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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와 어거스틴 의 시간이해

by 【고동엽】 2011.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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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거스틴과 바르트의 시간이해


[1] 인간의 시간의식

필자는 이 글에서 4세기에 활동했던 서구기독교의 교부 성 어거스틴(354-430)의 시간론과 20세기에 활동했던 서구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칼 바르트(1886-1968)의 시간이해를 비교 고찰하여, 서로 통하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가려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두 신학자 어거스틴의 시간론과 바르트의 그것을 비교 고찰하는 것은 이 글이 추구하려는 목적의 모두를 다 표현하고 있지 않다. 사실 필자는 놀랍도록 어거스틴의 시간이해가 현대 철학적-과학적 시간이해에서 최첨단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과정철학 곧 유기체 철학에서, 화잇트헤드(1861-1947)가 이해하는 시간이해와 놀라울만치 서로 통하는 점이 있음을 간파하지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과 화잇트헤드 사이엔 1500여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다. 전자는 태양중심설을 믿었던 프톨레미 천문학 시대의 사람이요, 후자는 양자물리학 시대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양자사이엔 화해하지 못할 큰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간격을 넘어 이 두 천재적 대 사상가가 시간에 대해서 사유한 관점엔 우리가 놓쳐서는 않될 놀라운 공통적 관점, 또는 발상법의 유사성이 있다. 필자는 그점을 과제 발굴적 관심차원에서 수시로 언급하려고 한다.
시간을 이해하는 이해의 패러다임에는 근원적으로 두가지 서로다른 유형이 있다. 그 하나는 시간이란 방향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므로 과거와 미래를 구별해주고 시간을 화살의 날아가는 메타포로서 이해하는 직선적 시간이해 모델이다. 이러한 유형의 시간이해에서 근본적 특성은 시간의 불가역성이다. 시간은 되풀이되지 않으며, 흘러가는 같은 물에 두번발을 담글 수 없다. 또 다른 하나의 시간 이해에 의하면,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은 인간의 표상작용의 결과일 뿐이므로, 시간이란 흐르는 것도 아니고 방향을 가지는 것도 아니며, 움직이지 않는 영원한 현재로서 점과 같고 설령 움직인다고 상상하더라도 그것은 원주를 도는 운동과 같아서 결국 원운동을 하면서 반복 회귀하는 것일 뿐이다고 보는 모델이다. 영원회귀의 모델이 그것이다.


흔히 시간을 선형적 메타포로서 이해하는 첫번째 유형의 패러다임은 성서적 시간이해요 종교적으로는 셈족계의 종교사상 즉 유대교, 이슬람교,기독교의 독특한 시간이해 유형이다고 말한다.. 그에 반하여 두번째 유형의 시간이해 곧 영원회귀와 반복적 원주형 운동을 한다고 보는 시간이해 패러다임은 고대 그리시아의 자연철학, 인도의 우파니샤트와 힌두교 불교사상, 중국의 도가사상과 유교사상등이 그에 해당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고대 인간들의 시간이해는 전적으로 후자의 패러다임이다.


만약 시간을 날아가는 화살의 이미지를 적용하여 방향을 지닌 운동의 괘적이라고 가정할 때, 시간의 화살에는 적어도 세가지 다른 유형의 화살이 가능하다고 스티브호킹은 보았다. 첫째는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방향인데, 무질서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시간의 방향을 말한다.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이해에 있어서 시간이란 미래에서 닥아와서 현재라는 순간을 거쳐 과거에로 쏜살같이 살아지는 화살과 같다. 둘째는 심리적 시간의 화살인데 이것은 시간의 경과를 느끼고 과거는 기억하지만 미래는 기억하지 못하는 심리적 현상에서 도출한 시간의 방향감각이다. 심리적 시간화살의 이해에서보면 시간이란 과거에서 나와 현재를 거쳐 미래에로 돌진해 들어가는 탐험가와 같다. 셋째는 우주적 시간의 화살인데 이것은 우주가 수축하는 것이 아니라 팽창을 하는데 대한 시간의 방향이다. 이것은 사실 앞뒤로 운동하는 방향이 아니라 사면팔방 방향으로 시간이 확장하므로 시간은 균질성과 균등성을 잃고, 방향성도 잃고, 표준계를 잃어버린 상대적 시간이 된다.


이 글에서는 과학적 시간이해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하려는 것이므로, 기독교 신학의 시간이해는 자연히 창조와 시간, 인간의 실존양태로서의 시간, 타락한 시간, 구원받은 시간, 하나님의 시간성, 영원과 시간의 관계성등이 문제가 된다.

[2] 어거스틴에 있어서 시간과 영원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 11권 전체를 시간과 영원에 대한 명상을 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그는 시간이해에 있어서 시간과 영원을 철저하게 구별하는데서 시작한다. 영원과 시간은 질적으로 다르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영원이란 초시간이요 지속성과 흐름을 가지지 않은 영원한 현재로서 하나님의 것이요, 모든 시간이 거기에서 솟아나는 움집과 같은 것이다.


영원에 대조되어 시간이란 "항상 지나가는 것으로서 동시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 비하여 "영원에는 아무것도 지나가는것이 없어 모든 전체가 동시적으로 현재적이라는 것"이며 "과거란 항상 미래에 의해 밀려나고 미래는 항상 과거를 뒤쫒지만, 과거와 미래는 둘 다, 영원한 현재 안에서 창조되고 흐르게 된다"
어거스틴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반대하는 마니주의자들의 비판요지를 그의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몇가지 핵심쟁점으로 요약하고 있다. 마니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하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둘, 만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아무 것도 하시지 않고 쉬고 계셨다면 왜 하나님은 그런 상태에 영원히 머물러 있지 않았는가?


셋, 만일 하나님 안에 어떤 변동이 일어나 전에 만들어 본 일이 없는 어떤 것을 창조하시려고 새로운 의지와 뜻을 세웠다면, 그리고 그 새로운 의지가 새롭게 생겨났다면, 그 의지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체와 같을 수 없고, 만약 하나님의 창조의지가 영원하고 그 뜻이 하나님의 본체와 동일시된다면 피조물도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가?

위와 같은 마니교도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그들의 질문의 근원적 혼란은 시간과 영원을 같은 범주에 넣고서 생각하는 오류로부터 발생한다고 비판한다. 어거스틴의 비판의 요지는 "영원과 시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명제로서 답한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 하나님의 지혜요, 마음의 빛이여, 그러한 말을 하는자들은 아직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들은 만들어진 것들이 당신을 통하여, 당신 안에서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아직 모르고 있습 니다. 그들이 영원을 이해하고 맛보려 하나 그들의 마음은 피조물의 과거와 미래의 움직임을 따라서 날 아 다닐뿐 아직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인간들의 마음을 붙들어 잠간 동안만이라도 고 요히 머물러 있게하며, 항상 머물러 있는 저 영원의 광휘를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게 할 수 있겠습니 까?

 

어거스틴의 시간론에서 그의 영원에 대한 이해는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적 영원자 이해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한다. 영원은 항상 머물러 있는 것, 아무것도 지나가는 것이 없이 모든 전체가 동시적으로 현재적인 것, 피조되지 않은 것, 시공간적 범주로서는 파지할수없고 이해 할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뒤에 좀더 자세하게 검토하겠지만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영원개념은 양면적이다. 즉 "영원에는 아무 것도 지나가는 것 없어 모든 전체가 동시적으로 현재적"이라고 말 할때, "아무 것도 지나가는 것 없어"라는 말 속에는 사물의 운동성과 변화를 부정함으로 시간성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모든 전체가 동시적으로 현재적"이라고 말하는 생각 속에는 시간성의 과거, 현재, 미래경험이 모두 포함되므로, 그의 영원개념은 시간성이 완전히 탈색배제된 "무시간성"이라고 말 할수 없고 과거성, 현재성, 미래성이 순수가능태나 이데아 형태로 현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게 된다. 이 글에서 중요한 논점은 과연 어거스틴의 영원개념이 시간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초시간성, 무시간성의 성질의 것인가, 아니면 시간성을 이데아적 형상으로서나마 영원 속에 내포하는 것인가의 문제를 지닌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창조 이전엔 시간이란 없다. 다시 말해서 시간도 창조된 것이며, 창조와 함께, 창조와 더불어 존재하게 된 피조물의 존재방식이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자요, 시간의 근원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하나님은 모든 시간에 앞서 계신다고 말 할 때, 하나님이 시간 안에서 시간을 앞서 계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항상 현재이신 영원의 탁월성으로 모든 과거의 시간 이전에도 계시고 모든 미래의 시간 후에도 계신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이며, 모든 시간과 세월이 동시적으로 있는 영원이며, 시간전과 시간 후에도 영원히, 영원 안에서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활동과 변화 없이는 시간이 없다. 영원 속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세계를 '시간 안에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창조하셨다.
어거스틴이 강조하려는 점은 시간은 영원의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성'과 피조물의 '시간성'은 서로 모순 충돌되지 않고 어떻게 접촉점을 지닐 수 있는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양하지 않고서 어떻게 영원성과 시간성을 동시에 함께 생각 할 수 있단 말인가? 튀빙겐 신학자 율겐 몰트만은 어거스틴의 시간론을 성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대담한 말을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다음의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즉 영원의 자기변화가 비로소 피조물의 시간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그것을 비치하였다는 것이다.....세계를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은 그의 나라 안에서 자기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세계의 창조자가 되기로 결정하였다. 하나님의 이 자기 결정 속에 영 원으로부터 시간에로의 이전(移轉, 넘어감)이 있다. 이 본질적 결정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영원을 자 기 안으로 거두어들이시고, 그리하여 그의 창조를 위하여 자기에게서 시간을 내시고 그의 피조물에 게 그것의 고유한 시간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원과 창조의 시간 사이에는 창조결행을 통하여 결정된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 서 있다.

 

율겐 몰트만의 위에 인용한 말은, 피조물의 시간성이 피조물의 한 존재방식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들듯이 그렇게 시간을 빚어만드셨다는 뜻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성은 신적 생명의 유출결과도 아니고, 필연적 존재계층상의 퇴화적 자연배출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의한 스스로의 제한과 자기 안에 영원을 거두어들이시고 피조물의 시간성을 존재의 집으로서 마련하시는 신적 생명의 은총의 허락과 창조행위를 의미한다.


"영원한 현재"로서 영원 안에 영원자로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거나, 미래의 하나님이 아니고, 언제나 현재의 하나님이시고, 그런 의미에서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비록 모든 피조물의 시간성은 하나님의 영원과 날카롭게 대비되고 구별되지만, 인간의 시간의식도 사실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라는 시간성 안에서만 과거의 시간성과 미래의 시간성이 파악되고 현존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어거스틴은 시간을 가장 심원한 경지까지 파들어가 질문한자 답게 그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형태로 있는지 알기를 원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과거와 미래는 오직 현재형태 안에서만 있다고 매우 역설적 결론을 내린다.

과거와 미래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것들은 과거나 미래의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라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미래가 미래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 없는 것'이 되고, 과거가 과거로만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없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 가 어디 있든지 또는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은 현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됨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시간의 현재성은 영원의 현재성을 현상 속에서 반영하는 것, 현상세계는 이데아 세계의 드러남이자 구체화이듯이 인간의 현재성은 비록 덧없고 흘러가는 운동성 속에서 항상 살아져 버리지만 과거성과 미래성을 담지하는 귀중한 존재의 집이 되는 것이다. 시간은 피조물적인 형식이다. 창조는 미래의 '아직 있지 않음'으로부터 나와서 현재의 '순간 있음'을 거쳐 과거의 '더이상 있지 않음' 이라는 시간의 흐름으로서 경험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의 순수존재, 하나님의 존재자체 곧 영원자존성에 대비하여 피조된 세계는 언제나 비존재 또는 무의 위협아래 노출되어 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어거스틴이 세가지의 시간성의 체험을 말하지만 참으로 현실적인 시간성으로 존재하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성뿐이라고 강조한다는 것을 기억해둬야 하겠다. 엄밀하게 말하면 미래의 시간이나 과거의 시간은 없다고, 현실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저유명한 시간성의 세 가지 존재양식이 어떻게 우리의 현재경험 속에 현전(現前)하게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 명확히 드러나 밝혀진 것은 미래의 시간이나 과거의 시간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러므로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적당치 않습니다. 아마 '과거 일의 현재', '현재 일의 현재', '미래 일의 현재'라는 세 가지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 니다. 이 세 가지의 시간이 어떤 면에서 우리의 영혼(마음)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 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즉 과거 일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 일의 현재는 직 관이며, 미래 일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시간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은 진실로 실존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고, 지금이라고 부르는 현재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는 신학자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안에 과거와 미래가 숨쉬고 있다. 현재를 소홀히하고, 현재를 도피하고, 현재를 불성실하게 산다는 것은 피조물의 전체내용을 소홀히하고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어거스틴은 현재적인 시간성을 하나님의 영원성과 비교할 때, 덧없는 운동성과 변화성 안으로 침몰하는 것으로 파악하지만, 현재성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현재성은 곧 피조물의 모든 것이 걸려있는 담보물이다.

[3] 어거스틴과 화잇트헤드에 있어서 시간의 현재성 이해

 

앞 절에서 살펴본 대로 어거스틴은 시간이란 미래에서 와서 현재를 통하여 과거로 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간이란 아직 있지 않은 것에서, 연장(길이)이 없는 것을 통하여, 이미 있지 않은 것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러면 시간을 흘러가는 화살과 같은 연속운동으로 파악하는 지속의 개념하고, 실질적 시간은 오직 길이와 연장이 없는 현재라는 순간 속에 과거는 회상의 형태로서, 미래는 기대와 예기의 형태로서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순간성 개념을 서로 어떻게 조화 시킬 것인가? 한발작 더 나아가서 어거스틴을 괴롭힌 점은, 시간성의 실재적 현실성이라 할 수 있는 "길이가 없는 순간이라는 현재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측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봉착한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측정가능성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은 다시금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와 직결된다.
어거스틴은 시간의 본질과 힘을 알고자 했던 것이다. 이 절에서 우리는 잠간 어거스틴의 시간론에서 그가 근대 뉴톤 역학에서 전제하고 있는 "절대시간론"을 지지하는 것인가 부정하는 것인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뉴톤물리학이 말하는 "절대시간론"을 받아드리지 않는 어거스틴의 시간이해가 화잇트헤드의 시간론과 비교할 적에 공통점은 무엇이며 양자간의 차이점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어거스틴은 시간이란 운동성과 밀접하게 관련된 그 무엇이지만, "시간이란 물체의 운동이다"라고 단순정의하는 것엔 반대한다. 도리어 어거스틴은 "물체의 운동이 시간이다"라는 명제를 소박하게 받아드리지 않고 "시간 밖에서는 어떠한 물체의 운동도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영혼의 내면소리를 듣는다. 시간은 일종의 연장(distentio)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어거스틴은 시간의 연장성을 파악하고 측정하는 객관적 확실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결국 시간을 재는 곳과 측정하는 주체가 인간의 마음, 영혼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거스틴과 화잇트헤드는 모두 뉴톤적 절대시간을 부정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시간은 절대적이거나 자존적인 실재가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과정의 특성이다.


뉴톤역학이 말하는 절대시간이란 무엇인가? 뉴톤적 절대시간관은 시간을 실재의 한 측면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독립적 실재로서 파악하는 입장에서 말하는 시간이다. 다시 말하면 뉴톤적 절대시간관은 운동하고 질량을 지닌 물체가 그 안에서 움직이고 용적을 차지하는 하나의 그릇과 같은 것으로 시간을 파악하다. 뉴톤역학에서 말하는 절대시간론에서 보면 시간이 자존적이며, 자신의 권리상 실재적이고, 물질이나 실체에 의존하지 않으며, 다른 어떤 것의 특징이라기보다는 그 스스로가 어떤 것으로 있는 객관적 그 시간이다.


뉴톤의 절대시간론은 근현대 인간들의 세계관과 우주론의 기초가 되어있고, 우리들의 사유방식을 근원적으로 제한해 왔던 것이다. 뉴톤적 절대시간론에 의하면 절대시간은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그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과정에 선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의 본성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과정에 의존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모든 종류의 과정과 사건은 "수용자로서의 절대적 시간"(receptacle time)이 없이는 발생할 수도 없고 지속 할 수도 없다. 절대시간은 그것들의 완전한 동질성과 균질성 때문에 현실적으로 무한하다. 한마디로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뉴톤적인 절대시간론에 의하면 "자연을 시간 속에서 보는 견해"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서 보았듯이 어거스틴에 있어서, 시간은 자연(피조세계)보다 앞서서 존재하는 존재론적 수용자가 아니라, 창조와 함께 피조된 창조물의 존재방식이며, 그런 의미에서 창조와 함께 있고, 창조의 생성, 소멸, 변화, 승화, 성숙과 함께 있다. 화잇트헤드도 시공해석에 있어서 시간이 절대적인 실재가 아니고 과정의 특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다시 우리의 논제로 돌아가서 우리는 시간을 어디에서 ,어떤형태로 측정하는가? 어거스틴의 고백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

 

오, 내 마음아, 나는 네 안에서 내 시간을 재노라. 나를 어지럽게 하지 말아다오. 즉 시끄럽게 밀려오 는 여러 가지 인상으로 인해 너 자신을 어지럽게 하지 말라. 내가 말한바와 같이 나는 바로 네 안에서 시간을 잰다. 여러 가지 일들은 지나가면서 네 마음에 인상을 남긴다. 그 일들은 과거로 지나갔어도 그 것들이 남긴 인상은 현재 남아 있다. 나는 바로 현재 남아있는 그 인상을 재는 것이지 과거로 지나가 면서 남긴 그 일들(사건)을 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시간을 잰다고 할 때 나는 바로 그 남아있는 현재의 인상을 재는 것이다.그 러므로 시간이 그렇게 존재하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잴수 없다.

 

좀 길게 인용된 위 문장은 어거스틴과 화잇드헤드 시간론을 비교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화잇트헤드에 있어서도 '현재성은 그의 형이상학의 긍긍적 현실성을 담보한다. '현실재'(actual entities)또는 '현실계기'(actual occasions)라고 표현하는 창조적 과정 가운데 있는 매우 리얼하고, 현재적인 경험이 우주와 모든 가시적 불가시적 존재기초 토대이며 기본단위이다. 화잇트헤드의 유기체철학에 있어서도 "미래와 과거는 둘 다 현재에 함축되지만, 과거는 확정된 것으로 함축되는 반면 미래는 미실현의 것으로 함축된다". 화잇드헤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현재 속에 있다. 현재는 항상 변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파생된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를 조건짓고 있으며, 미래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에 들어있는 냉혹한 현 실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과정적 실재들이 물 흐르듯이 과거라는 기억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변화하고, 미래는 내 마음 속에서 미리 앞당겨 예기하고 기대하면서 희망하는 형태 속에서 여전히 현재 속으로 돌입한다. 시간을 그림언어로서 그릴 적엔 미래에서 나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에로 돌아가는 후진형태의 그림이 그려지지만, 그것은 우리가 시간의 연장성과 계기성을 경험하면서 마음이 그려내는 화살진행방향의 역진행 모델그림이다.


그 상상의 관념적 그림은 시간이란 거꾸로 흐르지 않으며, 반복하지 않는다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그림언어로서 마음이 그려낸 시간 방향이다. 그러나 좀더 진지하게 시간성과 시간경험을 어거스틴과 화잇트헤드처럼 생각한다면, 시간은 미래에서 나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에로 흘러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현재성을 기점으로 하여 과거는 현재 속으로 넘어와서 현실재를 구성하면서 육화하고, 미래는 기대와 가능성으로서 또한 현재 속에서 예견적으로 희망하면서 현존한다.


화잇트헤드 또한 어거스틴처럼 현재가 모든 존재의 궁극적 입각점이다고 생각한다. 과거는 현재라고 부르는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s) 속으로 들어와 밥이 되고 구성자료가 되면서 객관적 불멸성을 얻는다. 현재의 '현실적 계기' 속에는 실현된 과거만이 아니라 실현될 미래가 들어오게 되는데 현재에 내재한 조건들에 의해 순응하면서 창조적 변화를 일으키며 현재 속으로 융합한다. 어거스틴과 화잇트헤드의 결정적 차이점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네오플라톤주이자였던 어거스틴의 관념론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를 기억하기도하고 예견하기도하는 현재성은 인간의 영혼이라고 일컫는 마음 속에서 종합된다. 그러나, 경험적 실재론자인 화잇트헤드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는 자연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재 안에서 통전된다.


화잇트헤드는 전통적인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 다시 말해서 어거스틴과 데카르트가 전제하고 받아드리고 있는 존재론적 이원론을 거부하고, 어거스틴이 말하는 영혼의 기억작용이나 예기작용 또한 자연이라고 부르는 창조적 과정의 한 형태라고 보기 때문이다.


화잇드헤드의 유기체철학에 의하면 현실세계(actual world)는 과정(process)이며, 과정은 현실적 존재의 생성(becoming)이므로, 현실적 존재는 피조물이며,'현실적 계기이다. 그런데 화잇드헤드에게 있서는 "현실적 존재가 어떻게 생성되고 있는가"( how an actual entity becomes)라는 것이 "그 현실적 존재가 어떤 것인가"(what that actual entity is)를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말은 '존재'와 '생성'이라는 두가지 근본적인 현실파악 관점에 있어서, 양자는 현실적 존재에 대한 두가지 방식의 서술형태 또는 파악형태이지만, 화잇트헤드는 현실적 존재의 '있음'(being)은 그 '생성'(becoming)에 의해 결정된다는 과정철학의 원리를 지지하는 것이다.


화잇트헤드 견해와는 다르게 어거스틴은 그 모든 '생성'의 존재론적 가능성과 창조적 변화의 토대를 '존재자체'이신 하나님에게 두기 때문에 '존재'가 '생성'보다 더 우선적이고 근원적인 것이라고 보는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신관이 영원한 창조가운데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 신앙과 모든 운동성과 창조적 변화성마저도 초월해 있는 절대초월자 상(象)을 지닌 신플라톤철학의 신관을 융합하려고 했던 고대 교부신학의 해석학학적 고민을 파악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화잇트헤드가 존재의 이원척 측면을 무시하거나 또는 그 설명법에 있어서 완전하게 해결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잇트헤드가 창조적 과정으로서의 '생성'을 '존재'보다 강조할 때, 현실적 계기 속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모든 과거의 현실재들을 단순한 잡다(chaotic many)로서의 집적물이 아니다.


과정은 단순한 변화나 전이운동이 아니라 새로움과 창조성과 조화와 아름다움이 발생하는 창발적 계기 곧 창조적 과정이기 때문에, 그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화잇트헤드도 어쩔 수 없이, 플라톤의 이데아나 신유학의 '리'(理) 에 해당하는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 '창조성'(creativity), '신'(God)과 같은 형이상학적 실재들을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 속에 끌이들이거나 상정하지 않을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화잇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전제되고 상정되는 형이상학적 실재들은 구체적인 현실적 실재로서의 창조적 과정을 떠나서 존재하거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 11권 "시간과 영원"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당신은 모든 시간을 창조하신 영원자이시요, 모든 시간 이전에 계신 자이므로 어떤 시간도 당신과 같 이 영원 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또한 어떠한 피조물도 비록 그 피조물이 시간을 초월하여 있다고 할지라도(예, 천사들이나, 로고스나 이데아들) 당신과 같이 영원 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어거스틴과 화잇트헤드에게 있어서 서로 통하는 공통점은 존재체험과 시간체험에 있어서 현재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다른 중요한 공통점은 존재의 시간과정은 맹목적인 우연의지배 과정이 아니라, "많은 것에서 한분에게로", 무와 다름없는 분열과 혼돈과 잡다의 상태로부터 통일과 조화와 의미충만으로 형성되어 가는 창조적 과정이라고 보는 점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모든 영혼과 육체를 지으셨기에,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경이롭고 신비롭게 모두 아신다고 고백한다.


시간과 다른 영원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시간의 세 가지 존재방식, 경험 방식인,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일을 꿰뚫어보시고, 미리 아시고, 경륜 섭리하실 수 있는가? 우리는 어거스틴의 시간론을 20세기에 다시 창조적으로 계숭하면서 발전시킨 칼 바르트이 시간과 영원 이해를 살펴보려 한다.

 

[4] 칼 바르트의 피조물의 존재방식으로서 시간성과 하나님의 영원성

칼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 제3권 2부 47절에서 인간본질을 시간성에서 규정하면서 시간과 영원에 관한 신학적 통찰을 집중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물론 바르트는 하나님의 영원성 문제를 그이 교회교의학 제2권 하나님론 중에서 "신적 자유의 온전성" 이라는 표제 하에 다루고 있으나, 시간성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존재의 유한자로서 시간체험이기 때문에 창조론에 나타난 바르트의 신학적 인간학 항목에서 살피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시간 속에서 산다. 인간의 시간성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날카롭게 대조되면서 인간의 피조성을 규정한다. 만일 인간이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인간이 무시간적이라면 인간의 생명 현실성도 없다. 바르트는 인간의 시간성은 인간을 유한한 존재로서 한정시키면서도, 동시에 인간 생명을 근거지어 주고 현실적 생명을 가능케 하는 피조물의 존재형식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존재의 한계를 그어주는 자는 자연이거나, 우연이거나, 무(無)가 아니라, 인간의 창조주, 그의 계약 대상자, 영원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의 시간 속에서 살아갈 수있는 존재의 능력요 희망의 근거이다.


그런데, 칼 바르트의 시간과 영원론이 성 어거스틴의 시간과 영원론에 영향을 받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어거스틴과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차이점의 핵심은 어거스틴이 신 플라토니즘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 하나님의 영원성을 피조물의 시간성과 구별하면서 거의 초시간적, 또는 무시간적 영원성으로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본래적 의미의 시간성'(authentic temporarity)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점이 어거스틴가 바르트의 절묘한 차이점이다. 다시 말하면 바르트에 있어서 하나님은 무시간적 영원이거나, 비시간적 영원을 살지 않는다. 성서적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의 무한 연장으로서의 영원개념이거나, 시간성을 부정하고 초연하면서 초시간적 부동성 속에 거하는 생명없는 영원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성은 다름 아닌 모든 시간성의 원천이고 모든 시간성의 존재론적 탯집이기 때문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원성이란 하나님 생명성의 절대자유한 질적 성격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은 피조물이 경험하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세 차원을 계기적(successive)으로 경험하면서 생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시간의 세 가지 경험 양태를 동시적(simultaneous)으로 경험하면서 산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성의 특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성의 부정이거나 무시간적 초월이 아니라, 보다 충만한 본래적 시간성의 완전형태이고 시간성의 충만이다. 시간의 주요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로서 계시며, 미래에 오실 자이기 때문에 그 시간의 세 가지 존재방식은 하나님의 시간성에 있어서는 제한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 동시적으로 통전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성은 근원적 시간, 본래적 시간, 창조적 시간이다(His eternity is original, authentic and creative time).


피조물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성은 유한하고 분절되어 있고, 변화와 이행 속에 있다. 인간은 자기 시간의 유한성과 분절성을 죽음으로서 경험한다. 죽음은 유한한 인간생명의 시간성의 끝이면서도 시간성의 박탈이다. 시간의 정지요, 시간성을 더 이상 지니지 못하는 존재의 정지이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죽음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죽음자체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主요 시간의 주이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 할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이시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 그 자체로서는, 혹은 인간성 그 자체 안에는 죽음을 넘어서서 영존 불멸하는 신적 불사성이 없다. 인간이란 그렇게 유한한 존재요 사멸하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이후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고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생명의 시간성이 종말을 맞이한 이후에 무(無)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주요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이 계셔서 유한 인간생명을 영원한 시간 속으로 받아주시고 새로운 시간성으로 덧입혀주시는 은혜로운 초청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을 헬라적 영혼불멸사상과 구별하여 "유한한 끝있는 이승 생명의 영원화" (the eternalizing of this ending life)라고 부른다.

 

[5] 에필로그

어거스틴과 초기 바르트에 있어서 하나님 경험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적 차이 경험이며, 그에 상응하여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이 시간성과의 질적 차이 경험이었다. 인간은 그 시간성에서 자기가 하나님이 아니고 피조물임을 경험한다. 그러나, 후기 바르트에 갈수록, 처음의 영원과 시간의 질적 차이성은 변증법적 성격을 띄면서 영원은 모든 시간성의 존재론적 지반이며, 시간성의 온전한 성취요 충만이기도 한 것으로 변화된다. 그리하여 다시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이 강조되고, 인간의 시간성은 다시 긍정된다.


어거스틴과 바르트의 공통점은 피조물의 시간경험에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가 분절되고, 계기적으로 밖에 경험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영원성과 피조물의 시간성은 절대 혼동할 수없이 구별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시간성은 피조된 실재로서 피조물의 존재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로서 피조물의 존재방식이라는 점과 플라톤적인 영향의 흔적을 받아 시간성의 덧없음을 강조하면서 영원이 시간에 대하여 존재론적 우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도 어거스틴과 바르트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면 어거스틴과 바르트의 시간론의 근본적 차이점은 무엇이며, 그 차이점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가정 중요한 차이점으로서, 우리는 이미 바르트의 영원개념은 시간성의 부정이 아니라, 시간성의 통전적 충만으로서 좀더 적극적으로 시간성을 이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원성을 좀더 역동적으로 세가지 양식의 시간성이 동시적으로 통전체험되는 본래적 시간성의 충만으로서 파악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자로서 언제나 동일하시고 불변하신 존재이시기에 그에게는 시간의 속성이 없고 다만 영원한 현재로서 모든 시간을 초월하신다." 물론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영원한 현재는 "항상 머물러 있는 현재"(nunc stans)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 앞에서 모든 존재가, 모든 날들이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현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원 곧 '영원한 현재'는 어떤 의미로든지 시간성을 내포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의 시간론과 영원론을 연구한 선한용도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원성을 시간의 연장 또는 무한한 시간으로 이해 할 것이 아니라 초시간성, 또는 무시간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라고 갈파하고 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전지(全知)는 마치 화잇트헤드의 신론이 말하는 "신의 근원적 본성" 안에서 신이 세계를 관념적으로 미리 알고 파악하는 것이지 "신의 결과적 본성" 안에서 세계를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닌 셈이 된다. 현실적 경험은 시간성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트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성의 부정이나 초시간성이나 무시간성이 아니라, 본래적인 시간성의 통일이고, 시간경험의 세가지 양태를 동시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고, 시간성의 충만으로서 파악된다. 그러므로, 성서의 하나님은 세계의 고난에 참여하여 함께 아파하시고 신음하시며 세계를 구원하려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고통을 겪으신다.


또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바르트의 신학적 사유에서는 성 어거스틴에게서 거의 약화되어 살아져 버린 종말론적 사고를 회복시킴으로써 영원과 시간관계를 매우 변증법적으로 파악할 뿐 만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경험 양태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두 사람은 서로 반대되는 방향에서 본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어거스틴에 있어서 시간의 흐르는 방향이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과거에로 흐른다.


그러나 바르트에 있어서 시간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로 향한다. 두 사람은 모두 직선적 시간관을 가지면서 시간의 방향성을 감지하지만, 어거스틴에 있어서 시간 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현재에서 기억이라는 마음의 창고 속에 잠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 있어서 시간의 구원은 미래로부터가 아니라, 초시간적이고 초자연적인 영원 곧 위로부터만 온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있어서, 시간의 방향은 미래를 지향하기 때문에, 희망의 존재론, 만물의 영화와 종말적 성취를 대망하는 변혁적, 창조적 시간 이해를 가질 수 있다.


비록 어거스틴이 현재성의 중요성을 가장 일찍 파악하고,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 기억과 기대로서 현존함을 강조했지만, 어거스틴은 시간성 그 자체가 플라톤 및 네오플라톤의 형이상학체계가 말하는 덧없는 현상적 그림자의 존재방식을 위한 존재론적 집이라는 근본적 시각의 테두리 안에서만 작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적 존재들의 창조적, 적극적 참여의 가치와, 변혁의 동력, 종말적 영광의 빛을 앞당겨 현실을 창조적으로 변혁해갈 당위성으로 시간적 과정을 이해하는 데까지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현재의 시간은 종말적 미래에 나타날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창조적 변화를 겪으며 앞으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상의 도성을 향해 위로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니즘과 네오플라톤니즘의 형이상학적 구조와 존재론이 어거스틴의 사고를 그렇게 틀 지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사상의 심원성과 그 은총

의 신학은 그로 하여금 네오플라톤주의자로 남아있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빛에 조명받고 붙잡힘 받은 신앙인으로서 남게 한다. 아가페적 사랑과 은총의 신학은 플라톤주의나 신플라톤주의 철학에서는 찾을 수 없는 성서적 신앙의 본질적 특성이요 기독교신앙의 신비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의 시간론과 영원이해를 다룬 선한용 교수는 어거스틴의 시간이해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시간성은 항상 지나가는 것 또는 연속(successio)으로 특징지어지며, 둘째, 시간성은 분열과 분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과거-현재-미래를 인간의 시간성에 있어서는 동시적으로 지닐 수 없다. 셋째, 시간성은 일회적인 것이고, 비반복적인 것으로 특징지어 진다. 선한용이 의미있게 지적한데로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록 속에서 시간론을 자세하게 다룬 것은 단지 인간의 시간경험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영원의 중개문제를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론적 관점에서 영원과 시간의 질적 차이를 극복하고 상호매게하기 위해 진리자체이신 하나님의 영원이 시간 속으로 화육하여 중보, 속량, 화해를 일으키면서, 無의 위협아래 있는 인간을 안정시키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경험함으로서 천상의 나라를 흠앙하는 순례자의 삶을 살도록 하려는데 있었다.

 

김경재(한신대,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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