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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사도행전 1장 4절~8절)

by 【고동엽】 202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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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사도행전 1장 4절~8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 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람은 대체로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선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이 육체에 따른 본능이 주도하는 육체 주도적인 인간이 있고, 둘째는, 항상 합리적인 이론으로 이치에 맞는 삶을 살아가려는 이성 주도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으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진 성령 주도적인 인간입니다. 물론 사람은 육체를 입었기에 육체적인 욕망이 있고, 정신을 가졌으므로 합리성도 추구하며, 또한 기술도 있고 능력이 있기에 생산도 하며 돈을 벌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육체 주도적인 인간이냐 이성 주도적인 인간이냐, 아니면 성령 주도적인 인간이냐가 가늠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9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이 그 안에 내재하셔서 성령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령 주도적이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선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뜻입니다. 흔히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도 내가 기도해서 하나님이 보상하시고, 내가 선하고 의롭게 살아서 하나님이 그에 따른 보상을 주신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얼핏보기에는 율법적인 요소가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우리 인간은 응답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약속과 성취의 전철로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로 이끄시고 인간은 따라가는 것이 성경적 진리입니다. 이것을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고 착하면 부모님들은 칭찬을 하며 상을 주기도 하고, 잘못했을 때에는 책망도 하고 때리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 자식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주도하고 부모가 보상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전적으로 부모가 주도하고 자녀들은 순응하는 것뿐입니다. 자녀들이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부모님은 아픈 마음으로 바로 인도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잘하면 기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차이가 있을 뿐, 부모가 주도적인 사랑으로 이끌어간다는 데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전적인 은혜로써 우리에게 역사하시며, 우리는 이 은혜 앞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들이 요구할 때마다 필요한 대로 주시면 좋을 텐데, 하나님은 왜 약속을 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좀 조급한 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적 약속에는 하나님께서 정한 시기와 방법이 있습니다. 아니,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기 때문에 받을 자격을 키워서 주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요구한다고 해서 땅문서를 주는 부모가 있습니까? 요구한다고 해서 그대로 즉석에서 줄 수는 없으며, 주어서는 안 될 시기이면 먼저 약속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아이들을 다 키웠습니다만 요즘 유아 교육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면 지난날의 잘못된 교육에 대해 후회가 많습니다. 그 교육 내용은 신학적인 것으로, 약속과 성취에 대한 바른 오리엔테이션을 가정교육에서부터 이루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무엇인가 요구할 때, 당장 주지 말고 우선 약속부터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을 했으면 그 때가 될 때까지는 아무리 떼를 쓰고 울어도 주지 말되 일단 약속한 것은 비록 아이가 잊고 있어도 약속한 때에 주는 그러한 훈련을 가정에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약속과 성취에 대한 신의가 생기면 10년 후에 준다고 해도 그런 줄로 알고 믿게 됩니다. 또한 기다린다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운 줄로 알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훈련은 여러 방향으로 확산되어 공부할 시기에 공부하지 않으면 늙어서 고생한다는 말도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지 않겠다고 말해 놓고도 떼쓰면 주고, 주겠다고 했다가도 까맣게 잊어 버려 아이들과의 소중한 약속을 쉽게 저버리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런 불신이 쌓이고 쌓여서 약속을 믿지 않을 뿐더러, 약속을 기다리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민족이 된 것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 보면 신호등에 대해 당연히 지켜야 할 그 작은 약속에도 우리의 조급함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빨간 신호등에서 파란 신호등으로 바뀌는 그 찰나에 누군가가 재어 보았더니 평균적으로 파란 등이 켜지기 4초 전에 미리 떠난다는 것입니다. 4초를 기다리지 못해 떠나다니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어릴 적부터 가정교육이 잘못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어음입니다. 약속어음은 당장에 현금화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약속 시간이 되어야 돈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한을 믿고 기다리며 오늘 내게 주신 바에 대해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면서 우리가 자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중생을 통하여 태어나게 하고 성령을 통하여 성장하며 성숙하게 되어, 그 어느 수준에까지 이르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그 수준에 이르러야 약속하신 그 선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실인즉 조급한 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라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받을만한 자가 될 때를 안타깝게 기다리고 계신단 말입니다.

성경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구할 때까지 기다려서 그 자격을 갖춘 다음에 주시는 것입니다. 받을 그릇을 준비하지 못해 받지 못하는 우리도 다급하지만, 주고 싶어도 주시지 못하는 하나님은 더더욱 마음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믿음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주시고자 하는 시간과 방법을 우리가 이행하도록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도 약속의 성취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오셨고 말씀을 주셨으며 역사 하셨고, 그리고 다시 재림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생활 속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하여 약속을 주시고 성취하시고 또 약속하시고 성취하시는 일들을 계속 반복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분할 성취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분할 성취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리라. 권능을 받으리라.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그러면 그것을 받고나서 귀한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종말론적인 약속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크게 두 가지를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성령의 세례를 받으리라는 약속입니다. 세례는 기독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세례 자체가 신학적 의미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난 부활절에 우리 교회에서는 60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만 대단히 중요한 의식입니다. 신학적인 의미로 설명하면, 옛 사람은 완전히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그 귀한 사건이 이 현실 속에 나타난 상징입니다. 이제 율법으로 죽고 은혜로 살며, 나 자신으로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인간, 세속적인 인간으로 죽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성령 주도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역사가 세례이며, 성령이 임하면 이런 일이 이루어지겠다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오는 엄청난 변화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것은 생명적인 변화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신앙 생활을 "매일 세례"라는 한마디로 표현했습니다. 매일 죽고 매일 사는 것입니다. 세속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것을 계속 매일 죽이고, 그리스도적인 것으로 계속 살아나는 역사입니다.

이제 성령은 내 안에 계시며, 그가 주도하십니다. 내 생각도 내 주장도 내 목적도 방법도 전부 성령이 주도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순간순간 임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할 때 기탄 없이 수천 명 앞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무식한 자였으나 그가 설교할 때 많은 사람이 감탄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충만하여 그의 언어와 지식을 성령이 주도하고 계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이용하셔서 역사 하신 순간입니다. 또한 그는 성령이 충만할 때 비상한 용기를 가졌습니다. 어떤 비난이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어떤 오해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매맞고 핍박을 받으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들으랴, 하나님 말씀을 들으랴. 너희가 판단하라"고 대단히 위트 있는 말을 했습니다. 이런 비상한 용기와 여유는 바로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온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선택함에 있어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선택의 연속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직업을 선택하고 사람을 선택하고 순간순간 사건 속에서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그 때마다 성령이 나의 선택을 인도하여 영적인 방향으로, 영원한 가치의 것으로, 그리스도적인 것으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성령은 내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어쩌면 이 변화는 자기도 모르게 변화하는 무의식적인 변화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오늘 교회에 처음으로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처음부터 딱부러지게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 세 번 거듭나오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에 달라지게 됩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술 마시기 경연 대회에서 연 4년을 제패한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의 강권에 이기지 못하여 교회를 나왔다가 계속해서 몇 주일 나온 뒤에 저를 만났습니다. 그는 "목사님, 목사님의 말씀은 잘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마는 그런 대로 재미가 있어서 몇 주일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점점 술맛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웬일일까요? 이러다가 술 끊게 될까봐 걱정입니다"하고 농반진반으로 이야기하는데,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성령은 나의 성격, 취향, 그리고 입맛까지도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바로 어제도 어느 부인이 그 동안 귀하게 간직하던 다이아 반지와 노리개 등 귀한 보석을 모두 가지고 와서 고백했습니다. "이전에는 그렇게도 소중했던 물건인데, 이제는 이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세상에 어려운 사람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이것들을 팔아서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고백이었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면 취향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지고 성격까지도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계속되어서 어느 수준에 이르면 깜짝 놀랄 만큼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에 다니고도 아직 변화가 없다면 분명히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혹 가룟 유다의 후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고도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으니까요. 아무튼 변화하지 못한 자는 그 신앙에 뭔가 이상이 있음을 자각해야 하겠습니다. 성령이 내재하면 내 생각, 내 존재, 즉 나의 나됨을 변화시키고 계속적으로 인쳐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주도권을 행사하여 "너는 내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고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항상 우리를 세례로 인도하십니다.

둘째로, 본문에서는 "권능을 받으리라"고 약속을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습니다. 이 권능은 우선 죄를 이기고 죄책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그를 부인하고 도망갔던 제자입니다. 그런데 불과 50일쯤 후에 3천 명 앞에서 담대하게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베드로의 마음속에서도 "내가 어떻게 감히 예수님을 전할 수 있을까?"하는 망설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을 이기는 힘이 성령입니다. 그는 죄를 이기고, 죄책을 이기고, 죄로 말미암은 저주를 이기고, 율법을 이기는 권능을 받아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권능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고 존경을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 : 12). "예수의 이름으로 고쳤으니 조금도 우리를 특별나게 보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 교만을 극복하는 대단히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자기 명예욕을 극복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령 받은 성도들은 욕심을 극복했습니다. 그리하여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유무 상통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권능은 협소한 민족주의의 문화적 장벽을 극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이방 사람이라고 멸시하던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권능은 고난과 핍박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오히려 핍박받을 때에 기뻐하며 공회로 나오리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손해보고 예수 이름으로 매맞을 때에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하며 기뻐했습니다. 이 권능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나아가서 죽음을 이기는 엄청난 힘입니다. 그러기에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안 되는 것을 성령만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에게만 능력이 있어 나를 죽이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어 증인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권능을 받고, 그리고 증인이 되면 또다른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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