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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기, 삼위일체 신론이 정립되다 2

by 【고동엽】 2021. 10. 2.
 
4 세기, 삼위일체 신론이 정립되다 2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대로 유대교 유일신 유신론은 후대에 와서 정립되었습니다.
유일신 유신론은 강한 배타성을 보이는데, 그것은 이 개념이 만물을 섭리하는 감독자로 존재하는 그리스 철학 신과 밀접하게 연관되었기 때문 입니다.(*1)
유대교 후기 신론이 그리스 철학 영향을 받아서 정립되었다는 말 입니다.
이스라엘과 그리스 등 고대 신 본질은 폭력에 있습니다. 신이 폭력 속성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라 폭력을 통해 평화를 구합니다.
야훼 신도 적을 멸절하는 폭력 신이고요,
그리스 신 디오니소스는 많은 재앙들을 주관합니다. 디오니소스는 갑작스런 변동, 뜻 밖의 재난, 공포 신으로 규정됩니다.
신이 깨뜨린 평화를 스스로 복구함으로써 신 정당성을 찾습니다.(*2)
교부들은 출발부터 강한 배타성을 가진 신 개념을 토대로 신학했습니다.
교부들은 기독교가 이러한 신 개념과는 전혀 다른 예수그리스도를 신으로 신앙한다는 사실에 조금도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실은 오늘날도 기독교가 이 사실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4 - 5 세기 교부 신학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기 때문 입니다.
4 세기 교부들은 신은 누구인가? 신이 이 땅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대해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신 본성이 무엇인가? 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신 본성을 플라톤 철학으로 설명하여 예수께서 신 동일 본질인가 유사 본질인가 하는 문제 투쟁에 생사를 걸었습니다.
교부들은, 예수는 근본 하나님 본체시나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 형체를 취하셨다.(빌2:6-11) 또 신(말씀)이 육신이 되셨고(요한1:14) 세상을 사랑하셔서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 하신다(요한3:16-17) 등 성서가 증언하는 기독론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외면했습니다.(*3)
섭리론(攝理論 providence)
라틴어에서 섭리(providere)라는 말은 미리 정해져 있음(fore-ordering)을 미리 본다는(fore-seeing) 말 입니다.
기독교 섭리론은 구약 성서가 아니라 그리스 플라톤 사상에서 유래했습니다. 플라톤은 10 번 째 법규에서 아테네 손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들은 자신 소유물, 즉 하늘과 땅 모든 피조물을 애지중지 돌본다. 더구나 만물 중에서 미미한 것들이나 소소한 것들을 돌본다.(*4)
이 섭리 신앙을 종교성 짙은 신플라톤주의 사상에서 세네카와 키케로도 가르쳤습니다.
기독교 최초 신학자 오리게네스(185-254)에 의해, 이 섭리론이 인류 구속사를 해석하기 위해 신 양육 의미로 기독교에 유입되었습니다. 5 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이것을 받아들여 요한 5 장 17 절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 말씀과 연계해서 발전 시켰습니다.(*5)
16 세기 종교 개혁자들은 이 신플라톤주의 섭리 신앙과 기독교 믿음이 어떻게 다른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6)
신플라톤주의 섭리론 강조점은 미리 정해진 것을 신이 그렇게 되도록 이끈다는 것 입니다.
삼위일체 성령론 강조점은 신이 변화무쌍한 우리 현실을 돌보는데 있습니다.(요한6:66, 고후3:16)
미리 정해져 있음을 강조하면 인간은 가계장치 톱니바퀴에 불과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한다는 예수 말씀(요한 8:36)은 거부되는 형국 입니다.
16 세기 종교개혁자 칼뱅은 섭리론을 적극 수용하여, 신 작정론과 예정론 교리를 정립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일어날 모든 일을 아시며 그의 목적에 맞게 이런 일들이 발생하도록 하시며 그의 목적대로 되도록 인도하신다고 합니다.(박혜경)
창세 전에 그리스도인이 선택되었다는 성서 진술(엡1:4)은,
그리스도인이 탄압으로 생명이 위협받는 엄혹한 현실에서 신앙을 지키고자한 진술 입니다. 성공자가 성서의 극히 미미한 진술을 바탕으로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진다면
1. 행위에 따라서 심판받는다.(로마2:6)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모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7:21)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엡3:12) 등 성서 말씀은 거부되는 형국 입니다.
2. 기독교 신은 가난한 사람, 소외자, 실패자 하나님이라는 진리가 거부됩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므로 '성령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합니다.(로마8:26)
기독교가 이 지경이 되었으면 신학과 역사를 돌아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함이 순리일 텐데,
오늘날 기독교 주류가 성서도 아니고 중세 신학을 그대로 따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전지전능한 신
구약 성서에 하나님은 야훼와 엘 샤다이로 표기됩니다. 히에로니무스(Jerom 347-420)는 히브리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불가타역) 야훼는 주님으로, 엘 샤다이는 전능한 하나님(God almighty)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결정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전능한 분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 랍비들은 엘 샤다이를 젖가슴 가진 분(breasted One) 이라는 뚯이라고 말합니다.(*7) 삼위일체 신인 보혜사 성령 하나님과 유사한 의미 입니다.
그동안 신학에서 전능한 하나님이란, 사건들에 영향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완전히 그 모든 사항을 결정하신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성서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한 신 개념은 중세 서양사 산물로서 서구신학 개념 입니다.(*8)
종교개혁자 칼뱅에게서 하나님 전능이란, 하나님 자신이 독자적 비밀스런 계획에 따라 만물을 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기독교강요 3, 23, 7)
이러한 입장은 모든 성공이 하나님 축복이고 재난과 역경은 하나님 저주라는 의미 입니다.(기독교강요 1, 16, 4, 6, 8)(*9)
칼뱅 주님은 예수그리스도가 아니고 플라톤 입니다.
절대, 무한, 불변, 전지, 전능 완전한 선이라는 신 개념은 플라톤 신 범주 입니다.
이러한 신플라톤주의 신 개념이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과 현재 그들을 따르는 서구 신학 정통주의 입장 입니다.(*10)
성서시대를 제외하곤, 오늘날까지 주류 신학은 한 번도 민중 하나님을 고백한 때가 없습니다. 언제나 교회와 국가 지도자가 지배하는데 봉사하는 신학 입니다.
현재 한국 개신교 주류인 복음주의는 19 세기에 미국에서 이신론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발흥했습니다. 복음주의는 성서 문자주의와 칼뱅 신론에 의해 자본주의 세계와 완벽하게 결합했습니다.(*11)
복음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2 세기 교부들이 신학을 정립할 때 성서와 그리스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성서와 자본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성공, 성취, 업적 신학이 교회를 부패하고 병들게 하여 기독교 소멸 길로 가는 중 입니다. 젊은이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와 성당을 보고 기독교 성공이 자신들과 무슨 관계인가 묻습니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빈부격차가 증대되어 발생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과도한 경쟁에 밀리는 청년들에게,
교회성당이 위로와 희망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현실을 교회성당이 조장합니다. 부자와 성공자가 교회에서 우대받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젊은이가 하나님 축복으로 칭송되고 있는 현실이 분명한 사례 입니다.
예수께서는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우셨습니다.(누가19:41-44)
또한 차별 상징이 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시며 항쟁하십니다.
하나님 힘은 설득이지 통제와 지배가 아닙니다. 화이트헤드는 선은 어떤 악이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많은 선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12)
과정 신학 신론은, 하나님은 인간 자유를 위해서 모든 것을 열어두신 분 입니다.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 별개가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사태가 피조물에게 좋지 않게 흘러갈 때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십니다.(*13)
오늘날 우리는 타인 삶을 삽니다. 명예, 권력을 비교 우위에 두기 위하여 행위하고 행복도 타인과 관계하는 나 속에서 찾습니다.
믿음은, 법과 관습 그리고 타인 시선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 인도합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오늘날 신앙인은 잘못된 전통을 정통이라 우기며 억압된 신앙 생활하는 현실 입니다.
자유의지는 인간 진보를 추동하고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감정, 감성은 뇌 전두엽에서 작용합니다. 이 처럼 기억, 이해 등 의식 작용은 뇌 지정된 기관의 작용 입니다. 그러나 지유의지는 어느 기관이 있지 않고 뇌 전체 통섭統攝consilience 작용에 의해 발현 합니다.(*14) 우리는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삽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우리의 끊임 없는 노력과 투쟁으로 계발됩니다.
자유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 선물 입니다.
칼 바르트 스승인 W. 헤르만은 실재 근원은 인간 이성에 있지않고, 신에게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서 칼 바르트는 우리에게 오는 절대 타자로서의 신 개념을 계발했습니다.(*15)
신은 실제 효과를 주기 때문에 실재합니다.(*16)
우주의 가장 중심 실재는 모든 사물과 사건 현실 배후에 있는 무한한 생명과 힘울 가진 영 입니다.
우리 인간 삶에서 가장 중심은 이 무한한 생명인 하나님 생명 흐름에 나를 열어놓는 것 입니다.(*17)
우리에게 신 인식이 왜 중요할까요?
포이어바흐는 신이란 인간 의식이 투사된 존재라고 합니다. 절반은 맞는 말 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믿는 신이 어떻한가에 따라, 신을 따라서 행위하기 때문 입니다.
그동안 기독교 신은 지배하고 통치하는 폭력 신 입니다. 12 세기 3 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대인과 이슬람인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해 1 만 여 명을 학살했습니다. 당시 1 만 명은 오늘날 비중으로 백만 명도 넘습니다. 예루살렘 도시에 피가 말 발굽까지 찼다고 합니다.
16 세기 종교 개혁 30 년 전쟁으로 유럽 인구 35 %가 죽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성당 하나님은 지배하고 통치하는 하나님 입니다.
재미있는 표현은, 성직자들은 교회성당은 민주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 통치 제도라고 떳떳하게 말합니다. 그러고서 자기가 하나님 대리자라고 우기고 자기가 통치합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은, 교회성당은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라는 말 입니다. 인간성을 잃고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교우들도 성직자가 하나님 대리자라는데 동의 합니다. 그리스도인 모두는 하나님과 직접 관계하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성서는 무시된지 오래 입니다.(벧전2:9)
16 세기에 칼뱅이 그렇게 해서 제네바 시를 4 년여 엄숙 통치하여 예배 불참자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재 세례파 그리스도인 7 천 명을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학살했습니다.
삼위일체 신을 반대하는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은데, 정작 자신은 삼위일체 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통치해야 하기 때문 입니다.
오늘날 만약 법이 허용한다면 교회에 살인과 고문이 만연할 거라는 게 나의 생각 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날 기독교 배타성과 폭력성은 하나님나라 현재성과 삼위일체 신론 실종이 원인 입니다.
다음회에 삼위일체 신에 대해 설명합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1. 리처드 보컴 예수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형일 안영미 새물결플러스 서울시 2019, 37p
2.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김진식 박무호 민음사 서울 2019, 201-202p
3. 리차드 보컴, 113p
4.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신학과 철학 오성현 종문화사 서울 2019, 114-115p
5.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판넨베르그 조직신학 2 새물결플러스 서울 84-85p
6.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3 윤응진 대한기독교서회 서울 2016, 55p
7. 존 캅 예수의 아바 하나님 박만 한국기독교연구소 고양시 2018, 20-21, 38p
8. 찰스 하트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홍기석 임인영 한들출판사 서울 1995, 19, 29p
9. 데이빗 그리핀 과정신정론 이세형 이문출판사 대구시 2007, 139p
10. 존 쿠퍼 철학자들의 신과 성서의 하나님 김재영 새물결플러스 서울 2011, 53-54p
11. 카렌 암스트롱 신을 위한 변론 정준형 웅진지식하우스 서울 2013, 366-371p
12. 찰스 하트숀, 349, 375p
13 . 존 쿠퍼, 311p
14. 에드워드 윌슨 통섭 최재천 장대익 사이언스북스 서울 2016, 183-227p
15. 하워드 아일랜드, 마이클 제임스 발터 벤야민 평전 김정아 글항아리 서울 2018, 225p
16.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김재영 한길사 파주시 2019, 604p
17. 같은 책, 1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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