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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놔두고 죽 퍼먹는 교회

by 【고동엽】 2012. 5. 8.
 

사실 우리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시는 진실한 목회자들이 아주 많이 계십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지금 크게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별로 순수하지 못한 인사들이 속된 수단을 동원하여 부끄러운 인맥을 형성하고 여러 교단의 교권을 뿌리 깊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 교권주의자들이 심한 월권으로 중앙선을 넘나들며 가슴을 졸이게 하더니, 요즘은 아예 한국교회를 구약 시대로 역주행시키고 있다는 자괴심마저 듭니다. 그 증거는 자명합니다. 시대착오적인 율법 중심, 성전 중심, 그리고 제사장 중심 사상이 한국교회에 전방위적으로 확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리상 스스로 율법 중심이라고 자인하는 교단은 하나도 없습니다. 겉으로는 복음, 십자가, 은혜, 그리고 만인 제사장을 노래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겉과 속이 많이 다릅니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구약 율법의 참된 정신과 제도를 왜곡하여 백성을 억압하며 사욕을 취하던 바리새인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율법 중심 세계 유일의 한국형 십일조가 그런 율법주의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는 명백히 복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율법의 무거운 짐입니다.

 

만일 어떤 특정 개인이 자율적으로 십일조를 한다면 이를 구태여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신도들에게 일률적으로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분명히 큰 오류입니다. 하여튼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거나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하라고 강조합니다만, 사실은 하나님께 '거저 받은 은혜'를 율법의 십일조로 보암직하게 포장하여 순진한 신도들에게 아주 비싸게 팔고 있는 셈입니다.

 

율법의 중심축이었던 제사, 안식일, 그리고 할례를 모두 폐기한 한국교회가 왜 유독 십일조만은 이리 집착할까요. 그래도 마지막 남은 양심의 찌꺼기와 좁쌀만 한 체면 때문에 '돈이 된다'라는 솔직한 고백은 차마 못 하고 있습니다. 이는 십일조 없이 교회를 건강하게 잘 운영하고 있는 전 세계 교회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우리 피조물들로부터 돈을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다만 성도들이 물질을 서로 나누며 이웃 사랑을 직접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 집이 부족하신가요, 아니면 재물이 부족하실까요. 돈을 간절히 원하는 자들은 오직 교회 내에서 사익을 추구하는 종교 업자들뿐입니다. 선교나 건축을 위해 십일조가 필요하다는 변명 또한 매우 부적절합니다. 구약에 제정된 십일조의 본래 용도는 결코 선교나 건축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몫입니다. 아울러 마치 이방 종교처럼 무엇을 '바치라'는 말 또한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희생물을 바치듯 바침을 강조하는 것은 구약 제사 시대의 율법적 사고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제사'입니다. 따라서 이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몸이 된 상태인데, 무엇을 따로 더 바치라는 것인지요.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그렇게 바치는 것을 좋아하신다면, 차라리 필요 이상으로 사치스러운 중대형 교회 목사들의 고급 승용차와 두둑한 재산부터 먼저 바치시기를 권면합니다. 자신들은 호의호식하면서 생활고에 지친 교인들에게 열심히 바치라고 설교하는 것은 지독한 기만이며 위선입니다. 은혜 시대인 신약의 가르침은 '바침'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하나님은 연보나 십일조가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연보는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어 쓰는 것입니다. 십일조의 참된 정신 역시 바침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들에게 주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십일조의 정신'은 죽이고, 그 껍데기인 '십분의 일'만 살려 열심히 바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나누지는 않으면서 계속 바치라고만 합니다.

 

그래서 이 돈의 대부분은 교회의 거품 성장과 교회 사유화에 악용이 될 뿐 가난한 이웃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전 중심 언제부터인지 한국에서는 교회당이 슬그머니 성전으로 둔갑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분히 사이비성이 있던 어느 교단에서 애용되던 이 기만적 호칭에 요즘은 소위 정통 보수라는 교단들마저 노골적으로 가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당 건물을 성전이라 하며 신성시하는 신앙 역시 극히 구약적인 사고에서 비롯됩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인 신자들 자신이 성전이라고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울 만큼 배웠다는 목회자들이 단체로 합심하여 단지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인 교회당 건물을 거룩한 성전이라고 오도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장소 어느 건물에서 예배를 하던 그것은 단지 모임을 위한 처소일 뿐 성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가 장식된 건물 속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마음속에 직접 임재하십니다.

 

강단 역시 그저 설교의 편리상 세운 단이지 구약의 성스러운 제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빈말이라도 교회당이나 강단을 성전이니 제단이니 하며 함부로 호칭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무분별한 언사는 기독교의 무속화 또는 미신화를 촉진하고 다만 교권주의자들을 즐겁게 할 뿐입니다. 게다가 근자에는 교회당 부지를 '거룩한 땅'이라고 하며 십자가에 붉은 리본을 줄줄이 달아 마치 성황당처럼 차려 놓고 무속적 '땅 밟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는 지나가던 선무당이 다 비웃을 일입니다.

 

하여튼 한국의 일부 교회들은 성경에 시키지 않은 희한하고 기발한 일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에 아주 도가 텄습니다. '건물 신앙'은 근본적으로 구약의 성전이라는 '거룩하고 신성한 이미지'를 기복 신앙에 접합하여 신도들을 일단 감동시키고 이를 인위적인 교세 확장에 이용하려는 잔 수에서 출발합니다. 성장과 전도를 명분으로 내세운 이런 통속적 수법의 배후에는 단지 '교회 사유화'라는 음흉한 욕망이 자라고 있을 뿐입니다.

 

강남의 어느 대형 교회가 성전이라는 미명으로 수천억 원의 초대형 건물을 지으며 당당하게 준비한 핑계가 '협소'해서라고 합니다. 또한 이미 충분히 큰 다른 대형 교회들도 같은 이유로 틈만 나면 계속 초대형 증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훈련된 제자들을 다른 지역에 흩어 파송하지 않고 암탉이 병아리 품 듯 끼고 있으니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비만한 모양이 된 것이 아닙니까. 들어오는 물길만이 있고 나가는 물길이 없으니 소금 덩어리 사해 바다처럼 그렇게 기형적인 모습이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흩어져야 할 소금이 대형 창고에 재고품처럼 쌓여 있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작은 교회들은 일꾼이 너무 없어 날마다 울고 있는데, 훈련된 제자가 넘치는 대형 교회들은 이를 외면하고 고작 하는 말이 교회당이 협소해서 불편하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변변한 초막 하나 없는 야산이나 광야에서도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작은 교회들을 수도 없이 도살하며 키운 그 육식 공룡 같은 건물이 그리도 자랑스럽습니까.

 

유럽의 교회들이 과연 대형 건물이 없어서 그처럼 몰락했을까요. 우리는 큰 건물 헤롯 성전을 자랑하던 바리새인들의 종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사장 중심 목사의 제사장화 또한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전통이 되고 있습니다. 중세 교회 사제직을 폐하고 신설한 목사직이 교회의 삼권을 흔들며 사제보다 더욱 강력한 제사장적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결국 한국 개신교만은 종교개혁을 거꾸로 한 느낌입니다.

 

중세 사제는 그나마 로마 추기경이나 교황의 통제라도 받았지만, 한국 중대형 교회 목사들의 월권은 누구도 쉽게 못 말립니다. 당회는 어용화되기 일쑤이고 많은 경우 노회, 연회, 그리고 총회 역시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오히려 개 교회 목사의 부정을 비호해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재와 게는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목사 제사장화의 절정은 '교회 세습'입니다. 마치 구약의 제사장처럼 대를 이어 담임목사직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제사장 직분과 전혀 다른 목사들이 제사장의 권위를 새치기하여 다른 직분보다 더 특별한 특한을 누리려 하는 데에 있습니다.

 

구약 율법은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보다 더욱 위대합니다. 구약의 십일조 또한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가르쳐 준 자발적 연보는 그 보다 더더욱 좋은 것입니다. 즉 성경의 진리는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시되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구약시대보다 더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구태여 그보다 못한 것에 집착해야 하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장성한 성도들에게 밥을 주셨는데, 한국교회는 왜 구태여 계속 죽을 먹겠다고 하는지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죽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장성한 후에도 여전히 죽만 먹는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성장한 신도들에게 죽을 먹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제자 훈련은 열심히 하는데 훈련된 제자를 품에 안고 쉽게 놓아 주지를 않습니다.

 

이제 성장을 했으면 나가서 일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예배당 바닥에 모여 앉아 어리광 부리며 해마다 돌잔치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시대착오적 역주행을 멈추어야 이 세상에 우리 신자들 외에 감히 성전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란 절대로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구약의 율법과 관습으로 신도들을 얽매어서는 안 됩니다. 큰 건물을 짓고 세속적 복을 구하던 것은 구약의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이미 넘치는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다고 설교 때마다 복을 노래하며 남은 인생을 기복에 몰입해야 할까요. 이는 밥 놔두고 죽 퍼먹는 격입니다. 만일 육신을 위한 복이 그리도 중요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닌 로마 황제의 아들로 오셨을 것입니다. 이제 직분자들은 더 이상의 거짓말과 역주행을 멈추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구약 제사장 행세를 하거나 율법의 무거운 짐을 또다시 성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바리새인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 같은 행위는 죽통에 머리를 박는 어리석은 짓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십자가 사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샬롬!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신성남 출처 :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7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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