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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하나님2(창세기 17 : 1 ~ 8)
아브람의 구십 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사도신경의 원문은 '내가 믿는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리네 문맥으로는 목적어가 앞에 와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하지만 원문에는 믿는다는 고백이 먼저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신앙고백을 성경적으로 간략하게 요약해놓은 것이 사도신경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고 고백하는 바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입니다. 이 고백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예배에서나 공통된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맨 먼저 공부한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귀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라는 말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헬라사람들이 철학적 신화적 표현을 즐겨 쓰는 것에 비하여 히브리사람들은 늘 비유적 상징적 표현을 즐겨 씁니다. 이는 성경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진리의 태반이 상징적 용어를 구사하여 설명되고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말도 역시 상징적인 용어입니다. '성령'은 본디 '바람'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아들'이라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이 역시 가정적(家庭的)인 느낌을 담은 상징적 표현인 것입니다. 이렇듯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三位)부터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함으로 사도신경을 시작합니다. 이 가운데서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그 부성(父性)과 공의로우신 사랑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그에 이어서 이 시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총괄하시며,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압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라고 고백하는 우리들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라는 것을 믿는 사람답습니까?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입으로는 곧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툭하면 걱정을 하고 염려를 하고 불안해하고 절망하기 일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면서 어찌 그다지도 걱정이 많은 것입니까? 이는 사도신경에 어긋납니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고백을 정면으로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신앙고백 합니다. 이 고백이 입으로만이 아닌 참 고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의미를 분명히 알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의 좌표를 확고히 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전능'의 개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크게는 무변광대(無邊廣大)의 우주에서부터 작게는 하잘것없는 한낱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주관하고 계십니다. 선(善)도 악(惡)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선한 것만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줄로 알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악한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악을 주관하시는 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선과 악이 대립하는 틈바구니에 존재하고 갈등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악도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보십시오. 악을 떠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결히 살아가는 욥을 보고 사단이 시험을 하려듭니다. 사단은 하나님께 허락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라는 단서를 붙여 허락하십니다. 이리하여 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극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욥의 고통은 사단의 의도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으로 초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사단의 못된 짓거리도 주관하십니다. 우리의 눈에는 마귀 사단만이 보입니다.
그 이면에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단이 욥을 괴롭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조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인지, 우리는 미처 다 이해하지 못하고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용케 믿음이 좋아진 때에는 이해가 됩니다. 어쩌다 믿음이 떨어졌을 때에는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결코 독단적으로 결론을 내릴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믿음이 어느 만큼의 수준에 이르렀는가, 이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저 엄청난 고난의 이야기 욥기는 이 점을 일깨워주는 성경입니다.
여러분은 크리스찬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악한 일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쓰임 받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믿을 수 있다면 당신의 신앙은 바람직한 수준에 닿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뭘 하고 계시기에 이 모양이란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저렇듯 악한 것까지도 용납하신 단말인가?'-내 신앙이 땅에 떨어졌을 때에는 이같은 의문이 고개를 쳐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됩니다. 악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천사는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영광을 돌리고, 마귀는 간접적으로 영광을 돌린다"-아우구스티누스의 말입니다. 스스로는 멸망하여 지옥에 떨어지면서도 믿는 자로 공로를 세우게 하는 것이 마귀 사단입니다. 마귀 그 딴에는 제 뜻대로 믿는 자를 괴롭히는 것 같지만, 믿는 자들은 그로 인한 고통을 통하여 더욱 굳건하고 온전한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허다한 역경과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을 우리는 연면(連綿)한 역사 안에서 시간시간 체험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합리적인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불합리한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전쟁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평화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리고, 좀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를 다스리자고 그 일에 선한 자를 쓰시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악한 자를 결정적으로 다스리고자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보다 더 악한 자를 쓰시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 속에 있는 악을 뿌리뽑고자 하실 때에도 악한 자를 쓰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엄연하게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자 그를 다스리시고자 이방인의 악한 왕 느부갓네살을 당신의 막대기로 쓰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칠십여 성상이나 바벨론 포수(捕囚) 생활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무릇 인간사 모든 것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에는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자리에 기념관이 하나 서 있습니다. 폭탄이 떨어지기 전에는 성당이 서 있던 자리입니다.
물론 성당의 자취는 간데온데없습니다. 그러나 그 성당에 비치되어 있었던 요한 조상(彫像) 한 구(具)와 흠집 하나 안생긴 노란 종(鍾)이 하나-이것들이 박물관에 옮겨져 지금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자폭탄의 위력에는 돌이고 쇠붙이고 할 것 없이 남아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상(彫像)과 종이 멀쩡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니요? 미상불 박물관에서는 그것들 밑에 글을 써 붙여놓았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이라고요. 그러나 천만에요. 결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40만의 생명이 눈을 뜬 채 사라지고, 모든 동식무생물(動植無生物)이 처참하게 녹아 없어지는 그 아비규환의 지옥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는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박물관의 그 종은 이 사실을 웅변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하거니와 무릇 성결된 생활은 모순된 일이건 부조리한 일이건, 합리적이건 불합리하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전능'의 개념 그 두 번째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그 뜻대로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폭군적인 '가능'이 아닙니다. 힘을 믿고 마음먹은 대로 밀어붙이고 짓누르고 짓밟고 때려 부술 수 있다는 차원의 '가능'이 아닙니다. 모든 것 속에서 당신의 계획하신 바를 가장 선하게 온전히 이루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실패란 결코 없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우연(偶然)'이라는 말을 쓰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기적'이라는 말도 곧잘 씁니다. 걸핏하면 기적이니 뭐니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기적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이요 당연지사(當沿之事)인 것입니다. 전지전능치 못한 우리 사람의 눈에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전능의 하나님께 인데 기상천외가 어찌 있겠습니까? 사람이 보니까 불가사의하고 비합리적인 일이지 하나님께는 예사롭고 합리적인 일인 것입니다.
흔히 기적은 초자연적이고 초과학적인 현상이라고 말하는 젊은이들에게 저는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그것이 지극히도 과학적인 현상이었음을 알 때가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지식이 미치지 못해서 이해를 하지 못할 따름이다."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에 엄연히 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던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과 민수기 11장에 나타나는 메추라기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신 광야에서 메추라기가 진(陣)에 덮이도록 날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으로 배를 채웠다는 이야기-도대체 그 황막한 광야에 무슨 메추라기가 있어서, 또 그리도 많아서, 그 많은 사람들이 구워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인지, 사람의 상식 가지고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건 아무래도 미심쩍은 이야기다-성경을 읽으면서 누구 할 것 없이 이렇게들 회의를 품어왔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성경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눈앞에서, 바로 오늘의 싯점에서 버젓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1967년의 이른바 '6일 전쟁' 때의 일입니다. 상금(尙今)도 아랍측에서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문제의 땅 시나이 반도-사람이 살지 못하는 이 땅에 이스라엘 군대가 진주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초저녁 녘이었습니다. 난데없이 엄청나게 많은 메추라기가 사막 위에 떨어져 내리는데 마치 어지럽게 우박이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군인들은 모래 위에 새까맣게 나뒹구는 메추라기들을 부지런히 주워 다 실컷 구워먹었습니다. 이를 기이한 현상이라 여긴 전문가들이 메추라기의 생태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쪽의 메추라기들은 마치 우리나라의 제비가 철 따라 무리 지어 왔다가 또 철 따라 무리 지어 강남으로 날아가듯이, 그렇게 무리 지어 몰려다니다가 힘이 진하게 되면 저녁녘에 땅위로 툭툭 떨어지는데,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에 힘을 다시 찾으면 일어나 붕 날아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성경이 말씀한 그 기적 앞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으니 사람이란 실로 강퍅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내 좁은 지각의 범위에서 이치에 맞아야만 믿지, 그렇지 않고는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어디 메추라기 기적만이겠습니까?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애굽 땅에 내린 10대 재앙 가운데 메뚜기 재앙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도 쉽게 믿으려들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메뚜기가 그렇게도 많았기에 그 떼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산천초목이며 짐승이며 할 것 없이 마치 탱크가 짓밟고 지나간 자취와도 같이 초토화하고 말았단 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같은 장면은 펄벅의 소설「대지」에도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지만, 성경에 보는 그 메뚜기 재앙도 언젠가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실제로 그 같은 메뚜기 재앙이 있고 나서야 확실하게 믿게 될 만큼 우둔하고 미련한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대로 믿어둘 것입니다. 구태여 우리의 얕은 지혜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해보려고 억지를 부릴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믿어두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를테면 노아의 방주가 현대 고고학의 발달로 흔적을 드러냈듯이, 우리가 기적이라고 기이하게 여기고 의심을 가지고 하는 일들이다 현실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성경적 진리의 참됨을 추호라도 회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 앞에 '기적'이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데에 절대로 양보가 없으십니다. 과부족이 없으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때로 하나님의 뜻이 묵살되는 것도 같고 손해를 보는 것도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어김없이 다 하십니다. 데려갈 사람 다 데려가십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 병들고 건강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현대는 의학이 발달하여 꽤나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어 사람들은 어떻게든 좀더 오래 살아보려고 갖은 애를 다 씁니다마는 그렇게 안달할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암'이라는 병은 어떻게 해야 정복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암이라는 병을 있게 하셨을까 하고 원망하는 소리들을 합니다마는 저는 이런 사람들보고 충고합니다. '암'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데려가시는 방법의 하나이니 그대로 내버려두라, 왜들 그리도 안달복달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의학이라고 하는 것은 일시의 불편을 조금 덜 자는 것일 뿐, 결코 생명을 주장(主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오래 산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노후에 양로원에 수용되어 죽지 못해 사는 노인들이나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이란 적당한 때에 가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못되지만 가능하면 정신 맑을 때에 불러 주십사 하는 것도 기도할 제목의 하나입니다. "하나님, 합당한 때에 나를 부르소서." 이런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래저래 남 거북하게 만드는 신세가 되고 망령이나 부리고 하면서 오래 사는 것을 그 누가 복이라 하겠습니까? 그런가하면 때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죽음도 있음을 흔히 목격합니다. 새파랗게 건강한 젊은이가 교통사고로 죽는가 하면 길가다 벼락을 맞아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고를 막으실 수 없어서 발생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경우에도 하나님이 부르셔서 갔다고, 하나님의 뜻에는 모든 가능성이 다 들어 있다고, 하나님은 전능 하시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전능'이란 하나님의 자유를 일컬음입니다. 초월적 능력을 일컬음입니다. 사람은 마음과 뜻이 많아도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적습니다.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게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뜻과 능력이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뜻의 자유성(自由性)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실 때에 못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시고자 하시는 자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이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무한한 자유-이것이 '전능'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갑니다(막 5:22). 야이로가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이에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가실 때에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달려오면서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선생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야이로는 적이 난처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주춤거리는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 5 : 36)." 그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야이로의 딸은 죽음에서 살아납니다. 보십시오.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고 못났습니까? 병든 자가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에는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를 쓰다가도 일단 숨이 넘어가고 나면 할 수 없다 하고 병풍 치고 맙니다. 이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한계를 초월하여 계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당신의 뜻을 자유로이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능은 '사랑'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과 사랑-이것을 믿는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어도 능력이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아파서 신음합니다. 열이 40도를 오르내리고 숨 가빠합니다. 이를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대신 죽고 싶을 만큼 사랑은 있는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사랑입니다. 감상에 그치는 사랑입니다. 능력 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자식에게 학비를 대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랑, 배고파 울부짖는 자식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사랑-이렇듯 능력 없는 사랑이 우리 인간들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주실 수 있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사랑에는 지혜가 없기 쉽습니다. 이를테면 사랑한답시고 자식을 더 괴롭히거나 과잉보호로 자식을 버려놓기도 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상대방을 어떤 형태로든 속박합니다. 이쪽에서는 사랑한다고 하는데 저쪽에서는 사람을 왜 그리 괴롭히느냐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사랑입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마음뿐일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능력과 지혜를 동반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극히 부분적인 것이어서 내가 얻는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는 손해 되는 것이 있으며, 내가 사랑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미운 것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하십니다. 무한하십니다. 여기에 가장 귀중한 문제가 깃들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능력과 지혜를 동반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온전하게 계시된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의 계시입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4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온전하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된 것입니다. 폭군적인 능력이 아니요 위협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구속(救贖)의 능력입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합니다. 이 둘을 다 얻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볼 때에는 십자가가 이 두 가지를 다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결정(結晶)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전능을 웅변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것은 곧 구원론적 전능입니다.
여러분, 기적이 무엇입니까? 기적치고 가장 큰 기적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상 가장 엄청나고 위대한 기적이라면 베주비오 화산이 폭발한 것이나 원자탄이나 사람이 달나라 갔다왔다는 따위의 일이 아닙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적은 사울이 바울된 일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사도 바울 됨으로써 인류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폭군적 기적을 기적이라고 보기 쉽습니다. 뒤집어엎어진다던가 철저하게 박살이 난다던가 하는 따위의 파괴적 변화-이런 것은 참 기적이 아닙니다. 한 생명이 살아나는 것이야말로 참 기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다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가 가진 세계관, 그 좁은 문화권 안에 머리를 틀어박은 채 거기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느냐?'-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하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리석어서 내 소견에 할 수 있어 보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 같으니까 기도를 하지만, 네 소견에 아무래도 될 일이 아닐 것 같아 보이면 하나님께서도 못하실 것으로 여겨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고 포기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궁극, 인간이 부닥치는 막다른 데서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아브라함 99세 때에 나타나셔서 주신 말씀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자답게 살렷다, 왜 된다 안 된다 하느냐고 말씀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부터 25년여 전에 아브라함을 보고 아들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아내 사라는 이미 생산을 할 수 없는 할머니였습니다. 의학 상식으로는 아들이 있을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그를 보고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십니다. 아브라함도 믿지 못하고 사라도 어이없다는 듯 픽 웃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믿지 못하느냐'하고 나무라십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냐? 내가 한다면 하는 줄 알 것이지 왜 그리 휘청거린단 말이냐. 네 아내가 단산했다는 것과 내가 아들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흔들리지 말고 굳게 믿으라 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 아브라함이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땅을 흉년 좀 들었다 해서 버리고 애굽 땅에 간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셨다고 했으면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그 땅에서 버틸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아브라함은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서 못 본 체하셨다면 아내를 빼앗길 뻔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왜 못 믿고 우왕좌왕하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으면 내 생각대로 된다 안 된다 판단하여 왔다 갔다 할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믿고 따르면 될 것이 아니냐 하심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을 믿고, 그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믿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이미 겪은 과거는 믿지만 아직 보지 못한 미래에 대해서는 믿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약점입니다. 앞으로의 일은 두고봐야 알겠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하나님의 역사였던 게 분명하고, 앞으로 전개될 일들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편에서 역사 하실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역사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이요 고백입니다. 비록 내가 처해 있는 현재가 모순되고 부조리하고 어지러운 실패작으로만 보인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처해 있는 이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내 앞에서 완전 하라'-우리는 결코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당황할 것 없습니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역사를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믿고 살아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십니다. 나의 한정된 생각, 나의 부족한 행동, 이런 것을 다 초월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는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이것을 고백해 마지않을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확실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병들었습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전능이 있습니다. 죽었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거기에 있습니다. 사업에 성공했습니까? 하나님의 전능이 거기에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를 했습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함께 하셨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사업에 망했습니다. 그는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어째서 사업이 안 되는 것입니까?" 이분 보십시오. 사업하네 하면서 3년 동안 교회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불의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다가 무너졌습니다. "어찌하여……"하고 탄식을 합니다. 위로할 도리가 없습니다. 한마디밖에는. "그 사업 무너진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모름지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끝까지 믿고 나아갑시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신 것이 없습니다. 그 능력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때마다 새롭게 고백할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확실하게 고백하면서 살아 갈 것입니다.
아브람의 구십 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사도신경의 원문은 '내가 믿는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리네 문맥으로는 목적어가 앞에 와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하지만 원문에는 믿는다는 고백이 먼저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신앙고백을 성경적으로 간략하게 요약해놓은 것이 사도신경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고 고백하는 바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입니다. 이 고백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예배에서나 공통된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맨 먼저 공부한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귀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라는 말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헬라사람들이 철학적 신화적 표현을 즐겨 쓰는 것에 비하여 히브리사람들은 늘 비유적 상징적 표현을 즐겨 씁니다. 이는 성경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진리의 태반이 상징적 용어를 구사하여 설명되고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말도 역시 상징적인 용어입니다. '성령'은 본디 '바람'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아들'이라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이 역시 가정적(家庭的)인 느낌을 담은 상징적 표현인 것입니다. 이렇듯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三位)부터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함으로 사도신경을 시작합니다. 이 가운데서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그 부성(父性)과 공의로우신 사랑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그에 이어서 이 시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총괄하시며,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압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라고 고백하는 우리들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라는 것을 믿는 사람답습니까?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입으로는 곧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툭하면 걱정을 하고 염려를 하고 불안해하고 절망하기 일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면서 어찌 그다지도 걱정이 많은 것입니까? 이는 사도신경에 어긋납니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고백을 정면으로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신앙고백 합니다. 이 고백이 입으로만이 아닌 참 고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의미를 분명히 알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의 좌표를 확고히 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전능'의 개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크게는 무변광대(無邊廣大)의 우주에서부터 작게는 하잘것없는 한낱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주관하고 계십니다. 선(善)도 악(惡)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선한 것만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줄로 알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악한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악을 주관하시는 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선과 악이 대립하는 틈바구니에 존재하고 갈등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악도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보십시오. 악을 떠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결히 살아가는 욥을 보고 사단이 시험을 하려듭니다. 사단은 하나님께 허락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라는 단서를 붙여 허락하십니다. 이리하여 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극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욥의 고통은 사단의 의도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으로 초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사단의 못된 짓거리도 주관하십니다. 우리의 눈에는 마귀 사단만이 보입니다.
그 이면에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단이 욥을 괴롭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조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인지, 우리는 미처 다 이해하지 못하고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용케 믿음이 좋아진 때에는 이해가 됩니다. 어쩌다 믿음이 떨어졌을 때에는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결코 독단적으로 결론을 내릴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믿음이 어느 만큼의 수준에 이르렀는가, 이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저 엄청난 고난의 이야기 욥기는 이 점을 일깨워주는 성경입니다.
여러분은 크리스찬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악한 일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쓰임 받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믿을 수 있다면 당신의 신앙은 바람직한 수준에 닿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뭘 하고 계시기에 이 모양이란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저렇듯 악한 것까지도 용납하신 단말인가?'-내 신앙이 땅에 떨어졌을 때에는 이같은 의문이 고개를 쳐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됩니다. 악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천사는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영광을 돌리고, 마귀는 간접적으로 영광을 돌린다"-아우구스티누스의 말입니다. 스스로는 멸망하여 지옥에 떨어지면서도 믿는 자로 공로를 세우게 하는 것이 마귀 사단입니다. 마귀 그 딴에는 제 뜻대로 믿는 자를 괴롭히는 것 같지만, 믿는 자들은 그로 인한 고통을 통하여 더욱 굳건하고 온전한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허다한 역경과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을 우리는 연면(連綿)한 역사 안에서 시간시간 체험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합리적인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불합리한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전쟁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평화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리고, 좀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를 다스리자고 그 일에 선한 자를 쓰시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악한 자를 결정적으로 다스리고자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보다 더 악한 자를 쓰시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 속에 있는 악을 뿌리뽑고자 하실 때에도 악한 자를 쓰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엄연하게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자 그를 다스리시고자 이방인의 악한 왕 느부갓네살을 당신의 막대기로 쓰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칠십여 성상이나 바벨론 포수(捕囚) 생활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무릇 인간사 모든 것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에는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자리에 기념관이 하나 서 있습니다. 폭탄이 떨어지기 전에는 성당이 서 있던 자리입니다.
물론 성당의 자취는 간데온데없습니다. 그러나 그 성당에 비치되어 있었던 요한 조상(彫像) 한 구(具)와 흠집 하나 안생긴 노란 종(鍾)이 하나-이것들이 박물관에 옮겨져 지금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자폭탄의 위력에는 돌이고 쇠붙이고 할 것 없이 남아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상(彫像)과 종이 멀쩡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니요? 미상불 박물관에서는 그것들 밑에 글을 써 붙여놓았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이라고요. 그러나 천만에요. 결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40만의 생명이 눈을 뜬 채 사라지고, 모든 동식무생물(動植無生物)이 처참하게 녹아 없어지는 그 아비규환의 지옥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는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박물관의 그 종은 이 사실을 웅변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하거니와 무릇 성결된 생활은 모순된 일이건 부조리한 일이건, 합리적이건 불합리하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전능'의 개념 그 두 번째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그 뜻대로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폭군적인 '가능'이 아닙니다. 힘을 믿고 마음먹은 대로 밀어붙이고 짓누르고 짓밟고 때려 부술 수 있다는 차원의 '가능'이 아닙니다. 모든 것 속에서 당신의 계획하신 바를 가장 선하게 온전히 이루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실패란 결코 없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우연(偶然)'이라는 말을 쓰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기적'이라는 말도 곧잘 씁니다. 걸핏하면 기적이니 뭐니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기적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이요 당연지사(當沿之事)인 것입니다. 전지전능치 못한 우리 사람의 눈에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전능의 하나님께 인데 기상천외가 어찌 있겠습니까? 사람이 보니까 불가사의하고 비합리적인 일이지 하나님께는 예사롭고 합리적인 일인 것입니다.
흔히 기적은 초자연적이고 초과학적인 현상이라고 말하는 젊은이들에게 저는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그것이 지극히도 과학적인 현상이었음을 알 때가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지식이 미치지 못해서 이해를 하지 못할 따름이다."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에 엄연히 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던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과 민수기 11장에 나타나는 메추라기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신 광야에서 메추라기가 진(陣)에 덮이도록 날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으로 배를 채웠다는 이야기-도대체 그 황막한 광야에 무슨 메추라기가 있어서, 또 그리도 많아서, 그 많은 사람들이 구워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인지, 사람의 상식 가지고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건 아무래도 미심쩍은 이야기다-성경을 읽으면서 누구 할 것 없이 이렇게들 회의를 품어왔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성경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눈앞에서, 바로 오늘의 싯점에서 버젓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1967년의 이른바 '6일 전쟁' 때의 일입니다. 상금(尙今)도 아랍측에서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문제의 땅 시나이 반도-사람이 살지 못하는 이 땅에 이스라엘 군대가 진주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초저녁 녘이었습니다. 난데없이 엄청나게 많은 메추라기가 사막 위에 떨어져 내리는데 마치 어지럽게 우박이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군인들은 모래 위에 새까맣게 나뒹구는 메추라기들을 부지런히 주워 다 실컷 구워먹었습니다. 이를 기이한 현상이라 여긴 전문가들이 메추라기의 생태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쪽의 메추라기들은 마치 우리나라의 제비가 철 따라 무리 지어 왔다가 또 철 따라 무리 지어 강남으로 날아가듯이, 그렇게 무리 지어 몰려다니다가 힘이 진하게 되면 저녁녘에 땅위로 툭툭 떨어지는데,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에 힘을 다시 찾으면 일어나 붕 날아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성경이 말씀한 그 기적 앞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으니 사람이란 실로 강퍅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내 좁은 지각의 범위에서 이치에 맞아야만 믿지, 그렇지 않고는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어디 메추라기 기적만이겠습니까?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애굽 땅에 내린 10대 재앙 가운데 메뚜기 재앙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도 쉽게 믿으려들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메뚜기가 그렇게도 많았기에 그 떼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산천초목이며 짐승이며 할 것 없이 마치 탱크가 짓밟고 지나간 자취와도 같이 초토화하고 말았단 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같은 장면은 펄벅의 소설「대지」에도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지만, 성경에 보는 그 메뚜기 재앙도 언젠가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실제로 그 같은 메뚜기 재앙이 있고 나서야 확실하게 믿게 될 만큼 우둔하고 미련한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대로 믿어둘 것입니다. 구태여 우리의 얕은 지혜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해보려고 억지를 부릴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믿어두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를테면 노아의 방주가 현대 고고학의 발달로 흔적을 드러냈듯이, 우리가 기적이라고 기이하게 여기고 의심을 가지고 하는 일들이다 현실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성경적 진리의 참됨을 추호라도 회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 앞에 '기적'이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데에 절대로 양보가 없으십니다. 과부족이 없으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때로 하나님의 뜻이 묵살되는 것도 같고 손해를 보는 것도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어김없이 다 하십니다. 데려갈 사람 다 데려가십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 병들고 건강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현대는 의학이 발달하여 꽤나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어 사람들은 어떻게든 좀더 오래 살아보려고 갖은 애를 다 씁니다마는 그렇게 안달할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암'이라는 병은 어떻게 해야 정복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암이라는 병을 있게 하셨을까 하고 원망하는 소리들을 합니다마는 저는 이런 사람들보고 충고합니다. '암'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데려가시는 방법의 하나이니 그대로 내버려두라, 왜들 그리도 안달복달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의학이라고 하는 것은 일시의 불편을 조금 덜 자는 것일 뿐, 결코 생명을 주장(主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오래 산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노후에 양로원에 수용되어 죽지 못해 사는 노인들이나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이란 적당한 때에 가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못되지만 가능하면 정신 맑을 때에 불러 주십사 하는 것도 기도할 제목의 하나입니다. "하나님, 합당한 때에 나를 부르소서." 이런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래저래 남 거북하게 만드는 신세가 되고 망령이나 부리고 하면서 오래 사는 것을 그 누가 복이라 하겠습니까? 그런가하면 때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죽음도 있음을 흔히 목격합니다. 새파랗게 건강한 젊은이가 교통사고로 죽는가 하면 길가다 벼락을 맞아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고를 막으실 수 없어서 발생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경우에도 하나님이 부르셔서 갔다고, 하나님의 뜻에는 모든 가능성이 다 들어 있다고, 하나님은 전능 하시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전능'이란 하나님의 자유를 일컬음입니다. 초월적 능력을 일컬음입니다. 사람은 마음과 뜻이 많아도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적습니다.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게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뜻과 능력이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뜻의 자유성(自由性)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실 때에 못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시고자 하시는 자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이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무한한 자유-이것이 '전능'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갑니다(막 5:22). 야이로가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이에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가실 때에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달려오면서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선생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야이로는 적이 난처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주춤거리는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 5 : 36)." 그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야이로의 딸은 죽음에서 살아납니다. 보십시오.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고 못났습니까? 병든 자가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에는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를 쓰다가도 일단 숨이 넘어가고 나면 할 수 없다 하고 병풍 치고 맙니다. 이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한계를 초월하여 계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당신의 뜻을 자유로이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능은 '사랑'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과 사랑-이것을 믿는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어도 능력이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아파서 신음합니다. 열이 40도를 오르내리고 숨 가빠합니다. 이를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대신 죽고 싶을 만큼 사랑은 있는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사랑입니다. 감상에 그치는 사랑입니다. 능력 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자식에게 학비를 대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랑, 배고파 울부짖는 자식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사랑-이렇듯 능력 없는 사랑이 우리 인간들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주실 수 있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사랑에는 지혜가 없기 쉽습니다. 이를테면 사랑한답시고 자식을 더 괴롭히거나 과잉보호로 자식을 버려놓기도 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상대방을 어떤 형태로든 속박합니다. 이쪽에서는 사랑한다고 하는데 저쪽에서는 사람을 왜 그리 괴롭히느냐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사랑입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마음뿐일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능력과 지혜를 동반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극히 부분적인 것이어서 내가 얻는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는 손해 되는 것이 있으며, 내가 사랑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미운 것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하십니다. 무한하십니다. 여기에 가장 귀중한 문제가 깃들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능력과 지혜를 동반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온전하게 계시된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의 계시입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4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온전하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된 것입니다. 폭군적인 능력이 아니요 위협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구속(救贖)의 능력입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합니다. 이 둘을 다 얻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볼 때에는 십자가가 이 두 가지를 다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결정(結晶)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전능을 웅변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것은 곧 구원론적 전능입니다.
여러분, 기적이 무엇입니까? 기적치고 가장 큰 기적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상 가장 엄청나고 위대한 기적이라면 베주비오 화산이 폭발한 것이나 원자탄이나 사람이 달나라 갔다왔다는 따위의 일이 아닙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적은 사울이 바울된 일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사도 바울 됨으로써 인류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폭군적 기적을 기적이라고 보기 쉽습니다. 뒤집어엎어진다던가 철저하게 박살이 난다던가 하는 따위의 파괴적 변화-이런 것은 참 기적이 아닙니다. 한 생명이 살아나는 것이야말로 참 기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다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가 가진 세계관, 그 좁은 문화권 안에 머리를 틀어박은 채 거기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느냐?'-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하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리석어서 내 소견에 할 수 있어 보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 같으니까 기도를 하지만, 네 소견에 아무래도 될 일이 아닐 것 같아 보이면 하나님께서도 못하실 것으로 여겨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고 포기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궁극, 인간이 부닥치는 막다른 데서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아브라함 99세 때에 나타나셔서 주신 말씀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자답게 살렷다, 왜 된다 안 된다 하느냐고 말씀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부터 25년여 전에 아브라함을 보고 아들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아내 사라는 이미 생산을 할 수 없는 할머니였습니다. 의학 상식으로는 아들이 있을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그를 보고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십니다. 아브라함도 믿지 못하고 사라도 어이없다는 듯 픽 웃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믿지 못하느냐'하고 나무라십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냐? 내가 한다면 하는 줄 알 것이지 왜 그리 휘청거린단 말이냐. 네 아내가 단산했다는 것과 내가 아들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흔들리지 말고 굳게 믿으라 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 아브라함이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땅을 흉년 좀 들었다 해서 버리고 애굽 땅에 간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셨다고 했으면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그 땅에서 버틸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아브라함은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서 못 본 체하셨다면 아내를 빼앗길 뻔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왜 못 믿고 우왕좌왕하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으면 내 생각대로 된다 안 된다 판단하여 왔다 갔다 할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믿고 따르면 될 것이 아니냐 하심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을 믿고, 그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믿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이미 겪은 과거는 믿지만 아직 보지 못한 미래에 대해서는 믿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약점입니다. 앞으로의 일은 두고봐야 알겠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하나님의 역사였던 게 분명하고, 앞으로 전개될 일들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편에서 역사 하실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역사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이요 고백입니다. 비록 내가 처해 있는 현재가 모순되고 부조리하고 어지러운 실패작으로만 보인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처해 있는 이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내 앞에서 완전 하라'-우리는 결코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당황할 것 없습니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역사를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믿고 살아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십니다. 나의 한정된 생각, 나의 부족한 행동, 이런 것을 다 초월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는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이것을 고백해 마지않을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확실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병들었습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전능이 있습니다. 죽었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거기에 있습니다. 사업에 성공했습니까? 하나님의 전능이 거기에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를 했습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함께 하셨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사업에 망했습니다. 그는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어째서 사업이 안 되는 것입니까?" 이분 보십시오. 사업하네 하면서 3년 동안 교회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불의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다가 무너졌습니다. "어찌하여……"하고 탄식을 합니다. 위로할 도리가 없습니다. 한마디밖에는. "그 사업 무너진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모름지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끝까지 믿고 나아갑시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신 것이 없습니다. 그 능력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때마다 새롭게 고백할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확실하게 고백하면서 살아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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