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간의 대화에 대하여
앞글에서 저는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운동임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종교간의 대화는 더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궁극 목적은 그 사람을 복음으로 이끌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최선의 방법은 대화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주 극단적인 보수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거나 근본주의적인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상종하거나 대화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사실은 예수님 역시도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과 대화하셨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궁극적으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요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과 대화하셨고, 논쟁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마 니고데모일 겁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대화를 한 후 즉시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과의 대화가 후에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에 공헌을 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당시의 에피큐리안들과 스토익주의자들 그리고 아테네에서 제우스를 섬기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불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들의 신앙세계와 세계관을 이해하고 기독교와의 접촉정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접촉점이 발견되면 이 접촉점들을 대화의 출발점으로 지혜롭게 활용함으로써 타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적대감을 걷어내고, 복음에 대하여 눈과 귀와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참된 이해와 관심에 기초한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다른 종교인들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종교간의 대화 특히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대화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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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cal Orthodoxy(급진적 정통)에 대하여 / 정성욱목사 | 그외 신학 |
이번 학기에 저는 현대신학(Contemporary Theologies)이라는 과목을 주로 엠디브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30여명 정도의 학생이 수강하고 있지요. 첫 강의 시간에는 신학의 본질에 대해서 강의 했습니다. 요즘 서구권 신학계 내에서 신학의 본질은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있는 화두입니다. 특히 복음주의권에서 몇 달전 타계한 스탠리 그렌즈와 로저 올슨, 그리고 존 프랭키 등이 주창한 탈보주적 복음주의는 많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죠. 최근 프랭키는 The Character of Theology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저와 신학과 동료교수들이 함께 읽으며 비판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지난 90년대 초중반부터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신학적 운동에 Radical Orthodoxy라는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급진적 정통" 정도로 번역이 될 수 있겠네요. 중심인물로는 John Milbank, Graham Ward, Catherine Pickstock 등이 있습니다. 급진적 정통주의의 신학적 관심은 교부시대와 중세시대 기독교의 중심 흐름이 되었던 신학적 착상들 (특히 어거스틴과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가 부각됨)을 현대주의, 탈현대주의, 초현대주의 (hyper-modernism)가 혼재해 있는 20세기말 21세기 초의 시대 정신과 문화적 흐름을 해명하고, 전체 사회와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을 제공하며, 나아가서는 세계와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습니다. 신학적 관심의 폭에 있어서는 칼빈, 에드워즈, 카이퍼 등으로 이어지는 개혁신학과 흡사합니다. 개혁신학 역시 종교개혁의 신학적 원리로 전체 사회와 문화와 세계를 해석하고 변혁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여 왔으니까요. 하지만 급진적 정통주의가 의지하는 신학적 통찰들은 온전히 개혁주의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의 신학적 통찰들이 부각되는 점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크게 불편함을 일으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많은 젊은 복음주의자들에 급진적 정통주의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최근 베이커 출판사를 통해서 칼빈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James K. A. Smith가 출간한 Introducing Radical Orthodoxy는 급진적 정통주의를 잘 소개해주는 책입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일독을 권합니다. 이 책은 제가 가르치고 있는 현대신학 과목의 교과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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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틸리케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바르트 신학에 대한 논의는 잘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헬무트 틸리케의 신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지요. 한편에서는 바르트 신학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개혁주의 신학의 부족한 점을 매꿔볼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고도 하던데요. Re:헬무트 틸리케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정성욱 | 조회 72 | 05.12.09 01:15 http://cafe.daum.net/profchung/1brN/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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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과정신학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 정성욱목사 | 그외 신학 |
과정신학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공간이 부족합니다.
핵심만 찍어서 말씀드립니다.
과정신학이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변화와 생성의 과정에 있다는 신학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에는 '하나님'도 포함되지요.
즉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이 영원 불변하도록 고정되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도 여전히 변화과정에 있고, 생성과정에 있다고 봅니다.
이 변화과정과 생성과정 자체가 영원하지,
하나님이 영원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신론에서 이미 완전히 벗어났구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성과 형벌대속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기독교 세계로 들어오고자 한다면 이단으로 정죄되어야 하겠고,
그냥 철학적 세계에 남고자 한다면 하나의 독창적인 철학체계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결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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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의 신학 어떻게 볼 것인가?
칼 바르트 사후 독일 신학계에는 세 명의 거성이 등장합니다. 위르겐 몰트만,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에버하르트 융엘 이죠... 이 세사람의 신학세계는 각각 특징을 가지고 있지요... 그 중에서도 몰트만은 제 3세계 신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독특한 신학을 전개해 왔습니다. 그는 남미 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 여성 해방신학, 민중신학 등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며 대화하고 관여합니다. 요즘 수술 후 회복기간 동안 몰트만의 책을 좀 심도있게 읽고 있습니다. 몇 가지는 저의 신학적 입장과 동일한 면을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도 성경을 약속과 그 약속의 성취로 해석하고 그 약속성취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성이 확증된다고 보는 몰트만의 약속 해석학은 상당히 좋은 부분입니다. 그리고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제가 주창하는 삼위일체론과 많은 부분에서 동일했습니다. 물론 그의 사삼위일체론을 자세히 분석할 경우 저의 입장과 다른 점도 많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강조는 시기 적절하다고 보여집니다. 몰트만의 신학에서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긍정할 수 있는 면이 있는 반면 동시에 부정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있지요... 우선 그의 만유재신론적 신관입니다. 만유재신론이란 영어로 panentheism으로서 만유가 하나님을 담고 있다는 신관과 연결되지요. 전통적인 신학에서 강조된 하나님의 초월성은 약화되고, 하나님의 내재성이 극단적으로 강조됩니다. 동시에 몰트만의 신관은 과정신학적 신관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과 세계는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의 과정과 역사를 노정한다는 것이죠. 몰트만의 이러한 신관을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거부할 수 밖에 없지요...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만유회복론입니다. 몰트만은 그의 주저 [오시는 하나님]에서 죄인들과 심지어 마귀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과 화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일시적인 심판이 있겠지만 심판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죠... 이 주장 역시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복음주의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지요... 결론적으로 몰트만은 성경이 말하는 부분을 넘어서 성경이 말하지 않는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고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와 신학의 절대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신학은 온전히 복음적인 신학으로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바르트를 읽을 때 저는 바르트의 성경해석에 오류가 있음을 자주 발견합니다. 반면 몰트만을 읽을 때 몰트만은 성경을 넘어가고 있음을 자주 발견하지요... 복음주의자로서 성경에 근거한 비평적인 시각으로 몰트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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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최근 출판된 '예수의 정치학'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 정성욱목사 | 그외 신학 |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우선 재세례파 혹은 재침례파 운동의 교회사적 의의를 짚어보아야 합니다. 1.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 운동의 여러 흐름들 중에서 가장 래디컬하게 로마가톨릭전통과의 단절을 이루었던 운동이라는 점이죠. 대표적으로 유아세례를 거부한 점, 국가교회제도를 거부하고 교회와 국가 혹은 정치와의 철저한 단절을 추구한 점이 중요하지요. 2. 이어서 윤리적인 면에서 평화주의를 신학적 담론 현장에 회복시킨 점 역시 중요합니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또는 칼빈의 just war이론을 넘어서는 성경적 측면을 회복시킨 것이죠. 그러나 문제점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리처드 니버가 잘 지적한 대로 신앙공동체의 문화참여를 소극적으로 지지한 점 그래서 자칫 신앙공동체가 신앙인의 게토로 변질 될 수 있는 길을 터 놓은 점은 큰 약점이라고 보여집니다. 이 점에서 재세례파 운동은 개혁신앙의 문화참여/변혁 사상과 대비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은 저도 자세히 정독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요더 특유의 성경해석적 통찰과 평화주의적 이념이 통합된 아주 중요한 저작이라고 보여집니다. 개혁신학적 복음주의자로서 제가 요더의 모든 주장에 동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제시한 평화주의라는 이상과 이념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깊이 고민하고 또 비판적으로 수용해야할 성경적 측면이라고 보여집니다. 교회사에 등장한 어떤 전통도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통찰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루터파전통이든, 개혁파전통이든, 제세례파든, 세대주의든, 감리교파든, 오순절파든... 우리는 다양한 전통들로부터 열린마음으로 배우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물론 개인이 속한 주류전통을 가지는 것 역시도 중요하지요. 예를 들어 제가 속한 주류 전통은 개혁신학, 칼빈주의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루터파전통에서 그리고 재세례파전통에서 중요한 통찰들을 여전히 배우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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