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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개혁자들의 개혁 과제

by 【고동엽】 2010. 3. 18.
 

                                   종교개혁자들의 남은 과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로마카톨릭을 적그리스도로 보는 데는 일치하였다. 이 당시 성직자들의 종교권력의 핵심은 성례전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중재자 행세를 하며 인간위에 군림하는 모습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인제사장직임을 강조함으로서 성직자와 평민간의 신분계급을 타파했으며, 교황의 영적우위설을 거부하였으며, 교황의 성경해석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성경은  신앙에 근거해서 누구든지 성경을 해석할수 있다고 하였다

교회내의 우상숭배 요소들을 철거 하였는데 성인유물이나 예수상, 마리아상, 각종 성인상등과 같은 동상들을 철거하고 말씀의 중심적 위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요소들은 물론 오르간, 의복, 그림 등 까지도 철거하였다. 특히 미사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커서 종교개혁후 수년동안 성례전을 교회에서 한번도 실시하지 않는 교회가 많았다.

카톨릭에서 말하는 성례전이란 세크라멘툼이란 용어로서 로마군인의 충성맹세를 의미한다. 카톨릭의 핵심인 7성례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유아세례를 받는일로 부터 시작해서 결혼, 임종에 이르기까지 성직자의 중재라는 이름으로 일생 70년을 포로 되게 하였다.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또한 죽어서도 로마의 귀신이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성례전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7가지 성례중 세례와 성찬식 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폐지 하였으며, 미신적인 요소들은 모두 없애버렸다

그런데 여기에서 성만찬에 대한 개혁자들의 입장은 서로가 달랐다.루터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에 주께서 실재로 임한다고 하였고, 쯔빙글리의 뒤를 이은 
칼빈은 영적으로 임한다고 주장하였다.그러나 쯔빙글리는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상징할 뿐이라고 했다. 쯔빙글리에게는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 일뿐이며 카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제사드린후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하다거나, 루터나 칼빈처럼 이 떡과 잔을 마시면 
그리스도가  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쯔빙글리에 있어서 성례전은 말씀선포에 종속적인 것이었고, 신앙을 생성하는 것은 말씀의 선포였지 제사드린 떡과 포도주를 먹음으로써 생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쯔빙글리는 종교개혁자들 중에 유일하게 성만찬을 예배의 정규적 순서로 생각하지 않고 일년에 4번만 시행하는 것으로 축소시켰다.이것이 오늘날 개신교의 전통이 되어 성만찬을 년에 몇차례 실시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또한 오늘날에도 종교권력의 핵심적인 위치에 성례전이 있다 성례전이 거룩하고 신비하고 고상할수록 성직자들의 권위는 그만큼 신비적이고 신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신비스럽고 비밀스럽게 포장 될수록 이것으로 인해서 교인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하는것 역시 다양하며 천차만별이 되어 신앙이 병들수 있다.

그러나 성만찬은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이미 다 성취되고 있으며, 매일의 거룩한 삶이 성만찬이다. 친구와 가족과 이웃과 함께 사랑과 애정이 가득한 식사가 성찬이며, 나누는 삶이 성만찬의 삶이다. 말씀이 중심이 된 삶이 세례이며, 말씀으로 치유되는 삶이 세족식이다. 인간의 삶속에서 분리시켜서 별도의 의식으로 만들어 놓은 의식속에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적 요소가 개입할 수 있다.

성례전의 주체는 하나님이지 인간이 될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행할수 있는 그 무엇도 될수 없다.성례전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며, 오직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고 삶이 되는 삶 가운데에 성례전은 이미 풍성하고 풍족하게 녹아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학의 방향은  일부 단체에서는 중세 카톨릭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개혁은 방향은 교회내 우상을 철거하는 방향이어야지, 다시 교회내에 우상숭배의 요소를 들여오며 안된다. 설교단과 제단을 위치를 조정하고, 십자가를 세우고 신앙의 상징물들을 다시 부착시키고 성만찬집례도 횟수를 늘리거나 거창해지는 것은 다시 중세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점이 있다.쯔빙글리의 개혁신앙이 칼빈에 의해 한참 후퇴하였다는 것이다.성례전에 있어서 루터와 칼빈은 카톨릭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우상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우상은 예수상, 마리아상, 각종 성인들의 동상이나 그림이나 상징물들만이 우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혁자들은 모든 것을 다 철거하였지만, 한가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중세 카톨릭의 우상숭배의 최고의 정점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도 우상숭배의 정점에 위치해 있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이다.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쯔빙글리와 스위스 취리히 시민들과 시의회 의원들만이 이것을 거의 완전하게 타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쯔빙글리의 뒤를 이은 칼빈에 의해서 한참 후퇴하였다. 이후로 오늘날까지 성례전과 사도신경은 누구도 손대지 못할 정도로 교리화 되었으며 논리적 신학적으로 체계화되어 있다.  만약 누군가가 이것을 고치거나 건들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단자로 몰리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 장기적으로 성례전의 완전폐기 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성례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맏기고 말씀에 순종할 뿐이다

16세기 루터, 쯔빙글리,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스스로 개혁을 한 것이 아니다. 시민들의 강렬한 개혁의지와 실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주체는 시민이었지 성직자들이 아니였다. 개신교는 말씀중심의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성례전으로 인하여 한쪽다리는 애굽에 있고, 다른 한쪽다리는 가나안땅에 있는 모습과도 같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외에 그 어떤 것도 예배에서 포함시킬수 없다.성만찬은 수백년동안 예배의 중심에 중심 역활이 되어왔다. 어떻게 떡과 포도주가 예배의 중심이 될수 있으며, 오직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 말씀 뿐이다.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처럼 기념은 일년에 한번이면 된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이 기쁘고 반갑고 기념적인 것은 일년에 한번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성찬의 삶이며, 매일 매일이 기념이다.만약 특별히 기념한다면, 일년에 한번,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오늘날과 같이 자주되어져서는 안된다. 예배당안에서 시행하는 의식적 예배행위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예수께서 이런 만찬을 하지 않으셨다. 넘치도록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풍족하고 충분한 식사였으며, 사랑과 애정이 넘치는 식사였다. 예배후 식당에서 교인들끼리 정성스럽게 준비한 빵과 포도음료로 점심식사를 기념적으로 하거나 아니면 식당이 없다면 예배후 부활절처럼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고 이웃들과 함께 반쪽을 나누어서 먹는 기념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사도신경을 주문처럼 암송하고 떡과 포도주를 먹는다면 이것은 중세 교회들의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다. 또한 이들이 개신교회안으로 들어올때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다음은 사도신경이다. 이것의 성립시기는 불명확하다  2세기부터 부분적으로 세례에서 나타나는 문헌이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사도신경은 6~7세기경의 것이다. 또한 동방교회는 사도신경을 결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되는 부분은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표현인데, 이것은 고대 카톨릭교회에서 죽은 성인숭배사상에서 비롯되었며 죽은 자들과의 교통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고백이며 신앙이다


사도신경은 구약시대에 율법처럼 신약시대의 율법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보듯이, 사도신경이라는 고도의 신학사상을 통해 하나님을 보아야만이 인정하겠다는 것이며  다른 기준들은 정죄의 대상이 되고 있다.우리의 신앙은 오직 성경말씀뿐이다.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기준은 우리의 양심과 진리의 영 뿐이다. 사도신경은 더이상 개신교의 고백이 될수 없다고 본다.

성례전과 사도신경의 생략은 중세 카톨릭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성직이라는 특권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며 누구나 동등한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의미한다.출애굽 했으면 완전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지  양다리 걸치고 있으면 개신교의 정체성은 위협받고 사라질수 있다.정체성을 확립하고 말씀중심의 신앙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하루속히 개혁되어야 한다. 종교권력에 취한 자들은 결코 성례전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며 가나안방향으로의 개혁도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교인을 생각하는 목자라면 개혁할 것이다. 오늘날 유럽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닌 종교를 떠날 뿐이다. 이상하게 생긴 종교에서 이상하게 만들어 놓은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뿐이며 외면과 무관심의 대상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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