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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본 성경
구약연구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본 성경
A. 구약에 대한 Critical Approach
Historical-critical Mathod(source criticism, text criticism)
1) 문서설(Document Hypothesis)
구약은, 한 권(예-모세오경)이라 할지라도 단일 저작이 아니고, 한 번에 쓴 것도 아니며 여러 시대에 걸친 여러 저자의 작품이다. 왜냐하면 논리적 일관성이 없고 중복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doublet’(중복보도)는 한 사건을 두 번 이상 기록하는 형식이다.
J, E, D, P 등의 문서들로 성경을 모두 찢어내기 시작하여 현재는 그 분류들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인정하는 상태이다.
Martin Noth : 성경의 문서설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서, 한 사건이 두 가지로 기록된 것을 증명하는 확실한 근거는 ‘doublet’ 밖에 없다.
Eissfeldt(최고의 문서설 학자) : 문서설은 확실한 fact 위에 근거한 이론이라기 보다 가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
2) Form Criticism(양식사학 비평)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문서설의 극단화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문서설은 J, E, D, P라는 문서의 본래적 성격을 그래도 인정하여 현존하는 원문을 추적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비해 양식사학은 기록된 형태 이전의 form을 추구한다.
현재의 구약 형태가 존재하기까지는 간단한 것들의 복합이 아니라 더 오래된 기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J, E, D, P 이전의 문서가 있을 수 있고 문서 이전에도 구전의 형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pre-literary stage(문서 이전의 상태)를 인정하고 그것까지 추적하려 한다.
그런데 남아 있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데 그 방법으로 Gattungsforchung(쟝르, 형식)를 사용한다. 이 형식 연구의 근거는, 고대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형식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종교적 영역에 있어서는 더욱 보수적이므로 더 형식에 철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서화 이전의 형식은 보수적 성격 때문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형식과 삶의 내용(상황)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현재의 삶의 내용 속에서 고대의 형식(gattung)을 추적할 수 있다 - 삶의 상황을 전제. 현존 형태 이상의 풍부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unit 안에 여러 쟝르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서로 찢어 분류(atomistic)하다보니 원문으로서의 구약 전체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3) Canonical Criticism(예일대의 B. S. Childs가 주장)
위의 2가지 비평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데 비해 이들은 현존하는 정경 자체를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인용한 구절은 구약이었다고 하여 구약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의 근저에는 문서설과 양식비평이 전제한다. 비평의 방향만 달리하며 현재 형태의 구약에 관심을 두고 이 구약이 어떤 경로를 거쳐 이루어졌나를 연구한다. 연구의 방향은 다르지만 연구의 방법론은 변하지 않았다(Childs의 ‘The Crisis of Biblical Theology’를 보면 근본적으로 우리와 다르다).
* 이들 3비평의 공통점은 오늘 우리의 성경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점이다. 한 사건의 중복기록은 서로 모순된다고 하여, 그렇게 되면 양자가 모두 그릇되거나 적어도 하나는 그릇되므로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한 unit를 다른 새로운 문맥에 집어 넣음으로서 본래 문맥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context 변조).
B. 성경연구의 도입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인 것이 아니다. 기록된 때에 따라 편의상 구별한 것이다. 구약을 접근하는 방식, 구약을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각자 원하는 방식이나 시각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어떻게 접근하고 바라봐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성경 자체가 성경에 대해서 여타의 책과 구별하는 것이 영감이다. 자유주의는 이 영감을 인정하지 않고 성경과 다른 책들을 구별하는 것을 포기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의 독특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초부터 창조, 타락, 이스라엘의 선택, 그리스도의 초림, 재림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현대는 역사관이란 역사를 보는 제 입장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다양한 역사관이 있다는 뉘앙스를 준다. 현대신학에서는 역사의 문제와 신학의 문제가 맛물리고 있고, 역사의 의미에 따라 신학의 정립이 달라진다. 그러나 성경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통적 견해이다. 역사에는 역사 자체와 역사 기술이 있는데 역사 기술은 결국 역사 해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요즈음 역사 해석이 중요한다고 본다. 즉, 성경은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이라고 보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은 절대적인 역사관이다.
1.역사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天은 heavenly realm(허공)을 말한다. 地는 earthly realm 즉, 물리적 공간이다. 따라서 두 개의 실재 영역으로 나뉘어진다(realm of reality). 물리적 공간 즉, 인간이 사는 삶의 장은 시,공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리적 공간 외에 또 다른 실재 영역이 있다. 그것이 heavenly realm이다. 통속적으로는 영계(靈界)라 한다. 역사란 물리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총체를 가르쳐 역사라 한다. 이 천상의 영역과 물리적 영역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는 이 천상의 영역에서 시작되어 물리적 영역으로 넘어간다고 본다.
성경은 하나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물리적 영역인 시,공의 영역의 일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Docetism, 이것이 더 세련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불트만(Neo-Gnosticism)학파로서 시,공의 역사가 다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시,공의 물리적 공간에 뿌리를 박은 것이다. 또한 성경의 역사는 하나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의 흐름이라고 할 때 지혜문학(시편, 잠언 등)이 포함되기 어려운 점이 있긴 하나 하나의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신학의 왕은 조직신학(교의신학)이다. 그러나 모든 신학의 근거는 성경이다. 이제까지의 신학 중 가장 성경과 밀착된 것이 조직신학이었다. 성경의 진수를 체계적으로 진술해 놓은 것이 교의신학이다. 혹자는 교의신학도 시대상황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나 이러한 시대적 영향은 오히려 교의신학을 오도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특히 독일철학에서 그러하다). 독일에서는 철학의 발달의 궤와 신학의 발달의 궤를 같이 한다. 철학과 신학이 매우 밀접하여 신학에 많은 해를 끼쳤다.
성경과 가장 밀착된 것이 조직신학이지만 조직신학 속에서 성경을 더욱 가깝게 느끼기 보다는 멀리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직신학의 용어가 성경의 용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은 주제별로 나뉘어져 기록되어 성경의 역사성이 상실되어 있다. 즉, 조직신학은 주제별로 성경 내용을 조직화하였다. 이는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사색이 들어가고 오늘의 상황에 대한 사색(refleetion)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합리적 설명을 가함).
성경은 구체적, 역사적 사건 기록이다. 교의신학은 추상적, 체계적이다. 이것이 교의신학의 약점이자 장점이다. 사건을 기록한다는 것은 사건 자체로 끝나지만 추상적이라고 함은 하나의 원리를 추출하는 것으로 다른 여러 사건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 조직신학 자체가 추상적인 것은 사색을 거쳤기 때문에, 철학적 요소가 가미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근거하나 시간의 제약 등의 이유로 성경의 실제기록(직접적인 내용)과 기록 속에서 원리를 추출하는 과정이 생략되었으므로 성경과 거리감 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색을 통한 추상적, 체계적, 조직적 작업은 정도의 차이 뿐이지 모든 신학에 다 있다. 방법론의 독특성은 과거의 사건 자체 지향보다는 현재지향적이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주제별로 발전되어 간다.
신 론 변증가들, 삼위일체론 ↓
인간론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 ↓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옴.
기독론 이성론 논쟁 ↓
구원론 종교개혁시대 ↓
교회론 ↓
내세론 ↓
그런데 성경 자체가 신론, 인간론 등으로 구별하여 이야기하고 있는가? 성경과 교의신학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는 ①교의신학이 주제별로 모았기 때문이고, ②이들이 사용한 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의학은 현재지향적(오늘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이고 성경은 과거 사건을 기록(그때 무엇이 일어났는가?)했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이 오늘 필요한 교리, 어느 시대나 적용되는 원리 등을 추출하여 기록한 것이기에 이러한 과정에서 구체적인 역사와는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주제별로 항목을 나누고 이에 관련된 성경 구절을 각 문맥에서 뽑아내므로 문맥 파괴가 이루어지고 유기적인 흐름이 깨어지게 된 것이다. dicta probantia = proof text(특정 교리를 증거해주는 성구들) 때문에 역사성 자체가 증발해 버린다.
이렇게 성경의 역사적 성격은 없어져 버려도 좋은 것인가? 이것에 대한 반론이 성경신학으로 나타났다. 성경의 역사성을 고수해야 한다. 즉 신학에서 꼭 회복해야 할 것으로 자유, 보수 양편 모두 주장한다.
2. 성경의 역사성(Geschichtlichkeit : Historicality)
1) 성경의 역사적 성격
성경은 어떤 책이냐? 하는 것이 현대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B. W. Anderson의 ‘Exodus Typology in Second Isaiah’에서 ‘Allegory와 Typology는 2개의 상이한 존재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Allegory : 구체적, 역사적 시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무시간적, 영원한 어떤 것에서 참 실제를 발견하고자 함. 알레고리칼한 해석은 구체적 관심보다는 배후의 진리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러한 해석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구체적 역사는 실제적 역사의 영역이 아니고 무시간적 영원한 역사의 표면적 구체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참 실제는 구체적 역사 속에 있지 않고 실재를 초월한 것이다. 시공의 역사적 사건은 무시간적 진리의 일시적 구체화에 불과하다. Plato의 Idea에서 이러한 입장이 잘 나타난다. ‘현상은 영원한 이상의 묘사요 그림자이다’
Typology : 시,공에서 일어난 일은 영원한 실제와 동일하다. 역사 속에서 궁극적 실제가 표출된다 .
성경은 Anderson의 2가지 주장 중 어느 한 범주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성경이 진술한 내용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이 역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에 뿌리박은 구체적 역사요, 구체적 목표를 향해 시작과 끝을 가지고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교의신학은 이러한 역사성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주요한 성격을 놓치고 있다(오랫 동안 전통신학과 자유신학의 구체적 충돌이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교의신학의 그런 성격 - 성경의 역사적 상황(context)을 근거하지 않는 - 때문이었다). 만약 성경신학이 전통적인 신학의 조류였다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성격 때문에 처음부터 자유주의 신학의 짜집기 성격과 크게 충돌하였을 것이다.
2) 성경의 중심 주제와 관련된 역사성
요 5:39 - ‘너희가 성경(구약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눅 24:24 -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구약성경)에 나를 가르켜 기록한 모든 것...’
이런 구절들은 적어도 신약을 영감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열쇠를 제공한다. 신,구약의 근본적 통일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신약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다는 것은 이견이 없지만, 구약도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다는 것에는 자유와 보수 사이에 많은 이견이 있으며 정통 견해 중에도 그리스도의 구체적 증거에 대해서 서로 다르다.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인 것은 분명한데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하는 데에 대해서는 확연하지 않다. 구약에서는 메시야가 나오지만 그 당시의 인물을 말하고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그 많은 기록들은 다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기록은 예수님이라는 한 인격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 메시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구약의 다른 내용과는 별 상관없이 단편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구약이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의 방식이 매우 포괄적이며 직접적인 방식과는 다르다.
구약의 다른 내용과 관련되어 있으며 오히려 구약 전체를 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구약의 요약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구약 전체가, 구약 전역사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흔히 구약은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신약은 그리스도를 성취했다고 한다. 신약의 많은 구절들이 ‘...이것은 구약의 그리스도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고’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구약은 예언(prediction)이고 신약은 성취만으로 되었는가? 이것은 약간 주저되는 결론이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구절만 찾으려 한다.
이렇게 할 때 시편, 이사야, 미가 등만 찾기 때문에 역사서 등 그 외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찾지 못하여 구약의 많은 부분을 윤리적으로 해석(moralize)해 버린다. 예표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성막이나 제사, 그리고 그 외의 사건을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풀어가지만, 오히려 그 사건이 그 당시에 갖는 실제적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약 편향적’이 된다(예언→성취의 입장).이들은 신약 저자들이 ‘...은 구약의 ...을 이루려함이라’고 기록한 부분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구약은 순전히 예언이고 신약은 그 성취라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구약에도 성취가 있으며 신약에도 예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구약은 모두 예언과 성취의 역사이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 이러한 결론은 예언 성취의 의미를 단순히 시간적 의미에서 보다도 폭넓게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① 왕하 17:22-23에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말씀에 근거했고, ‘역사는 바로 하나님 말씀의 실현’임을 말해준다(Actualization). 모든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 말씀의 실현인 것이다. 말씀은 약속의 형태든지 예언의 형태든지 말씀의 실현은 바로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하나님 말씀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 55:11-12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한 번 나오면 반드시 구체화되고 실현된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성경 저자들의 근본적 역사관(참 역사관)은 ‘전 역사는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다’라고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신약 특히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이미 이런 역사 기술 방법을 이어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언 성취를 보다 폭넓게 보면 신,구약이 모두 예언과 성취이며 말씀의 실현이다. 성경 역사를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라고 볼 때 사 55:12에는 ‘내 입의 말이 헛되이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했다(구속 역사와 관련).
결론 :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실현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리들을 가르치실 때에 반드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통해 하신다. 성경의 구체적 역사성을 부인하는 입장 중 하나는 Gnosistism인데 도세틱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가현설을 주장한다. 성육신은 역사 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성경은 항상 구체적 역사와 관련이 있다.
신,구약의 관계를 예언 성취의 관계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어법을 잘 모르는 입장이다. 그렇게 될 때 구약은 그 자체의 역사성이 약해지며 신약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② 성경은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라고 할 때(사 55:11-12) 그 의미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관련 구절은 암 3:6하 ‘하나님의 행하심이 아니고서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7절 ‘하나님께서 자기 계획을 선지자에게 먼저 계시하시고 행하신다’, 8절 ‘주께서 말씀하시면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장래사의 계획을 선지자에게 말하시고 선지자는 선포하는 것이다.
렘 23:16 거짓 선지자의 하나님께서 말씀치 않은 것에 대하여 예언한 것을 책망함.
18 참 선지자는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하여 비밀계획을 전수 받는다.
왕상 22장에는 하나님의 회의가 나옴(미가야 선지).
이사야는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알게 된다. 14:27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 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이는 이스라엘 뿐아니라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결정과 뜻에 따라 실현됨을 알 수 있다.
사 40장 이후에는 이방신들을 국문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너희 이방신들아 너희가 장래 일을 말해보라.’ 미래사를 말한다는 것은 역사를 주관한다는 것을 뜻하므로 하나님의 그 말씀은 자신만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시 33: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매 이루어졌다.’
이렇게 성경 역사를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라 볼 때 구약과 신약의 첫 부분으로부터 마지막까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구약도 역시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의 역사이며 의미 있고 실제적인, 하나님 그 백성의 역사이다(여기서 불트만 등은 구약을 무의미하다고 하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허상의 역사, 알맹이 없는 역사가 아니다. 구약은 ‘예언 모음집’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여러 곳에는 신약을 가리켜 성취의 역사라 한다. 그러므로 구약은 그 자체가 예비적 성격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러한 양자의 입장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구약은 하나님 말씀의 실현임과 동시에 구약의 예비적 성격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 : 구약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이루어지는(점진적 성격) 어떤 목표, 종국,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완성의 역사이다.
낮은 단계는 높은 단계를 내다보는 것이다. 구약 자체로서도 의미를 잃지 않고 신약에 대한 예비적 성격도 살릴 수 있다. 구약의 역사가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이 된다는 점에서 진정한 발전의 성격을 가지고있다. 신약의 ‘...이루려 함이라’라는 뜻의 πληροω(플레로오)의 뜻은 make full fill이라는 뜻이다. 이는 consummation(가득 채운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성하러 왔다고 했을 때 역시 πληροω를 쓰는데 그것은, 구약의 절정은 그리스도에서 성취됨을 의미한다.
③ 구속역사가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을 향해 가는 완성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 목표를 향해 흘러가는 역사를 꿰뚫고 있는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무엇인가?
대전제 : 성경의 중심 주제는 무엇인가?(요 5:39 성경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 직접적인 대입은 지양하되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야 한다.
전통적으로는 예언 성취의 관계로 신,구약을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 후로는 신,구약의 통일성을 covenant에 의해 이해하려고 했고 이 시도는 구속사의 점진성, 즉 성경계시의 역사적 성격을 드러내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계시의 여러 성격에서는 역사성과 함께 상이성(발전성)을 보이고 있다.
존 머레이는 ‘계약신학이야말로 구속사의 진전성을 나타내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언약’의 개념이 성경의 중심 주제를 꿰뚫는 중심사상이 될 수 있는가? 관련 구절에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뒷받침 한다(현재는 covenant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설정되어 있지 않다). 보편적인 언약의 개념은 ‘관계확립’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관계결속’은 다윗과 아브라함 언약에 국한될 뿐 노아에 있어서는 관계결속에 맞지 않다. 그렇다고 할 때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과의 관계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나는 너희 하나님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성경을 흐르는 하나의 핵심사상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모든 성경의 중심사상인가? 하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
이와같이 언약개념이 언약의 실제 내용을 담는 형식에 불과하거나 그 내용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서 그 내용은 어떤 더 큰 주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형식으로서의 언약은 충족되지만 그 내용까지 포괄하지 못한다. 언약이 전 구약 중심 주제에 부합되는 것에 부족하다는 것은 언약을 관계결속이라는 것으로 할 때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을 연결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언약의 개념이 구약의 전 내용을 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언약의 내용이 서로 산만하게 존재하다가 그리스도에 와서 종합됨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것은 언약들의 서로의 성격이 긴밀한 연결을 갖지 못하는 것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에는 일관된 중심 주제가 있는가?
그에 대한 대 전제는, 이러한 중심 주제는 신,구약이 지목하는 그리스도에 직결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이것은 신학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대한 구절이 바로 마태복음 1장이다. 마태복음 1장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전 구속역사의 뼈대를 보여주고, 어떻게 구속 역사를 이해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온다.
ꡔβιβλος γενεσεως Ιησου Χριστου..... ꡕ(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예수 크리스투...)
신약의 저자들이 표현할 때 구약의 표현을 인용하는데 70인역을 많이 참조한다.
예) 구약의 ‘תודלות הלא’가 모두 족보의 뜻을 가진 것은 아니고 야곱에서는 ‘약전’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근원, 역사라는 뜻이 더 정확하다. 족보는 어느 의미에서 가장 압축된 역사하고 할 수 있다. 족보의 확대는 바로 역사이다.
תודלות הלא는 성경의 핵심적인 표현이다. 이 말은 훨씬 복잡한 의미가 있다. 이 족보는 인류의 역사를 크게 구분짓는 분기점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데, 족보란 가장 함축된 형태의 역사이다. 인간의 존재방식의 특수성 즉, 혈통, 혈연이 연속성을 통해서 후손을 이어간다. 따라서 족보는 어떤 역사의 줄기를 시사하는데 사용되고, 역사의 근원을 항상 제시해 준다(혈통의 근원을 시사).
성경의 족보 사용례를 살펴보면 어느 근원점에서 시작된 역사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아 새롭게 시작될 때에 그 근원(새 역사)과 이전의 근원(옛 역사)과의 연속성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예) 마 1장은 예수님의 족보와 아브라함의 족보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역사 속에서 어떤 인물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때 그 역사의 근원을 미루어 살피므로 그 역사의 근원과 현재의 사건의 관련성과 연속성을 시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 역사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이 하나님의 약속은 당대로 그치지 않고 혈통을 통해서 계속 이어져 내려온다. 그러다가 이 약속이 성취되거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때, 지금 일어난 일은 특히 한 인물에게서 되어지는 일은 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족보를 사용한다.
그 역사의 줄기, 근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을 의식한다(새로 시작되는 역사의 근원과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중심인물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떤 혈통이나 역사의 줄기, 그리고 역사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이 그 역사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다가 어떤 인물의 생애에서 실현되려 할 때 그 인물의 족보를 기술한다. 새로운 국면, 한 segment의 시작시 ‘족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 관점에서 ㉠ 마 1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새 역사의 근원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 아브라함과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역사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보고 있다.
17절 아브라함 - 다 윗 / 14대
다 윗 - 바 벨 론 / 14대
바 벨 론 - 그리스도 / 14대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성경기자는 전 구약역사를 압축하여 설명함을 알 수 있다.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이루어지는데 이 새로운 역사는 이전의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게되고, 이 하나님의 약속이 누구로부터 주어졌는지를 밝히므로 이 새로운 역사가 이전 역사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역사는 이전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마 1:17 이 새로운 역사 즉, 아브라함-예수까지의 이전의 역사는 크게 3부분으로 구분된다고 시사해 준다. 이 역사의 구분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 되돌아와 본 것인데 되돌아와 보니 이전 역사와 관련이 있고 그 역사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역사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역사와 관련이 있고 이 역사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이 있었다. 따라서 창 12:1-3의 아브라함으로 돌아가 보면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 근원인 아브라함의 역사를 이해하여야 한다. 아브라함의 왕국건설의 약속은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하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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