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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예배자의 관심(누가복음 18장 9절~14절)

by 【고동엽】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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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예배자의 관심(누가복음 18장 9절~14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名將) 한니발(Hannibal)은 눈이 하나밖에 없는 애꾸였습니다. 하루는 그의 집으로 화가를 불러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합니다. 화가는 한쪽 눈이 감긴 모습을 정직하게 사실 그대로 그립니다. 그러나 완성된 그림을 본 한니발 장군은 대로(大怒)합니다. "왜 이렇게 병신 꼴로 그렸느냐!" 장군은 화가를 끌어내어 목을 치라고 명합니다. 그 화가는 그림 하나 그린 댓가로 죽고 맙니다. 장군은 다시 다른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그리게 합니다. 앞서의 화가가 눈 하나 없는 모습을 곧이곧대로 그렸다가 화를 당했다 --- 이 사실을 알고 온 화가는 한니발의 초상을 두 눈이 다 성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한니발 장군은 이번에도 대로합니다. "내 눈이 어째서 둘이냐? 하나밖에 없는 눈이 네 눈에는 둘로 보인단 말이냐? 이건 내가 아니라 딴사람이 아니냐! 괘씸한지고." 이 화가도 역시 참수(斬首)를 당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불려와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생명을 부지합니다. 그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도록 한니발의 옆모습을 그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서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 어디에 관심을 두느냐가 문제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 관심의 향방이 문제입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나의 세계관과 나의 생활 철학에 따라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내 생각의 향방에 따라서 성공한 것도 되고 실패한 것도 됩니다. 관심의 향방, 마음의 향방(向方)이 중요한 것입니다. 돈, 명예, 지식, 지위를 다 가졌다 해도 내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해 있으면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관심,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관심은 바로 '의(義)'입니다. 의를 최대의 관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쉬운 예로, 여러분이 지금 임종을 맞는다고 생각해봅시다. 이제 죽는 시각인데 재산이 소용 있습니까? 장수한 것이 보람입니까? 지식이나 명예가 무슨 소용입니까? 오직 하나,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설 것인가 --- 의(義)만이 문제가 됩니다. 내가 의롭게 살아왔나 돌아볼 때에 뉘우치고 후회하게 됩니다. 의가 침해될 때에는 존재를 상실하는 아픔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돈을 잃어버린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명예를 잃어버리면 참기 어려운 것이 사람입니다. 하물며 나의 의가 짓밟힐 때에야 그 고통이 엄청날 수밖에 없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배만 부르다고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의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의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의'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나의 의입니다. 나의 세계관, 양심의 기준에 따라 스스로 세운 의입니다. 그것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둘째는 상대적인 의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가 낫다거나 못하다고 비교하게 되는 의입니다.
동시에, 비교하면서 이웃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의가 있습니다. 상대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하기보다는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힘쓴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되기 위하여 노력한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의인이라 칭해주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신경을 쓰다보니 진실이 결여되고 불행해집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 있고, 이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 --- 곧 궁극적인 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통합적(統合的)인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이 인정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때에는 나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도 지지해주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또 의가 무너집니다. 간혹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내게도 옳고 하나님 앞에도 진실하고 하나님도 의롭다 하시는 것이 틀림없는데 사람들이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외롭고 고독한 길입니다. 이것이 순교자의 길이요 성도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갈 때에야 그 마음이 평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셨고 스스로 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예배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요, 하나님께 나를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예배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종교개혁자 칼뱅(Calvin) 은 그의「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다." 바로 그 다음 장에서는 다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에 대한 지식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한, 나의 존재는 없어집니다. 내가 나를 알 때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나 자신을 아는 것은 한 사건 속에서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동안에 내가 나를 알게 되고 나의 진실을 찾으면서 하나님을 밝히 알게 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예배만은 성실해야 됩니다. 여기에 내 존재의 의미가 있고 생명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을 봅시다. 두 사람이 성전으로 올라가 예배를 드립니다. 여기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둘 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둘째, 둘 다 의에 관심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의가 문제입니다. 셋째, 각각 자기를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면서,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스스로 성찰하고 나의 의를 살피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 내용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볼 때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자기가 잘한 것을 자랑하며 자기 의를 내세우다가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합니다. 그의 예배는 실제로는 예배하는 겉모습뿐이었습니다. 끝내 그는 참예배 없이 성전을 나오게 됩니다. 반면, 세리는 자기 의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죄인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죄인입니다 하며 울부짖던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고 기쁜 마음으로 성전을 나서게 됩니다. 예배의 궁극적 관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는 데에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예배에 실패했습니다. 그 실패의 원인을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해주십니다. 이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십시다. "하나님이여" 하고 한마디 불러 놓고는 "나는……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이라는 말이 우리 성경에는 두 번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세 번 있습니다.
나는 이렇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 시종일관 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하나님도 못보고 이웃도 보지 못합니다. 아주 어리석은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나를 구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옆 사람을 의식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남보다 내가 더 의롭다, 내가 더 진실하다고 구별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순간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대만에 가면 진(眞)이라는 이름을 붙인 교회가 있습니다.
「진교회」--참된 교회라고 이름을 지어 붙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다른 교회가 예배당을 지으면서「진진교회」라고 이름을 지었고, 또하나의 다른 교회는「진진진교회」라고 이름을 짓더랍니다. 저마다 자기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이「소망교회」인데, 서울 안에만「소망교회」라는 이름을 붙인데가 서른 곳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구분을 위해서 보통 '어느동 소망교회'라고 부르기도 합디다마는 어느 동네를 가보니 「새소망교회」라고 이름을 붙였더군요. 아마도 우리 교회는「낡은 소망교회」로 치부하는가봅니다. 여기까지도 그렇다 치고 큰 걱정이 하나 있습니다.「참소망교회」가 출현할까봐 걱정입니다.
자기네가 참이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사람들마다 자기를 좀더 돋보이게, 좀더 낫게, 좀더 거룩하게 보이고자 하는 의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별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이러한 구별 의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육학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녀들이 밖에서 싸우고 터져 들어왔을 때에 "다른 아이들은 못돼먹어도 상관없지만, 너만은 그러면 안된다"고 훈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특별하다 --- 이렇게 자녀를 교육하다가는 보통아이들보다 더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특별하지 않고. 내 자식도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나를 특별히 구별지어 생각하는 마음 자체가 큰 우상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꽤나 노골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절)"--바리새인은 큰소리로 기도합니다. 교만한 사람입니다. 나만이 특별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멸시 경멸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옛날 랍비의 기도문 가운데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학원에 있는 자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길 모퉁이에 앉아 있는 자들과 있게 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나이다. 나도 일찍 일어나고 그들도 일찍 일어납니다. 나는 율법의 말씀에 따라 일찍 일어나고 그들은 헛된 일을 위해서 일찍 일어납니다. 나도 노동을 하고 그들도 노동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수를 받으나 저들은 보수가 없습니다. 나도 뛰고 그들도 뛰나이다. 나는 다가오는 세상의 생명을 향해 달리지만 그들은 파멸의 함정을 향해 달리는 것을 감사하나이다." 참으로 감사할 것이 많기도 합니다. 이 얼마나 그릇된 생각입니까? 아주 교만한 태도입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이틀이 아니고 두 끼니입니다. 본래 경건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 금식하는 풍속을 지킵니다, 그러나 나는 두 번씩 금식한다, 나는 그들보다 더 경건하다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이고 외식(外飾)적인 자랑입니다. 외적으로 자신을 떠벌이는 사람치고 내면으로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음이 교만하여 생기는 일입니다.
자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지적인 자랑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뭣 좀 더 안다고 해서 우쭐거립니다. 또 민족적인 자랑이 있습니다. 특별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은 사회학적인 자랑도 있습니다. 재산이 더 많다, 신분이 높다, 양반이다, 별것도 아닌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무서운 자랑은 영적 교만(spiritual pride)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기도를 많이 하였다고 자랑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교만입니다. 언젠가 한 교우가 내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목사님, 저를 아십니까?" 대뜸 이렇게 묻더군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목사님! 제가 40일을 금식기도한 사람인데 저를 모르십니까?" 금식한 것이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명함에다 이렇게 써넣고 다닙디다 - '40일 금식기도 두 번.'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생각해봅시다. 기도를 많이 했다고 다 이루어집니까? 하나님께서 들으셔야 합니다. 내가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선행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선행이 됩니다. 깊이 생각하십시다. 내가 사람 앞에 어떤 모습으로 보이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마 6:3)" ---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은밀한 곳에서 보시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선행과 기도와 헌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나는 금식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 외적인 형식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의로움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과 나만의 비밀스러운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랑하던 바리새인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기의 의를 내세워서 하나님께로부터, 혹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내려는 보상심리(補償心理)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고로 외적인 장식이 너무 요란하면 그 내용이 충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여자 분들의 화장을 예로 들어봅시다. 화장은 본래 좀더 예쁘게 보이자는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거짓이 섞여 있는 것이지요. 이런 거짓은 애교로 보아 어느 정도까지는 통합니다. 그러나 너무 진해지면 천박한 느낌을 줍니다. 조금밖에 속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외양(外樣)을 많이 꾸몄다는 것은 속이 썩었다는 것이요, 말이 많다는 것은 속이 비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빈 달구지가 소리가 많이 난다'고 하는 옛 속담이 있습니다. 요즘의 도시사람들은 달구지가 무엇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달구지에 짐을 가득 실으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빈 달구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겉으로 꾸민 것이 많고, 외식적이고 형식적일 때에 속은 텅 비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은 의식, 형식, 외식만을 중시하고 내용은 없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말이 적었습니다. 오로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가슴을 칩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옆에 누가 있는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성경구절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께 조용히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경멸조의 말투로 '하나님이여, 나는 저 세리 죄인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하며 기도하는 것을 과연 세리가 들었는가가 궁금합니다. 세리가 그 소리를 듣고도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한 것이라면 그는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나는 죄인이다,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다가도 다른 사람이 나를 죄인이라고 멸시하면 대개 '나만 죄인이냐? 너는 더 나쁜 죄인이다'하고 덤비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이 죄인이라고 회개하던 진실된 마음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남에게 책임을 전가(轉嫁)하고 맙니다. 남을 원망하다가 자신의 진실된 페이스(pace)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세리는 이 말을 들으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예, 저는 죄인입니다.
진실로 죄인입니다"하고 통탄의 기도를 드립니다. 누구에 대한 원망도 없습니다. 세상이 험해서요, 로마군인 때문이요, 세상 경제 때문이요, 정치 때문이요, 사회 때문이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그렇소 라고 핑계를 댈 수도 있으련만 아무런 군소리가 없습니다. "죄는 내가 지었습니다" "나의 잘못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고통스럽습니다'라고 울부짖는 것도 회개가 아닙니다. '후회스럽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회개가 아닙니다. 오직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나의 잘못입니다'라고 자백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세리는 하나님과 절대적인 관계를 이룹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불쌍히 여기다 - 헬라말로 '힐라스데티'라는 이 말은 일반적으로 용서를 빈다는 뜻입니다. 또 복을 달라는 뜻도 됩니다. 의를 달라고 하는 뜻도 됩니다. 그러나 벌을 면하고 저주를 피하게 해달라는 간구의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내세울 것도 없고 변명할 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괴로움만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스스로 화를 푸셔서 호의를 베풀어주십시오. 저에게는 더 기대할 것도 없고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선하신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입니다. 긍휼을 기대하는 자세입니다. 지난날에는 잘못을 하였지만 앞으로는 잘할 것이니 한번만 눈감아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불쌍히 여기고 처분대로 맡기겠다는, 긍휼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폴란드의 천문학자이며 수학자요 저술가인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온세상 사람들이 천동설(天動說)을 믿고 있을 때에 혼자 지동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위대한 천문학자입니다. 그는 이 일 때문에 교황청으로부터 심하게 문책을 받고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양심에 충실하게 지동설을 고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임종을 맞게 되었을 때에 주위의 사람들이 묘비문에 대하여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새겨달라고 부탁하더랍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그 친절을 구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내려주신 그 은혜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자비만을 구하나이다.
진정 그 자비를 구하나이다. 아멘.' 나에게 은혜를 많이 달라고 나를 좀 인정해달라고 조르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부족하고 허물밖에 없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죽어가던 강도에게 베푸셨던 그 긍휼을 마지막으로 베풀어달라고 소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기도를 하겠습니까? 도대체 우리의 기도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소원이 너무 많습니다. 약속도 많습니다. 지금까지 내뱉은 거짓말도 산더미같이 쌓였는데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입니까?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나를 생각합니다. 달리 더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라는 한마디면 족합니다. 저 죽어 가는 강도를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나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면 그뿐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너무 복잡하고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어떤 때에는 원수를 갚아달라는 둥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협박 공갈을 합니다. 온갖 불평과 원망을 다 토로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만난 자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할 때에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어느 성자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나의 소원을 반납합니다. 주님의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나는 아무 소원도 구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구하여야 하겠습니까?
예배는 성실하게 드려야 합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와서 한 시간 동안이나 예배를 드렸지만 마음으로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모든 일이 부실(不實)하더라도 예배만큼은 성실하고 알차야 합니다. 깊은 정성과 신령으로 예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을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고, 십자가의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받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예배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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