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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정수 제 6장 언약 사상의 파노라마

by 【고동엽】 2021. 11. 29.

개혁신학의 정수 제 6장 언약 사상의 파노라마

 

언약의 중요성

 

언약 사상은 16세기 종교 개혁의 성경적 신학 연구에서 시작되어 중요한 교리로 발전하였다. 개신교인들의 교회 생활에 영향을 미친 핵심적인 항목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언약 사상’ 또는 ‘언약 신학’이다.

 

현대 신학자들의 다양한 해석들

최근 신학자들의 토론 가운데 언약 신학에 대한 평가를 보면 상당한 이견이 교차하고 있으며, 이는 주로 법적인 계약으로 잘못 해석하는 주장이 혼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교훈들만 얻는 데 그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칼 바르트의 관점에서 칼빈주의 신학사와 17세기 정통신학의 스콜라적 방법론에 대해 ‘이론적이며 사변적이다’라고 무조건 비판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학의 규범은 바르트의 저술에서 찾아지며 칼빈과 후대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연속성에대한 비판을 하였다. 이들처럼 성경을 제외하고 어떤 한 사람이나 어느 한 사상만이 진리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군부 통치적 전체주의자들의 독선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술과 같이 우매한 짓이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요소들과 비교해 볼 때 불연속성보다는 연속성이 훨씬 더 많다. 칼빈 신학은 전체적으로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이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바르트는 칼빈 신학의 핵심을 성경적 그리스도 중심 신학으로 규정하고,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예정론자들이었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는 정당한 평가라고 볼 수 없다. 칼빈의 신학에는 은총이 핵심을 이루고 있지만, 후대의 신학은 율법주의적인 언약 신학이라고 대비시키는 것도 정확한 비교가 아니다. 언약 신학에 있어서나 전체적으로 볼 때나 칼빈과 후기 정통 신학자들의 차이점은 그렇게 심각하거나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언약 비판론자들의 뿌리와 흐름

정통신학 비판의 계보는 헤페-베버-비쳐-홀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언약 사상을 정확히 해석하는 작업에서 이처럼 대립적인 이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것은 신학의 계보가 이미 다르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앙 고백적인 칼빈주의자와 신정통주의자들 사이의 대립만이 아니라, 많은 신학자들이 다양한 현대 신학 사상에 근거하여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약 사상은 사실 하나의 신학 주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주제들과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칼빈에서 윗시우스까지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칼빈의 언약 사상과 연계된 구원론

 

예정론과 행위 언약

은혜 언약의 조건으로서 믿음은 오직 칼빈에게서만 두드러지게 강조되는데, 그것은 오직 선택된 자들에게만 가능한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선택되지 못한 자들은 이 언약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칼빈의 언약 사상에는 하나님의 일방적이며 단독적인 면이 강하게 들어 지만, 동시에 조건적이며 쌍무적인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조건적인 요소들은 모두 은혜 안에 포함한다.

 

언약과 선택의 관련성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획하여 택하신 자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며, 언약의 조건적인 성격은 인간 편의 책임을 요구한다. 믿음과 순종의 행위는 둘 다 우리 자신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권능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렇게 믿고 순종할 수 있도록 자극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언약 안에서 의무들을 수행할 수 있다.

 

행위 언약적인 요소들

믿음의 반응 포함하는 인간 편의 책임과 노력을 무시하지 않았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서 칼빈은 두 가지 면을 모두 주목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나는 하나님이 은혜로 먼저 시작하신 행복의 약속과 사랑의 선언이요, 다른 면은 바른 삶을 진지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권면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받으라고 초청하시며, 그들은 믿음의 순종을 하나님 앞에 보여야 한다고 요청받는다.

 

대표 언약 개념의 함축

하나님께서 아담을 모든 인류의 머리로 지목하셨기 때문에 그의 죄는 모든 인류의 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독립된 과목으로 확장한 볼프강 무스쿨루스

 

볼프강 무스쿨루스는 언약 신학의 발전에 주목할 만한 이론과 저술을 남겼다. 첫째, 그는 신학 체계에서 언약을 독립된 과목으로 구별하였다. 둘째 그는 ‘언약’ 과 ‘증거’라는 두 개념을 더 이상 동일시하지 않았다. 셋째, 그는 성경에서 일반 언약과 특별 언약을 구별하였다.

하나님이 언약을 설정하신 이유는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처럼 영원 불변하며 견고하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맺은 일반적이요 일시적인 것이고, 특별한 언약은 선택된 자들과 믿는 자들을 포함하는 특별언약이다. 언약의 상대자 또는 동맹자들은 분명한 책임이 있기에 이 특별한 언약은 쌍무적이다.

 

우르시누스의 은혜 언약

우르시누스는 은혜 언약의 교리에 새로운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는 최초로 언약을 단순히 약속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 약속일뿐만 아니라, 이 약속의 성취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실질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고 풀이하였다. 언약에서의 화해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점을 이끌어 냈다는 점이다.

우르시누스는 은혜 언약을 둘째 언약인 자연 연약과 연결해서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자연 언약의 순수성이 유지되는 방식으로 타락한 인간을 은혜 언약에 참여시키셨다.

우르시누스의 언약 신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성령의 활동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거듭나게 하고, 언약 안에서 그들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가르쳐 주며, 성도들을 하나님의 성전이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로 빚어 낸다.

우르시누스의 가장 획기적이고 가장 탁월한 언약 교리의 새로운 강조점은, 성도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분이다. 우리는 모두 그냥 언약의 참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연합을 이룬 관계 속에 있다. 우리는 언약의 혜택을 약간 누리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며 그분과 연합되어 있다.

 

올레비아누스의 삼위일체론과 역동적 연합

독일 남부 지역에서 개혁신학의 정립에 훌륭한 공헌을 한 개스퍼 올레비안 또는 올레비아누스는 두 학교에서 칼빈주의 신학의 초석을 놓았다.

 

삼위 일체론

올레비아누스는 하나님의 본질을 바르게 토론하는 것이, 즉 삼위일체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푸는 열쇠라고 생각하였다. 삼위일체론은 단순히 이론 신학으로 끝나지 않고, 구원론적 설명을 담고 있는 언약괴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은혜 언약에 참여하는 자는 곧 삼위일체와 교통하게 되는 것이다.

 

은혜언약

언약 사상의 핵심은 언약의 본질과 시행을 구분해서 생각하는데 있다.

인간의 최대 행복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연합하는 데 있다는 말은 은혜 연약의 본질을 바르게 지적한 말이다. 언약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라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구원 의도를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올레비아누스는 은혜 언약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쌍무적인 다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단순한 화해의 약속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복종 맹세가 함께하여 쌍방이 모두 참여하는 것이다. 쌍무적인 참여로서의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핵심 주제이다.

올레비아누스는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 양쪽이 언약에서 서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었으며,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이자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였다. 삼위일체가 서로 연합하듯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서로 연합하듯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연합도 긴밀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신비로운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다. 그리고 그 연합의 끈은 성령이다. 결국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은 삼위일체 전체와 교통하는 일이다.

언약의 첫째 기초는 영원한 대세자상으로 사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를 획득하셨다. 은혜 언약의 둘째 기초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에 기초하여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 교리보다도 은혜 언약의 더 깊은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이다.

 

잔키우스의 기독론적 새 언약

잔키우스는 이탈리아 출신의 난민이며 스위스에서 활동한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성경 해석학과 교의학을 발전시킨 매우 걸출한 인물이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편재설의 오류

잔키우스는 기독론 중심적으로 신학을 재구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성경 해석을 하려고 했고, 그리스도에게 합당한 위치를 부여하려는 중심을 갖고 있었다. 잔키우스의 기독록은 칼빈의 기독론과 거의 차이가 없다. 그리고 성만찬에 대한 설명에서도 칼빈의 신학과 일치하고 있다.

칼빈의 기독론과 성만찬론의 핵심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현존 면에서 볼 때, 하늘에 머물러 계신다고 하였다.

잔키우스는 루터파에서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육체 또는 인성의 편재설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리스도의 한 본성은 그분의 전인격을 대변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다른 본성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무소부재하시는 신성의 특성을 인성헤다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다.

 

단순한 기념식의 오류

성례의 기능과 본질은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그리스도와의 물질적인 관련성을 맺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억하면서 물질적인 것에서 초월하여 올라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잔키우스의 성만찬은 칼빈의 성만찬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칼빈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우리 영혼이 하늘 나라로 올라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먹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만찬의 목적은 생명력이 없는 물체에 우리를 결합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게 결합시키려는 것이다.

 

언약의 영속성과 구원의 보장

잔키우스에 대한 연구에 진력한 파르팅 박사는, 잔키우스가 그리스도와 그의 선택된 자들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서부터 찾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래서 아담, 아브라함, 모세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두고 전체 기독교 신자들을 포함하는 공동체 언약을 맺었다고 이해했다는 것이다.

언약의 핵심은 두 가지 약속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 조건을 성취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 자신이다. 언약 신학은 구원론의 핵심, 즉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얻으며 성들을 끝까지 지켜 주시는 교리를 확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한다.

성도들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이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인한 역사이다. 새 언약의 확실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행되는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다.

영원한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연합으로 인하여 선택된 자들은 확신을 얻는다. 옛 언약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성령의 부어 주심을 통한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내적인 순수함이 주어지고 유지된다. 성령의 역할은 새 언약이 옛 언약과 같은 방식으로 결코 파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하는 일이다.

 

헤르만 윗시우스의 행위 언약과 언약의 통일성

 

헤르만 윗시우스는 언약 신학에 뛰어난 유럽 대륙의 정통 신학자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존경을 받았던 교육자이며 저술가이다.

윗시우스는 언약이란 개념을 언어적인 탐구와 주석적인 논의를 통해서 설명하되, 퍼킨스처럼 신학이 ‘축복된 삶의 학문’이라는 폭넓은 관점에서 생각하였다. 언약이란 궁극적 축복을 얻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쌍방간의 일치라고 그는 보았다. 그러나 그는 언약이란 근본적으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최상급 통치에 기초를 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윗시우스의 언약 사상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에 의해서 시작된 면과 인간의 협력적인 책임 이행을 강조하는 쌍무적 언약을 상호 대립적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모든 언약은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시작한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편무적이며 일방적이다. 동시에 이들 언약은 쌍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인간 쪽에서도 반드시 맡은 책임을 감당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윗시우스는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에 서서 은혜와 선택을 서로 대립적 관계로 보지 않았다.

‘타락 전 언약’은 여러 가지 관점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는 ‘자연 언약’ ‘창조 언약’ 그리고 ‘율법 언약’ ‘행위 언약’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데, 그 내용은 자연적인 법이 이미 타락 이전에 조건적으로 인간에게 맡겨졌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타락 이전에 맺은 언약은 처음부터 은혜를 떠난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언약적 대표로서 이해되는 기독론과 구원론이 함께 관련되어 있는 교리이다. 아담은 행위 언약을 지켜야 하는 인류의 대표로서 행동하고 있었고 소망이 없었으나, 그리스도는 은혜 언약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드러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요구하신 것은 율법주의가 아니었다. 율법을 요구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윗시우스는 아담이 처음 창조되어서 살던 상황 즉 아담의 이해력이 자연의 고찰에 대해 전적으로 의존하는 아주 순수하고 중립적인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아무 조건이나 율법이 주어져 있지 않았을 때에도, 즉 우리 인류의 첫 조상이 창조의 상태에 있었을 때에도 “창조주를 떠나서 독립적인 객체로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엇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을 보전하시고 섭리 가운데 지켜 보호하신다. 따라서 개혁주의 행위 언약은 오직 은총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윗시우스의 행위 언약에 대한 강조, 즉 인간에게 요구된 율법 준수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우리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율법주의로 빠져 버린 것이 아니다.

 

 

맺는 말 : 정통신학의 재발견

 

개혁 신학자들은 신약과 구약, 두 언약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성례가 지닌 의미를 언약적 맥락에서 옹호하는 공통성이 있었다. 구속 역사는 ‘율법과 은혜’라는 두 용어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창조된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법을 거역함으로써 인간은 더 이상 율법의 기준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그 율법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믿는 자를 자유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만 은혜를 값 없이 선물로 받는다. 하나의 동일한 언약 중에서 값 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은 다양하게 사용된 율법의 현재성으로 지금도 하나님의 본진과 성품을 널리 드러내고 있다. 언약 신학의 핵심 요지는 구원의 무조건적 성격과 견인의 교리를 밝히는 것이다. 행위 언약은 은혜 언약을 미리 전제하고 주어졌으며, 그것은 구속 언약에 기초하여 나온 것이기에 연속성과 영원성을 갖고 있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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