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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근원이 된 사람(창세기 22장 11절~19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잘살지 못하면 사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살지 못하면 잘사는 것이 아니다'---깊이 생각해봅시다. 숨을 쉰다고 살아 있는 것일까요? 먹고 입으면 사는 것일까요? 사람답게 살아야 사는 것입니다. 성도답게 살아야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굴욕스러워하고 저주스러워하며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영원히 살아야 잘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행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시적인 칭찬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찰나적인 육체의 만족, 본능의 충족, 성취감---이런 것들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들입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한 장로님은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으로, 20여 년 동안에 공로가 많다 하여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상받은지 한 달도 채 못되어서, 잘못된 일이 있다고 좌천되어 섬으로 쫓겨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장로님 하시는 말씀이 "그럴 것이었다면 상이나 주지 말지……" 세상일이라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상받았다고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상은 영광도 아닙니다.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사는 것, 영원히 빛나는 삶을 사는 것이 잘사는 것입니다.
또한, 나 혼자만이 행복해서 복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배불리 먹지만 이웃이 굶고 있다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중환자실에서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면 내가 건강하다 할지라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다같이 건강해야 행복한 것이지요. 참된 복이란 나 하나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같이 행복해야 하고 다같이 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위해 주신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사자로 삼으실 때에 처음으로 주신 말씀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입니다. 창대한 것도 복이요, 이름이 높아지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큰 축복은 복의 근원이 되는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복되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만이 복되다는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가정이 복되고, 그의 민족이 복되다는 뜻입니다. 그가 복됨으로 인해 만백성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래서 복의 근원이며, 그래서 참으로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계시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조상이 계시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과 조상께 고마워하십니까? 그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십니까? '많은 사람 중에서도 이렇게 귀한 할아버지를 내게 주시고, 또 이러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셔서 오늘의 내가 있게 하심을 하나님께 감사한다'---이런 마음이 듭니까?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꼭 반대로 생각합니다. '내 팔자가 하필이면 왜 요모양이람. 하필이면 왜 이런 부모에게서 태어났담'---나의 아버지가 누구이며 어머니가 누구라고 말하기 부끄러워할 정도로 자신이 그 집안에 태어난 것을 저주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이따금 봅니다. 기왕 시작된 이야기이지만 일단 여기서 접어두기로 합시다. 이제는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됩니다. 좀 있으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것이고, 이윽고는 아무개의 조상이 될 것입니다. 내 아들, 내 손자, 내 후손이 앞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무엇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우리 할머니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내가 있다'---이렇게 고마워할 것 같습니까? 과연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하필이면 이런 조상에게서 내가 태어났담'---이런 원망(怨望)은 듣지 않을까요? 내가 복을 물려줄 것인가 저주를 물려줄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이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나 하나'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될 때에 자자손손(子子孫孫) 수천 대에까지 복을 받게 되고, 내가 복되지 못할 때에는 3, 4대까지 저주스러운 생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담은 우리에게 죄와 사망을 물려주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에덴동산의 아담 할아버지와 하와 할머니가 별로 고맙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생명과 소망을 기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지만, 그 복을 받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복스러운 환경과 복스러운 여건을 주신 것이 아니라, 많은 시련 속에서 복된 사람으로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어떤 복을 주고 싶습니까? 그저 일생동안 돈걱정 안하며 무사태평으로, 안일하게 살도록 해주고 싶습니까? 잘못된 생각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결혼하자마자 좋은 집에 사는 것을 보면 좀 불행한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 차라리 조금 가난하고, 조금 병든 것이 낫습니다. 좀 실패하고, 더러 낙방하면 어떻습니까? 좋은 사람, 진실한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만 된다면 인생의 조그만 흠이 대수겠습니까? 이것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진정한 복입니다.
미국 후생국의 한 여직원이 하루는 열두 살 난 절름발이 소년을 의사에게 데려왔습니다. 의사가 진찰해본즉, 수술을 하면 완치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의사는 이 소년을 불쌍히 여겨 무상(無償)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정성스러운 치료 끝에 이 소년은 다른 아이들처럼 자유로이 걷고 뛰어 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흐뭇한 일이 있은 지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의사는 우연하게도 그 옛날 소년을 데리고 왔던 후생국 여직원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옛날 생각이 나서 "그 소년, 지금은 의젓한 어른이 되었겠군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성공해서 잘 살고 있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하고 그 여자가 반문합니다. "불쌍한 가운데서 절름발이를 면했으니 의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과학자가 되었나요?" "아닙니다." "사업가가 되었나요?" "아닙니다." "그렇다면요?" 의사의 표정이 무거워졌습니다. 순간, 그 여자는 청천벽력 같은 대답을 합니다. "강도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감옥에 있습니다." 여직원은 침통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고쳐서 다리는 성하게 해주었지만, 어디는 가야하고 어디는 가지 말아야 하는지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은 들어야 하고 무슨 말은 듣지 말아야 하는지,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못 걷다가 성한 다리를 얻었으니 제멋대로 뛰어다니다가 그 꼴이 된 것이지요."
여러분,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진정한 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무엇이 진정한 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는 과정을 보면 야박스럽기도 하십니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 왜 그러실까' 싶을 정도입니다. 남의 땅에 사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괴로운 일인데,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옛날 무법천지,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그 시절에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방황해야 하는 나그네 신세가 됩니다. 오늘은 여기에 천막을 치고 내일은 저기에 천막을 쳐야 하는 유목민으로, 방랑객으로 평생을 삽니다.
성경은 이렇게까지 말씀합니다. '발붙일 만큼도 땅을 주시지 않았다' 이렇게 살았는데 무엇이 복되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듭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다'---시간적으로도 아브라함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오랫동안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으면 열달 후에 선뜻 주실 것이지 25년이나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늙어서 조급한데, 아브라함이 75세 때에 말씀하신 것을 25년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주십니다. 그것도 듬뿍 주신 것이 아니라 달랑 외아들 하나---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큰 경륜과, 지혜와, 섭리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을 찾아 헤매게 하시고, 약속의 자녀를 받아 간직하는 복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의 피크(peak)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절정에 달한 복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준비되는 것을 기다려 자격이 된 다음에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복을 미리 준비해놓고 그것을 받을만한 자(者)로 준비시키십니다. 준비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험이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말씀합니다. 시험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왜 시험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이 큰복을 받을 수 있도록 친히 준비케 하셨습니다. 우선 지혜를 준비시키셨습니다. 복을 복으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알고 보면 정말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복은 소유(所有)가 아니라 깨달음입니다. '내가 복되다'고 깨닫는 데에 복이 있습니다. 복이라고 하는 색다른 환경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아는 지혜를 준비시키시고, 그리고 복을 지키는 겸손을 허락하십니다. 복이란 받는 사람의 겸손만큼만 받게 되어 있습니다. 백만 원 주었을 때에 겸손하던 사람이 일억 원을 주었을 때에 교만해졌습니다. 백만 원짜리 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 이상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요. 제 처지가 높아지면 교만해지고, 낮아지면 겸손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 지경으로 살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교만 때문에 더 큰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꼭 죽을 지경이 되어야만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도 그저 그런 지경으로 살아야 되겠어요. 그 사람이 가진 복의 그릇이 고작 그 정도인걸요. 여러분, 복중의 가장 큰복이 겸손의 복입니다. 내가 겸손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넣으십니다. 몰아붙이십니다. 시련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이며, 바로 여기에 복의 근원이 있고, 복의 출발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복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돈을 주셨으면 돈을 감당해야지요. 명예를 주셨으면 명예를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복된 자로 키워주시되, 그 복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 또한 키워주십니다.
발명왕 에디슨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그가 젊었을 때에 실수로 고막을 다쳤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귀가 더욱더 어두워지자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수술을 하면 고칠 수 있다는 말에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술 날짜를 정해놓고는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 갔나 하고 한참을 찾아보았더니 천연스럽게 연구실에 앉아 있더랍니다. "선생님! 귀를 고치지 않으실 작정입니까? 그대로 있다가는 귀머거리가 되고 맙니다." 의사가 말하자, 에디슨이 대답하는 것 좀 보십시오.
"거 시시하고 시끄러운 세상 잡소리는 안 듣는 게 훨씬 편하겠어요. 차라리 귀머거리로 사는 것이 연구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적당히 들어두면 될 것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들어 말썽이지요. 귀가 너무 밝아서 말썽입니다. 안 들어도 될 말을 많이 들어서 번민이 생기고 괴롭습니다. 신앙에 손해만 입습니다.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귀머거리로 사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보아서 신앙에 금이 갈 바에는 차라리 장님 되는 것이 낫습니다. 돈 많아서 사람이 허탄해질 것이면 차라리 가난한 편이 낫습니다.
변변치 않은 세상의 명예, 지위, 지식---이런 것들 때문에 세상은 참 많이도 시끄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참복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귀중한 약속을 주셨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시험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사실인즉 시험의 뜻을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시험의 종말이 어떻게 될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믿고 따라갔습니다. "이 시험의 끝은 무엇입니까? 이대로 순종하면 나에게 어떤 복을 주실 것입니까"라고 여쭈어보지 않았습니다. 여쭐 수도 없었고 여쭐 필요도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했을 뿐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을 시험한 그 시험의 성격을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에게는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식, 명예, 자식, 체면, 위신…… 사람마다 나름대로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씩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 가장 귀한 것-----여기에 시험의 거점(據點)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아브라함으로서 가장 귀히 여기는 아들을 달라고 하십니다. 정말 큰일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나서 그는 생각합니다.
'아들이냐 하나님이냐? 하나님이냐 아들이냐?'-----역시 하나님입니다. 아들일 수가 없지요. 가장 귀한 것을 몰아내고, 그 우상의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기를 원합니다. '네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것을 아끼지 말고 내놓으라.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되겠다'---이것이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합리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하는' 복을 받자면 아들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장가도 안든 이 아들을 내놓으라 하십니다. 때로는 이치에 맞는 말씀으로 시험하기도 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에도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는 살인을 하라는 것---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과감하게 나의 생각, 판단, 지식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나의 생각, 나의 판단을 깨끗이 십자가에 못박는 그 순간, 모리아 산에서의 장엄한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성경구절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당장 바쳐라'하신다면 조금이라도 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흘길'을 걸어갑니다.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는 그 사흘길---삼추(三秋)인들 그렇게 길고 힘들었을까요? 여러분, 혹시 오늘이라도 누가 예수 믿으면 죽인다고 총을 들이대고 '예수 믿느냐' 협박하면 '믿습니다!'라고 담대히 말하고 죽는 것---그것은 쉽습니다. 저도 그런 자리에 한번 서본 적이 있는데, 별로 어렵지 않습디다. 그 사람이 방아쇠만 당기면 저는 한순간에 순교의 영광을 입습니다. 힘 안들이고 말입니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순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간을 주고 인내력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사흘길을 가는 동안 아들이 말을 겁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다 준비되었는데, 제물로 쓸 양은 어디에 있어요?' 이 순간의 아브라함의 심경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흘길의 고통과 힘겨움---그러나 아브라함은 끝내 이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합니다. 그제야, 참으로 그제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마라! 네가 하나님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을 만큼 나를 사랑하는구나'라고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더욱 감사하였겠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툴툴거리지나 말 것을……내가 왜 기쁜 마음으로 주를 따라가지 못했을까? 왜 찬송하며 모리아 산으로 향하지 못했을까? 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했던가?'하며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준비하십니다. 그러나, 주시려고 할 때에는 하나의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너의 가장 귀한 것을 내놓아라---공연한 걱정은 모두 다 털어 버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전진합시다. 그때에 주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다시 우리에게 주신 복을 확인해주실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복의 근원이 된 사람(창세기 22장 11절~19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잘살지 못하면 사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살지 못하면 잘사는 것이 아니다'---깊이 생각해봅시다. 숨을 쉰다고 살아 있는 것일까요? 먹고 입으면 사는 것일까요? 사람답게 살아야 사는 것입니다. 성도답게 살아야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굴욕스러워하고 저주스러워하며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영원히 살아야 잘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행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시적인 칭찬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찰나적인 육체의 만족, 본능의 충족, 성취감---이런 것들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들입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한 장로님은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으로, 20여 년 동안에 공로가 많다 하여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상받은지 한 달도 채 못되어서, 잘못된 일이 있다고 좌천되어 섬으로 쫓겨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장로님 하시는 말씀이 "그럴 것이었다면 상이나 주지 말지……" 세상일이라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상받았다고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상은 영광도 아닙니다.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사는 것, 영원히 빛나는 삶을 사는 것이 잘사는 것입니다.
또한, 나 혼자만이 행복해서 복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배불리 먹지만 이웃이 굶고 있다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중환자실에서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면 내가 건강하다 할지라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다같이 건강해야 행복한 것이지요. 참된 복이란 나 하나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같이 행복해야 하고 다같이 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위해 주신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사자로 삼으실 때에 처음으로 주신 말씀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입니다. 창대한 것도 복이요, 이름이 높아지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큰 축복은 복의 근원이 되는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복되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만이 복되다는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가정이 복되고, 그의 민족이 복되다는 뜻입니다. 그가 복됨으로 인해 만백성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래서 복의 근원이며, 그래서 참으로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계시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조상이 계시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과 조상께 고마워하십니까? 그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십니까? '많은 사람 중에서도 이렇게 귀한 할아버지를 내게 주시고, 또 이러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셔서 오늘의 내가 있게 하심을 하나님께 감사한다'---이런 마음이 듭니까?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꼭 반대로 생각합니다. '내 팔자가 하필이면 왜 요모양이람. 하필이면 왜 이런 부모에게서 태어났담'---나의 아버지가 누구이며 어머니가 누구라고 말하기 부끄러워할 정도로 자신이 그 집안에 태어난 것을 저주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이따금 봅니다. 기왕 시작된 이야기이지만 일단 여기서 접어두기로 합시다. 이제는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됩니다. 좀 있으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것이고, 이윽고는 아무개의 조상이 될 것입니다. 내 아들, 내 손자, 내 후손이 앞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무엇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우리 할머니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내가 있다'---이렇게 고마워할 것 같습니까? 과연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하필이면 이런 조상에게서 내가 태어났담'---이런 원망(怨望)은 듣지 않을까요? 내가 복을 물려줄 것인가 저주를 물려줄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이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나 하나'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될 때에 자자손손(子子孫孫) 수천 대에까지 복을 받게 되고, 내가 복되지 못할 때에는 3, 4대까지 저주스러운 생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담은 우리에게 죄와 사망을 물려주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에덴동산의 아담 할아버지와 하와 할머니가 별로 고맙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생명과 소망을 기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지만, 그 복을 받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복스러운 환경과 복스러운 여건을 주신 것이 아니라, 많은 시련 속에서 복된 사람으로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어떤 복을 주고 싶습니까? 그저 일생동안 돈걱정 안하며 무사태평으로, 안일하게 살도록 해주고 싶습니까? 잘못된 생각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결혼하자마자 좋은 집에 사는 것을 보면 좀 불행한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 차라리 조금 가난하고, 조금 병든 것이 낫습니다. 좀 실패하고, 더러 낙방하면 어떻습니까? 좋은 사람, 진실한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만 된다면 인생의 조그만 흠이 대수겠습니까? 이것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진정한 복입니다.
미국 후생국의 한 여직원이 하루는 열두 살 난 절름발이 소년을 의사에게 데려왔습니다. 의사가 진찰해본즉, 수술을 하면 완치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의사는 이 소년을 불쌍히 여겨 무상(無償)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정성스러운 치료 끝에 이 소년은 다른 아이들처럼 자유로이 걷고 뛰어 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흐뭇한 일이 있은 지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의사는 우연하게도 그 옛날 소년을 데리고 왔던 후생국 여직원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옛날 생각이 나서 "그 소년, 지금은 의젓한 어른이 되었겠군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성공해서 잘 살고 있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하고 그 여자가 반문합니다. "불쌍한 가운데서 절름발이를 면했으니 의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과학자가 되었나요?" "아닙니다." "사업가가 되었나요?" "아닙니다." "그렇다면요?" 의사의 표정이 무거워졌습니다. 순간, 그 여자는 청천벽력 같은 대답을 합니다. "강도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감옥에 있습니다." 여직원은 침통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고쳐서 다리는 성하게 해주었지만, 어디는 가야하고 어디는 가지 말아야 하는지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은 들어야 하고 무슨 말은 듣지 말아야 하는지,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못 걷다가 성한 다리를 얻었으니 제멋대로 뛰어다니다가 그 꼴이 된 것이지요."
여러분,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진정한 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무엇이 진정한 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는 과정을 보면 야박스럽기도 하십니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 왜 그러실까' 싶을 정도입니다. 남의 땅에 사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괴로운 일인데,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옛날 무법천지,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그 시절에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방황해야 하는 나그네 신세가 됩니다. 오늘은 여기에 천막을 치고 내일은 저기에 천막을 쳐야 하는 유목민으로, 방랑객으로 평생을 삽니다.
성경은 이렇게까지 말씀합니다. '발붙일 만큼도 땅을 주시지 않았다' 이렇게 살았는데 무엇이 복되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듭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다'---시간적으로도 아브라함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오랫동안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으면 열달 후에 선뜻 주실 것이지 25년이나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늙어서 조급한데, 아브라함이 75세 때에 말씀하신 것을 25년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주십니다. 그것도 듬뿍 주신 것이 아니라 달랑 외아들 하나---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큰 경륜과, 지혜와, 섭리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을 찾아 헤매게 하시고, 약속의 자녀를 받아 간직하는 복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의 피크(peak)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절정에 달한 복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준비되는 것을 기다려 자격이 된 다음에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복을 미리 준비해놓고 그것을 받을만한 자(者)로 준비시키십니다. 준비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험이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말씀합니다. 시험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왜 시험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이 큰복을 받을 수 있도록 친히 준비케 하셨습니다. 우선 지혜를 준비시키셨습니다. 복을 복으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알고 보면 정말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복은 소유(所有)가 아니라 깨달음입니다. '내가 복되다'고 깨닫는 데에 복이 있습니다. 복이라고 하는 색다른 환경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아는 지혜를 준비시키시고, 그리고 복을 지키는 겸손을 허락하십니다. 복이란 받는 사람의 겸손만큼만 받게 되어 있습니다. 백만 원 주었을 때에 겸손하던 사람이 일억 원을 주었을 때에 교만해졌습니다. 백만 원짜리 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 이상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요. 제 처지가 높아지면 교만해지고, 낮아지면 겸손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 지경으로 살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교만 때문에 더 큰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꼭 죽을 지경이 되어야만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도 그저 그런 지경으로 살아야 되겠어요. 그 사람이 가진 복의 그릇이 고작 그 정도인걸요. 여러분, 복중의 가장 큰복이 겸손의 복입니다. 내가 겸손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넣으십니다. 몰아붙이십니다. 시련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이며, 바로 여기에 복의 근원이 있고, 복의 출발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복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돈을 주셨으면 돈을 감당해야지요. 명예를 주셨으면 명예를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복된 자로 키워주시되, 그 복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 또한 키워주십니다.
발명왕 에디슨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그가 젊었을 때에 실수로 고막을 다쳤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귀가 더욱더 어두워지자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수술을 하면 고칠 수 있다는 말에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술 날짜를 정해놓고는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 갔나 하고 한참을 찾아보았더니 천연스럽게 연구실에 앉아 있더랍니다. "선생님! 귀를 고치지 않으실 작정입니까? 그대로 있다가는 귀머거리가 되고 맙니다." 의사가 말하자, 에디슨이 대답하는 것 좀 보십시오.
"거 시시하고 시끄러운 세상 잡소리는 안 듣는 게 훨씬 편하겠어요. 차라리 귀머거리로 사는 것이 연구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적당히 들어두면 될 것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들어 말썽이지요. 귀가 너무 밝아서 말썽입니다. 안 들어도 될 말을 많이 들어서 번민이 생기고 괴롭습니다. 신앙에 손해만 입습니다.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귀머거리로 사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보아서 신앙에 금이 갈 바에는 차라리 장님 되는 것이 낫습니다. 돈 많아서 사람이 허탄해질 것이면 차라리 가난한 편이 낫습니다.
변변치 않은 세상의 명예, 지위, 지식---이런 것들 때문에 세상은 참 많이도 시끄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참복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귀중한 약속을 주셨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시험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사실인즉 시험의 뜻을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시험의 종말이 어떻게 될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믿고 따라갔습니다. "이 시험의 끝은 무엇입니까? 이대로 순종하면 나에게 어떤 복을 주실 것입니까"라고 여쭈어보지 않았습니다. 여쭐 수도 없었고 여쭐 필요도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했을 뿐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을 시험한 그 시험의 성격을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에게는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식, 명예, 자식, 체면, 위신…… 사람마다 나름대로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씩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 가장 귀한 것-----여기에 시험의 거점(據點)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아브라함으로서 가장 귀히 여기는 아들을 달라고 하십니다. 정말 큰일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나서 그는 생각합니다.
'아들이냐 하나님이냐? 하나님이냐 아들이냐?'-----역시 하나님입니다. 아들일 수가 없지요. 가장 귀한 것을 몰아내고, 그 우상의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기를 원합니다. '네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것을 아끼지 말고 내놓으라.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되겠다'---이것이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합리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하는' 복을 받자면 아들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장가도 안든 이 아들을 내놓으라 하십니다. 때로는 이치에 맞는 말씀으로 시험하기도 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에도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는 살인을 하라는 것---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과감하게 나의 생각, 판단, 지식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나의 생각, 나의 판단을 깨끗이 십자가에 못박는 그 순간, 모리아 산에서의 장엄한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성경구절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당장 바쳐라'하신다면 조금이라도 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흘길'을 걸어갑니다.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는 그 사흘길---삼추(三秋)인들 그렇게 길고 힘들었을까요? 여러분, 혹시 오늘이라도 누가 예수 믿으면 죽인다고 총을 들이대고 '예수 믿느냐' 협박하면 '믿습니다!'라고 담대히 말하고 죽는 것---그것은 쉽습니다. 저도 그런 자리에 한번 서본 적이 있는데, 별로 어렵지 않습디다. 그 사람이 방아쇠만 당기면 저는 한순간에 순교의 영광을 입습니다. 힘 안들이고 말입니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순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간을 주고 인내력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사흘길을 가는 동안 아들이 말을 겁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다 준비되었는데, 제물로 쓸 양은 어디에 있어요?' 이 순간의 아브라함의 심경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흘길의 고통과 힘겨움---그러나 아브라함은 끝내 이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합니다. 그제야, 참으로 그제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마라! 네가 하나님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을 만큼 나를 사랑하는구나'라고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더욱 감사하였겠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툴툴거리지나 말 것을……내가 왜 기쁜 마음으로 주를 따라가지 못했을까? 왜 찬송하며 모리아 산으로 향하지 못했을까? 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했던가?'하며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준비하십니다. 그러나, 주시려고 할 때에는 하나의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너의 가장 귀한 것을 내놓아라---공연한 걱정은 모두 다 털어 버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전진합시다. 그때에 주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다시 우리에게 주신 복을 확인해주실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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