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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크랜머 (Thomas Cranmer, 1489-1556) (영국)

by 【고동엽】 2021. 11. 13.

토마스 크랜머는 1489년 노팅햄에서 태어났다. 그는 예수 대학(Jesus College)과 캠브리지(Cambridge)에서 수학했고, 1511년에 대학의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1520년대 초경에 그는 이미 에라스무스의 희랍어 신약성경을 논하기 위해 캠브리지의 화이트 호스(White Horse) 기숙사에서 회합한 소장 학자 그룹에 참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적인 문제가 심각한 헨리 8세의 이혼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그에게 협조하여 1532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다. 크랜머는 영국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영어 성경의 출판에 힘을 썼으며,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개혁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1549년 그는 영국 제1의 공중 기도서(Book of the Common Prayer)를 출판한다. 이는 개신교적 저작이었으나, 전통적 캐톨릭에 불필요한 비난을 사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작성된 것이다.


에드워드 통치시에는 또한 교리적 개혁도 있었다. 1547년에는 크랜머에 의해 대부분 씌어진 '설교록'(Book of Homilies)이 출판되었다.이것들은 임직 설교자가 없는 교구들에서 낭독될 복음적 설교였다. 1533년 크랜머와 리들리(Lidley : 런던의 주교)는 '42개조'(Forty-two Articles)를 내어 놓았다. 이것은 후에 '39개조'(Thirty-nine Articles)로 수정되었다.


에드워드가 1553년에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열렬한 로마 카톨릭 신봉자인 메리가 왕위를 계승했다. 메리는 에드워드의 개신교적 제도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1555년에는 수많은 주교가 화형을 당했는데, 라티머(Latimer)와 리들리(Lidley)였다. 라티머는 리들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격려했다. "리들리 선생이여, 위로를 받으시오, 그리고 남자답게 처신합시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횃불을 영국에 점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 후 공격의 화살은 크랜머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공격의 화살 앞에서 잠시 개신교적 신앙을 철회하는데 서명 하였으나 이내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런던탑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선언하고 마침내 화형장에 끌려가 화형을 당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신앙을 철회하는 데 서명했던 오른손이 불에 다 타 재가 될 때까지 무서운 인내를 가지고 순교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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