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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에 복음이 충만하게(창 11:1-9)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6.

<온 땅에 복음이 충만하게>
창11:1-9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0장은 온 땅의 족속들과 나라들이 다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나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1절에 보면 먼저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다"고 한 후, 2-5절까지는 야벳의 자손들을 열거하고 있으며, 6-20절에서는 함의 자손들을 열거하고 있고, 21-31절은 셈의 자손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벳의 자손들에 대한 언급이 끝나는 5절과 함의 자손들에 대한 언급이 끝나는 20절과 셈의 자손들에 대한 언급이 끝나는 31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5절에서는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했습니다. 20절에서는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했습니다. 31절에서는 "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했습니다. 이 세 구절은 결국 사람들이 여러 족속과 지방과 나라들로 나뉘었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다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나왔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절인 32절에서는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말함으로써 그 사실을 재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0장 5절, 20절, 31절에서 반복된 단어들인 족속, 언어, 지방, 나라 가운데 "언어"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조상을 가졌지만 자손들이 계속 대를 이어 번성하고, 사는 지역이 확산되다 보면 여러 작은 족속들과, 각 족속들이 모여 사는 지방들과, 각 지방들이 그 지역적 특성과 환경에 따라 결성하는 나라들이 생기는 것은 별 설명이 필요없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진 것에 대해서는 그 이유의 설명이 요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곧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그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본문 1절에서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한 것은 본래 하나였던 언어가 왜 여러 언어로 나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겠다는 뜻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단지 언어의 다양성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설명 이상의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성읍과 높은 탑을 건설하려 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중단시키셨습니다. 사람들이 성읍과 높은 탑을 건설하려 한 것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께서 그 건설을 중단시키신 것은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성읍과 높은 탑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었기 때문이며, 그 건설이 중단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한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던 일을 그치게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이며 또 왜 잘못된 것인지를 밝혀야 합니다. 본문 4절은 사람들이 한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그런데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 것, 탑 꼭대기를 아주 높게 세우는 것, 그래서 유명해지는 것, 그리고 흩어지지 않고 모여 사는 것 그 자체를 꼭 나쁘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네 가지 의도나 행위 중 우리는 흔히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이름을 내려 한 것"을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교만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이 해석은 충분히 설득력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벨탑을 세운 사람들이 정말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여기며 하나님에게 도전하려고 탑을 높이 세우고 있었다고 성경자체가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 본문 속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에도 사람들의 행위를 교만에다가 연결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 6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단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신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그들의 교만을 꺾으셨다든가 그들의 이름을 지우셨다든가 하는 언급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결과를 전하는 8-9절에서도 도시건설이 그쳤고 사람들은 흩어졌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바벨탑이야기가 진정 의도하는 것, 그 유일한 의미는 아닐지라도 그 일차적 의미가 무엇이겠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8-9절에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결론짓는 이 8-9절에서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는 말이 앞뒤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와 연결시켜 우리는 본문 4절에서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했듯이 바벨탑을 세운 사람들의 궁극적인 의도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는 것이었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으려 했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신 것이 이 바벨탑이야기의 일차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으려 한 것이 뭐가 그렇게 잘못된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사람들이 흩어지기를 원하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물어야 합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며 사람에게 하신 명령과 그의 복주심의 약속으로부터 찾아질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해석에 있어서 그 배경이 되는 것은 멀리는 창1:27-28의 말씀이고, 보다 가까이는 창세기 9장 1절과 7절의 말씀입니다. 먼저 창1:27-28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땅에 충만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시의 뜻이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뜻은 대홍수로 지면을 쓸어버리신 후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주신 명령 속에서도 변함없이 반복되고 재확인된 것입니다. 창9:1에 보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고, 7절에서도 보면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반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 땅을 사람들이 가득채우며 살기를 원하셨음을 이제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벨탑을 세우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뜻을 잊어버리고 그 명령에 거스르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바벨탑을 세우던 지역은 시날 평지였습니다. 이 시날 평지는 아주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동방으로 옮겨가다가 너무나 좋아 보이는 이 땅에 이르자 더 이상 흩어지지 않고 그 비옥한 땅에 강대한 나라를 세우고 크고 높은 성과 탑을 세워 위세를 떨치며 살고 싶은 욕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허락하신 온 땅을 채워야 한다는 사명을 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적인 편안함을 더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맛보게 되면 어느새 쉽게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리곤 하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지구의 구석구석에 사람이 다 살고 있고 더 이상 흩어질 곳이 없게 된 오늘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흩어지기를 원하셨다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그저 사람들이 온 땅에 편만하게 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든 말든 그저 널리 흩어져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노아 때의 홍수가 필요없었을 것입니다. 창6:5-7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뒤덮혔던 온 땅을 홍수로 씻어버리시고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아담과 하와에게 하셨던 그 명령을 다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다시 주셨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이전처럼 그저 온 땅에 흩어져 살기만 하면 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온 땅이 충만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땅에 복음이 충만하게 되는 것, 이것은 오늘날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명령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하신 것 아닙니까? 지금의 우리의 삶에 만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 흩어져 나아가야 할 사명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선교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우리도 교회를 크게 다시 지어야 하는데 밖에다 돈 쓸 수 없다" 하며 우리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한다면 우리 또한 하나의 바벨탑을 세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의 언어가 혼잡해질 것입니다. 선교는 선교 받는 교회를 세울 뿐 아니라 선교하는 교회를 더 튼튼히 세우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선교를 열심히 하는 것은 그 공동체의 식구들 간의 믿음의 언어를 통일시켜주는 가장 큰 힘입니다. 오늘은 우리 새문안교회가 창립 115주년을 맞은 주일입니다.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이 땅의 어머니교회이기에 우리 새문안교회는 더더욱 그 선교의 빚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온 땅에 복음이 충만하게 되는 일에 주저없이 앞장서는 우리 새문안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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