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보는 사람들
고린도전서 10:6-11
모 일간지 사설 가운데 월드컵 4강 진출과 히딩크 지도력을 거울로 삼자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히딩크의 용병술과 지도력을 교훈으로 삼자는 뜻입니다.
11절을 보면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을 거울삼아 너희는 그런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이 본문의 골자이며 교훈인 것입니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Sabine Melchior Bonnet)가 쓴 「거울의 역사」(Historicau Miroir)라는 책을 보면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기위해 고여있는 물을 들여다보거나 돌을 갈아서 자기 얼굴을 비춰보았다는 것입니다. 2천년전 가야시대 사람들은 청동으로 거울을 만들어 썼고, 13세기 후반 유럽사람들은 평판유리 뒷면에 금속판을 대어 거울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거울은 남녀노소의 필수품입니다. 여자들 핸드백 속에 반드시 들어있는 필수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울, 컴팩트, 루즈, 티슈 등입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고인물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이래 최신 거울에 이르기까지 거울의 용도는 자기 모습을 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망원경이나 안경은 남을 보고 다른 것을 보기 위해 필요하지만 거울은 자기 모습을 보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것들을 보고 다른 사람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너를 보고 너를 시험하고 너를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면 역사를 공부하게 됩니다. 세계역사도 공부하고 한국역사도 공부합니다. 왜 역사를 공부합니까? 그것은 지나간 역사를 되풀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나간 역사를 거울삼아 보다 나은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거울삼아 드려다 보면서 두 가지를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1. 우상숭배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7절을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우상숭배를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창조주로 믿는 유일신 신앙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은 한 남편 한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이 남자 저 남자, 이 여자 저 여자를 편력하는 간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입니다. 8절을 보면 하루 동안 2만 3천명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1-6을 보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 머물러 있는 동안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이것이 우리의 신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신이 아니다."라면서 떠들고 춤추며 황금송아지를 신으로 섬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황금으로 우상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황금은 물량가치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금을 많이 보유한 나라는 부자나라였고, 금 보유량이 적으면 가난한 나라 였습니다. 종이로 만든 화폐는 물에 젖고 불에 타지만 황금은 그럴 일이 없기 때문에 부의 척도로서 그 가치가 높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당시 황금을 모아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애굽사람들에게 소는 풍년을 상징하는 짐승으로 그들이 섬기는 우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애굽사람들이 섬기는 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황금으로 풍요를 상징하는 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우리의 신이라며 숭배했던 것입니다. 즉 돈과 풍요를 우상으로 섬긴 것입니다.
현대인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돈이라면 의리도 버리고, 우정도 버리고, 부모도 죽이고, 신앙도 내팽개치고, 예수도 버립니다. 돈 생기는 일이라면 주일도 상관없습니다. 돈버는 일이라면 양심도 신앙도 버립니다. 바로 그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월드컵 기간동안 한국이 세계에 내놓은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선수들의 강인한 투지와 기량, 시민들의 협동, 차질 없는 진행, 철저한 보안 등 많았습니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응원입니다.
거리로 나온 사람만 800만, 안방에서 식당에서, 해외에서, 교회에서 치밀하고 조직적이고 열정적 응원에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그런데 신문마다 TV나 방송마다 4천만을 붉은악마라느니 붉은전사라느니 떠들어댔습니다.
저도 운동장에도 갔었고, 길거리에도 나가 응원을 했습니다. 한국선수가 공을 몰고 독일 문전으로 갈 때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휘젓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며 소리치고 박수를 쳤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4천만 모두가 감독이고, 트레이너였고,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지 붉은악마가 아닙니다. 왜 내가 붉은악마 입니까? 한국기독교인 1,200만 명은 하나님의 백성이지 붉은악마가 아닙니다. 이점 분명히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 4천만이 악마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진짜 악마대장일 것입니다. 대한민국 4천만 국민이 붉은사상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북한의 김정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응원과 신앙, 응원과 주체성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붉은색 유니폼은 어떻게 생각하는냐"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본래 기독교에서 붉은 색깔은 보혈, 구속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흰 옷 입었다고 속도 흰 것은 아닙니다. 검은색 입었다고 속도 검은 것은 아닙니다. 붉은 티셔츠를 입었다고 속도 붉게 되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는 악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마라는 이름을 걸면 악마와 친하고 악마를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사람이든, 그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섬기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2. 주를 시험하지 않아야 합니다.
9절을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21:4-9을 보면 모세의 인도로 광야길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평원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날씨는 뜨겁고 먹고 마실 것은 없는데다 몸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자연히 불평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냈느냐?" "먹을 것이 없다. 마실 물이 없다."라며 모세를 향해 원망과 불평을 터트렸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14:27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고 했습니다. 모세를 향해 터뜨렸던 원망을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동일시하였다는 점을 주목해야합니다.
출애굽기 17: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다는 이유로 모세에게 대들고 다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와 다툰 사건을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다툰 그곳을 「맛사」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시험하다`라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약속하셨습니다. "애굽에 살고 있는 너희를 내가 인도하여 가나안땅으로 인도하겠다."고, 그리고 "나는 스스로 있는자 하나님이다. 나는 내 이름을 걸고 이 약속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그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계신가 안 계신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따지고 저울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경가 「호지」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믿음과 인내를 훈련시키고 강하게 하기 위해 시험하신다. 그러나 사단은 범죄에 빠뜨리기 위해 시험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않됩니다. 마태복음 4:7을 보면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시험합니까?
첫째,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신가, 계신다면 어디 계신가, 꼭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가, 종교는 다 같은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가? 50억 인구를 하나님은 다 기억하시는가?" 등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믿고 기도한다면서 "이건 안될꺼야, 이건 어려울거야, 하나님도 이것만은 어려울거야"라는 생각이 곧 시험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험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 컨닝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몰래 훔쳐보거나 노트를 펴놓고 보는 것 등을 컨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은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거나 넘겨다 볼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시험에 빠지지도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지도 않습니다. 이런저런 문제로 시험에 빠지는 것은 내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을수록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14-29을 보면 귀신들린 아들을 주님께 데려온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주님은 그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가 소리쳤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리고 29절을 보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 "내가 믿나이다"라고 소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시험도 이기고, 고통도 이기고, 유혹도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이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며 경계가 된다"고 했고, 12절에서는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교만하지 말라,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남긴 거울을 들여다봤습니다. 하나님 대신 우상숭배 하다가 멸망당한 거울,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뱀에 물려 죽은 거울,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런 것들을 거울삼아 교만하지 말라고 주었던 거울들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울 앞에서 우리 자신을 고치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섬깁시다.
돈이든, 권력이든, 오락이든, 취미든, 사업이든, 직장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부모든, 자녀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중요시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되 시험하거나 원망하지 맙시다.
돈은 많이 벌고 회사가 잘되고 지위가 높아지고 만사가 형통하더라도 그러기 떄문에 더 겸허하게 자신을 낮춥시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야고보서 4:6 말씀을 가슴에 새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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