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계2:1-5, 골3:13
꽤 오래 전입니다만 제가 타지키스탄에 가서 말씀을 현지인들에게 전했던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폭탄 테러가 일어나서 수많은 사상자가 났던 *2000.10.01.
그런 아주 위험스러운 그런 상황에 있는 그 지역 교회 교인들에게
꼭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필요하다고 간곡한 부탁이 와서
타지키스탄 두산배라는 곳에 가서, 현지인 교회에서 말씀을 전했어요.
당연히 통역이 있어야 했죠. 제가 말씀을 전하면
그 통역이 현지어로 통역하고, 그것을 또 다른 언어로 통역하고...
그렇게 통역을 몇 단계를 거쳐서 말씀을 전했는데
처음에는 '통역을 통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제대로 될까?' 솔직히 좀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통역이 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았어요.
제가 전하는 말씀을 얼마나 잘 현지어로 통역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느낌이 있잖아요.
통역이 통역하면서 몇 번이나 울더라고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깨닫고, 그 말씀을 통역하는 것이
본인에게 너무 자기 마음에 감동이 되고...
그래서 제가 설교를 해서, 그렇게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는 걸, 예전에 본 적이 없어요.
저 때문에 은혜를 받는 게 아니고, 순전히 통역 때문에 은혜를 받는 거더라고요.
그때 제가 마음에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제가 전하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그 느낌과 감정까지 담아서 전해주는 통역이
너무 귀하더라고요.
근데 그때 그런 마음이 순간 들더라고요.
'제가 그동안에 늘 설교하는 것이, 사실 이 통역이 하는 역할을 하는 거였는데...'
'나는 얼마나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을, 이 현지인 통역자 청년처럼,
그렇게 전심으로, 그리고 뜨거운 마음으로 내가 말씀을 전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너무 하나님 앞에 죄송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용서하라 사랑하라' 하는 메시지를 제가 전하면서
그때 타직키스탄에서 설교하던 생각이 나요. 꼭 그 심정입니다.
그 동안에 제가 용서와 사랑에 대한 설교를 꽤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오늘 또 하는 제 마음의 심정이, 전적으로 주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설교가 참 은혜로운 설교인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하는 설교이기도 합니다.
제가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설교를 하고 나면,
아주 분노에 찬 메일을 받거나, 또는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꽤 많이 겪습니다.
'다시는 이런 설교하면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중에도, 솔직히 오늘 설교가 마음이 불편한 분들도 있으실 거예요.
가족들 사이에, 혹시 부부싸움하고 왔거나,
가족 사이에 관계가 안 좋거나, 교인들 사이에 미운 사람이 있거나,
또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싫은 사람이 있는 사람...
그런 분들은 오늘 설교를 들을 때, 엄청 부담도 되고
솔직히 너무 싫은 마음도 들 거예요.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는 사실 우리 본성에 잘 안 맞습니다.
심지어는 굉장히 (설교를 들으면서) 화를 내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렇기 때문에 더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설교를
해야 하는 이유는, 용서와 사랑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마음이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마음이니까요!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것이, 우리의 사모함인데
예수님하고 마음이 맞아야 예수님과 동행하는 거잖아요.
아무리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믿어도,
예수님의 마음을 내가 품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박보영 목사님의 할아버지가 되시는 고 박용익 목사님께서 돌아가실 때
손주(박보영 목사)가 의사였다가 목사가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셨던 그분이
유언을 하신 내용을 전해주었어요.
그 내용이 뭐냐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거라!'
그 손주 목사에게 해주고 싶은 할아버지 목사님의 간절한 유언이
그대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건 목사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C S 루이스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어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이에요. 그게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행2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밀레도라는 곳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부릅니다.
에베소까지 가고 싶었는데, 도무지 거기로 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내요.
왜냐하면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다시는 에베소로 갈 수 없을 수도 있겠다'
작별 인사를 거기서 한 거예요.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다가,
사도 바울이 앞으로 에베소 교인들이 겪게 될 어려운 상황을 말해줍니다.
이 에베소라는 도시는, 그때 당시에 굉장히 타락한 도시였어요.
어느 도시나 사실 대도시는 타락이 심한 거죠.
우상 숭배가 심하고, 그리고 아주 풍요를 추구하고,
죄악과 거짓, 이단들이 난무하는... 영적으로 말할 수 없이 악하고 타락한 도시,
거기에 아주 소수의 에베소 교회가 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면, 걱정이 앞서는 겁니다.
'이제 무서운 악한 영들이 너희들을 무너뜨리려고 역사할 것이다. 그러니 대비하라'는 거예요.
행20:2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 장로님들은, 실제로 사도 바울의 이 경고를 명심하고
그리고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믿음을 지켜내요. *지금 본문 계2장의 에베소 교회와 동일
많은 이단들이 들어와서 미혹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뺏어가려고 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을 지키고, 이단을 용납하지 않게 됩니다. 훌륭하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어요. 계2:2~3
오늘 우리가 그 예수님의 칭찬을 읽었잖아요.
계2:2~3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주님이 다 아신다는 거죠. 이건 대단한 칭찬이죠.
그런데 무서운 책망이 이어져요. 그것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믿음을 지키고, 이단과 싸우려고 몸부림쳤기 때문인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겁니다.
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 책망은, 앞의 칭찬을 아무 소용없이 만드는 진짜 무서운 책망이에요.
'너는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 안에 예수님 처음 영접할 때, 그때의 처음 사랑!
그것을 만약에 잃어버리면, 더 이상 성도가 아니고, 더 이상 교회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안에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 이건 신앙의 생명과도 같은 겁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나누는 제 마음 심령이, 정말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너무나 많은 분들이, 이런 주제의 설교를 너무 익숙하게 듣다가 보니까
이 메시지의 심각함과, 또 자기에게 반드시 적용되어야 될 것에 대한 의식이
아주 희미해져 버린 거예요. 워낙 많이 듣다 보니까... 다 안다고 생각하니까...
▲한국 초대교회사를 보면, 황해도에 소래교회가 나오는데 *한국 최초의 교회
선교사님이 복음을 전해주어서 생긴 교회가 아니에요. 아주 자생적인 교회입니다.
만주에서 복음을 들은 기독교인들이, 자기 고향 땅 소래로 돌아와서
거기서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운 거예요.
*소래교회 https://rfcdrfcd.tistory.com/15981726
그런데 이 소래교회가 1907년에 평양에서 부흥이 일어나기 벌써 10년 전에
이미 부흥을 경험합니다.
우리 한국은 교회사를 보면 1907년이 부흥이 일어난 해라고 하지만
사실 그 전부터 곳곳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1903년에 원산 부흥도 대단히 유명하죠.
그런데 앞서 1896년에 이 소래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나요.
캐나다의 말콤 펜윅 선교사라는 분이 https://rfcdrfcd.tistory.com/6292592
이 소래교회에 갔다가, 거기에 한 300명가량의 기독교인이 있는 것을 보고
그때 당시로는 대단한 거죠. 그때 당시에 집회를 하게 됩니다.
선교사님이 오셨으니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해서
교인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는데, 열심히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하는데
이 펜윅 선교사님이 뭔가가 아쉬운 거예요.
그래서 첫날 집회가 끝나고 난 다음에, 교회 지도자 되는 분을 불러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무언가가 빠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이는 중에, 전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는 딱 한 경우입니다. 우리 중에 두 사람이 서로 사이가 안 좋은데,
그런 누군가가 회중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혹시 서로 사이가 안 좋은, 미워하는 그런 두 사람이 누군지 나에게 말해주세요.'
그때 그 교회지도자가 그냥 고꼬라져서 우는 거예요.
그러면서 펜윅 선교사님에게 솔직히 자기가 미워하는 교인이 있다고 말했어요.
그때 그 펜윅 선교사님이 '그러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시라' 그리고 집회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자기가 미워한 그 교인을 찾아가요.
그리고 미워했던 것을 용서해달라고...
그러자 상대방 그분도 '내가 잘못했다고...'
그래서 두 분 사이에 놀라운 화해가 일어나요.
그 다음 주일에 교인들 앞에서 그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여러분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하고
정말 눈물로 고백을 했어요. 그때 교인들이 다 회개가 터졌어요.
이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느낀 거예요.
그리고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그들이 생생하게 느끼고,
자기들의 죄,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통곡하고 회개가 일어나고...
정말 부흥이 일어나게 된 거죠.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이 일은, 한국 교회 역사에 절대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일이었어요.
사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30년의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이 원칙은 절대로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두 사람이라도 서로 미워하고 싸우면
하나님은 더 이상 예배를 받지도 않으시고, 아무런 역사도 안 하십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갈라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우리가 처음부터 명심하고 명심해 왔다면
그러면 한국교회는 지금 이런 모습이 아닐 거예요.
지금이라도 우리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정말 적용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은, 그냥 한번 해보신 말씀이 아닌 거예요.
이 말씀 속에 우리의 가정의 회복과, 교회의 회복이 있는 겁니다.
솔직히 듣기 싫어도.. 실제로 마음에 미운 사람이 있으면,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듣기 싫은 말씀이 없어요.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용서 안 할 구실를 찾아요.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해요.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술이 취해 있거나, 담배를 노골적으로 피우거나
또는 간음을 하거나 음란한 행위를 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그러면
큰 죄라고... 아주 정말 반응이 노골적으로 싫은 반응이 나오죠.
그런데 실제로 그런 윤리적인 죄 보다, 비교할 수 없이 무섭고 심각한 죄가
바로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예수를 믿고도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죄예요.
우리가 예수동행일기를 써보면, 우리가 무슨 간음죄를 지었다거나, 음란한 일을 했다거나
거짓말을 했다거나... 이런 내용은 일기에 좀처럼 못 씁니다. 너무 창피해하니까요.
그런 일을 한 것에 대해서 나눔일기 쓰는 것은 너무 두려운 일이에요.
'다른 사람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그런데 누구에 대해서 미운 생각은.. 그냥 써요.
'누가 미워 죽겠다. 난 누구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너무 섭섭하고..'
이런 내용은 나눔 일기에 쉽게 써요. 왜냐하면 그건 그렇게 큰 죄라고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완전히 바꿔 생각하는 거죠.
사실 이게(미움) 바로, 내가 간음을 했거나 누구를 살인을 했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죄라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나도 이기적이면서, 다른 사람이 이기적인 것은 눈 뜨고 못 봐요.
나도 거짓말하고 살면서, 다른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화를 내요.
나도 욕심이 많으면서도, 누가 욕심을 부리면, 그를 사람 취급을 안 하려고 그래요.
이게 무서운 거예요. 자기도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이 매일 용서받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어요.
'우리는 매일 용서받으며 살아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은, 누구에게 인사를 할 때 악수하면서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인사를 하는 대신에, '오늘도 회개했습니까?' 그렇게 인사를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사람을 만나면 '오늘도 회개하셨나요?'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거에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동행집회 때, 먼저 보혈 찬송을 부르고
보혈의 은혜를 붙잡고 기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우리는 오늘 참 귀한 집회에 오셨는데, 그 귀한 은혜 중에 하나가
우리가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 다시 주시는 정결함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다 받으신 은혜예요. 여러분이 그 은혜를 받았음을 아는 것도 귀해요.
'오늘 내가 주님 앞에 내 죄를 자백하였고,
주님의 보혈로 내가 씻음을 받은 사람이다'
여러분 이 은혜는 얼마나 귀한지 몰라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영적인 담대함을 갖게 해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예수동행집회 때마다, 우리가 보혈 찬송, 또 보혈에 의지한 기도를 하는 거죠.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이, 그것이 얼마나 귀한 건가를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인사를 그렇게 했다니까요.
근데 여러분, 매일 용서받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매일 용서하는 것도 필요한 거예요.
나는 계속 용서만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
그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사실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인 거예요.
나는 용서받기를 원하지만, 남은 용서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러니까 여러분이 꼭 명심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사이가 언제나 정결함을 얻는 은혜예요.
그러려면 나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일이 날마다 필요한 거예요.
▲아직도 제 기억에 남는 안타까운 장례식이 있었는데
한동안 소식이 없으시던 어느 교우 한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달려가서 장례를 치르는데, 너무 아쉬운 것은
용서받지도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세상을 떠난 거예요.
그런 장례식이 제일 어려운 장례식이에요.
진짜 용서하는 일이.. 매 순간 용서받고 용서하는 일이 너무너무 중요하다는 걸,
장례 치르면서 너무너무 절감했어요.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받고 또 용서하고 사는 겁니다.
실제로 살아보면서 돌아보니까, 내가 용서를 받아야 되는데, 용서받지 못한 거예요.
내가 용서해 주어야 되는데,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늦게서야 어느 자리에서 만났을 때... 그때처럼 어색한 일이 없어요.
용서하고 용서받지 못한 관계가, 두고두고 내 삶의 가장 무거운 짐이 되는 거예요.
이 순간이 주님 앞에라면, 주님 앞에 갔을 때 거기서 만났어요.
용서하지도 못했고, 용서받지도 못한 사람을... 이건 끔찍한 일인 거예요.
왜요?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용서로 서 있는 거거든요.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내가 용서받은 것,
사랑받을 수 없는 내가 사랑받는 자리가, 그 자리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내가 용서도 안 한 사람... 내가 용서받지도 못한 사람을 거기서 만난다면
너무너무 안타까운 거죠.
그러므로 여러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절대로 적당하게 넘겨서 안 됩니다.
깨달으면 바로 해결해야 돼요.
깨달으면 '내가 용서 못했구나.. 또 내가 용서 받지 못했구나..' 즉시 그 문제 해결해야 돼요.
물론 내가 용서한다고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형편이 좋아질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목사님, 용서해도 소용없대요. 내가 사랑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던 대요.'
물론 그럴 수 있어요.
나는 용서했는데, 나는 사랑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당장 관계가 해결되거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있어요.
우리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 자체로써 중요한 거지,
그 다음에 되어지는 결과는, 그건 진짜 주님께 맡기는 거예요.
우리에게 용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좋은 결과가 올 거니까...' 그래서 용서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마땅히 해야 될 의무일 뿐이에요.
▲골3:13절에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성경은 아주 명확해요.
용서하면 더 상태가 좋아질 테니까...
사랑하면 그 사람도 변할 거니까... 그런 말씀이 없어요.
주님과 우리 사이에서,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으니... 그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나도 그 사람을 용서하는 거예요.
주님은 어느 정도로 이 문제를 생각하게 말씀하셨냐면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누구로부터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면
일단 제물을 내려놓고... 그거부터 해결하라는 거죠.
왜요? 제물을 바쳐도 하나님 안 받으시니까.
먼저 가서 그 사람과 화해하고, 그리고 와서 다시 제물을 드리라.
예배해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주일 예배 안 드리면 마음에 큰 죄를 지은 것 같죠?
주일인데 주일 예배를 안 드렸어요.
그런데 예배당에 앉아 있는다고, 예배도 아닌 거예요.
맨날 싸우고... 관계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당에 앉아있다고 그게 예배인가요?
성경적으로 다시 해석해 볼 필요가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교회 안에 분쟁이 있으면 성찬을 받을 수 없다'고 했어요.
고린도전서 11:18절에 말씀했어요.
분열이 있으면 그렇다는 거죠. 이것은 심각한 문제인 거예요.
용서와 사랑의 문제는 하나님과 관계에, 신앙생활에 아주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지만, 만약에 사랑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서 2장에서 말씀했어요.
죽은 믿음으로 어떻게 구원 받아요?
그러면 '사랑하지 못하면 구원도 못 받는다' 그런 말은 아니에요.
만약에 여러분의 마음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생기고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면, 빨리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거예요.
이건 정말 명심하고 살아야 돼요.
이걸 무슨 교리처럼 만들어서 '이제는 사랑으로 구원 받는다'
이런 교리 논쟁을 하자는 게 아니에요.
내가 예수님을 믿었는데, 믿음으로 구원 받는 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내게 미운 사람이 생기고, 용서 못할 사람이 생기면
빨리 그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라'는 거예요. 내 믿음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주님께서 5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계2:5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제 너희들은 끝이야'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다시 말하면, 만약에 서로 사랑이 식어져 버렸고,
교인들 사이에 서로 마음이 갈라지고 그러면,
빨리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돌아보고, 그걸 회복하라는 거죠.
왜? 처음 사랑은 다시 회복이 되는 거예요.
처음 행위라는 게 뭐냐면,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피 흘려 죽으신
그 속죄의 은혜를 내가 깨달았을 때, '세상에 이런 은혜와 사랑이 어디 있나?' 했던
그 감격, 그때로 돌이키라는 거예요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또 죄 짓고, 반복해서 죄 짓고, 은밀한 죄를 짓고
그러고 살았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기다리시고
그리고 나와 함께 하시니... 이 영원한 사랑, 절대 포기하지 않은 사랑을 내가 깨달았을 때
그 감격, 그때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사,
내가 주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뜨거운 헌신의 마음, 그때로 돌이키라는 거예요. 그걸 다시 붙잡으라는 거예요.
오늘 이 집회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초점이 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주님을 바라보는 은혜에 눈을 뜬 바로 그 순간(첫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거예요.
▲제가 2014년 안식년 때, 이스라엘에서 한 달 이상을 살았었습니다.
그때 갈릴리 호수에 가서, 거기 있는 팔복교회 라는 곳으로 갔어요.
성지순례 가면 들리는 코스 중의 하나입니다.
근데 보통은 버스 타고 팔복교회에 갔다가, 팔복교회를 한 번 둘러보고 또 버스 타고 나와요.
팔복교회에 앞에 있는 꽃앞에서 사진 찍고... 대부분 성지순례는 그렇게 가요.
그런데 그때는 안식년 기간 동안에 그냥 저희 내외만 거기서 지냈기 때문에,
굳이 버스 타고 단체로 이동할 필요가 없는 거죠.
가이드 하시는, 이스라엘에서 유학하시는 목사님이
우리에게 팔복교회 언덕에서, 갈릴리 호수 쪽으로 내려오는 트래킹 코스를 쭉 소개해 주더라고요.
그러면서 하시는 이야기가 '바로 이 길이, 2천년 전 예수님 당시 때도 있었던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도 그 길을 걸으셨다는 거예요.
정말 가봐야 되잖아요. 예수님이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서,
팔복교회는 언덕 위에 있는 교회인데, 거기서부터 갈릴리 호수 쪽으로
쭈욱 걸어 내려가는 길인데, 길도 정말 멋있더라고요.
그리고 거기서 이렇게 걸어서 내려오다 보니까
갈릴리 호수가 언덕 밑으로 쫙 펼쳐져 있는데 그렇게 아름다워요.
경치가 그렇게 좋아요.
게다가 거기 경치를 예수님이 보셨다는 거잖아요.
예수님이 보셨던 바로 그 자리에서, 그 갈릴리 호수를 내려다 보니 느낌이 어떻겠어요?
'야~, 너무 좋구나, 이렇게 아름답구나...'
그리고 그 트레킹 코스를 따라 쭉 내려오는데,
가이드 목사님이, 내려오는 동안에 조그만 굴 하나를 소개해 주셨어요.
'이 굴이 예수님께서 이 길을 내려오시다가, 여기에 머물러서 기도하시고
제자들과 같이 대화도 나누시고 하시던 그 굴입니다' 라는 거예요.
'목사님, 여기 좀 들어가서 목사님도 기도해 보세요!'
그래서 저희들을 그 굴 속으로 안내하더라고요.
그 굴 속에 앉아서 보니까, 굴 바깥 입구에 갈릴리 호수가 보이고
그리고 굴 속에 앉아서 '아 주님도 여기에 앉으셔서 기도도 하시고
제자들과 대화도 나누셨겠구나..' 그러니까 느낌이 너무 좋아요.
근데 그때 그런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이렇게 멋있는 광경, 아름다운 광경이, 왜 성경에는 기록이 안 됐을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갈릴리 언덕(팔복교회 자리)에서 갈릴리 호수까지 내려오는 동안에
그 아름다운 경치에 대해서 기록된 부분이 어디 나오나요? No
'왜 이런 아름다운 모습은 기록이 안 됐을까?'
그때 제 마음에 '예수님께는 경치가 관심이 없으셨구나'
그랬겠지요. 천국을 보신 분이 세상에 갈릴리 호수 경치가
'와 대단하다. 여기가 천국 같다...' 하실 리 없죠.
천국을 못 본 사람만 그런 표현을 써요. '와 여기가 천국 같다.'
예수님은 이미 천국의 아름다움을 다 아시는 분이
거기 풍경이 뭐가 대단한 풍경이겠어요?
'예수님의 마음에 정서가 없으시다' 그런 뜻은 아니죠.
'예수님의 눈에는 사람(제자)밖에 없었구나!'
그게 너무 강하게 와닿는 거예요.
예수님의 눈에는 '어떻게 하면 이 제자들을 온전히 세워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할 수 있을까?'
그 마음밖에 없으셨던 거예요.
우리가 진짜 오늘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마음에 품으면
예수님 마음과 정서가 그대로 내 마음으로 전달돼요.
사람이 달리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가족도 그렇고, 교인도 그렇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
특히 예전에 내 마음이 안 들었던 사람, 싫은 사람, 때때로는 원수 같은 사람,
진짜 가시 같은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눈에는, 이방인, 유대인이 없었어요.
이방인 유대인들끼리는 서로 막 으르렁거렸는데
예수님의 눈에는 그 차이가 없었어요.
심지어 갸룟유다에게조차 주님은 그 발을 씻어주시고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시라'고 했던 분이에요.
우리가 진짜 미워하는 사람, 그 사람을 주님은 사랑하세요.
어떤 사람은 그걸 (미움) 못 견디는 사람이 있어요.
'내게 그렇게 미운 사람, 내게 잘못한 사람인 그도 주님이 사랑하신다'
이건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지게 돼요.
▲YWAM에 플로이드 맥클랑 선교사님이 계신데
그분이 1980년에 암스텔담 홍등가, 거기는 공적인 사창가가 있는데,
거기서 사역을 하셨던 이야기를 그분의 책에서 썼어요.
그가 그 사창가에 아파트 하나를 얻어서 지내는데, 그 옆에는 사탄교회가 있어요.
그리고 옆집에는 남자들 동성애자들이 함께 사는 집도 있고, 그런 곳에서 사는 겁니다.
그런데 한 번은 어느 선교단체에서 그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는 분들이
플로이드 맥클랑 선교사의 사역 현장을 보고 싶다고.. 찾아 오시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좀 걱정이 되는 겁니다.
지금 자기들이 거쳐하는 곳이, 거기가 사창가 지역이에요.
그런데 손님들이 오시겠다니, 오시라고는 했는데
좀 마음이 걱정이 되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들이 자기 아파트로 걸어오는데
그 아파트 주변에 있는 창녀들이, 그날 너무 해가 좋아서 그런서,
그 사람들이 다 바깥에 나와 있었어요.
근데 옷을 좀 입고 나오면 좋은데, 거의 안 입고 나오다시피 그렇게 나왔어요.
그런데 지나가는 자기와 그 선교단체 지도자들을 보고
그들이 해맑게 인사를 또 하는 거예요.
그동안에 늘 인사를 하고 지냈어요. 플로이드 맥크랑 선교사님과 인사를 하고 지냈으니까요.
이웃이니까요.
근데 그때, 그 인사를 해오는 그들을 보면서, 자기도 인사를 했죠.
자기 뒤에 오는 선교단체 간부 되시는 분들은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들인 거예요.
'자기가 그 이웃들과 이렇게 인사를 하고 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나 다를까 자기 뒤통수가 너무 싸늘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손님들은 아무 말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진땀이 났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생각할까? 특히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얼마 뒤에 미국에서 열렸던 어느 큰 선교 대회에 참석했는데
어느 한 분이 자기를 알아보고 달려와서, 자기에게 말을 걸더래요.
'당신이 암스텔담 사창가 사역을 둘러보도록 안내를 해 준 것에 대해서 기억이 나느냐?'
보니까 그때 오셨던 선교단체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에요.
'네,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놀랍게도 플로이드 맥클랑 선교사를 보고 우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답니다.
'당신이 우리를 그 창녀촌으로 데리고 다닐 때,
내 눈에는 한 무리의 창녀들과 뚜쟁이 그리고 마약 중독자들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당신 이웃에 살던 두 소녀에게 인사를 하며 그들의 이름을 불렀는데,
나는 아직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소냐와 엘소 였죠.
그제야 그들이 창녀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가 울면서 했던 고백이에요.
이게 정확하게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예수님의 눈에는 누구나 다 사랑하는 자녀예요.
구원해야 될 사람인 거예요.
내 눈에는 '악하고, 상종할 수 없고, 도무지 만나기도 싫고, 미워 죽겠고,
차라리 죽으면 좋겠고...'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려고 하는 사람이잖아요.
주님과 마음이 맞아야 하는 거잖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용서하는 경험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끄세요.
용서하는 경험을 통해서...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는 성숙함에 나아가게 돼요.
꼭 기억하셔야 돼요. 용서하고 사랑하는 걸 통하여
우리가 영적으로 주님과 하나 되는 성숙함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사랑이에요.
이것도 지키고, 저것도 지키고, 사랑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우리가 진짜 사랑하면,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거예요.
▲제가 1984년 4월에 회심을 광주통합병원에서 했는데
그때 회심하면서 제가 깨달은 것이
제가 가장 큰 죄인이라는 사실이에요.
무슨 죄인인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는 거죠.
저는 그 전까지, 이 세상에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있는 줄 알았어요.
당연히 저는 선한 사람이었고요.
그런데 그날 '모든 사람이 악하다'고 하는 말씀이 너무나 선명하게 깨달아졌어요.
로마서 3:10절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께서 제 속에 있는 내면의 죄, 진짜 나의 내면의 죄를 다 알게 하셨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가 의인이라고,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거죠.
어떤 악한 짓을 한 사람보다, 사실은 제가 더 큰 죄인이었던 거죠.
그 눈이 열리고 나니까 십자가가 완전히 다른 십자가로 보였어요.
그 용서와 속죄의 은혜는, 정말 저의 가슴을 절절하게 움직였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이건 의심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게 저의 회심이에요. 그리고 그게 제 첫사랑이에요.
그때 저는 하나님께 제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었어요.
용서받았던 은혜 때문에!
그런데 그런 은혜를 체험했지만, '첫 사랑'은 금방 식어졌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고 이제 목회하면서,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이 제 중요한 관심사가 됐어요.
목사가 당연히 교회를 성장시켜야 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점점점 교인들이 미워지는 거예요. 말을 그렇게 안 들어요.
교회를 빨리 성장시키려면, 열심히 나가서 전도도 하고,
그리고 헌금도 좀 많이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제자 훈련도 열심히 받고...
또 집회도 많이 오고, 제발 좀 그래야 되잖아요.
그러면 교회가 금방 부흥될 것 같은데... 교인들이 말을 안 듣는 거예요.
'내가 진짜 정말 좋은 교인들하고 목회를 하면, 우리 교회가 더 부흥될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도 막 드는 겁니다.
완전히 정말, 제가 처음 은혜 받을 때, 처음 사랑 때와 다른 마음이 돼 버립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기도회 때, 골고다 산상에 달리신 주님 앞에 제가 서는
그런 영적인 체험을 했어요. 새벽기도 하면서...
갑자기 환상같이 주님 앞에 제가 서 있는 거예요.
제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는데, 눈물밖에 안 나요.
주님의 고통도 너무 제게 충격이었고, 그게 저 때문이라는 것 때문에도 너무너무 울었어요.
그렇게 울다가 끝났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 교인들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렇게 사랑스럽게 보이는 거예요.
'얼마나 헌신을 했느냐, 얼마나 예배 잘 나오느냐, 얼마나 전도를 열심히..' 아무 상관이 없어요.
진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거기서 목회가 바뀌는 거죠.
좋은 교인 만났다고, 좋은 환경을 만나서 목회가 달라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때 하나님이 제게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어요.
그리고 보니까, 오히려 교인들이 불쌍하더라고요.
'내가 진짜 은혜가 충만한 목사라면, 우리 교인들이 저렇게 신앙생활은 안 할 텐데..'
그런 마음이 드니까 '오히려 내가 자격이 없으면
하나님, 제가 이 설교자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가 되더라고요.
그렇지만 다시 제 육적인 성품은, 저를 다시 영적으로 메마름 가운데로 몰아가더라고요.
그렇게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또 어떤 사람에 대해서 까다로워지고, 미워지고,
정죄하게 되고... 특히 한국 교회에 대해서 너무 부정적이고...
우리나라와 민족에 대해서 너무 마음이 속상하기만 하고...
그때 하나님이 저에게 성찬의 은혜의 눈을 열어주셨어요.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라. 이 잔은 너희에게 주는 내 피라'
처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실 때,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할 제자들이에요.
그걸 뻔히 주님이 아시면서도.. 성찬을 주셨어요.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나를 배반해도, 나는 너희들을 버리지 않을 거다'
'살과 피를 주워 먹게 하셨으니' 그러니 뭘 어떻게 분리할 수 있겠어요.
'제자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그날 제 가슴에 하나 절절히 와닿았어요.
저는 솔직히 싫은 사람은 싫고, 미운 사람은 미웠거든요.
그런데 그런 나와, 주님이 '내 몸이라 내 피라' 라고 떡과 포도주를 주실 때
'주님의 마음은 기쁘셨겠나? 주님과 내가 마음이 안 맞는데...'
그래서 제가 성찬을 받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내 안에 오시겠다는 주님은 기쁘실까?'
그러고 난 다음에 확 제 마음이 바뀌더라고요.
주님이 제게 주신 말씀이 '너도 그렇게 해라' 그것밖에 없었어요.
'너도 그렇게 해라, 도무지 용서가 안되고, 사랑이 안 되는 사람하고도 하나되라'는 거예요.
교인들하고 하나라는 거예요.
▲근데 이제 목회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또 부딪혀오니까
근심과 걱정이 또 내게 처음 사랑을 다 뺏어갔어요.
예배당 건축하느라고 부채가 많았습니다.
그때 심장 쇼크가 왔어요. 부채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그때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면서,
그 심장 쇼크에서 건짐을 받았어요.
그때 하나님께 제가 물었습니다.
'이 모든 내 스트레스, 내 무거운 짐을 주님께 다 맡겼는데,
그러면 담임목사인 저는 뭐 해야 되나요?'
그때 주님이 주신 대답이 '사랑하는 거지...'
저는 지금까지 주님으로부터 계속 그 교훈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설교를 계속 하는 거예요.
때때로는 그런 설교를 한다고 욕도 먹고 비난을 받기도 하면서
이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제가 깨달은 주님의 마음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한 평생을 허락하셨을까?
'싸우고 살다가 오너라' 그랬을 리가 없잖아요.
'나는 성공했다고 자랑하고 오너라' 그러라고 인생을 주신 것도 아니잖아요.
'왜 나는 저 사람만 못할까?' 열등감 속에 고통당하다가 오라고 그렇게 인생을 주신 것도 아니잖아요.
주님이 우리에게 한 인생을 주셨다면, 그러면 '사랑하다가 오라'는 거예요. 그죠?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한 인생,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사랑하다가 오너라..' 할렐루야!
여러분 정말 한 번 사는 인생, 여기에다 여러분 인생 전부를 걸어보세요.
또 그런 교회를 세우는 것에 여러분의 모든 기도를 집중하세요.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시는지를
우리에게 알게 하실 겁니다. 자 우리가 찬양하고 같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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