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ser_contents">라티머는 1485경 잉글랜드 레스터셔 서커스턴에서 부유한 자작농(自作農)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510년경에 사제 서품을 받고, 1530년까지 20년 동안 케임브리지에서 설교자로 점차 명성을 얻었다. 처음에는 정통 로마 가톨릭 신앙을 가졌으나 1525년 마르틴 루터의 새 교리들에 영향을 받은 젊은 케임브리지 성직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 집단의 영적 지도자 토머스 빌니의 활동에 감명을 받고 개종했다고 말한다.
그뒤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려고 할 때 그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여 왕의 호감을 사 1531년 윌트셔 웨스트 킹턴 성직록을 받았다. 얼마 안 있어 당시 점차 두각을 나타내던 2명의 종교개혁자와 사귀었는데 그 중 1명은 나중에 왕의 총리가 된 토머스 크롬웰이었고, 다른 1명은 훗날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토머스 크랜머였다. 그러나 그렇게 유력한 지지자들도 라티머가 이단설을 가르쳤다는 혐의로 고소당했을 때 그를 두둔할 수 없었다. 1532년 1월 라티머는 종교재판관들 앞에서 연옥(煉獄)의 존재와 성인숭배의 필요성 등 특정 신조들에 동의하기를 거부하여 파문과 투옥을 당했다가 1532년 4월에 완전히 굴복을 한 뒤에야 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롬웰 덕분에 1535년 일약 우스터 주교가 되었다. 1536년경에는 종교개혁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당시 영국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 교회 교리를 바꾸려는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일 때 라티머가 어떤 역할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1539년 영국에서 정통 가톨릭 신앙이 일시적으로 세력을 얻게 되어 주교직을 빼앗겼는데 설상가상으로 1540년 크롬웰의 갑작스런 몰락으로 법정에서 자기를 변호해줄 주요 지지자마저 잃게 되었다.
헨리의 남은 재위기간 동안 라티머는 그늘에서 살았다. 간간히 이단혐의를 받아 런던탑 신세를 지기도 한 것 같으며, 1547년 1월 어린왕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기 전 몇 달 동안에도 그곳에 갇혀 있다가, 새 왕조가 급속히 프로테스탄트교 쪽으로 기우는 바람에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번에는 두려움이나 인기에 개의치 않고서 자유롭게 설교하고 싶었기 때문에 옛 주교직을 다시 맡아달라는 부탁을 거절했다. 그의 설교는 많은 군중을 사로잡았으며 때로는 왕실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시민들과 함께, 대목장(엔클로저) 제도는 인구감소 및 빈곤을 유발하는 제도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 메리 튜더가 왕위에 오르자 종교개혁의 이상을 확산시킨 인물로 낙인찍혔고, 1553년 반역죄로 체포되었으며, 옥스퍼드로 끌려가 재판을 받은 뒤 1555년 10월 16일 종교개혁자 니콜라스 리들리와 함께 화형을 당했다. 래티머는 불에 타 죽으면서 함께 죽어가는 리들리에게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영국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을 촛불을 켜게 될 걸세"라고 격려함으로써 후세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1953년 H. S. 다비의 〈휴 라티머 Hugh Latimer〉가 출판되었다.
그뒤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려고 할 때 그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여 왕의 호감을 사 1531년 윌트셔 웨스트 킹턴 성직록을 받았다. 얼마 안 있어 당시 점차 두각을 나타내던 2명의 종교개혁자와 사귀었는데 그 중 1명은 나중에 왕의 총리가 된 토머스 크롬웰이었고, 다른 1명은 훗날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토머스 크랜머였다. 그러나 그렇게 유력한 지지자들도 라티머가 이단설을 가르쳤다는 혐의로 고소당했을 때 그를 두둔할 수 없었다. 1532년 1월 라티머는 종교재판관들 앞에서 연옥(煉獄)의 존재와 성인숭배의 필요성 등 특정 신조들에 동의하기를 거부하여 파문과 투옥을 당했다가 1532년 4월에 완전히 굴복을 한 뒤에야 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롬웰 덕분에 1535년 일약 우스터 주교가 되었다. 1536년경에는 종교개혁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당시 영국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 교회 교리를 바꾸려는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일 때 라티머가 어떤 역할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1539년 영국에서 정통 가톨릭 신앙이 일시적으로 세력을 얻게 되어 주교직을 빼앗겼는데 설상가상으로 1540년 크롬웰의 갑작스런 몰락으로 법정에서 자기를 변호해줄 주요 지지자마저 잃게 되었다.
헨리의 남은 재위기간 동안 라티머는 그늘에서 살았다. 간간히 이단혐의를 받아 런던탑 신세를 지기도 한 것 같으며, 1547년 1월 어린왕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기 전 몇 달 동안에도 그곳에 갇혀 있다가, 새 왕조가 급속히 프로테스탄트교 쪽으로 기우는 바람에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번에는 두려움이나 인기에 개의치 않고서 자유롭게 설교하고 싶었기 때문에 옛 주교직을 다시 맡아달라는 부탁을 거절했다. 그의 설교는 많은 군중을 사로잡았으며 때로는 왕실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시민들과 함께, 대목장(엔클로저) 제도는 인구감소 및 빈곤을 유발하는 제도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 메리 튜더가 왕위에 오르자 종교개혁의 이상을 확산시킨 인물로 낙인찍혔고, 1553년 반역죄로 체포되었으며, 옥스퍼드로 끌려가 재판을 받은 뒤 1555년 10월 16일 종교개혁자 니콜라스 리들리와 함께 화형을 당했다. 래티머는 불에 타 죽으면서 함께 죽어가는 리들리에게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영국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을 촛불을 켜게 될 걸세"라고 격려함으로써 후세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1953년 H. S. 다비의 〈휴 라티머 Hugh Latimer〉가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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