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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후퍼 (John Hooper, 1495-1555) (영국)

by 【고동엽】 2021. 11. 13.
존 후퍼(John Hooper)는 1495년 영국 서머셋셔(Somersetshire)에서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하나님의 은밀한 소명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었다. 옥스퍼드를 졸업한 후 토마스 아룬델(Thomas Arundel)의 청지기로 고용되었다. 토마스 아룬델은 후퍼가 지니고 있는 견해와 신앙을 알고 그를 도와 주려 하였다. 그러나 헨리8세의 압제하에서 더 이상 영국에 머물수 없었다. 그는 스위스 츄리히(Zurich)로 피신하여 거기서 불링거(Bullinger)와 막역한 친구가 된다. 그는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히브리어도 열심히 공부했다.


하나님의 섭리로 에드워드가 왕이 되자 그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1550년 5월에 후퍼는 글로체스터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직책을 2년 동안 훌륭히 수행하였으며 후에 우스터의 주교로 임명된다. 그러나 이 경건한 주교의 선하고 행복한 출발은 주교들의 임명과 복장, 그리고 그 밖의 사소한 일에 관한 좋지 않은 논쟁 때문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 교회 안에는 경건한 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주교들은 신자들을 교화하는데 유익을 준다기보다 야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의식들을 행했으며, 게다가 교황청의 주교들과 같은 의복을 입었었다. 그들은 소매 없는 검은 법의를 입고 그 밑에 흰 법의를 받쳐 입었다. 그 다음에는 사각형 모자를 썼다. 이러한 사소한 것들이 지나치게 미신적이며 로마 카톨릭을 따랐기 때문에 후퍼는 결코 그것들을 입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국왕에게 자신의 주교 임명을 취소하거나 그러한 의식들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왕은 즉시 그의 청원을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이 일로 후퍼는 반대자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


국왕 에드워드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메리는 제일 먼저 후퍼를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그의 친구들이 피신할 것을 권면할 때 후퍼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나는 도망쳤다가 내 발로 걸어왔다. 그러나 이제 나는 소명을 받아 이곳에 왔으므로 내 양들과 함께 머물며 살다가 죽을 것이다" 1553년 9월 그는 체포되었고, 무려 2년 동안 신문과 재판을 받게 된다.


그가 감옥에 있을 동안에 그의 친구였던 안토니 킹스턴(Anthony Kingston)과 마지막 대화중에 이런 말을 남겼다. "킹스턴씨, 죽음은 쓰고 생명은 달콤합니다. 그러나 장차 임할 죽음은 더욱 쓰고, 장차 얻을 생명은 더욱 달콤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장차 임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장차 얻을 생명에 대한 사랑과 갈망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해 준비된 화형의 고통과 곤경을 인내하며 견뎌낼 것입니다. 나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당신과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1555년 2월 그는 화형장에서 어린 양처럼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않고 지독한 불꽃 속에 인내하면서 고요히 숨을 거두웠다. 이제 그는 복된 순교자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실한 사람들을 위해 만세 전부터 예비된 즐거운 하늘 나라에서 다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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