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6:8~15
◑타고난 천사는 없습니다.
▲그냥 훤한 얼굴을 뜻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이것은 잡티 없는 깨끗한 흰 피부, 흰머리나 주름이 없다는 말이 당연히 아닙니다.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성도와 성도가 아닌 사람은
얼굴만 봐도 척 알아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걱정거리가 없고 잘 먹고 잘 쉬면 얼굴이 훤해집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얼굴은, 그래서 훤해진 얼굴이 아닙니다.
▲극심한 핍박 중에도 천사의 얼굴
스데반집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형편에서 그가 천사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지금 극심한 핍박/논쟁 중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행6:9
여러분, 어떤 사람과 논쟁 중에 얼굴이 천사 같을 수 있습니까?
게다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11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13
이렇게 거짓 증언을 하는 의도는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천사의 얼굴과 같을 수 있습니까?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6:15
▲타고난 천사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겉보기에 진짜 성격이 온순하고, 온유해 보입니다.
정말 천사 같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고백이나, 아니면 아주 가까운 식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세상에 고집/성깔/분노 없는 사람은.. 글쎄요, 없는 것 같습니다.
간혹 정신이 이상한 사람은.. 늘 웃고 다닙니다만, 그 분은 성질이 없을까요?
‘얼굴’이 선천적으로 남보다 특별히 선하게 보이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만,
‘내면 성품’이 아예 천사표라서, 천사의 얼굴을 타고 난 사람은, 세상에 결코 없습니다.
◑1. 자아가 죽어야.. ‘천사의 얼굴’ 됩니다.
▲원수를 선대하는 마음
스데반 집사가 어떤 얼굴이었을까요?
자기를 모함하고 거짓 증언하고 죽이려고 하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얼굴에 두려운 기색도 나타나지 않고, 사람을 원망하는 기색도 나타나지도 않고,
분노나 혈기가 얼굴에 나타나지도 않고, 당연히 그럴만한데,
그들을 향해 오히려 긍휼의 표정, 사랑의 표정이 얼굴에 나왔다는 뜻입니다.
스데반집사는 결국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기도할 때
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본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사실 “예수님 같은 얼굴이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던 말씀을, 스데반이 받아서 했던 것입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러므로 스데반이 순교하는 순간에 그 얼굴 표정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돌 던지는 이들을 향하여
오히려 사랑하고 용서하는 얼굴이었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으로 마음이 충만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꾸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자기 얼굴 표정관리를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그냥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을 때, 천사의 얼굴 됩니다. ←이 설교문의 주제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인지는 얼굴에 드러납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살 때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집니다.
▲자아가 죽었던 링컨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타고난 얼굴은 자기가 선택 못합니다.
태어나 보니까 그렇게 생긴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의 얼굴에 나타난다고 믿었던 겁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할만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에이브라함 링컨이 국회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 때 상대편 당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당신은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요!" 라고 소리쳤습니다.
이것은 미국 사회에서 굉장한 욕입니다.
어떻게 감히 연설을 하고 있는데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라고 합니까?
그러나 그 때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굉장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여보시오! 내가 만약 얼굴이 두 개라면
왜 하필 이 중요한 자리에 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소!"
그의 이 말로 온 국회에 폭소가 터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꾸며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링컨 대통령은 미남이 아닙니다.
그래서 턱수염을 길렀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고, 또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많이 당한다고, 누구나 천사의 얼굴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림이 악마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그도 큰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 얼굴 표정도 바꿉니다.
그렇지만 다 천사의 얼굴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천사의 얼굴처럼도 변화시키지만/악마의 얼굴처럼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극심한 가난을 겪고.. 수전노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극심한 가난을 겪고..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자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혹독한 상사를 경험하고.. 따뜻한 상관이 되나,
어떤 사람은 더 혹독한 상관이 되기도 합니다.
고난을 겪을수록.. 얼굴이 아름다워지는 사람도 있고,
고난을 겪을수록.. 추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난 자체에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고난이 아니라, 자아가 죽었느냐/안 죽었느냐 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얼굴이 더 망가집니다.
그러나 자아가 죽은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상처 입을 자아가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고난이 천사의 얼굴을 만듭니다.
◑2. 성령충만 해야.. 천사의 얼굴 됩니다.
▲평소에 성령충만 했던 스데반
여러분, 성경에 스데반 집사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구제 문제로 교회 안에 분쟁이 생겼을 때, 7집사를 뽑았습니다.
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스데반이 평소에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 이것이 스데반의 인격을 설명할 때 늘 따라 나오는 단어입니다.
스데반이 얼마나 성령충만 했느냐 하면
논쟁 중에도 혈기나 분노로 말하지 않고,
성령의 지시대로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여러분, 어떤 사람과 논쟁을 할 때, 자기 성질이 나오고, 혈기가 나오고
자기 주장이 나오고, 자기 고집이 나옵니다.
이 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한다는 것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는 그랬단 말입니다. 성령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에서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사방에 원수들이 둘러싸고 있어도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만 분명하면 됩니다.
▲성도는 빛으로 밝게 비추며 (천사처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얼굴에 신경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마5: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빛을 느끼게 하라!는 말입니다.
‘아, 저 사람은 마음에 놀라운 기쁨이 있구나! 참된 기쁨을 가지고 있구나!’
여러분, 자신에게 한번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샘솟듯 기쁨이 있습니까?
말할 수 없는 평안,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자아의 죽음’을 아직도 붙잡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 진리를 믿고 그 복음을 붙잡으면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경험을 반드시 마음 중심에서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얼굴이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당신은 천사처럼 기쁜 얼굴로 살고 있습니까?
▲영적으로 성숙해야... 부부가 행복한 가정을 꾸립니다.
행복한 부부 관계는 영혼의 나이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다 겉으로는 어른이라도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일 수 있습니다.
①부부가 둘 다 성인이라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천국에서 삽니다.
②남편이 영적으로 성인이고, 아내가 영적으로 어린아이일 때
아내가 칭얼거리면 남편은 그녀를 업어주고 달랩니다.
그들 부부는 별 문제없이 잘 삽니다. 그러나 남편은 영적으로 고독하게 삽니다.
③반대로 남편이 영적으로 어린아이이고, 아내가 영적으로 성인일 때
그녀는 남편이 투정할 때마다 안아주고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줍니다.
그들 부부도 별 문제없이 살지만 아내는 마음 속이 허전합니다.
영적으로 어린 사람은, 상대가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상대로부터 떨어지기를 싫어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어린 사람은 사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그가 진정 사랑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입니다.
④심각한 것은 부부가 둘 다 영적 어린아이 수준이면.. 항상 싸우거나 헤어집니다.
부부생활은 대화를 많이 한다고 친밀해지며 모든 오해가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은 대화할수록 싸움이 생겨서 안하는 게 낫습니다.
어린이들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며 오직 자기주장과 자기변호를 할 뿐입니다.
어린 아이와는 깊은 대화를 할 수 없으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주어야 합니다.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해서는, 부부가 서로 영적으로 어른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모가 영적으로 성숙해야, 자녀가 행복합니다.
행복한 부모, 자녀 관계도 영혼의 나이에 달려있습니다.
①부모의 영적 나이가 성인이라면
그 부모는 자녀를 양육할 수 있으며, 부모와 자녀 둘 다 행복합니다.
②부모와 자녀, 둘 다가 어리면 비극입니다.
그들은 평생 싸우며 원수 관계로 삽니다. 그런 가정 많이 봅니다.
③부모가 어리고 자녀가 성숙해 있다면
별 분쟁은 생기지 않지만, 자녀는 우울한 청년 시절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영혼이 어린 사람이..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된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들이 안타깝게도 겁도 없이 상대의 멋진 외모, 재산, 학벌 등에
눈이 가려져서 영적으로 어린아이를 자기 배우자로 선택합니다.
그들이 상대를 바로보지 못하는 것은 자신도 어리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겪는 가정의 어려움을.. 미리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들마저도, 자기 자녀의 결혼 때, 세상적 기준으로 결혼시키려 합니다.
그 나이든 부모조차도 영적으로 어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영적으로 어른이 될 수 있습니까?
무엇을 더 배우고 훈련받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이 그것을 해결해 줍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믿을 때 이루어집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살 때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자아는 아무리 훈련시켜도 결국은 자기중심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옛 사람 내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고 처리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될 때 비로서 그는 영적으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휴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 매사가 짜증스럽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나는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 스트레스 때문에 죽을 것 같아.”그런 분 계십니까?
저도 한 동안 ‘빨리 은퇴하고 좀 쉬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습니다. 모든 일을 빨리 하고서 좀 쉬었으면 하였습니다.
그것도 어리석은 생각임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스트레스가 되는 일들이 없어질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죽고 예수님으로 살 때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환경이나 사람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늙어갈수록 더욱 유쾌해집니다.
저는 거듭났던 1984년 4월 28살 때부터 진정으로 행복했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 완전히 나 자신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3살인 지금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더 실제적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거듭나면, 해가 지날수록 더 행복한/최고의 한 해가 됩니다.
그때는 예수님에 대해서 눈이 열린 것이고,
지금은 예수님과 친밀함 속에 더 들어왔기 때문에 지금이 더 행복합니다.
‘아, 일이 없어야 편안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구나.
예수님과의 관계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거구나.’
지금 하는 일을 빨리 마치고 그 다음에 편안하게 놀려고 하지 마십시오.
일을 다 마쳐도 당신은 놀 수 없으며 평생토록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행복한 사람이, 평생을 행복하게 사는 사람
일도 빨리 해치우고, 밥도 빨리 먹어치우고,
어차피 할 일이라면 결혼도 빨리 해치우고,
아이도 빨리 낳고, 열심히 돈을 벌고 아이들 키우고
빨리 독립시키고, 드디어 당신은 자유로워졌다고 합시다.
모든 의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자, 이제 무엇이 남았습니까?
이제 해방된 후에 얼마나 행복합니까? 근심과 짐이 다 사라진 지금
과연 기쁨의 삶이 시작되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빨리 해치우지 마십시오.
순간 순간 지금 당신이 삶을 즐길 수 없다면
모든 일을 마친 후에도 당신은 결코 즐길 수 없습니다.
휴가 가서 은퇴하고 난 다음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일 속에서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살면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재미있게 노세요!
스탠리 존스,「순례자의 노래」에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스탠리 존스선교사님이 6개월간 전도 여행을 떠날 때,
매리 웹스터라는 자매가 쪽지 한 장을 주더랍니다.
펴보니 “예수님과 함께 재미있게 노세요.”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전도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하는 말로는 너무 경박한 말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녀의 말이 진리임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누리고 있는 것을 정확히 꼬집은 것이다.
나는 재미를 누리고 있다. 예수와 함께하는 재미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이 책에 도전을 받고, 우리 목회자들이 각 담당 교구로 헤어질 때
이렇게 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목회 임지가 다 어려운 분들입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서 보니
그 어렵다는 모든 일들이 예수님과 함께 재미있게 놀다가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이런 말 들으면 짜증나는 분도 계시지요?
‘지금 집에 가면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직장에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데...
재미있게 놀다가 오라니?’
그러나 여기에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가정 일 직장 일이 다 스트레스입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살게 되는 사람에게는 재미있게 놀다가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그때 내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얼굴을 천사의 얼굴로 바꾸는
기가 막힌 화장품을 주셨습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과 만남 속에서도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자에게는 모든 곳.
모든 순간이 천국이며 삶의 기쁨과 감동을 경험하는 공간입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로 천사의 얼굴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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