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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5 "사심을 나타내사“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수신자인 데로빌로에게 자신이 먼저 써 보내었던 누가복음을 상기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사도행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나타내 주고 있지요.그 핵심을 사동행전에서는 다섯가지의 동사로 기술해놓고 있습니다.
그 다섯가지 동사중 마지막 동사가 “승천하셨다”입니다.
이 승천하셨다는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누가는 본문3절을 통해서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해받으신 후에 저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사십일동안 더희에게 보이시며
누가는 이 구절을 통해서 자신이 기록했던 누가복음의 궁극적 목적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데 있다는 것을 분명이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알고 있다 시피 누가복음은 총 2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증언은 마지막장 24장에서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부활과 부활이후에 증거뿐 아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보여주셨던 부활 증거의 내용이 그 한 장에만 기록 되어있습니다.
누가복음 마지막장 24장을 누가복음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누가복음 이십 사 분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기록했던 진정한 이유는 마지막장에 있습니다.
1장에서 이십 삼장이 이십 사장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일 부활을 증언하는 이십 사장을 빼어 버리면 누가복음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24장이 없는 누가복음을 믿음의 대상으로 받아 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을 필요가 없지요.
그저 2000년전 지구 반대편에서 죽어 버린 그저 한사람의 청년의 죽음으로 끝나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믿는 이유나 교회의 존재이유도 우리가 예수님이행하심과 가르치심을 따라 살 단하나의 이유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증언으로 누가 복음의 막을 내린 것은 너무나 타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교회의 역사와 사도들의 행적을 밝혀주는 사도행전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이 얼마나 중요한 메시지인가
그런데 사도행전은 에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만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사도행전도 교회도 있을 이유가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핵심도 결론도 모든 것의 초점은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누가의 증언이 개인적이거나 주관적 신념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당신의 사심을 보여주었다고 말해줍니다.우리의 믿음의 동기가 부활하신 에수 그리스도에 있음을 분명히 확인해줍니다.
예수 부활은 이처럼 중요하기에 누가는 누가복음 24장에서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부활의 증거를 소상하게 기록했습니다.
부할하신 예수께서
엠마로 마을로 내려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한채 두려워했던 그리고 마가 다락방 숨어있던 제자들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에게 아직도 못 자국이 선명한 손과 발을 보여주심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유훈의 말씀을 남겨주심
이모든 것은 제자들에게는 누가의 표현대로 확고부동한 주님께서 보여주신 부활의 증거들 이었다
지금 고인이 된 세계적인 소설가 일본의 엔도휴사코 작품 예수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탄생이란 것이 있음
에수라는 이름은 이천 년 전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던 히브리의 이름
그리스도란 구원자를 통하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표기한 것
우리가 주님을 예수 그리스도라 부른 것은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믿기 때문
그렇다면 그의 작품이 예수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니라 예수의 탄생과 그리스도의 생애라 해야 타당하다.
엔도슈사크가 구지 탄생과 생애의 순서를 바꾼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지울 수 없는 두 가지 의문을 지니고 있었음
첫 번째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의 증언을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가 보기에는 예수님은 기적의 이야기만 제외하면 이전의 랍비나 선지지에 비해 크게 차이가 나는분이 아님
게다가 예수는 죽음 앞에서 너무나 무력
그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는 개처럼 끌려서 봄 볓이 내리 쬐이는 골고다 언덕에서 비참하게 찢어져 죽어감
그처럼 현세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던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로 온 인류의 구원자로 어떻게 받아 들여 졌는가? 그의 첫 번째 질문이었음
두번째 질문은 에수의 제자들에 관한 것
그들은 모두 비겁 겁쟁이면서 예수 배신 도망쳤던 인간 깉지 않은 인간들 이었다 그런데 그 한심한 인간들이 어떻게 예수 사후에는 도리어 예수를 위해서 목숨 마져 버렸는가?
상식적으로 살았을 때 배신자라면 죽은 후에 관계단절...인지상정
그런데 어떻게 배신했던 제자들이 죽은 후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강렬한 신앙의 소유자가될 수 있었는가?
그는 이 해답을 예수님의 부활에서 찾음
에수 부활이 아니고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었다
현세에서 무력하게 보였던 예수 사후에 그렇도록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을 배신했던 재자들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던 이유도...모두 예수의 부활로 인함
그래서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이라고 붙임
예수께서 부활을 믿는 자 에게만 예수님은 그리스도 일 수 있다는 뜻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 이후부터부활을 증언하는데 생명를 걸고했음
세상의 권세나 영광이나 부가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
댓가는 원형 극장에서 사자밥 참수형 화형 그러나 개의치 않음
그들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났다고 주님은 정말 부활했다고 부활을 외치면 죽음
그들은 진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던 것임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그들이 삼년동안 함께했던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수있었음
죽음 마저 두려워 하지 않는 그들의 예수 부활을 믿는 그 믿음위에 교회가 세워짐
예수의 부활로 인해 진정한 사도 일수가 있었음
사도행전 벽두에서부터 부활을 강조함으로 전개하는 이유가여기에 있음
그런데 희한한 것은 누가가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면서도 오늘 본문에서 부활이란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음
부활의 증언을 위해서 쓰여진 눅24장도 마찬가지
누가복음은 24장을 위해서 존재
그러나 24장에서 조차 부활이란 용어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음
누가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음
다른 복음서도 동일
우리말 개역성경 마27장53 예수의 부활등장...
우리말의 부활은 헬라어로 에게르시스...앉은 자리에서 일어 난다. 누운 자리에서 일어난다.
본래 부활의 단어와는 동떨어짐
사복음서에서 부활을 뜻하는 아나시스타스 ... 부활을 믿지 않은 사두개인들이란 말을 쓸 때 사용했고 더 이상은 쓰지 않음.
또한 요11장25..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복음서 그 어디에도 부활이란 단어를 쓴 곳은 한군데도 없음
그 이유가 무엇 이겠는가?
2000년전 헬라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부활이란 헬라어 용어에 대한 보편적 인식 때문
당시 헬라어를 사용하던 사람들 오직 두 경우만 부활을 사용
첫째 부활이란 있을 수 없다 라고 언급할 때
둘째 부활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신화나 전설속의 허황된 이야기라는 것을 사용할 때
만일 당시 부활이란 그 말을 사도들이 사용했다면 당시 헬라어를 사용했던 당시 사람들은 본래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거짓말이거나 신화로 받아들일 것이 뻔하기 때문
그러므로 부활이란 단어로 증거하지 않음
대신에 다른 식으로 표현
사흘 째 되던 새벽에 여인들 무덤 찾아갈 때 무덤이 비어있었음
두려움과 근심에 사로잡힌 여인들에게 천사가 한말을 눅24장에 이렇게 기록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살아 나셨느니라
누가는 이렇게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으로 표현
마태복음은 보다 명료
그가 여기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그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요한 20장21장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으로 표현
사도들이 사용한 죽은자...네크로스의 본래 뜻은 시체란뜻
부활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시체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기록했음
왜? 부활이란 당시 헬라어는 일반인의 보편적 인식 처엄 예수의 부활은 신화나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또는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시신이 되었다가 다시 살아 나녔다... 오해할 수 없도록 정확하게 증언하기 위함
누가 역시 사도행전 벽두에 “해받으신후에 친히.....”해를 받았다는 파스코..돌아가셔서 시신이 되었다는 뜻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가 이런 표현으로 사도행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그의 의도를 파악
예수의 부활을 하나의 상징적 추상적 개념 혹은 이론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결코 사도행전적 사람이 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시신으로 갔다가 다시 살아남을 믿는 자 만이 그 삶이 교회와 사도행전으로 엮어질 수 있다
성경의 핵심..에수께서 시신가운데 살아 나녔다는 것
기독교 핵심도 그럼
우리는 오늘도 예배드리면서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본디오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우리 역시 2000년전 누가처럼 예수부활이 상징이 아니라 시신가운데 살아 나셨음을 매 예배마다 고백
그렇다면 과연 누가(who) 입으로의 고백할 뿐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시신상태에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삶으로 증거할 수 있겠는가?
자기 역시 언젠가는 공동묘지 속에 시체로 들어누울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실체를 인식한사람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사람 안죽을 것 같은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가 어렵고 설령 맺는다 할지라도 그 관계가 깊어질 수 없다
언젠가 우리의 몸도 그날이 오면 공동묘지 속에서 썩어질 것을 통감하는 자만이 시신속에서 살아난 예수를 믿으면서 믿음을 가질수 있다
공동묘지에서 썩어 문들어질 자신의 실체를 인식한 자에게는 시신 속에서 살아나신 예수 외에 구원자가 있을수 없고 시신 속에서 살아나신 그 예수 안에서만 영원이 살 수 있음을 분명히 알기 때문
골4장13..등장하는 도시 히에라 폴리스 현재 터기 석회봉 위에 건설되었던 옛도시..
신성한 도시란 뜻이며 석회절벽 사이로 온천수가 흐르고 자연환경 신비로움 옛사람들은 그곳을 신성한 곳으로 여김
먼 곳에 있는 사람들도 죽은후에는 그곳에 묻히기를 소원
오늘날 페허임에도 불구하고 성문 밖으로 나가면 1200개의 석관들이 남아있음
그 공동묘지에 이런 비문이 있다고 함... 나 어제 너와 같았으나 너 내일 나와 같으리라
어찌 이것이 이 천년 전 로마제국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겠는가?
오늘사는 우리는 물론 미래의 인간들도 똑같을 수밖에 없다
오늘 내가 살아있다고 내일도 살았다는 보장 그 어디에 없다.
내가 죽음을 인식하지 못 한다고 해서 죽음이 피해가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죽음의 날과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시각은 시시각각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통감한자라면 무덤 속 시신가운데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의주인으로 모실 그 주님을 좇아 살수밖에 없음
로마의 기독교가 카타콤 지하 묘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의미심장
로마의 교회의 토양은 음 회질 토양
간단한 기구로 땅을 팜 ..땅속 음회질이 공기와 맞닿는 순간부터 돌처럼 굳어짐
그 과정에서 시체의 모든 썩은 물과 악취를 음해질 토양이 모두 흡수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들 장례식보다 로마사람들이 더 용이하고 위생적이었다
지하 묘소를 찾아 내려 가면 좁은 벽 좌우에 사층 오층으로 관이 안치
복도 중간 중간 좁은 공간 ...로마 초기 기독교 교인들은 그 공간에서 예배를 드림
그들의 신앙과 예배가 얼마나 역동적이었겠나
온 사방 즐비한 관을 보면서 그들은 매일 자신의 실체를 확인했을 것이다
나 어제 너와 같았으나 너 내일 나와 같으리라
자신의 실체를 확인한 그들이 온 사방에 관이 즐비한 지하 묘소 한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께 예배를 드렸으니 죽음 마져 두려워 않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님
부봫하신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의 누가의 증언 처럼 우리에게도 다시 사셨음을 친히 보여주심
당신의 이름으로 죄 가운데 건져주셨고 예수를 알게 해 주셨고 주님께 예배하게 하셨고 광성교회를 이루게 하셨음
만일 부활하시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임
이 일들이야 말로 주님의 확실한 부활의 증거
가장 큰 증거와 은혜는 우리를 이곳 광성교회로 불러 예배드리게 해주셨다는 것
이천년전 지하 묘지속의 초기 기독교인처럼 우리 역시 이 지하에서 죽은자 가운데 다시 살아난 주님을 다시 쫓으면서 예수의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로마제국을 깨끗게 하셨던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분명이 당신의 뜻을 이루리라
가만히 귀기울여 보자 나어제 너와 같았으나 너 내일 나와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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