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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정수 5장 칼빈과 베자의 예정론

by 【고동엽】 2021. 11. 29.

개혁신학의 정수 5장 칼빈과 베자의 예정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예정론은 개혁주의 신앙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초기 종교 개혁자들만이 아니라 후대 청교도의 신앙에도 매우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교리를 놓치면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주권을 부정하게 된다. 예정은 하나님의 불변하신 행동이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겸손과 경고를 주는 동시에 성도들에게 자극과 위로를 준다.

칼빈의 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사상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리고 베자와 ‘돌트 신경’을 작성하는 데 참여한 후기 정통 신학자들에게 전수되었고, 훗날 헤르만 바빙크 등을 비롯한 신칼빈주의자들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교리의 하나로 다루었으며, 칼빈과 같은 맥락에서 이 교리를 받아들였다. 칼빈의 예정론은 구원의 확신과 위로를 위하여 성도들에게 주는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본다.

베자와 후기 정통 신학자들은 예정론을, 구원론의 마지막에서 다루던 칼빈과는 달리 하나님의 작정 교리를 다루는 신론으로 옮겼다는 점이다. 베자 이후로 거의 대부분의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예정론을 중요하게 취급하면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창조, 작정, 섭리 세 가지로 나누었고, 예정을 선택과 유기로 구성된 하나님의 작정 교리의 일부로 다루었다. 예정론을 구원론에서 신론으로 옮겨 놓는 신학 체계나 신학 구조의 변화를 제시했다고 해서 오해도 받고 비판도 받고 있는 신학자가 테오도르 베자이다. 그러나 칼빈과 베자의 신학을 서로 대립적으로 설정하려는 주장은 명백한 자료에 대한 왜곡이다.

 

“예정론 도표”에 대한 오해

베자의 “예정론 도표”는 하나님의 작정과 그 시행에 있어서 시간적 차이점에 대한 해설이지 개혁신학 체계를 예정론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문서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서정과 관련된 예정론의 제시에 불과한 것이다. 베자와 퍼킨스는 하나님의 허용 범주와 우연적인 사건들과 자유의지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예정론이 ‘신학의 원리’가 되어서 개혁파 정통신학의 핵심으로 다시 변질된 것이 아니라, 일련의 신학 주제들 중에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설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베자나 퍼킨스는 단순하게 구원론적으로 이해되는 예정론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으며, 더구나 신학 체계가 이성이 아니라 계시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 개혁자들과 일치하기 때문에, 결정론적이요 연역적인 성격을 나타낸다고 비판하는 것은 근

본적으로 근대 신학자들과 일부 비판자들의 오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밀러 교수의 연구로 밝혀진 것은 베자의 “예정론 도표”는 베자 신학의 전체 개요라고 할 수 없고, 다만 당시 제롬 볼섹과의 논쟁에서 빚어진 문제들에 대한 해답의 성격을 띠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 하나님의 작정과 그 시행은 위로와 힘을 주는 근거가 된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입증한 문서인데, 이런 특수한 베자의 논문을 갖고 원래의 의도를 외면한 채 칼빈의 신학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문서의 왜곡이라는 것이다.

베자는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예정론을 도출해 낸 것이 아니다. 칼빈과 불링거를 스승으로 삼아서 개혁주의 신학을 연구한 베자는 당대에 제네바에서, 그리고 주변 도시에서 문제시되고 있던 예정론 교리를,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한 바에 따라 다시 한번 강조하였을 뿐이다.

 

칼빈의 예정론 논쟁

예정론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중요한 신앙 내용이었다. 볼섹은 중세 말기의 가톨릭 신학에서 나온 주장을 반복하면서,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누가 구원의 대상으로 들어갈 것인지 예정되었다는 주장은 비이성적이라고 보았다. 또한, 볼섹은 예정론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단독 결정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면서, 선택은 복음에 대한 순종의 반응을 나타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요, 유기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거역하는 반항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이런 인간의 반응이 있기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결정한 바에 따라 그대로 귀결되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순서로 볼 때, 하나님의 영원한 정죄가 있기 이전에 먼저 인간의 불신앙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볼섹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인간의 선택에 간섭하시는 것이 아니라 초시간적으로 개입하셨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여기서 볼섹이 실패한 것은 논리적 순서와 시간적 순서를 구분해서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영원 전의 결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판단하지 못하는 성질의 것임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둘째는, 예정된 선택과 예지적은 유기를 현재 시점으로 이해하면서, 중세 말 유명론자였던 가브리엘 비엘이나 요한 에크의 신학에 나오는 신인 협력설을 강하게 주장하였으며, 볼섹은 예정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선적으로 강조하였다.

선택된 자들과 유기된 자들에 대한 예정론을 종교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파악하였다.

 

예정론 구성의 차이

칼빈과 베자 사이의 예정론을 다루는 차이는 내용에 있지 않고, 그것을 배치하는 구성의 차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칸빈은 예정론 교리를 섭리론과 함께 묶어 선험적 교리로서 신론의 한 부분으로 다루었는데, 나중에는 구원론의 말미에 위치시킴으로서 후험적인 성격을 부각시켰다. 섭리론을 예정론으로부터 떼어 신론으로 옮긴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세 하나님의 섭리와 피조된 질서를 다루고, 그리고 인간에게 적용되는 성령의 사역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구원의 체계, 즉 구원의 확신을 언급할 무렵에 하나님의 예정을 다룸으로써 더 분명한 인과 관계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베자는 “예정론 도표”를 작성하면서 나름대로 중요성을 판단하여 이를 신론의 한 부분으로 다루었고, 그때까지 아직 칼빈의 최종판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칼빈의 최종 체계를 반영할 수는 없었다.

칼빈은 인간에 대한 정죄의 근거와 세상에 죄악이 들어오게 된 근거로서 하나님의 예정이 그 원인이라는 주장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으며, 최상의 창조물인 인간이 타락한 것을 운명에 돌리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서 비난할 수 없으며, 이는 인간의 타락을 섭리 가운데 허용하시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하였다. 더 이상 인간의 부족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풀어 보려는 쓸모없는 노력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결국 칼빈은 하나님의 작정을 차원이 다른 지식으로 취급하고, 인간의 죄악에 대한 철저한 추궁으로 결론짓는다.

베자의 예정론도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작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시행에 대한 설명이다.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서 선택과 유기의 이중 예정을 제시하고, 하나님은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인간(영광을 위해, 진노를 위해)을 창조하시기로 뜻하셨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칼빈처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그 시간적 차원에서의 시행을 나누어 설명한다. 이는 작정과 유기의 목적에 대한 것을 최종적인 유기 자체와 구분하려는 것이다.

베자의 “예정론 도표” 마지막 부분은 인간의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 기초를 둔 선택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이런 원리들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사역과 선택된 자들에 대한 적용, 즉 구원론을 설명한다. 베자는 구원의 확신을 주는 기초로서 예정론을 다루고 있으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론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작정 교리와 예정론

베자는 하나님의 작정 교리와 예정론을 다루면서, 흔히 말하는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한 최초의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주장을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즉흥적으로 어떤 계기에 맞춰서 일어나거나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이 엄청나게 상반된 신학적 내용은 아니다.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를 열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 타락과 구원의 작정이 모두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작정이란 어떤 시기나 사건이나 계기와는 전혀 무관하다. 하나님의 작정은 나중에 그들이 타락할 것을 미리 하시는 예지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타락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며, 순수하게 그분의 속성인 선하신 즐거움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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