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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자유주의 신학보다 우수… 그것이 진리”

by 【고동엽】 2021. 10. 11.
"자유주의는 계몽된 세계에서 복음을 새로운 방법으로 전하려는 운동이었지만, 바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정통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이끌어내는 운동으로 전략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를 표방하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해 자유주의자들이 던진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독일에서 16년간 유학하며 마르틴 루터의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 겸 목회자가, '자유주의 신학' 입문서를 펴냈다. 안양대 신대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분당두레교회 담임으로 섬기고 있는 김용주 목사가 그 주인공.
김용주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현대 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와 '현대 신학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E. D. Schleiermacher, 1768-1834),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건물을 짓고 완성한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과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 등 4인의 신학 사상에 대한 핵심과 평가를 전해주고 있다.
2008년 귀국 후에도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 <칭의, 루터에게 묻다> 등 루터 연구서들을 펴내던 김용주 목사는 왜 자유주의 신학을 파헤치기 시작했을까?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에 이어 바르트와 불트만의 신학 다시 읽기 <신정통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본회퍼, 몰트만, 판넨베르크와 라너의 신학 다시 읽기 <정치 신학이란 무엇인가?>까지 현대 신학 강의 3부작을 펴낼 예정이다. 다음은 "자유주의 신학 비판, 알고 하자"는 그의 이야기.
-루터를 전공하셨는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책을 쓰셨습니다.


"독일어를 전공했기에, 신학교 시절부터 독일 신학 서적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등을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책에 등장하는 칸트나 슐라이어마허, 리츨과 하르낙 등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총신대 출신 중에서는 현대 신학을 가장 많이 공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학 시절 다녔던 훔볼트대는 이전 이름이 베를린왕립대로, 자유주의의 요람이었습니다. 슐라이어마허와 헤겔, 하르낙이 가르쳤던 곳입니다. 그 학교를 다녔으니 당연히 그들에게 관심이 생겼고, 그들의 책을 읽으며 베를린의 '자유쥬의적 공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자유주의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뚝 떨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 계몽주의가 계기가 됐지만, 그 이전에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종교개혁 신학을 허물기 위해 나온 건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했고, 이를 소위 사회 문제로까지 파고들어 복음을 거기에까지 적용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계몽주의 물결이 당대에 너무나 심했습니다. 그렇게 '이성 종교'의 분위기에서 신학을 하다 보니, 이성에 맞지 않는 전통적 교리, 원죄부터 기적 사건들,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 등 기존의 가치들을 소홀히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전제에도 루터가 깔려 있습니다. 독일 신학은 루터 없이 이해하기 힘듭니다. 제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설명하기 적합한 이유는, 그 뿌리인 루터를 전공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루터 신학을 어떻게 전개시켰고, 그들의 신학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신학 전공자들보다 오히려 자유주의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자유주의 신학 탄생, 당대 교회의 총체적 부패 때문일까?"
-자유주의 신학이 생겨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새로운 운동은 기존 교회들이 형편없이 살았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등장하는 것이라고요. 로마가톨릭이 너무 부패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이후에도 모두 그 도식에 대입시켜 버립니다. 그러니 칸트가 '도덕 종교'를 부르짖은 이유로 그 시대 정통 교회가 소금과 빛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인간의 삶을 등한시했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다 붙여버립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 칼빈신학교 리처드 멀러 교수와 생각이 같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인 16세기 로마가톨릭 안에도 건전한 신학은 존재했고, 종교개혁 이후 17세기에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등을 통해 교회가 어떻게든 청소년들을 복음으로 가르치려 하고 계몽주의 물결에 대처할 방법도 모색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출현한 것은 기존 정통 교회가 너무 역할을 하지 못해서라기보다, 당시 계몽주의라는 엄청난 사조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당대 지성인이라면 그 흐름을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성을 진리의 척도로 삼은, 이성적 판단과 자율적 인간 같은 계몽주의의 주장이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더불어 종교전쟁 등이 일어나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자꾸 생겨나자, 그들을 다시 끌어낼 성경 해석 방법을 모색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이 나온 것이지, 교회가 교회답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18세기는 나폴레옹의 시대였습니다. 교회를 다 박살냈지요. 정통 교회가 역할을 하고 말고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면 기존 교회가 다 부패했으리라는 전제를 갖기 마련인데, 새로운 철학 사조나 사상이 등장하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이 돈독하지 않거나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려던 이들은 여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려 하다 보니 새로운 신학이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칸트는 왜 이렇게 '도덕'에 집착했을까요. 책을 읽어보면, 칸트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도덕'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칸트는 목회자 가정에 태어나 경건주의 흐름에서 성장했습니다. 영국에선 청교도라 불리고 독일에선 경건주의라 불리는 이 운동은 엄격한 규율과 규칙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성장 배경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는 계몽주의입니다. 칸트는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았지만, 계몽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계몽주의가 세상을 구할 것처럼 여기던 시대에, 그는 이성의 한계를 말했습니다. '이성은 이 이상은 모른다'고 해야 진정한 계몽주의가 되지,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해선 안 된다고 보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성의 한계를 정하기 위해 쓴 것이 <순수이성비판>이지요. 이성은 눈에 보이고 경험할 수 있는 세계만 이해할 수 있다. 신의 세계, 자유, 영혼 불멸 같은 보이지 않는 세계는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면, 하나님을 없애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무리 자연과학이 발달해 살기 좋고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아도 도덕이 존재해야 혼란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칸트는 기독교를 도덕으로 연결시켜서 '도덕 종교'로 만들어야 기독교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고 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 주장, '은혜 없이는' 불가능"
-예수를 믿으면, 복음이 영혼에 심겨지면 자연스럽게 도덕적으로 살게 되는 것 아닌가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존 교회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부인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던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선 안 되고, 칸트 식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칸트를 비롯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치명적인 문제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은혜 없이는',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어떻게 받습니까? 그래서 신학에서도 '은혜의 수단'이라는 말을 쓰는데, '말씀과 성례'이지요. 말씀은 복음이지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부활의 말씀이 선포될 때 하나님 은혜가 임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 삶에 도전과 찔림과 회개를 가져와 돌아서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만드는, 소위 '도덕적 실천'을 이끌지요.
그러나 칸트를 위시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은혜의 수단, 말씀과 성례, 그리고 그 핵심인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것을 선포하는 교회라는 이 비밀에 대해 너무 무시하고 가볍게 여겼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너무 신뢰해 버렸습니다. 인간은 가르치면 실천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이는 개혁주의 용어로 하면 '전적 타락'을 믿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결국 (구원에 있어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나 반(半)펠라기우스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구호를 외치고 그들이 말하는 '도덕 사회'를 만들고자 해도, 사실상 실현될 수 없습니다. 은혜 없이는 안 되니까요."


-자유주의 신학의 가장 큰 맹점이군요.
"당시 기존 교회 신자들에게서 왜 '도덕 신자'가 나타나지 않고 무력해졌을까요? 역설적으로 계몽주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 유폐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회도, 시청도, 국가도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고, 거기서 핵심은 복음입니다. 복음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그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능력 있게 선포하고 있을까요. 많은 성경 연구와 기도가 동반돼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경청하게 만들 수 있는 성결의 삶을 살았는가 하는 면에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했는가', '그 복음을 능력 있게 선포했는가', '전하는 자로서 귀를 기울이게 만들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 3가지가 안 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는 무력해졌습니다.
사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려는 이야기들은 복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도덕 사회, 사랑의 사회로 만드는 것 말입니다. 더 나은 의와 사랑을 복음이 아니고서 어떻게 이룰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회도, 목사도, 신학교육도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만 이야기하다 보니 오히려 복음을 평가절하시켜 버렸습니다."
◈"자유주의 배척, 정통 신앙에 대한 자부심 부족 때문"
-보수 개혁주의 일부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을 괴물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것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면, 왜 우리가 자유주의와 현대 신학에 대해 떳떳하지 못합니까? 아무리 연구해 봐도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보다 우수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봅니다. 더 우수한 신학을 갖고 있기에, 바르트주의자나 자유주의자, 정치신학자들과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적을 이기려면 그들이 무슨 말을 쓰고 어떻게 신학을 하는지, 그들의 책을 읽어야 합니다. 거기서 발목이 걸리고 있습니다. 우선 언어라는 장벽이 있습니다. 독일어를 잘 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쪽 계열입니다. 현대 신학을 비판하는 이들은 대부분 영미권에 가서 공부하기 때문에, 그들의 책을 읽기가 힘듭니다. 대신 자유주의 신학을 좋아하는 이들은 대부분 독일로 갑니다.
종교개혁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면서도, 독일어로 현대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원전으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보수 신학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쁘다'고 말하는 것밖에 없고, J. 그레샴 메이첸이 40대 초반에 썼던 <기독교와 자유주의>만으로 자유주의를 비판합니다. 이 책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이 한 권에만 의존해서 버텨왔다는 게 문제입니다.
보수 신학자들은 잘 모르거나 조금 다르면 무조건 나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수한 신학적 훈련을 받고 있고, 세계 곳곳에서부터 와서 가르치고 있고, 교인들도 똑똑해졌습니다. 그런데도 객관적 자료 제시 없이 나쁘다고만 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신학이 부족하지 않으므로, 그들의 것과 함께 제시하면서 성도들에게 '당신들이 판단하라'고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좋으면 따라가라. 그러나 우리의 것에 동의하면 우리를 따르라'고요. 성도들도 그런 자유를 가져야 하고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전집이 원전으로 34권 분량입니다. 얼마나 글을 어렵게 쓰는지, 제대로 번역해도 무슨 말인지 파악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영어로 칼 바르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사전적 정의나, 누군가 써놓은 비판으로 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과 대결해서 이기려면 그의 글을 읽어내야 하고, 그런 인재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들의 화해론과 계시론 등을 명확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작업들을 하려면 그들의 글을 읽어낼 수 있는 인재를 키우고 실력을 길러야 합니다. 22세기가 될 때까지 '자유주의 신학은 나쁘다'고만 하고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 책으로 포문을 연 것입니다. 앞으로 후배들이 계속 개혁주의 신학의 우수성을 알리고, 자유주의가 가진 좋은 점과 함께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헤쳐서 독자들에게 판단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과제가 우리 시대에 놓였고, 저도 한 부분 그 과제를 담당했다고 봅니다."
◈자유주의 신학, 정통 신앙 고백하지 않는 '잠재적 이단'
-자유주의 신학은 오늘날 기준으로 '이단'이라 할 수도 있을까요.
"'잠재적 이단'이라고 봅니다. 오늘날은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경우 주로 이단이라고 하는데, 자유주의 신학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다 보니 이단이라고까지는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 같은 사람은 예수가 신이 아닌 인간으로 보는데, 이는 고대 기독론에 있어 이단이었던 '양자론' 입장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이었으나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해서 '신 의식'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올라갔고, 열심히 순종하고 타인을 위해 살면서 그리스도의 자리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초대교회로 말하자면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안디옥 학파, 그리고 네스토리우스주의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칸트부터 하르낙까지,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을 부정합니다.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신의 아들 자격을 얻었다고 말해도, 하나님 아들로 보지 않으면 이단 아닌가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시대적 문제들을 나름대로 고민하고 몸부림쳤던 부분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붙잡고 있는 기둥 같은 진리를 그렇게 무너뜨리면 어떻게 합니까?
리츨도 원죄론을 그대로 가르치면 도움이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나 단계로 이를 거론해야지, 원죄론을 그대로 가르쳐서 '죄가 유전되어 우리가 죄를 짓고 사망한다'고 가르쳐선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도덕 사회'를 이루는 데 있어 원죄는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정도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근거 없이 '이단'으로 몰아붙여선 안 됩니다. 저는 근거를 제시하는 입장입니다. 예수를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지금과 달리, 정통 교회에서 고백하는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이들을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종교개혁 이후에도 그대로 흘러 넘어왔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다'는 명제는, 마니교처럼 '선한 신이 있고 악한 신이 있다'는 주장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케리그마, 복음을 부정하면 이단이라고 해야겠지요. '성령의 신성과 재림'을 부정하면 이단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좋은 말들을 많이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단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책을 쓴 것이 개혁주의 신학계에 공헌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자유주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설사 그런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통 신학이 떳떳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왜 이단인지 분명한 근거를 제시해야, 우리가 붙잡은 진리가 올바르다는 것을 밝히 비출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피해자가 속출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몰랐는데, 자유주의 신학이 내 생각과 같더라'고 따라가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 번쯤은 치러야 할 전투입니다. 학문은 진실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가설들이 마구 돌아다니고 있는데, 가설들을 다 정리하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신학을 전문적으로 전공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첫 부분 칸트에서부터 큰 어려움을 겪으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교인들에게도 선물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려운 부분은 빨리 빨리 넘어가라'고요(웃음). 대신 그들이 했던 핵심 문장들을 기억하면 됩니다. 슐라이어마허의 경우 '종교는 절대 의존 감정이다' 같은 것인데, 이것들만 이해해도 상당히 많은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신학 전공자들은 정독하면 현대 신학을 이해하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왜 읽어야 할까요? 우리가 사는 시대는 현대라는 이성 중심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현대 신학자들이 말한 내용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신앙을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을 알게 되면 오히려 우리 영성이 깊어질 수 있고, 시대를 판별하는 능력도 기를 수 있습니다.
큐티도 중요하지만, 이런 작업 없이 큐티만 계속 한다면 '동어반복'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영성훈련 역시 심리학 등 여러 세속 학문들을 가져와서 영성을 강화시키려는 인위적 작동이 보이는데, 이전 기독교 역사를 배우고 이해하면 나도 모르게 영성이 자랄 수 있습니다.
적과의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적에 굴복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더 강해질 것입니다. 더 강한 신자가 될 수 있는 기회이니, 어려워도 읽어야 합니다. 읽다 보면 '내가 자유주의자였구나' 하는 깨달음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읽으면서 토론하거나 독서 비평을 해도 좋을 것입니다."


출처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1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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