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적 진리 이해와 그 자신의 실존적 고백
[ 한국개혁신학회 정기 발표회 발제 논문 2000. 12. 30. ]
이 승구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다양한 저작들에서 그리스도인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바는 자연인이 참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여러 면에서 분명히 한다. 자연인의 진리관과는 거의 대척적(對蹠的)인 그리스도인의 진리관의 성격을 살펴 볼 때, "도대체 그 누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 자신은 항상 그런 식으로 생각했단 말인가? 아니면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생각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면서, 그 자신도 때때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함을 드러냈는가?"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 이 글에서 내가 고찰하고자 하는 질문들이다. 이 글은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하는 기독교적 진리관이 기독교적 사유의 이상적인 형태요, 키에르케고르 자신은 심지어 자기 자신도 항상 이와 같이 생각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즉, 키에르케고르는 스스로가 이런 바른 기독교적 관점을 자연인의 관점과 섞는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는 여러번 거듭하여 "나는 나 자신을 감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런 주장은 키에르케고르가 진정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거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 말은 그의 간접 전달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는 당시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그리스도인이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을 기독교로 이끌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그의 간접 전달의 한 부분이라는 것에는 상당한 진리의 일면이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키에르케고르의 말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것을 잘 의식할 수 있다: "기독교권 (특히 덴마크의 개신교가) 신약 성경의 기독교와는 너무 거리가 있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그리스도인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소 논문에서 이런 진술이 그의 간접 전달의 한 부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결국 이 논문은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하는 기독교적 진리관은 아주 이상적인 기독교적 진리관이어서 키에르케고르 자신은 자기 자신이 항상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못함을 솔직하게 인정함을 보여주어,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면서까지 기독교적 진리관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물론 이것도 간접 전달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것에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즉,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의 절대성 때문에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하였음을 이 논문에서 드러 내고자 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진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은 이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기독교적 진리관과 이 기독교적 진리관을 자연인의 관점과 섞고 있는 자신의 사유 사이의 갈등을 깊이 의식하고 있다. 따라서 "소위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의 강한 비판은 당대의 기독교권안에 있는 소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판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기독교적 사유에 항상 충실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했던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만 한다고 여긴 기독교적 진리관에 항상 충실하지는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괴로워하며, 비판했던 것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일기[手記]의 내용들은 키에르케고르 자신이 기독교와 관련한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비교적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간주하고서, 그의 일기의 내용들을 검토할 것이다. 물론 나는 키에르케고르는 심지어 그의 일기에 있어서도 그의 정확한 상황과 그 자신의 사유를 숨기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일기조차도 또 하나의 문학적 전략(another literary tactic)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 물론 그의 일기에서도 키에르케고르 사상에 내재해 있는 모호한 문제들을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찾기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다 ; 그의 일기 내용도 비밀스럽고 은밀한 것이다(cryptic).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때때로 그는 이미 쓰여졌던 몇 구절들을 지우는가 하면, 몇 페이지는 잘라내고, 그의 일기가 사후에 출판되기를 원했고 그렇게 준비한 흔적이 많이 있다. 이와 같은 일기의 공적인 성격은 그로 하여금 이 일기에 있어서 조차도 의도적인 모호성을 갖도록 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그의 일기의 내용을 어떻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이 일기에서는 키에르케고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일종의 직접 전달을 찾아 볼 수는 있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나는 이 글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일기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은 네 시기를 구분해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방황의 시기(1838년까지), 그의 익명의 저작의 시기(1838-1846), 둘째 저작의 시기(1946-1852), 그리고 마지막 시기(1853-1855). 이제 이 시기들의 키에르케고르의 생각을 차례 차례로 검토해 보기로 하자.
1. 방황의 시기(1838년까지)
이 기간 동안 키에르케고르는 공식적으로 목회자 후보생인 신학생이었지만(a candidate for theology), 그는 이 기간 동안 일종의 자유로운 문필의 사람이려고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그는 샤르링(C. E. Scharling), 기독교는 그 본질과 전제가 인간 오성에 종속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한다고 가르친 클라우센(H. N. Clausen), 그리고 마르텐젠 (H. L. Martensen) 밑에서 공부하는 신학생이었고, 특히 1834년에는 마르텐젠 지도하에서 슐라이어마허의 {기독교 신앙}(The Christian Faith)을 읽기도 했다. 또한 그는 클라우센 교수와 홀렌베르그(M. H. Hohlenberg)가 편집해 내는 {해외 신학 문학 저널}(Journal of Foreign Theological Literature)을 읽고, 이를 통해서 뫼흘러(Johann Adam Moehler)와 피흐테(J. H. Fichte)의 사상에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뫼흘러의 {위대한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시대, 특히 아리우스주의와의 투쟁}을 읽었고, 피흐테(J. H. Fichte)가 편집하던 {철학과 사변 철학지}를 읽었으며, 부루노 바우어(Bruno Bauer)가 편집하던 {사변 신학지}를 읽었다. 또한 1837년에는 요한 에듀아르드 어드만(Johann Eduard Erdman)의 {신앙과 이성에 대한 강의}를 읽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 시기에 읽은 책들과 들었던 강의를 참조해 볼 때, 이를 통해서 그는 성서학과 신학 모두에 대한 합리주의적 접근에 노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프레가 잘 표현하였듯이 "그의 시대의 신학은 합리주의를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시기 동안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는 그의 초기 기독교 신앙과 계몽주의-이후적 사유가 결합된 형태를 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방황과 회의의 시기가 된다. 그래서 이 시기의 한 일기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방황이다." 이 시기의 기독교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사돈 형제가 되는 피터 빌헬름 룬드(Peter Wilhelm Lund)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있는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정통주의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시작하자마자 그 큰 거상(巨像)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통적 정통주의 기독교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1834/35년에 키에르케고르가 기독교를 회의하려는 큰 유혹에 빠져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의 일치가 있 다. 그러나 또 한 편 그 당시에 유행하는 신학은 그저 합리주의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도 그는 잘 의식하고 있었다. 그 시대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성경과 일치하는 것을 발견하면 자신들의 논의를 성경에 근거해서 진행시킨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다른 관점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적 관점과 자연인의 관점을 적당히 혼합하는 일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시대의 신학자들이 이런 혼합을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신학은 "신앙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공개적인 신뢰도 없으며, 성경 앞에서 선한 양심도 가지지 않은 것이다."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그래서 때때로 그는 자기 선생님들을 전통적 기독교의 관점에서 비판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가 길렐레제에서 쓴 대로, 그것을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어떤 것을 찾던 그는 당대의 신학계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 그 밖에 다른 그것을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여기 그의 고뇌와 방황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방황과 추구 가운데서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는 최소한 당대의 철학과 신학에서 구현된 단지 인간적인 사유(merely human thinking)와는 대립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적어도 이점은 아주 분명히 주장한다. 1835년의 한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다: "기독교는 사람의 인식이 죄 때문에 결함이 있게 되었다고 상정한다. 그것이 기독교를 통해서 고쳐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자연인으로서의 철학자는 [죄의 문제를 전혀 제기하지 않고]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당대의 철학과 신학을 따라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자연인의 관점에서 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만일 우리가 합리적인 존재로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독교가 우리가 대립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결론내려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방황과 회의의 시기의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순전한 인간적인 관점이 기독교적 관점보다 더 나은 것이다. 이 당시에 기독교는 그에게 "가장 비인간적인 잔혹함"(the most inhuman cruelty) 으로 여겨졌으며, 자신들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독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마르텐젠에게서 배운 대로 헤겔과 슐라이어마허의 노선을 따라 기독교를 해석해 보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키에르케고르도 기독교를 단순한 인간적 관점의 혼합시킨 것은 기독교로 불려져서는 안된다는 점은 아주 분명히 한다. 그런 혼합은 기독교적 개념의 의미의 변화를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 이 두 현대 신학자들의 손에 의해서 "영감(inspiration)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영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이 되어 버렸고, 성육신은 하나나 여러 사람들에게 다른 존재가 현존하는 것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는 비록 자신이 기독교가 가르치는 바를 받아들이지는 못하게 되었어도, 적어도 기독교 자체는 그 자체로 유지되어야만 한다고 믿게 되었다. 바로 이런 관점에는 그는 이 회의와 방황의 시기에도 기독교적인 주장으로 들리는 주장을 많이 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주장을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의 출생은 이 땅에서 일어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천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칭의도 이 땅에서의 일일뿐만이 아니라 천상적인 일이기도 한다.
만일에 한순간이라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잊으신다면 세상은 곧 존재하지 않게 될 정도로 세상은 하나님 없이는 존재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사실을 단지 객관적으로만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 다. 그는 아직 이런 기독교와 확정적으로 관련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런 내용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삶에서만 가능한데, 이런 삶이란 "중생하기 전 에는 실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적어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이 회의와 방황의 시기에도 그리스도를 선한 윤리적 이상과 교사로 제시하는 칸트적 개념이나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하는 천주교의 개념을 반박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신이 그 중생을 체험하고 기독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나는 믿기를 원한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다"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의 고백을 했던 것이다. 이 당시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그가 어릴 때부터 배워 온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문을 닫고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내주하시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오늘의 복음의 말씀(요 20:19) 같이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닫힌 문안으로 들어 오셨다." 키에르케고르는 아직 기독교 밖에 있고, 그리스도는 그의 밖에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닫힌 문으로 들어오시는 기적을 통해서라야 자신의 변할 수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2. 변개의 경험과 초기 저작의 시기 (1838-1846)
그러나 그 얼마 후에 키에르케고르 자신이 일종의 회심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838년 5월 19일 아침 10시 30분. "기뻐하라, 내가 너희에게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사도의 외침이 은혜스럽게 온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나의 마음에 불지펴졌다. 이런, 저런 일에 대한 기쁨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와 혀와 입으로 고백되는 영혼의 강한 노래로 표현되는 기쁨이 말이다. "나는 나의 기쁨을 통해, 기쁨 안에서, 그와 함께, 그 위에, 그 옆에서, 그리고 그 기쁨과 함께 기뻐한다" - 이런 천상적인 후렴, 그렇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천상적 후렴이 나의 다른 모든 노래들을 갑자기 사라지게 하여 버렸다. 그 기쁨은 마므레 평야에서 영원한 곳으로 불던 그 바람에서 온 신선한 바람, 그 공기의 흐름 같이 우리를 시원하게 하고 상쾌하게 한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이 고백으로 표현된 이 경험은 키에르케고르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나를 무(無)로부터 창조하셨다. 그것이 놀랍다고 그대들은 말한다. 분명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을 하신다: 죄인들로 부터 성도를 만드시는 것이다." 이 때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관계는 이 경험 이전에 그가 가졌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순전히 인간적인 사유의 편에 서 있지 않고, 기독교 편에 서 있는 것이다. 물론 이전에 생각한 바와 같이 기독교는 단순히 인간적인 사유와 철학에 대립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인간적인 사유와 대립되는 기독교가 옳고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신비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리스도께서는 동시에 우리의 구주와 심판자시라고...... 구주와 심판자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갖는 죄의식을 가지며, 신적 아버지의 사랑이 "삶 가운데서 유일한 불변의 것, 참된 아르키메데우스적인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중생의 체험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너무도 지루하고 단조로우며 기쁨이 없다. 나의 영혼은 텅비어 있고 공허하다. 무엇으로 그것을 만족시킬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아! 천상의 복됨으로도 이 영혼의 공허가 과연 채워질 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바로 다음 기록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 하나님! 평화를 위해 우리가 당신님께로 돌이키나이다. ....... 그러나 우리에게서 이 평화를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복된 확신을 당신님께서 친히 주셔야만 하옵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우리의 어리석음도, 지상적인 욕망도, 나의 사나운 갈망도, 나의 마음의 간절하고 불안한 추구조차도 이 평화를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는 그 복된 확신을 주옵소서.
이처럼 키에르케고르는 이제 기독교에 대해서 일종의 양면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1838년 이전에 그가 가졌던 기독교적 사유와 자연주의적 사유의 혼합이라는 형태와는 다른 것이다. 때로 그는 이전과 같이 깊은 회의를 가지고, 그것을 표현해 낸다: "나의 회의는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그는, 후대의 불트만이나 틸리히와는 달리,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 의식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회의를 경험할 때에도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자연인이 생각하는 방식을 혼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 가지 관점을 섞는 것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비판은 자신 안에 있는 그런 성향과 자신의 회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헤겔과 헤겔주의적 사상가들뿐만이 아니라, 비기독교적 사유를 지닌 자기 자신이 비판의 대상인 것이다.
그는 자신 안에 기독교와 양립 가능하지 않은 온갖 경향들을 발견하고, 다양한 익명의 저자들을 통해서 다양한 인생관을 표현하게끔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키에르케고르는 자신 안에 심미적인 사람, 윤리적인 사람, 종교성 A의 사람,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모든 성향을 다 발견하고 그것을 표현해 낸 것이다. 죠시아 톰슨이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익명의 저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상상과 감정을 분출해 내었다....... 그는 자신이 써야만 한다고 느꼈다. 수년 동안 그려온 개념들과 공상들의 물줄기를 다 부어내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러므로 그의 익명의 저작들에서 발전되고 있는 삶의 영역들은 그가 자신 안에서 발견한 경향들에 대한 일종의 이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때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삶의 영역들'(spheres of life)이 키에르케고르가 친히 체험해 나간 삶의 단계들의 발전을 표현해 낸 것이라는 견해와 나의 입장을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 안에 있는 이런 성향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심미적인 인간, 단순히 윤리적인 인간, 종교성 A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의 익명의 저자들이 보이고 있는 인생관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가능한 방식들의 표현들이다. 그 삶의 방식들은 서로 다른 것이다. 가르디너(Gardiner)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들은 "(그의) 내면으로부터, 각 관점의 입장에서 삶을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표현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익명의 저자들은, 마틴 떠스트(Martin Thust)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키에르케고르의 인형극의 인형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키에르케고르는 자신과 익명의 저자들의 거리를 확언하는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에 의하면, 익명의 저자들은 익명의 저자들로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이 익명의 저자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한다 : 물론 "말하는 이의 목소리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나의 사상은 아니다."
각기 다른 익명의 저작들은 각기 다른 문제를 다루고 있고, 각각의 익명의 저자들 은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닌 것이다. 클라이츠(Crites)가 표현하고 있듯이 "각 작품은 각기 독특한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클라이츠도 인정하듯이, 이들 작품들을 모두 감싸는 일종의 커다란 구조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커다란 구조는 그의 저작의 시초가 아니라, 마지막에서라야 드러나고 계시될 수 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1846년까지 계속되는 초기 저작의 내용이 키에르케고르의 생각과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를 논의했다. {이것이냐저것이냐}, {인생의 제 단계}, {공포와 전율}, {반복}, {불안의 개념}, {철학적 단편}, {철학적 단편에 붙이는 결정적 비과학적 후서} 등이 이 첫째 저작에 속한다. 키에르케고르 자신은 이 초기 저작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학에 있어서의 나의 기여는 실존의 전 양상(the whole of the compass of existence)의 결정적인 특성들을 이제까지 그 어떤 작가의 작품들도 그렇게 하지 못한 변증법적 명료성과 독창성을 가지고 제시했다는 데에 있다."
3. 두 번째 저작의 시기 (1846-1852)
첫째 저작을 다 마친 후에 키에르케고르는 그가 자신의 문학적 활동을 마쳤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서 진정한 기독교에 충실하지 않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인 독자들을 기독교에로 이끌어 들이는 산파술적인 작업을 했던 익명의 저작들로 자신의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점차 그는 이제까지의 산파술적인 간접 증언 이외에 기독교 진리에 대한 직접적 증언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기독교적 메시지를 좀더 직접적으로 선언하는 책을 써서 출판하기 시작한다. 이런 의미에서 {후서} 는 그의 전체 저작의 일종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후서} 이후로 그의 전달 의 방법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즉, 1846년-1848년) 다음 같이 다양한 글 이 기록되었다: {다양한 분위기의 건덕적 강화들}(1847), {사랑의 역사}(1847), {두 편의 윤리-종교적 소논문들}(1847년, 그러나 1849년에 출간됨), {아들러서}(1847년, 이 책의 일부가 on Authority and Revelation이라는 제목으로 영역되어 출판됨), {기독교적 강화들}의 일부 (1848년에 출간됨), {죽음에 이르는 병} 일부 (1849년에 출간),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훈 련} 일부 (1850년에 출간됨). 이 다양한 글들에서 그는 기독교의 요구를 직접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생각하면서 참된 기독교를 있는 그대로 증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에 1848년의 부활절 경험이 있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잘 주목하라, 매우 중요함(NB, NB) 1848년 4월 19일 수요일 나의 존재 전체가 변했다. 나의 보류와 자기-고립이 깨어졌다 -- 나는 말해야만 한다. 주여, 당신님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 경험에 근거해서, 그는 이제 자신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확실히 믿게 된 것이 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나 자신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우울을 극복하도록 도우실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사제(a priest)가 될 것이다." 이제는 임직하여 시골 교회의 목사가 되어 진리를 직접 증언하려고 그는 마음먹었다. 비록 그는 이 소원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는 적어도 기독교는 직접 증언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나는 지금까지 간접적이었던 모든 것을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감당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주장을 위해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개인적으로, 분명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서야만 한다." 왜냐 하면, "기독교의 전달은 증언하는 것으로 마쳐져야 하기 때문이다. 산파술적인 방법은 결코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관점에서 진리는 (소크라테스가 이해한 대로) 주체 안에 있은 것이 아니라, 선포되어져야만 하는 계시에 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강도사로 때때로 설교를 하기도 했다. 1848년 9월 1일에는 어떤 교회(Vor Frue Church)에서 설교했고, 1851년 5월에는 성채 교회(Citadel Church)에서 설교했었다.
그러므로 1848년 부활절의 경험은 키에르케고르로 하여금 기독교를 전과는 다르게 이해하도록 한 것은 아니고, 1838년의 경험과 같이 기독교에 대해서 다른 태도를 가지게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1848년의 경험은 1846년 {후서}를 마친 이래로 그가 생각하던 그 생각, 즉 이제는 기독교에 대한 직접적 증언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후서} 이후의 그의 생각과 1848년 전후의 그의 생각 사이에 분명한 연속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제 기독교권에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 도인이 되게 하려는 산파술적 교육을 마친 사람으로, 직접 전달로 나아가는 것이다: "기독교권(Christendom)에서는 분명히 산파술적 형태가 사용될 수 있다. 왜냐 하면 기독교권에서는 대부분이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상 가운데서만 살고 있은 것이 실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기독교인한 산파술은 (종국에는) 증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의 산파술적인 간접 전달과 직접 전달 사이에도 일종의 연속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크라이츠(Crites)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직접 전달의 시기 동안 키에르케고르는 "독자들이 전체로서의 기독교적 관점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해서 익명의 저작들을 설명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때로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자신이 실존적으로 아직 자신이 말하는 온전한 기독교에 충실한 존재라고 말하기 어려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이제 온전히 기독교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기독교적 익명으로 안티-클리마쿠스(Anti-Climacus)라는 익명의 저자를 내세워 그로 하여금 자신은 감히 이르지 못하는 온전한 기독교적 관점을 선언하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안티-클리마쿠스는 {철학적 단편}과 {후서}의 익명의 저자인 요하네스 클리마 쿠스(Johannes Climacus), 즉 기독교에 대해서 헤겔 철학적 관점에서 표현하고 그런 기독교 는 헤겔적 철학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천명하나 자신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 는 이 철학적 익명의 저자에 대립하는 인물로 설정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여러 번 "안티-클리마쿠스는 나보다 무한히 더 높다"는 등의 표현을 했다. 왜냐 하면 안티-클리마쿠스는 철저히 기독교적 관점을 드러내는 익명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티-클리마쿠스가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이전의 익명의 저작들을 통해서 키에르케고르가 덴마크의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로 산파술적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던 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뜻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안티-클리마쿠스는 익명의 저작들에서 말했던 바를 반복한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논의상의 둘째 시기(1838-1846) 와 셋째 시기(1846-1852)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기독교 이해와 기독교적 사고 이해에서의 분명한 연관성과 연속성이 있는 것이다.
이 셋째 시기에도 키에르케고르는 여전히 기독교의 내용은 인간이 자연적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과는 대립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자충족적인 이성과 그런 추론에 대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를 결국 파괴하며, 기독교의 자연적 원수이다." 기독교는 자연적 인간들에게는 너무나 과한 것이다(too much for natural human being).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비록 기독교가 자연인의 관점에 대립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내용을 계시하시고 확언하셨으므로 우리는 이것을 진리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이성의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독교적 인식론적 관점"이 있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적 사유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찰"(God-fearing reflection)이 라고 부른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찰이 다시 한 번 피상적 성찰이 오랫동 안 잡아 다니던 끈에 매듭을 지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동안 피상적 성찰에 의해서) 성경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의 신적인 권위가 사라져 버렸다; 이제 조금만 더 성찰하면 이 모든 것이 다 없어져 버릴 것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정황에 있다. 그러나 보라! 기독교의 샘을 다시 한번 더 작용하게 함으로, 그것이 성찰에 반하여 설 수 있도록 하는 정반대의 사역을 성찰이 수행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자연히 전혀 변경되지 않을 것이다.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투쟁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제까지는 성찰과 단순하고 직접적인 기독교 사이의 투쟁이었다면, 이제는 성찰과 성찰로 무장한 단순성(simplicity armed with reflection) 사이의 투쟁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이 셋째 시기(1846-1852)에도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적 관점과 자연인의 관점의 차 이와 대립을 분명히 의식하며, 그 차이를 강조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가 살던 시기에는 자연인의 관점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빈정대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파스칼이 유명한 수학자라는 사실이 기독교에 덕이 된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가 유명하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듣고, 그가 말한 바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시대에 사람들은 파스칼 같은 유명한 수학자가 기독교에 대 해서 좋게 말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계시하시고 확언하시기 때문에가 아니라, 어 떤 합리적인 사람이 기독교는 선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으려고 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는 점을 경고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그는 좀더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하기 도 한다:
기독교는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즉 사람의 유익을 위한 방식으로(확장되어 가는 절충)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방식(참된 기독교)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나는 자주 말하 곤 한다. 나는 또한 만일에 내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방식으로 기독교를 제시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거나 두려워서 그렇게 하려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조용히 있어 야만 한다고 말헀었다.
초기 교부들 가운데서 터툴리안 만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 기독교를 제시한 교 부는 없을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참된 기독교는 몇 가지 신앙의 조항과 도덕적 교훈이 얼마간 섞여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결산이다. 그래서 터툴리안 은 참된 기독교에 반대되는 것인 우상 숭배에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제 소위 기독교가 문화를 정복하고 폐위시킨 것이 이미 오래 전이라고 말하여지는 이 때는 기독교와 세상이 하도 섞여 버려서 그 질문이 다시 한번 더 강하게 제기되어야만 한다. 즉, 기독교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인가, 아니면 사람에게 속한 것인가?
교회의 초창기에는 사람들이 열심히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들은 기독교가 그야말로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문제여서, 우리가 그것을 위해 싸워야하는 문제라고 느꼈던 것이다. 기독교는 그저 몇 가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는가 아닌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는 방식으로 (즉, 하나님께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 주권으로 가지신 것으로) 기독교를 제시해야만, 그것이 기독교 에 대한 참된 제시이고, 이런 제시에 나타나고 관계되는 관점이 기독교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나 참된 기독교적 관점은 자연인의 관점과 섞여져서는 안 된다. 기독교를 자 연인의 관점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시해 보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결국 기독교의 성격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므로 실상은 "기독교가 하나님께서 창안하신 것이며, 좋 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관심거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의 생애의 셋째 시기(1846-1852)에 순수한 기독교적 관점과 자연인의 관점 에 의해서 수정된 관점에 대한 분명한 대조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가장 특징적인 강조점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 그것의 한 부분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키 에르케고르는 이 시대에 "도입되고 소개되어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이다"고 말한다. 신인(神人, the God-man)의 역설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둘째 시기에 비해서, 이 셋째 시기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하게 강 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관점과 자연인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 히 한 후에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둘째 저작을 통해서 기독교적 삶의 방식의 독특성을 강조 하는 것이다. 심지어 순교를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를 따름'에 대한 강조는 구주로서의 신인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셋째 시기에도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를 신인(神人)과 구주로 언급하며 강조하기를 잊지 않기 때문이 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와 신인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를 따르고(follow him),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그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번 살펴 본 바와 같이,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그를 신인이신 구주로 믿기만 하고 그를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것 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구속에 대한 기독교적 믿음이 사람들을 열심히 살지 않도 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열심히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추구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충심의 감사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순종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만 한다; 그는 기독교적 사유와 하나가 된 기독교적 실존 양식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참된 "기독교적 지식"은 참된 "기독교적 삶"을 낳는다고도 말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기간 동안에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 였다. 그러나 또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자기 자신의 삶과 실존 방식에 대한 묘사라고는 아직 느낄 수 없었다. 그 자신의 삶은 기독교가 마땅히 그러해야만 한다고 파악한 기독교의 요구를 아직 충족시키고 있지 못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나는 (그저) 시인 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은 그저 기독교를 (참되게) 묘사할 뿐이라고 한다. 여기서 "시인"이란 기독교의 이상적인 형태를 묘사하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은 자신의 구체적 실존에 있어서 그 이상을 아직 실현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말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시인적 실존"(poet-existence)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심미적 실존 양식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기독교와 관련해서 심미적 존재일 뿐이 라고 느꼈다. 그는 자신을 다음 구절에서 자신이 희화(戱畵)화한 인물과 같다고 생각한 것 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미친 것이 아니 라면, 유머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알다시피, 저는 19세기에서 태어나 엄격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서, 이성에 대한 보편적 (미신적)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머는 "하나님께서도 알다시피" 라고 말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자신 안에 순전히 기독교적인 관점과 할 수 있는 한 하나님께 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연인으로 생각하고 살려고 하는 경향 사이의 일종의 긴장을 가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기독교적 관점과 자신의 삶의 방식 사이의 이런 간격이 {죽음에 이르는 병}과 {그리스도교의 훈련}을 "아주 놀라운 정도의 그리스도인"인 안티-클리마쿠스라는 익명의 저자를 사용하여 출간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이 기독교적인 책들에서 묘사한 바와 일종의 거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감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닐 정도로 그렇게 너무 높여져 있는 것이다." 그 자신은 "가장 이상적인 영광 가운데 있는 기독교를 제시했지만," "개인으로 그는 [기독교에 아직] 상응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그냥 버려 두신다면, 그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고, 기독교를 완전히 다 잊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에도 키에르케고르 자신은 자신 안에 자연인 같이 생각하려 는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 있는 이런 성향을 전혀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는 점이다. 그는 이런 성향을 항상 유혹, 즉 참된 기독교를 왜곡하려는 시도라고 여긴다. 그는 비록 그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정의하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기독교의 이상 적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4. 마지막 시기 (1835-1855)
키에르케고르의 생애의 마지막 기간(1853-1855)은 그가 왜곡된 기독교라고 여긴 기독교권에 대한 직접적 공격으로 특징지워진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기성 교회를 변화시키기를 원했다. 적어도 그는 기성 교회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공적인 인정이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우리는 적어도 현재의 상황이 어떤지를 공개적으로 인정할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서 정직해야만 한다."
그의 기본적인 생각은 신약 성경의 기독교를 19세기 덴마크 교회에 적용시켜 보려 는 것이었다. 그의 신약 성경 이해에 의하면,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자 이외의 그 어떤 다른 종류의 그리스도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기에도 모든 그리스도 인들은 그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도의 제자가 되는 것만이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순종의 행위이다. 이 순종은 지금 여기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한다." 은혜가 없이는 신약 성경적인 의미의 제자가 없으며, 순종의 가능성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최후의 글들을 읽어보면 여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기독교 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되라고 하는 요구 외에 그 어떤 새로운 것이 있 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거의 모든 것은 이미 그가 언급했던 것들이거나, 그의 이전의 주 장의 논리적 결국이거나, 아니면 그로부터 조금 지나치게 과격하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의 유일한 요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진정한 교회가 되자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살 펴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아주 결정적인 요구라면, 이것의 논리적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기독교 국가와 기독교 민족을 가져오려는 모든 노력이 그 자체로(eo ipso) 비기독교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것이다. 왜냐 하면 그럼 모든 노력 전체가 기독교를 다른 것으로 환원시키고서야 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에 반하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수립하려는 경향을 지닌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주 쉬운 것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적인 신곡의 구조의 논리적 결국은 보편 구원이다"고 주장하는 포즈만 (Pojman)에게는 안됐지만, 키에르케고르는 보편 구원 교리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한 사람이, 아마도 백만인 가운데 한 사람 이, 어쩌면 온 세상에서 한 사람이 구원받음으로써 시작된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우리 모두가 - 우리 모두가, 심지어 개도 고양이도 모두가 다 구원받았다고 한다. 그것이 기독교권 의 기독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키에르케고르의 후기 사상도 그의 이전 사상 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기간 동안에는 아주 극단적인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강조점들이 나타난다. 그것들은 고행주의(ascetism)에 대한 그의 강조, (영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의 이 원론을 함의하는 형태의) 영적인 것에 대한 강조, 그리고 유아 세례 제도에 대한 심각한 비 판에 함의된 내면성에 대한 강조 등이다. 이제 이 요점들을 차례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고행주의에 대한 후기 키에르케고르의 강조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주제 와 관련해서 루터와 루터파 개신교는 후기 키에르케고르의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 을 말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루터는 순교자가 되지 않음으로써 실제로 굉장한 해를 가한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루터와 같 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명된 사람이 헌신된 옹호자들과 추종자들에게 둘러 싸여서 일상적인 편안한 삶으로 마쳤다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다........ 그의 삶의 처음 몇 년 동안에 그가 빛이었다가 그의 생애의 말년에는 무미건조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 {탁상 담화}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경외하는 이들에 둘러 싸여 편안히 앉아 있은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그의 생애의 후기에 루터는 그저 범부로 나타난 다.
우리는 정확히 무엇이 키에르케고르로 하여금 후기 루터가 기독교에 해를 가하였다고 생각 하게끔 하였는지 잘 모른다. 후기의 루터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주로 개신교의 세속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세속성이라는 말로써 하나님과 기독교를 이용해 가면서 이 세상에서의 안전과 복지를 추구하는 성향을 의미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세속성 이 주도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당대의 루터파 개신교가 루터가 의미하고 주장했던 바를 왜곡하고 잊어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진실로 다시 시작해야 할 곳은 루터로부터이다. 세속성과 종교성을 함께 연관시키는 이 일은 좀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키에르케고르는 개신교 기독교권 내에서 세속성이 주도적이게 된 것의 원인을 부분적으로 루터에게 돌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루터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관계는 좀 양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위에서 인용했던 인용문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더 이상 세상에 의해서 핍박받지 않는 말년의 루터는 잘못된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루터가 처해 있던 그 상황, 즉 교회가 부패했던 중세 말기에는 사람 들은 다양한 사람들이 만든 종교적 율법들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복음을 강조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루터에게 동의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한다: "개신교, 루터파는 진실로 교정제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복음의 충분한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 복음을 듣게 되면, 복음의 메시지를 '사고 방식과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식의 값싼 은혜를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사람들은 기독교의 요점인 자기 부인을 잊고서, 세속적인 잘됨과 범용 (mediocrity)을 우상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다시 말한다: "개신교를 규범적인 것으로 만든 결과로 큰 혼란이 초래되었다." 이런 말들의 의미는 교정제로서의 역할을 다 한 후에 우리는 다시 천주교회나 다른 형태의 사람이 만든 율법에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순히 우리는 기독교를 세속화의 원인이 되게끔 변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시대의 개신교는 교회가 그저 "기독교회"라는 이름만을 가지고 있 을 뿐, 실제로는 전혀 교회가 아닐 위험이 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는 우리가 "그리스 도인이기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이 가 바이올린을 켤 수 없기 때문에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것이 아주 이상한 것과 같이 이상한 것이다."
때로는 키에르케고르의 비판이 너무 지나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점이 그의 요점이다. 그는 자신이 상당히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신약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도 그는 잘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신약 성경이 요구하는 그런 철저한 의미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자; 우리는 '기독교회'라는 말을 헛되이 사용해 왔다. 바로 이점에서부터 새로이 시작하기로 하자. 이제 우리의 세속적인 잘 삶과 범용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본받도 록 해보자." 키에르케고르에게는 그리스도인이 살고 그에 비교해 평가받을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있을 뿐인데, 그것은 신약 성경이다. 그 기준에 의하면, 우리는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실존하는 인간이 가능한 한도 내에서 공로 의식이 전혀 없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키에르케고르는 고행 주의를 "육과 정욕을 견제하기 위해 실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그의 고행주의는 병적인 징후를 전혀 나타내고 있지 않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인도적 고행주의를 언급하면서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적 고행주의는 실존한다는 것이 곧 고(苦)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행주의에 의미가 있다. 만일에 실존하는 것이 고난 당하는 것이라면 고행 주의는 바로 쇼펜하우어가 스토아 학파에 반해서 주장한 것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고행주의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강조는 중세의 천주교회에서 일반적으로 가르치던 것이나 다른 형태의 고행주의와는 좀 다른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키에르케고르의 고행 주의는 희생적 행동에 그 어떤 공로도 돌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적 제자됨을 강조하는 그의 셋째 시기(1846-1852)의 사유와 마지막 시기(1853-1855)의 사유 사이에는 일종의 연속성이 있다. 비록 마지막 시기에 그는 가난한 삶을 좀더 강조했지만 말이다.
이제 두 번째 요점인 마지막 시기에 키에르케고르가 물질적인 것을 전혀 배제해 버리면서 영적인 것을 강조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어떤 부정적인 면이 나타나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셋째 시기까지는 키에르케고르가 그래도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균형감을 유지해 왔다. 그는, 신약의 사상에 의하면 영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을 배제한 어떤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고, 그리고 인간 존재는 전인이 하나님과 관련하에서 "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기(1853-1855)에는 좀 다른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본성상 사람은 종의 생육을 실존의 중심적인 것으로 만든다. 여기에 그의 이기주의 전체가 있다....... 기독교는 그 태도를 중심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상당한 투쟁을 감수하게끔 하였다. 그러다가 개신교가 나타나서 혼인과 관련해서 혼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거짓말하는 이 거짓 기독교는 얼마나 역겨운 것인가? 왜냐 하면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이 말하는 난센스를 반복하는 것이 더 안락하기 때문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목사'는 암수의 주인인 입장에서 생육이 큰 규모로 계속되리라는 것을 보면서 떼가 증가해 가는 것에 이기적으로 관심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도 말한다: "창조는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창조는 최고의 자기 만족이다. 아이를 낳는 것은 창조에 대한 연약한 유비일 뿐이고, 그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인간 이기주의의 최고점이다." 이로 부터 여성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견해가 나타난다. 한 곳에서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아마도 여성은 이곳 저곳에서 남자를 과도함과 방탕에로 나아가는 것으로부터 구하고, 그를 단정한 사람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결혼한 남자들을 유한성(finitude)과 범용(凡庸, mediocrity)에로 축소시킴으로 결혼하는 모든 남자들을 타락시킨다."
우리가 이런 말들을 키에르케고르의 마지막 공적 출판물들인 {기독교권에 대한 공격}과 비교해 보면, 이 시기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삶의 물리적인 측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구절들만을 보면 키에르케고르가 마니교도들이나 플라톤주의자들이 가졌던 것과 비슷한 영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의 일종의 이원론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어떤 학자들의 주장에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키에르케고르는 한 곳에서 물리적인 것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태도를 아주 분명히 표현하기도 하였다: "사람은 타락한 영(a fallen spirit)이다........ 타락한 영은 그 죄 때문에 몸이라는 노예의 옷에 넣어져서 세상이라는 이 형무소에로 보내지는 형벌을 받은 것이다." 비록 과거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상당히 있기는 하지만(예를 들어서, 오리겐, 심지어 칼빈의 표현들에도 주의하라!), 이 구절에서 표현된 것은 진정한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 그가 말하고 있은 내용은 기독교보다는 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지막 시기 동안 키에르케고르는 창조가 타락과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그의 이전의 견해에서 벗어난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것을 배제한 채 영적인 것 을 강조한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의 이전의 생각과의 약간의 비연속성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권에 대한 공격}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의 정통주의 루터파적 배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또 하나의 예를 언급할 수 있다. 그것은 유아 세례에 대한 그의 공격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키에르케고르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유아 세례를 비판적으로 보고 그 것을 폐지하려고 했다고들 해석한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이 아주 잘 살펴 본 바와 같이, 키에르케고르는 유아 세례 제도 자체를 폐지해 버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공격한 것은 '아이가 세례를 받았으므로, 그는 그리스도인이다'고 생각하는 당대의 보편적인 가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만일에 우리가 유아 세례를 강조하기를 원하면, 우리는 중생 교리도 함께 강조해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에 의하면, 중생이 없이는 그리스도인도 없다. 어떤 사람이 유아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그가 진정 중생한 이가 아니라면 그는 바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공격은 유아 세례 제도 자체에 대한 공격 이라기 보다는, 이 제도를 오용하는 데에 관여된 비기독교적 관점에 대한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가 그의 생애의 말년에 좀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는 기독교권의 세속성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 하는 것을 사람들이 의식하도록 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주장들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내가 판단하는 한, 물리적인 것을 배제하면서까지 영적인 것을 잘못 강조한 경우만이 기독교적 입장 밖에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5. 결론
이 논문에서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의 성년의 삶을 네 시기로 나누어 각 시기의 일기 내용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과 사유 방식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살펴 본 것은 이 네 시기 전체를 통해서 그는 항상 기독교적 관점과 자연인의 인간적인 입장을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시기에는 회의와 방황 속에 있던 그가 자연인의 인간적 관점에서 이 차이점을 강조했었다. 이 시기에 기독교는 자연인의 순전히 인간적 관점에서 비판받고 공격받아야 할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생애의 나머지 기간들에는 하나님의 사유와 하나 님께서 창안하신 것으로서의 기독교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본 자연인의 인간적 관점의 차이를 강조했다.
둘째 시기에(1838-46) 그는 몇 가지 다른 인생관들을 제공함으로써 기독교적 관점과 인간적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것이 그의 익명의 저작들의 주된 저술동기였던 것이다.
셋째 시기(1846-52)에는 그가 좀더 직접적으로 기독교적 진리에 대한 직접적 증인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둘째 시기와 셋째 시기 모두에 있어서 그는 때때로 기독교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즉, 그는 기독교적인 실존을 잘 드러내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묘사했던 기독교적 입장에 항상 충실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와 기독교적 진리 이해와 사유 방식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어떤 양보와 절충을 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의 실존적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할 수 있는한 기독교와 기독교적 진리 이해, 그리고 기독교적 관점을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많은 사람이 기독교에 들어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기독교적 관점과 자연인의 관점을 교묘히 섞는 것은 "기독교를 없애 버리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기독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그는 많은 극단적인 주장들을 제시하였었다. 그러나 물리적인 것을 배제한 영적인 것에 대한 강조의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이 시기에도 그는 기독 교적 관점을 순수하고 순결하게 유지하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키에르케고르가 기독교적 관점과 단순히 인간적 관점의 차이와 대립을 분명히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회의와 방황의 시기를 벗어나 종교적 경험을 한 후에는 자신이 철저하게 기독교적 진리관을 드러내 보려고 했다. 그 자신이 항상 그런 기독교적 진리 관과 기독교적 관점에 항상 충실하지 않음을 아주 통렬히 지적하면서까지 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진리관과 단순히 인간적 진리관을 섞는 것에 대한 그의 공격은 그 자신 안에서 발 견하게 되는 경향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펭거가 잘 표현한 바와 같이, "키에르케고르는 때때로 그 자신에 대한 최악의 원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을 철저히 비판하면서 기독교적 관점을 순수하게 보존하려는 태도는 이 새로운 시대에도 절실히 요청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에는 더욱더 교묘하게 기독교적 관점과 비기독교적 관점을 섞어 내고, 그것을 객관적인 태도라고 하며, 더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태도라고 제시하는 일이 더 많아 졌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키에르케고르의 역할은 과연 누가 담당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이 시대의 개혁 신학자들에게 던져진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를 감당하려면 우리들이 먼저 기독교적 관점과 기독교적 사유 방식, 그리고 기독교적 진리관을 분명히 하며, 우리의 사유와 신학 활동에서 이런 기독교적 관점에 충실한 모습을 나타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비학문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기도교적 관점의 순수성을 과연 순수하게 지키려고 하는가? 이것이 {결정적 비학문적 후서}를 요하네스 클라마쿠스라는 익명의 저자로 하여금 쓰게 했던 키에르케고르가 우리에게 주는 큰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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