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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개혁신학의 광맥 7장 낮은 칼빈주의: 아미랄디즘

by 【고동엽】 2021. 11. 29.
개혁신학의 광맥 7장 낮은 칼빈주의: 아미랄디즘


이번 장에서는 돌트 신경을 벗어나서 ‘낮은’ 칼빈주의를 전체적으로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아미랄디즘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모와즈 아미로
모와즈 아미로는 소위 아미랄디즘으로 불리는 학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다. 그는 1633년부터 1664년까지 프랑스 소뮈르에 있던 개신교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그 기간 동안에 프랑스 개혁 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십 여권이 넘는 저술을 발표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칼빈을 철저히 존중하고 따랐던 칼빈주의자라고 자부하였을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높은’ 칼빈주의자들의 신학에 대해서 큰 불만을 가졌다. 그래서 어거스틴과 칼빈의 전통에 따라서 돌트 신경에 견줄 만한 가장 순수한 신학을 재조직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출발의 동기는 나름대로 순수하였다.
그는 돌트 신경에 대해서 좀더 유연하고 부드럽게 고쳐야 할 부분이 많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한 예로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되었다고 가르치던 당시 일반적인 ‘언약적 대표설’에 반대하였다.
아미로는 언약적 대표설을 변형시킨 새로운 언약설을 주장했다. 그는 세 가지 언약이 있다고 가르쳤다. 첫째는 아담과 맺은 자연언약으로, 자연 속에 계시된 율법에 순종할 것이 요청된다. 둘째는, 이스라엘과 맺은 율법의 언약인데, 쓰여진 율법에 대한 순종이 요청된다. 셋째는 은총의 언약으로, 두가지 조건이 요청된다. 그는 보편적 은혜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조건적인 부분이 있고, 특별한 은총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무조건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신학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보편 은총론 때문이었다. 은혜 언약의 보편적인 부분을 위한 기초를 제시하고자 그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고 주장했다. 준비는 보편적이지만, 그 적용은 특별하여 선택받은 자들에게 한정되었다. 이것이 칼빈과 초기 종교 개혁자들의 견해라고 아미로는 확신하였다.


가설적 보편주의
앞에서 언급한 속죄론에 이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가설적 보편주의’라는 학설이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은총론을 일컫는 말이다. 즉 모든 사람을 위한 일반적인 은총과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특수 은총이다. 이교도들이라도 복음을 듣지 않았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설을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미로는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는다고 부인하면서, 복음을 들어야 구원을 얻는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 걸을 더 나아가서 두 가지 은총론에서 두 가지 의지론을 연결시켰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조건화된 의지와 특수하게 비조건화 된 의지이다. 보편적으로 조건화된 의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건에 따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염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부분적으로는 자연 속에 계시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음 속에 충분하게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은총은 다시 객관적 은총과 주관적 은총으로 구분된다. 객관적 은총이란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어서 믿음과 회개라는 조건을 충족할 때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은총은 오직 선택받은 사람들과 구원에 이르는 자들에게만 제공되는 은총이다.
이런 두가지 이론은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견해와도 상호 일치한다. 한 작정은 믿음의 조건 하에서 하나님은 보편적인 구원을 결정하였다. ‘조건적 작정’이라는 이러한 개념은 하나님의 작정에 무슨 조건이 붙을 수 있느냐는 생각 때문에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에게는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하여 아미로는 구원을 위한 준비는 보편적이지만, 그러나 적용은 특별한 자들에게 한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알미니안의 속죄론과 똑같은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의 유효성을 과소평가하는 잘못된 주장이다. 아미랄디즘은 보편 구원을 개념적(가설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단지 그 실제 적용은 선택자들에게만 한정된다고 보았다.
그밖에 아미랄디즘을 가르친 학자로는 존 카메론, 쟌 다일리, 블론델, 뽈 떼스따르, 조쥐에 드 라 쁠라스, 끌라우드 빠종, 루이 까펠 등이 있다.


아미랄디즘에 대한 반론들
이탈리아 출신으로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사역한 프랑수아 뒤르땡은 지속적으로 아미랄디즘의 문제를 파헤쳤다. 그는 가설적 보편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엄격하게 제한 속죄를 고수하였다.
1637년 알렝송에서 국가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그는 아미로의 신학을 온건하게 비판하였다. 그 후 1675년 뒤르땡과 하이데거, 루이 게른너 등이 기초한 ‘스위스 일치 신조’에서는 아미랄디즘을 명쾌한 논리로 정죄하기도 했다.
일치신조는 명쾌하게 하나님의 작정의 순서를 논하면서 타락 후 선택설을 채택하고 있다. 특히 구원을 위한 가설적 보편 은총과 아미랄디즘이 주장하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보편적 의지라는 개념을 거부하였다. 일치신조는 철저히 체계화되어 탁월하게 작성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돌트 신경처럼 당대 제기된 특별한 문제점에 대해서만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영국의 아미랄디즘과 그 반대자들
잉글랜드 성공회 존 데이브넌트는 돌트 총회에 참가했던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그도 아미로처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충분한 속죄이지만, 오직 선택자들만을 위해서 적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미로처럼 가설적 보편 구원론에까지 과감하게 보편 속죄론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넓은 의미의 칼빈주의자들 가운데, 성공회 출신으로 매우 영향력이 컸던 제임스 어셔 감독 역시 데이브넌트와 비슷한 주장을 폈다. 이런 속죄의 이중성을 옹호하고, 좀더 보편적 속죄론으로 기울어진 또란 칼빈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 리챠드 백스터이다. 그리고 유명한 저술가 존 번연은 「유기를 주장함」에서 좀더 폭넓은 속죄론을 주장했다.
영국의 제한 속죄론자들은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대표적인 칼빈주의 신학자 존 오웬은 엄격한 제한 속죄론을 철저히 고수하고 아미로의 보편 속죄론을 가장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다른 학자들의 이중적 입장도 배격하였다. 오웬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속죄의 여지는 전혀 없다고 단호히 잘라 말했다. 그는 프랑수아 뒤르땡 같이 작정의 순서 중에서 선택이 속죄보다 앞선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오웬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구원 얻는 신앙의 본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8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제한 속죄론은 계속해서 많은 도전을 받았다. 19세기에도 그것은 계속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도 그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칼빈과 속죄의 범위
초기 종교 개혁자들은 거의 대부분 속죄의 범위에 있어서 별로 큰 논쟁을 하지 않았다. 그 시대에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주의깊이 파헤쳐야할 과제들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돌트 신경이 작성될 무렵에 크게 부각되었고, 이는 과연 칼빈의 견해가 무엇이냐에 집약되었다. 이것은 계속하여 칼빈학자들 사이에는 보편 속죄론자와 제한 속죄론자가 함께 뒤섞여 있어서, 각자 자신들을 지지하는 이론을 칼빈의 글에서 추출해 내고 있는 형편이다.
분명한 것은 칼빈이 아미로와 같은 ‘가설적 보편 속죄’를 가르친 바는 없다는 점이다. 아미로가 선택과 유기를 받아들이고, ‘높은’ 칼빈주의자들에 대해 지나치게 반응을 보인 결과이지만, 엄격한 제한 속죄 문제로 인해서 분명히 그는 칼빈보다는 훨씬 낮은 칼빈주의에 속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도 높은 칼빈주의와 낮은 칼빈주의의 대두에 대한 가장 타당한 해결책은 근대 칼빈주의자들의 중에서 찰스 하지와 쉐드,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구원론을 가르쳤던 카이퍼(R. B. Kuiper) 등이 제시한 온건한 입장이다. 이들은 모두 일반은총이 모든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유익을 준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이런 보편적인 측면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들 상당수 칼빈주의자들은 복음의 보편적인 제시를 주목하자고 말한다. 물론, 오직 속죄의 혜택들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구원과 믿음은 오직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이나 대립을 해결하는 본질적인 해결책은 성경이 과연 무엇이라고 말하느냐에 달려 있다. 진정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바로 칼빈주의 정통신학이 지향하는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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