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 놀라운 삶의 변화! (엡 5:15-21)
웨일즈에 부흥이 일어났을 때, 제일 큰 은혜를 받은 것은 당나귀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전에는 사람들이 화가 나면 화풀이로 당나귀를 때렸답니다. 부부싸움을 해도 윗사람한테 욕을 먹어도 당나귀가 동네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고 당나귀를 때리는 일이 없어진 것입니다. 오히려 당나귀를 쓰다듬어주면서 회개하고 축복기도해 주는 일도 벌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고서 수지 맞은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라면 오늘 15절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15-16절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어떻게 행할지” 자신의 삶을 자세히 주의 깊게 점검해 보고 예수님을 정말 믿고 사는 사람인지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16절 “때가 악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를 환경 탓합니다. 아닙니다. 때를 분별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은 우리 삶을 완전히 바꾸십니다. “찬양하고” “감사하고”와 “순종하며” 살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무엇이 대단한 것인가?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무엇이 떠나갔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염려와 두려움, 욕심과 거짓, 불평과 원망, 슬픔과 낙심이 떠나간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정말 중요한 점은 이 찬송과 감사와 순종이 지켜야 할 법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항상 찬송해야 하고 감사해야 하고 모든 이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면, 이것처럼 무서운 짐은 없을 것입니다.
오랜 병을 가지고 고통당하는 이가 기뻐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요?
어린 자녀가 장애인인 부모가 기뻐하며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애를 써도 취직하지 못하는 젊은이가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을까요?
빚에 눌려 살며 자녀들을 공부시키지 못하는 부모가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을까요?
항상 기뻐 찬송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찬양과 감사와 복종이 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19절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절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절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17절을 보면 답을 얻게 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렇습니다. 쉬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볼 때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귀신들린 사람은 금방 표시가 납니다. 잠을 안자고 소리를 지르고 어두운 곳에 있거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고 이상한 힘이 생깁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아십니까? 분명한 표시가 납니다. 악한 귀신은 우리를 파멸시키고, 성령님은 우리를 찬송하게 하고 감사하게 하고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우리 여기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흔히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받는 것이고 안주시니 못 받는 것인데, 성령의 충만을 받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 하기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 충만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성령 충만한 사람과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이 나뉘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성령 충만을 술 취하는 것과 비교하였는데,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 만듭니다. 기분도 바꾸고 행동도 바꾸고 결국 방탕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할 수 있어도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을 취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24시간 술 창고에서 살아도 술취지 않습니다.
성령의 충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삶을 찬송과 감사와 순종의 삶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을 모셔들이고 순종해야지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모셔들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리 성령 충만한 사람들과 함께 있고 성령충만한 교회에 있어도 성령님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께 사로잡혀 살 마음이 준비되었습니까?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누구나 이 사실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뿐 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오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누구나 찬송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지난 수요일 정계홍권사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정계홍권사님은 22년 동안 중증 장애인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나 장례식은 너무나 은혜충만 감사충만한 장례식이었습니다, 22년간 중증 장애인으로 살았는데, 감사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침에 기도 중에 정계홍권사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며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했나요?”물어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서 찬송할 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정계홍권사님 가정은 우리 교회에서 가장 천국같은 가정을 이루고 사셨습니다.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천국 들어가는 길에서 감사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많이 가진 사람이 감사하는 것을 잘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다음에 감사하더라구요. 감사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지난 목회자 기도 모임에서 박온순목사님께서 간증하셨습니다. 지하철 전도를 나가기 전 아침에 기도하는데, 주님이 갑자기‘오늘 전도하다가 나 때문에 뺨을 맞을지 모른다.’하시더랍니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부담되는 말씀입니까? 그런데 그 목사님은 너무 감격하여 울었다고 했습니다, 지난 30년 세월 노방 전도자로 살면서 한번도 빰을 맞아 본적이 없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뺨 맞는 일을 허락하시다니 너무 감사하더랍니다. 어떻게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자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날 격한 반응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잘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여 변화된 삶의 가장 놀라운 것은 “복종” 입니다.
“찬송”과 “감사”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믿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될 수 있다면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종”은 다릅니다. 정말 인기없는 메시지입니다. 누구나 명령하며 살고 싶지, 복종하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고 나면 복종하게 됩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종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복종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높아지는 것이 싫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기 때문입니다. 천한 곳 멸시받는 곳이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되는 기쁨 때문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종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지도자를 다른 사람의‘신발털이개’가 되라고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고 말했는데 사도 바울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서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말했습니다. 그런 자신을 예수님은 받아주시고 사도로 쓰셨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이 자신을 미워하고 핍박해도 그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께 더 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고 사랑하고 섬긴다면 배은망덕한 사람들 때문에 가슴이 멍들고 찢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사람들을 사랑하였다면 아무리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경험하게 될지라도 여전히 그들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은 생각도 마음도 삶도 다릅니다.
지난 주일 저녁부터 장로 부부 수련회를 했습니다.
교회에 예배하는 교인이 늘어나면서 대책이 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주일 출석교인이 늘어나는 것은 분명히 흥분되는 일입니다. 학생이 성적이 높아지고 사업이 잘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부흥 부흥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늘어나는 교인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주차장, 교육관, 사무실, 사택들을 마련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한 마음을 갖는 것도 어려웠기에 기도원에 도착하여 저녁을 간단히 먹고, 바로 모여서 토의 없이 무조건 한 시간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목사와 장로 부부가 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일부터 하자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는 교회 성장을 바라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새 교인이 늘어나는 것을 좋아만 할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기쁨의 목적이 바뀌고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목사와 장로 부부, 온 교인의 목적과 기쁨과 자랑이 교인 수가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어야 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교회 성장이 목적이 되면 하나님의 지시를 정확하게 분별할 수 없고 반드시 타락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날 저와 장로 부부 모두는 결단했습니다. 우리의 기쁨, 목적, 교회 성장이 아니다. 예수님을 더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마음에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끄시는 방법을 하나 하나 보게 될 것입니다.
부흥, 성공, 명성이 왜 싫습니까? 싫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더 좋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난 금요 성령집회 때, 이지선 자매의 특별간증이 있었습니다. 사고가 있은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큰 은혜가 있었던 간증집회 후 한 교우가 게시판에 소감을 올렸습니다.“너무나 담담하게 조용하게 나누는 그 모습에서 역경을 이겨낸 승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것 보다도 순결한 아름다움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으며 그녀의 삶이야말로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주님의 선한 청지기였습니다.”이 자리에는 악몽과도 같았던 그 때 함께 하셨고 기도하셨던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10년 전, 충격과 비탄 속에 사로잡혔던 그 때, 오늘 이지선 자매가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살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의사들 조차 사람들 앞에 나설 생각도 말라고 하였던 이지선 자매를 누가 이렇게 변화시킨 것입니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그 순간, 계속하여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다시 한번 예수님께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예수님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삶의 목적이 되는 삶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삶의 이유요 목적이 된 사람은 찬송과 감사와 순종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이고 우리도 살고 모든 이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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