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 살전5:16~18
살전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아멘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나 많이 들었던 말씀이지만
솔직히 가장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잘 알고는 있지만, 가장 마음에 이해가 잘 안 되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해결 받고 가시게 되길 바랍니다.
이 말씀이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고,
너무나 놀라운 기쁨, 정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되기를,
그리고 이 말씀으로 정말 여러분의 생애와 삶이 완전히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짧은 1시간도 안 되는 설교시간에, 그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는지...
저도 정말 기도하는 마음으로 여러분들과 이 말씀을 같이 나눠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진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완전히 뒤집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형편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을
무슨 수로 당해 낼 수가 있겠어요? (없습니다)
아무리 마귀가 우리를 뒤집어 놓으려고 그러고, 불행하게 만들려고 그래도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데
마귀가 어떻게 하겠어요? 아무리 형편이 어렵고 힘들어도 말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데
어떻게 그 삶에 기적이 안 일어날 수 있겠어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엄청난 복을 주신 거예요.
어떤 형편과 삶 속에서도, 기적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열어주신 거예요.
우리가 그 사실을 진짜 믿음으로 취하지 못하니까,
그 엄청난 약속을 받고도, 말씀을 받고도,
이게 하나님의 뜻,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말씀했는데도
우리는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어? 어떻게 늘 쉬지 않고 기도해?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 (그건 불가능해)
그냥 그렇게 넘겨 버리니까 문제인 거죠. 그럼 예를 들어볼게요.
여러분 출애굽 사건, 말이 됩니까?
바다가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빠져 나와서 구원받았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됐잖아요. 하나님이 하시니까!
오병이의 기적은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어떻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를 남깁니까? 그런데 됐잖아요. 우리 주님이 하시니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긴 해요.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죠.
말은 안 되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출애굽 홍해도 가르시잖아요.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하신다는데, 왜 우리가 지레 '그건 안 된다!'고 막을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거예요.
이왕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했으면 '하나님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내게 체험되기 원합니다.' 이렇게 좀 담대하게 기도해 보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실 본문 말씀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이렇게 말씀했어요.
'항상 기뻐진다' 이렇게 말씀하진 않았습니다.
'항상 기뻐진다' 그러면 조금 느낌이 다릅니다.
'기뻐지는' 거 하고
'기뻐하라'는 것은 다른 말씀입니다.
'기뻐지는' 것은, 기쁜 일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거기는 무슨 노력도, 결단도 필요 없어요.
근데 '기뻐하라'는 것은, 분명한 결단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냥 '기뻐지기'를 원해요.
나는 기뻐지지 않는다고.. 그래서 항상 기뻐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항상 기뻐하라'가 무슨 의미냐면,
어떤 청년에게 애인이 생겼습니다.
너무 기쁘죠. 그죠. 가만 있어도 저절로 흥얼거리며 노래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애인이 떠났어요. 헤어졌어요. 그럼 얼마나 마음이 슬프겠습니까.
그때 주변에 있는 사람이 '야, 너 기뻐해!
내가 전에는 네가 너무 좋아해서 말을 못 했는데, 그 사람하고 사귀면 안 돼!
그 사람하고 네가 엮이면 진짜 큰일이야!
네가 헤어진게 정말 잘 된 거야, 그러므로 너는 오히려 기뻐해!' 이럴 수 있죠. 이런 뜻입니다.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군대 가는 형제가 기쁠 리가 없지요. 그 얽매인 생활 속에,
또 훈련도 받아야 되고... 온갖 정말 마음에 걱정과 근심이 가득할 일이죠.
그런데 옆에서 '너 (군대 가는 일을) 기뻐해! 야, 군대 아무나 가는 거 아니야.
너 대한민국의 일등 건강한 청년이라고 보증을 받은 거야.
그리고 군 생활하면서 네 인생이 바뀔 거야.
진짜 성숙한 지도자가 되는.. 아주 정말 좋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야.
비록 힘들기도 하고, 좀 어려운 과정도 거치겠지만,
지나고 나면 반드시 네가 유익하다고 고백할 수 있게 돼.
그러니 힘들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렇게 고민하지 말고, 대신에 항상 기뻐해!'
'항상 기뻐하라'에 이런 의미가 포함된 거예요.
그냥 기뻐지는 거 하고, 기뻐하라는 거 하고는 의미가 달라요.
기쁘지 않은데, 정말 기쁘지 않은데,
주님은 '항상 기뻐하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거든요. 그 말씀인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신 것은
기쁠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 가운데 그 일이 기쁨이 되도록 만들어 줄테니까
기뻐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중요한 것은, 진짜 항상 기뻐할 이유가 분명히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억지로는 기쁠 수가 없는 거예요.
기쁠 이유가 있어야 기쁜 거죠.
어떤 분이 제게 메일을 보내 오셨는데,
너무너무 어려운 시험거리가 많이 요즘에 생기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은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고, 말씀대로 살고 싶고 그런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유난히 계속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칠 때마다
예상치 못한 시련들이 한꺼번에 달려들곤 하는 일들이 자주 생깁니다.
예를 들면 착하게 보이던 회사 직원이 나한테 불만을 표시하면서 대들기도 하고
제가 신뢰를 가지고 모시고 있던 직장상사가
나에게 불신을 표시하면서 악의적으로 나를 대하기도 하고
내가 관여하고 있는 일들이 이상할 정도로 자꾸 꼬이면서 해결이 안 되고
사람들하고 계속 부딪치는 일들이 생기고,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친구와 후배가 어느날 갑자기 거리감을 두는 등등
뭐 이런 어려운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도대체 목사님, 이거 어찌 된 일입니까?」 이런 질문을 해오셨어요.
여러분 우리가 항상 기쁠 조건을,
항상 기쁜 일이 생길 때에 맞추면, 이 말씀은 영원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항상 기쁜 일이 생겨야 항상 기쁘다..' 절대로 그 말씀을 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기쁜 일이 생기는 것을 기쁨의 조건으로 삼으면
우리는 절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인생의 기적을 경험하고 살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항상 기쁜 이유가 우리에게 있는가요? 네, 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 안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분은 기쁨의 근원이세요.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을뿐만 아니고
실제로 내 안에 오셨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는 그것이
바로 항상 기뻐할 이유인 것입니다.
▲실제로 내가 굉장히 어려운 일을 만났어요. 슬픈 일을 만났어요.
낙심스러운 일을 만났어요. 두려운 일을 만났어요.
근데 주님은 내 속에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있잖아... 내가 있잖아...'
여러분 이해하시겠습니까? 슬픈 일을 만났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장례가 났어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고쳐 달라고, 치유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그 영혼을 거두어 가셨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를 만난 사람에게, 그 슬픔 속에 있는 사람에게
"기뻐하십시오!"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세요. 무슨 뜻이죠?
'너희 속에 내 Jesus 가 있잖아?
너는 그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사별의 슬픔이 있지?
그러나 내가 있잖아, 내가 너와 함께 하잖아!
그러니 너는 너무 슬픔 속에서 그렇게 무너지지 마라.
다시 만날 소망이 있어.
내가 그렇게 해줄게!' 여러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을 보면, 마음이 낙심이 되고 슬픔이 되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기쁘게 되는 거예요.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잖아!' 그런 뜻이에요.
여러분 아무리 좋은 사람하고도, 영원히 같이 살 수는 없어요.
어느 순간에는 헤어져야 될 때가 옵니다. 준비되셨습니까?
부부 사이에도, 부모 자녀 사이에도, 가족관계도, 친구 관계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되거든요. 여러분 그때를 준비하셨습니까?
그때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겠어요? 그 때는 정말 슬픔의 절정이죠.
사랑하는 사람하고 사별하고 난 다음에, 그 슬픔이 극복이 안 돼서
본인도 얼마 안 가서 세상을 떠나는 일들이 있죠. 그 이유가 뭐죠?
'내가 있잖아?' 하시는 주님이 실제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하고 헤어져도, 그래서 나 혼자 남았어요.
이런 순간이 와도 기쁠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세요.
'나와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근데 우리들의 문제는, 그 예수님과의 관계가 실제가 아니라는 거죠.
'내가 있잖아...'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그 예수님이
나에게는 실제가 아닌 거예요. (그냥 이론인 거예요)
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고 생각은 들지만,
내가 그렇게 실제로 느껴지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항상 기뻐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 것이 확인되고,
그래서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기쁜 거예요.
약1:2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러 가지 시험을 당했는데 어떻게 온전히 기쁘게 여깁니까?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핵심이에요.
여러 가지 많은 시험이 내게 닥쳐오지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너무 분명하니까,
그러니까 그 가운데서도 나는 기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기쁨으로 여러 가지 시험을 다 이겨내는 거죠.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복입니다.
▲어떤 성도가 아주 은혜를 충만하게 받고
그리고는 정말 한동안 늘 눈물의 기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사셨어요.
근데 어느 날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수술을 들어가게 됐어요.
항상 은혜가 충만한 때, 그런 일을 만났기 때문에,
무슨 두려움이 있거나 그런 느낌이 없더래요.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만나 주실 그런 은혜의 시간이 되겠구나'
위암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야 되지만
그런 믿음이 오히려 생기더래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면
뭐 6개월을 더 산들, 1년을 더 산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면, 그게 얼마나 더 놀라운 복이야?'
이런 담대한 마음까지도 생겼대요.
근데 그거는 실제로 이제 고통이 오기 전까지 이야기예요.
암 수술이 끝나고 항암치료로 들어가면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는데
그때부터 이제 서서히 '6개월을 살아도, 1년을 살아도, 주님을 더 깊이 만나면 괜찮지..'
이런 생각은 온데간데 없이 다 없어지고 '하나님 제발 이 고통 좀 없게 해 주세요.
하나님 좀 제발 좀 빨리 (암을) 깨끗하게 해주세요.
이 지긋지긋한 고통을 빨리 벗어나게 해주세요.
하나님 제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됩니까?'
그런데 상태는 더 악화가 되었어요.
나중에는 병원에서 '더 이상 몰핀 주사를 놓을 수도 없겠다'
이런 진단까지 나올 정도였어요.
그리고 이젠 특별 관리 대상자로 분류가 되었대요.
무슨 뜻이냐면 '그냥 죽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거죠.'
병원에서 뭐 더 이상 처치하기가 어려우니까
특별 관리가 다른게 아니고 그냥 내버려두는...
그런 취급을 받는 느낌을 받았을 때, 자기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그때는 '진짜 죽는게 차라리 낫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가족들 몰래 약국에 가서 수면제들을 이렇게 사서 모으기도 했었다 그럽니다.
그렇게까지 완전히 바닥에 가라앉았을 때,
참 기적과 같이 빛 가운데 임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분이 그때 그 이야기를 이렇게 썼어요.
"주님은 제게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는 제 마음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이 저의 창조주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때 알 수 없는 기쁨이, 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왔습니다.
그 기쁨은 곧바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통곡이 되었고,
그 순간 '이 분,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경배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찬양하고 또 감사의 고백을 올려 드렸습니다.
그 예배의 감격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보였습니다. 주님만 제 눈앞에 계실 뿐이었습니다.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고... 나를 몰라 주셔도 좋고, 알아주셔도 좋았습니다.
'아 이제 됐다..' 그것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예배자로서 사는 것뿐입니다.
그것 말고는 저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간증을 하시는 분이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요?'
여러분 좀 이해가 되십니까?
주님을 만났어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빛으로 체험했어요.
그때 그는 자기가 지금 말기 암으로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지만,
본인 고백이, 속에서부터 뜨겁게 치밀어오르는 기쁨이 있었다는 거예요.
이제는 뭐 더 살아도 그만, 그냥 데려가셔도 그만...
마음에서 넘치는 기쁨이 너무나 크니까,
주님, 나는 그냥 예배만 드릴 거예요. 그런 마음이 되었다는 거예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이렇게 돼요.
▲여러분 중에 목사님 '나도 좀 그런 체험을 하면 좋겠습니다.
나도 진짜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내가 진짜 항상 기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눈이 안 떠졌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런 은혜를 아마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체험을 의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런 체험이 있든지/ 없든지
우리는 이 간증을 하는 분하고 똑같은 영적인 상태에 있어요.
주님은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임하셨어요.
어떤 사람은 그것을, 아주 신비하게 눈이 뜨여서,
그것을 생생하게 볼 수도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위 간증자처럼)
지금 우리처럼,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이끌림을 받아서
오늘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 앉아서 기도하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둘 다 똑같아요.
우리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나를 이끄시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다를게 없어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더 강력한 체험을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게 주어진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이에요.
주님이 이미 내 안에 계신 것이, 아주 강한 체험으로 내게 주어지든,
아니면 아주 실낱 같은 체험으로 주어지든... 둘 다 똑같아요.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 주님이 내게도 역사하고 계시다는 건 똑같아요.
'나는 좀 강하게 역사하는 주님을 체험하고 싶다' 그러면,
실낱같이 역사하실 때부터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겁니다.
'조금 더 강한 체험이 주어지면, 나는 그때 기쁨으로 주님께 반응하고,
그때 내가 감사함으로 반응하고, 그때 내가 간증하겠다...'
제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런 폭발적인 은혜의 순간도,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 끝나게 돼요.
그러면 그때는 예배 안 하실 겁니까?
이미 내게 부어지는 은혜, 그거 자체가 아예 없으면
이건 정말 이제 예수님을 진짜 제대로 처음 믿기 시작해야 되는...
정말 처음의 결신 단계부터 가야 하는 거지만,
제가 오늘 보니까 이 자리에 여러분 모두들은
이미 주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역사하시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에요.
마음에 성령의 근심조차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나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그 조차도 성령의 역사니까 말이죠.
여러분 우리가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어요.
그건 우리 능력에 달린게 아니기 때문에요.
그건 주님이 이루실 일이에요.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거라고요.
'우리가 그게 될까 안 될까' 걱정할 이유가 없어요.
우리를 구원하시고 여기까지 오게 하신 주님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하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게 해주시는' 분이세요.
우리가 그 사실을 믿음으로 취하는 것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가 할 일은, 그렇게 해 주실 주님을 계속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험이 오고, 낙심이 오고, 문제가 생기고, 두려움이 오고,
기쁠 일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그 순간에도
나를 기뻐하게 해주시고, 감사하게 해 주시고, 기도의 문을 열어 주시는...
그냥 그 주님을 바라보는 거예요.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 올렸을 때, 쳐다보기만 해도 불뱀에 물린 자들이 살아난 것과 똑같은 역사가
지금도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들 가운데, 주님은 그 일을 이루세요.
▲많은 분들이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참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대만 세미나 갔을 때도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은혜의 눈이 열린 분들이, 너무나 기쁨이 충만해서 함께 모였어요.
같이 식사도 하면서, 간증도 듣고 하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했습니다.
대만 교회 안에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그런 믿음의 눈이 뜨인 교회와 성도들이
거기에서도 이제는 With Jesus Ministry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식사하면서 한 여전도사님이 안타까운 고백을 하더라고요.
자기가 신학교에서, 자기가 지금 누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대해서 이야기 했더니
조롱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더라는 거죠.
'야 너만 예수 잘 믿냐?
24시간 예수님 바라보는 건 너무 지나치게 믿는 거야,
어떻게 24시간 계속 예수님을 바라봐? 일상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그건 세상 일을 도외시하는 이원론적인 신앙이야'
그러면서 자기를 비난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거죠.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그게 안 믿어지는 분들이 있으세요.
여러분,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다음부터는 너희들이 잘 알아서 살아봐라' 이렇게 하시고 떠나셨다면,
그러면 24시간 예수님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게,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주님이, 지금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한 몸이 되셨어요.
이게 예수님을 신앙의 도리 라면
그러면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 믿는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셨고, 내가 주님과 온전히 연합했는데
내가 항상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거 자체가
사실 그거 자체가 모순이에요. 뭐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지요.
우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요5:5 '나는 포도나무요. 노인을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며칠 전에 안양에 있는 어느 병원 신우회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질문을 하고 대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때 이런 질문이 있었어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 예수님이 인도하심을 정말 받는다는 것의
범위를 알고 싶습니다. 정말로 삶의 전 영역에서 가능한 것일까요?
가령 집을 사거나 사업을 시작할 때,
이것이 내 욕심으로 시작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정말 주시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건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내 삶을 인도하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만
정작 결정은 본인이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 질문을 하신 분이 있었어요.
여러분 이런 질문이 왜 나오지요?
'예수님과 내가 온전히 연합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아직도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미주알 고주알 다 주님께 의논하고 살아요?
모든 결정을 어떻게 다 주님이 내리시도록 그렇게 하며 살 수 있어요?'
이런 말은 뭘 전제하는 거죠?
내가 주님과 온전히 연합한 자는 아니다는 거죠.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그 믿음은 아닌 거예요.
▲제 아내가 한번은 세미나 강의 때,
'주님, 오늘 점심은 어디서 먹을까요?
오늘 장을 봐야 되는데 언제 갈까요, 무엇을 살까요?'
매 순간 그렇게 주님께 물으며,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려고 노력한다고
그렇게 강의를 했었는데, 그 다음에 어느 선교사님 한 분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미주알 고주알 다 주님께 물어보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 제 아내가 순간 '이거 대답을 어떻게 해 드려야 되나?'
그래서 '주님, 어떻게 대답해야 됩니까?'라고 이렇게 주님께 질문을 드렸더니
아내의 마음에 그런 감동을 주시더래요.
'너희 문제는 나에게 미주알 고주알 다 물어보는 것이냐?
아니면 물어보아야 하는데 안 물어보는 것이냐?'
여러분 24시간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은
우리의 삶을 아주 힘들게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비로소 우리 삶이 이젠 제대로 삶이 되도록 만드는 거예요.
워낙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께 의논하고 그렇게 안 살았기 때문에
항상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처음에는 좀 이상해 보일 뿐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이제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삶을 실제로 훈련해야 합니다.
목표가 뭐지요?
'내가 너와 함께 하잖아?
(네 속에 너와 동행하는) 나 있잖아?'
우리가 낙심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고, 절망하고 있을 그때
주님이 '내가 있잖아,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잖아?'
'주님, 그렇군요. 주님이 저와 함께 계시니 제가 기쁩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이게 실제화 되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비로소 진짜 예수를 믿는 삶이 가능해지는 거예요.
▲우리에게 시험이 옵니다. 그게 없어지기를 주님께 구하지 마세요.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는 시험도 없고, 어려움도 없고, 뭐 낙심할 일도 없고...
그렇게 되어야 항상 기뻐하는게 아니에요.
시험도 오고, 어려움도 생기고, 정말 기가 막힌 어떤 순간을 만나기도 하지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게 너무 분명하니까, 기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기뻐하는 거죠.
주님이 항상 나와 같이 계시니까,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심을 늘 바라보니까.. 그게 늘 (쉬지 않고) 기도지요.
주님이 나와 항상 같이 계시니까, 모든게 감사하죠.
그래서 인생에 기적이 일어나는 거예요. 삶이 완전히 바뀌는 거라는 거예요.
롬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어요.
주님의 십자가, 우리 가운데 임하신 성령님을 통해서!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확증)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뭘 더 이상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 정도예요.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건데,
항상 미주알 고조할 주님께 의논하고, 주님을 계속 바라보고 사는 것,
사랑에 푹 빠진 거예요.
그걸 (신앙적) 의무라고 말하면 안 돼요.
'꼭 그렇게 살아야 되냐?'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모든 것을 같이 나누고 싶어 하게 돼 있잖아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주님과 내가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그래도, 그렇게 살아지는 거잖아요.
이거는 '살아지는' 거지,
그렇게 해야 되겠다고 노력하는게 아니잖아요.
사랑에 빠진 사람은, 미주알고주알 서로 나누고 사는 거지요.
여러분 우리는, 매일 모든 순간에,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지켜야 됩니다.
그게 기쁨이고 기도이고 감사예요.
매순간에 여러분의 마음이 무너지고, 상처가 생기고, 슬프고, 두려움이 오고,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우리 마음을 지켜야 돼요.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어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 말은 다시 표현하면 '주님을 바라보라, 나를 바라봐! 내가 있잖아...' 그 말씀이에요.
영적인 기복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만,
계속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 영적인 기복이 굉장히 짧아집니다.
영성일기를 쓰면요. 영적인 기복은 이제는 하루도 안 가요. (짧게 지나갑니다)
하루도 전에는 뭐 3개월, 심지어 어떤 사람은 30년 가는 사람도 있어요.
은혜 한 번 받았다가 한번 꼬꾸라지고 난 다음에,
30년 뒤에 '주여 두 손 들고 옵니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매일매일 영성일기를 쓰면서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보니까
성도에게 시험도 오고, 낙심도 오고, 어려운 일도 오고, 별의별 일이 다 생기지만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기록하면서 회개가 일어나고.. 다시 회복이 되고..
주님을 주목하게 되고.. 감사가 일어나고.. 기쁨을 얻고..
그러니까 정말 하루도 안 되게, 그 리듬으로 다시 회복이 돼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항상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죠.
'저 사람은 시험도 없나봐, 어떻게 저렇게 계속 기쁠 수 있지?'
그러나 알고 보면 그도 수도 없는 낙심이 있는 거지요.
그런데 계속 주님을 바라보니까, 또 다시 벌떡 일어나고, 또 다시 벌떡 일어나고...
전에는 슬럼프가 몇 개월씩, 몇 년씩 갔던 것들이
이제는 하루마다 회복이 되니까
항상 기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오늘 그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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