 볼 것은 눈을 들어 주님의 얼굴을 바라 볼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실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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