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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22절)

by 【고동엽】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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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항상 기뻐하라 쉬지 알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22절)

제가 군대에서 저의 친구에게 이런 엽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한국대학생선교회에서 보내는 엽서였습니다. 그 친구는 당시에 숭의여전에서 ccc간사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보낸 엽서가 저에게는 힘이 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지금은 뉴욕에서 치과의사를 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여기에 눈길이 멈춘 겁니다.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거창한 출세의 길인 것 인양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무슨 기뻐해야 할일이 있어야 기뻐하지 감사할일이 있어야 감사를 드릴 것이 아닌가?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목을 끕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실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음성을 주시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자 너는 내가 어디에 관심을 두고서 사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부모님의 소원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자식들이 기쁘게 사는 모습입니다. 효자들은 무엇이 효자인가 부모님들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는 겁니다.

항상 기뻐하라 여기에 초점을 두고서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기쁨입니다. 기쁨의 절대성을 말하기도 하고요. 시간의 초월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환경의 초월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먼 미래를 보면서 기뻐하는 겁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히브리사람들이 말하기를 결국 웃는 자만이 영원한 것이다. 우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웃는 자가 최후의 승리자다. 맞으면서도 웃으면 이긴 겁니다. 때리고도 불안하면 진겁니다. 그런데 기쁨은 깨달음에서 오는 겁니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기쁨이 없습니다.

제가 늘 보면서도 웃음이 나는 것은 이런 겁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분이 언제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겁니다. 그런데 그의 처지는 언제나 감옥에서 이 글을 쓴다는 겁니다. 빌립보서를 읽다가 보면 이런 겁니다. 감옥에 면회를 온 사람이 위로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처지는 그게 아닙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가 안쓰럽고 위로를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기뻐하라.

그러니 기쁨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기쁨으로 사는 겁니다. 내가 지금 상황을 보는 게 아닙니다. 그 구원의 손길을 보는 겁니다.

제가 언젠가 청송이라는 감호소에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감호소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세월은 그렇게 변해가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거기서 예배를 인도할 기회가 있어서 갔었습니다. 신우회원이 있고 회장이 나와서 거기서 찬양을 인도합니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 표정이 그렇게 기쁨의 찬양을 드리는가 생각이 들더라구요. 지금은 감옥이 좀 많이 좋아진 겁니다. 그래도 감옥은 감옥이거든요. 이 천년 전의 감옥입니다. 사도의 고백이 그런 고백을 드립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가득하게 채워갑니다. 감옥에 있는 내가 기뻐한다, 그러니 너희들도 기뻐하라. 기쁨은 누리는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너희는 기뻐하라. 행복 하라는 겁니다. 그게 그리스도의 모토입니다. 예수님의 모토가 그겁니다. 항상 기뻐하라. 당신이 십자가를 내일 이면 지셔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십자가를 보시면서도 기쁨을 가지고 가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절대적인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기뻐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입니다. 전에는 이런 것은 기쁘고 저런 것은 슬프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점점 수준이 높아지는 그리스도인은 그게 아닙니다. 이것은 이래서 기쁘고 저것은 저래서 기쁘고 입니다. 제가 어려서 저의 외조모님이 저를 키우시느라고 참 많이 힘드셨습니다. 제가 하루는 자다가 무심결에 한숨을 푸욱 내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님이 너 무슨 걱정이 있냐? 아니요. 그런데 왜 한숨은 쉬노? 그리고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보는 곳에서는 한숨을 쉬는 게 아니다. 그날 자다가 혼이 났습니다. 효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웃는 얼굴입니다. 기쁨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거기에 있으십니다.

토요일의 햇볕 이라는 글에 보면 세미 함프라는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는 부인도 없고 아이도 없고 그렇게 혼자서 삽니다. 그가 그렇게 혼자서 사는 이유는 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폐결핵에 반신마비 증상으로 겨우 거동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도 그는 어느 비행공장에서 기름옷을 입고 망치를 들고서 한 부분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 가진 그런 행복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웃음이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언제나 얼굴은 웃음이 가득합니다. 그의 입에는 누구를 향한 원망의 소리를 불평의 소리를 시기와 질투를 보내지를 아니합니다. 언제나 친절합니다. 그는 웃으면서 항상 웃음의 대답을 합니다. 주님이 내 구주가 되시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러면서 그가 즐겨 부르던 찬송은 언제나 이 찬송을 드렸다고 합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중국에 가서 꼭 가보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라고 하는 백두산입니다. 그곳은 정상의 일기가 하도 변덕스러워서 천지(天池)의 아름다운 모습을 온전히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며칠씩 기다려서도 못보고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친구 하나는 세 번을 갔는데도 번번이 천지를 제대로 못 보았다고 아쉬워합니다. 백두산 천지에 들어가려면 연길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자동차로 비포장도로를 다섯 시간 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백두산 아랫마을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곳이 이도백화라는 곳입니다. 거기서 다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새벽에 정상을 향하여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 일행이 백두산으로 떠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 드렸습니다.

"하나님, 어렵게 얻은 기회입니다. 부디 가는 길 평탄케 해주시고 백두산 천지 좀 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린아이의 기도 같은, 참으로 순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게 열린 천지의 장관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한 장로님이 대표하여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편안한 가운데 좋은 구경을 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거기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족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기도가 끝난 다음, 시종 못 마땅해 하던 그가 입을 열어 빈정거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재수가 좋았던 겁니다." 일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말았습니다마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재수(財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일진(日辰)이 좋았다, 운(運)이 좋았다---일마다 이렇게 여기는 자연주의자, 무신론자에게 무슨 감사가 있겠습니까? 자 그들에게 무슨 기도의 소리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읽다가 보면 기도하라는 명령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기도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거 말처럼 쉽게 되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기도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데 거기다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실은 기도는 우리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두드리라. 열어 주시리라. 뭐 이런 일이 있는 겁니까? 아쉬운 것은 우리가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쉽게 부탁을 하시니 말입니다. 그게 참으로 무어라 말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쉬지 말고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쉬지 말라는 것은 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without ceasing입니다. 하나님과의 나와의 수직적 관계의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음성이 여기에 있는 겁니다. 돈 좀 생겼다고 기도가 끊기고, 바쁘다고 기도도 안하고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심은 너 나하고 관계를 끊기지 아니하도록 이러가자 그런 겁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를 쉬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이 사울 왕 앞에서 내가 기도의 쉬는 죄를 범치 않을 것입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묘한 것은 언제나 일이 생기면 금식을 하고 부르짖고 그럽니다. 문제는 분명히 해결을 받아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 중요한 겁니다. 그 다음에도 계속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기도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나마 그렇게 기도로 나오면 얼마나 좋은 지요. 그것도 없다면 정말로 답답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언제나 계속되어지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점검이 있어야 합니다.

왜 기도를 해야 하는지 아세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빌 하이빌스 목사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너무나 바빠요, 그래서 나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그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런데 그 감사한다는 게 겸손한 자만이 있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 여기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모든 환경에서 감사하라는 겁니다.

여러분「뿌리」라는 영화를 보셨을 줄로 압니다마는, 그 영화를 보면 멀쩡한 사람들이 노예상인에게 붙들려가서 쇠사슬에 묶인 채 온갖 고생을 다합니다. 이후로 평생을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사는 그들에게 감사가 있겠습니까? 누가 빵 한 조각을 준들, 누가 따뜻한 옷 한 벌을 준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아도 노예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노예라는 것 하나로 평생을 감사 없이 살아갑니다. 또 감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식민지 백성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서러움 때문에, 또 그 원한 때문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식민지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정배(定配)당한 사람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그 사실 하나로 그는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름지기 감사란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노예나 머슴, 혹 품삯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내가 수고한 대가를 당연히 받는 것이다, 돈벌기 위해서 일한다---보수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1,300개 이상의 발명특허를 얻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가 만들어놓은 것을 우리가 많이 쓰고 있습니다. 활동사진기, 축음기, 무선 전신기 등, 그의 발명품은 온 인류에게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어렸을 때에 저능아 취급을 받았습니다. 정규적인 학교에서도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그를 위로하고 그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또 그는 젊은 날에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것은 내가 귀머거리가 됨으로써 연구에 몰두할 때에 잡음이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귀머거리가 되는 것은 답답하지만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잡음이 들리지 않고 어떠한 소음과도 관계가 없이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이여, 귀머거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에디슨은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는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귀머거리가 됨으로써 얻은 것만 생각했습니다. 내게 어떤 불행이 닥쳤든, 병들었든 가난하든 실패를 했든,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얻게 되는 것, 얻은 것, 그 소중한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베토벤을 생각해보세요. 음악가로서 귀가 멀었다면 볼일 다 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는 귀머거리가 되어서도 작곡을 합니다. 가장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곡들이 바로 귀머거리가 된 다음에 작곡한 것들입니다. 그는 악보로써 음악을 들었습니다. 귀로들은 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치명적으로 불행한 여건 가운데서 그는 오히려 하늘의 음악을 땅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런고로 인간의 인간됨이란 얼마나 감사하느냐에 있습니다. 사람의 믿음이 어느 정도냐, 인격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은 어느 경우, 어느 정도, 어느 지경에까지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인가, 감사의 깊은 원리를 얼마나 터득하고 사는 사람인가로 가름되는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분이 바쁘게 나다니다보니 자연히 가정에 소홀했습니다. 마침내 어린 아들이 불만을 터뜨립니다. 내 친구 누구는 자기 아버지하고 놀러 가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는 수없이 아버지가 하루 시간을 내어 종일 아들과 낚시질을 했습니다. 그날 잠자리에 들기 전, 각자 일기장에 하루 일 을 적습니다. '오늘은 아들과 함께 낚시질로 하루를 허비했다'---아버지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들은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해서 아주 즐거운 하루였다'라고 썼습니다. 똑같은 사건인데, 한 사람에게는 괴로운 시간이요 다른 한 사람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불평하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감사가 없으면 노예입니다. 불평하면 비참해집니다. 불평함으로 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은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말씀하는바 기쁨과 기도와 감사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하나님의 소원적 의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상 이 말씀을 보면서도 그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소원은 초환경적이며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곧 어떤 환경에서든지, 어떤 경우에든지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지극히 환경적입니다. 조건적이요 종속적입니다. 그러므로 있으면 기뻐하고 없으면 슬퍼합니다. 성공하면 좋아라, 하고 실패하면 원망합니다. 잘되면 기도하고 안 되면 그만둡니다. 기도도 답답하면 하다가 조금 열리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일에 늘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이 소원적 의지를 결정적 의지로 바꾸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러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여러분, 어느 때에 기쁨이 있습니까? 어느 때에 기도합니까? 어느 때에 감사합니까? 실제적으로 보면 이것은 아주 상대적입니다. 주었다가 빼앗고, 성공하게 했다가 실패하게 하고, 건강하게 했다가 병들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기뻐할 줄도, 기도할 줄도, 감사할 줄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못 가졌다가 가지게 되면 좋아합니다. 모르다가 알게 되면 기뻐합니다. 조금 더 가지게 되면 조금 더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적입니다. 다시금 원망이 생깁니다. 더 못 가진 것을 원망하게 되고, 더 배우지 못한 것을 원망하게 됩니다. 본디 기쁨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지극히 찰나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잃어버렸다가 얻고, 병들었다가 낫게 되면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줄 압니다마는, 그렇게 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불러 기도하게 만드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여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만족하고 한번만이라도 성전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간절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을 뻔한 사람이나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바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옥중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절망과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라는 말이 전체를 통하여 무려 열세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별명이 '희락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도 바울의 기쁨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의 처한 환경에 연유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는 충분히 기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주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으로 아주 만족해합니다. 이제는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절대적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는데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해주시고 저렇게 해주세요,하며 소원을 다 구합니다. 또 "잠 잘자게 해주세요. 아멘"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면 이 아이는 꼭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른답니다. 엄마가 물었습니다. "얘, 너는 기도한 다음에 왜 노래하고 춤을 추니?" 아이는 대답합니다. "엄마, 하나님께 너무 슬픈 얘기만 많이 해서 죄송해 그래요.

로마 교외에 카타콤(Catacomb), 곧 지하묘지가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죽어 매장된 곳입니다. 그 카타콤 벽에 이러한 글귀가 씌어 있다고 합니다. '이 어두움 속에 빛이 있습니다. 이 무덤 속에 아름다운 음악이 있습니다.'--이러한 신앙적 낙천주의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철저하게 훈련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찬양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를 얻은 사람은 그 자유 하나로 만족합니다.

기쁨의 무조건성, 기도의 절대필요성, 감사의 무한성--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도 큰 은혜를 받았고, 또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 은혜를 알고, 이 귀한 은혜와 감사를 밖으로 내보내고, 이 은혜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나간 모든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앞으로 다가올 모든 사건을 신앙적으로 소망적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기도 없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 없는 기도가 진실일 수 없습니다. 기쁨 없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그리스도인,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범사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도 소원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강한 주권으로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되게 하실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반드시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바라시는 바를 알고, 속히 기뻐하시는 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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