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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예수사랑이란 무엇인가 4

by 【고동엽】 2009. 5. 5.
예수사랑이란 무엇인가 4
4. 가짜 디오니시우스 신학
가짜 디오니시우스는 자신이 사도행전 17 장 34 절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제자 디오니시우스라고(개역개정은 디오누시오) 주장하면서 신플라톤주의 저술을 남긴 신학자 입니다.
그의 저술들은 기독교 신학과 철학 그리고 신비주의의 중요한 교과서로 채택되었습니다.
바울의 제자라는 명성과 교회적이고 신비적인 내용으로 기독교 신학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나다.
하지만 후대의 연구에 의하면, 그의 저작들은 신플라톤주의 사상가인 '프로클로스'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고 또 여러 요소들이 그에게서 빌린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가짜 디오니시우스는 신플라톤주의를 별다른 저항 없이 스콜라신학 등 기독교 신학에 퍼다 날르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이 가짜인 것은 에라스무스가(1466 - 1536) 삼위일체 신론이 4 세기에 정립되었는데, 바울의 제자라면 1 세기 인물이므로 삼위일체 신론을 전개할 수 없음을 밝히면서 드러났습니다.
종교개혁시에 루터와 칼빈 등은 이러한 이유 등으로 스콜라신학을 거부하여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이 결정적으로 다르게 되었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인간의 선한 행위, 즉 인간의 의지로 구원 받음에 있고, 바울의 기독교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신앙훈련이라며 극기 훈련을 하는 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필자가 가톨릭을 폄훼하려는 의도로 이러한 신학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1. 가톨릭의 카리타스사랑(자비사랑)이 구원을 위한 공로적 성격이 있음을 지적하기 위함 입니다. 카리타스사랑이 우월적 지위로 행하는 사랑일 수 있음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필자는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고 호칭하신다는 루터의 칭의 신학이 완전구원으로 오해를 일으킨다는 것을 설명한 바도 있습니다.
2. 만인 전문가 시대에 신학은 더 이상 신학자나 목회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평신도가 신학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함으로써 못된 종교꾼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의 가톨릭신학의 구원관은 아우구스티누스와 가짜 디오니시우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수용한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스콜라신학으로 정립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원의 순서가 있는 것이 특징 입니다.
1. 인간의 정화(淨化 purgation)
2. 신의 조명(illumination)
3.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신의 은혜(조명)가 있기 전에 인간의 정화가 먼저라는 게 특징 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죄용서 전에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설교를 한 것과(사도행전3:38) 같으며, 예수가 회개 없이 죄를 용서해 주었다는 바울의 설교와는(사도행전13:38) 다릅니다.(여기서 죄용서는 죄가 없게 해 주었다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도록 기회를 다시 주었다는 의미 입니다. 다음 기회에 자세히 논구하겠습니다)
칼 바르트의 설명에 의하면 가톨릭의 조명은 그리스도의 부름(선택)과 같습니다. 가톨릭 구원관은 부르시기 전에 선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학으로 인해 가톨릭의 카리타스사랑(자비사랑)은 우월적 지위에 의한 시혜적 행위이거나 구원받기 위한 공로적 행위로 나타날 우려가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갈등과 불화를 유발할 수 있음으로 예수사랑이라고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행위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이유는 자랑하지 않음으로써 교만을 방지하여(에배소2:9) 갈등과 불화를 막고 화해와 평화로 이끄려는 의도 입니다
가톨릭의 자비사랑이 이렇한 약점이 있다고 해서 개신교의 가나한 사람들에 대한 구호가 가톨릭에 비해 크게 약한 것은 크게 잘못 입니다.
가톨릭에서 카리타스사랑(자비사랑)이 아니라 차등 없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예수사랑을 실천한 마다 테레사의 사랑을 봅니다.
5. 마더 테레사(1919- 1997)의 사랑
그녀는 1929 년 1월 16 일 수련 생활을 사작했습니다. 1946 년 9 월 10 일 피정에서 신의 음성을 듣습니다.
'수많은 영혼을 위해 한 걸음 나가기가 두려우냐? 너는 인간의 영혼을 위해 죽어보지 못했으니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 상관하지 않는구나 ••• 라는 신의 음성을 들었습니다.(브라이언 콜론의척, 마더 테레사 나의 빛이 되어라 85p)
그녀의 거듭된 요청에 교황청은 수녀 신분을 유지하면서 개인 자격으로의 구호 활동을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1948 년 8 월 17 일 수녀복을 벗고 인도의 불가촉 천민이 입는 사리옷을 입고 혼자서 거리로 나왔습니다.
후에 노벨 평화상을 받고 가장 힘들었을 때가 언제냐는 질문에,
'배가 고프고 지쳐서 수녀원을 찾았을 때 그 수녀원에서 안내한 곳은 식당이 아니라 뒷 켠 계단 밑의 빈 공간이었습니다. 남루한 그녀를 동료로 받아줄 수 없었습니다. 성당에 지원을 요청했을 때 신부로부터 성과도 없는 곳에 지원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당시 영국과 일본의 전쟁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식량이 수입되지 않아 인도 정부 공식 통계가 2 백만이고 실제는 5 백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거리에 주검이 버려졌고, 살아있는 채로 버려진 사람이 많습니다. 개울에 박혀있는 여인을 데려다 돌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배 고프다가 아니라 아들이 그랬다는 말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마더 테레사의 기도와 돌봄으로 아들을 용서하고 죽었습니다.(마더 테레사, 사랑은 철따라 열매를 맺나니 94p)
마더의 활동은 14 년 동안 활동한 후에 영국 BBC 방송에서 맬컴 머거라지와의 대담에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 많은 가난과 주검을 여인 혼자 무슨 성과가 있을 거라고 구호활동에 나섰는가?'
마더가 대답합니다. '나는 바다에 물 한 방울 보태는 심정으로 일을 합니다.'(나빈 차울라, 마더 테레사 219p)
맬컴 머거리지는 그녀를 취재하면서 마더에게서는 자신의 의지와 자아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불굴의 의지로 이 일에 나선 그녀가 정작 하는 일 모두를 신에게 맡기는 그녀의 영성 입니다. 그녀는 일의 성과나 업적, 성취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가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합니다.(맬컴 머거리지, 마더 테레사의 하느님께 아름다운 일 92 p)
마더는 보건성의 허락을 받아 힌두교 사원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힌두교식으로 장례도 치루어 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힌두교 사원을 더럽힌다고 연일 데모를 하여 경찰서 서장이 왔습니다. 마더는 살 썫는 냄새와 고름 냄새 속에서 젓가락으로 살에서 구데기를 빼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서장은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어머니와 누이더러 이 일을 하라고 해라 하면서 떠났습니다.(오키 모리히로, 마더 테레사 넘치는 사랑 157 p)
마더 테레사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어떤 성과나 업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 지켜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존엄한 죽음을 맞게 해 주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마더는 불행히도(?) 이름이 알려졌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이름도 빛도 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여러 종교의 신앙인이 많습니다.
여러 전기와 그녀의 글을 읽었는데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글이 길어져 더 소개하지 못함이 아쉽습니다.
긴 글에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엔 유대인의 사랑과 동양의 사랑에 대해 올립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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