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회복의 십자가를 질 때
마 8:5-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본문을 보면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고향으로 군사 요충지입니다. 그래서 로마군 사단급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한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병졸 100여명을 인솔하는 지휘관으로 오늘로 말하면 대대장급입니다. 이 백부장이 하루는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와서 “내 하인 한명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데 내 하인을 고쳐 주십시오.”하고 탄원을 하였습니다. 당시 하인은 파리 목숨과 같았습니다. 인격도 인권도 기대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습니다. 거기다 그 하인이 중풍에 걸려 누워있습니다. 회복이 불능입니다. 주인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때 주인 백부장이 예수께 직접 쫒아와 “내 하인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좀처럼 없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장 가자, 내가 고쳐주마”하고 흔쾌하게 승낙했습니다. 보통 일이 아니니까 예수님도 마음에 감동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백부장이 “우리 집까지 가시는 것은 너무 죄송한 일이니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고쳐지리라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또 감동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어지간하면 예수님을 모시고 가서 자기 집도 자랑하고 종이 많음도 과시하고 자기의 권세를 과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생하며 가실 것까지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낫을 줄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백부장의 말에는 두 가지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 가서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안수하지 않아도 낫을 줄 믿는 믿음입니다. 오늘 산으로 기도원으로 안수 받으러 몰려다니는 신자들에게 아주 좋은 교훈을 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 절대 능력이 있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직접 가지 않고 고치신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4장46절에 기록된 왕의 신하 아들을 고치신 경우이고 두 번째는 본문에 나와 있는 백부장의 경우입니다. 백부장은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고쳐질 줄 믿었습니다. 참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놀랍게 여겨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10)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많이 천국에 갈 것”(11)이지만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2)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택함 받은 유대인들은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백부장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은 대로 되라”(13)고 보내셨는데 그 하인이 곧 나았다고 했습니다. 여기 본문이 말씀하는 의도가 몇 가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믿음 없음 고발”
이 본문의 의도는 먼저 된 유대인들의 믿음 없음을 고발하려는 말씀입니다. 즉 “이 이방인인 군인의 믿음이 얼마나 깊고 철저하고 투철 하냐, 그런데 왜 먼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런 믿음 있는 사람이 없느냐“하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참 분노스러웠을 것입니다. 이웃집 아이는 늘 100점을 맞아 옵니다. 그런데 우리 집 아이는 늘 60점을 맞아옵니다. 그러고도 대견한 것처럼 시험지를 들고 오면서 큰 소리로 “나 60점이나 맞았다”고 떠들며 옵니다. 그때 어머니는 참 속이 상할 것입니다. 이웃집 애는 늘 100점을 맞아오는데 왜 우리 애는 60점만 맞아오는가 속상해서 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예수님 마음도 그랬을 것입니다. 저 이방인 군인도 저런 믿음이 있는데 왜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저런 믿음 있는 사람이 없는가 한탄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자손들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는 교훈을 따라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왜 내 백성들은 내 말을 듣지 않느냐“(렘 35:14)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에, 벳새다에, 가버나움에 가셔서 전도했을 때 듣지 않고 배척을 하였습니다. 그때 경고하시기를 “이 모든 권능과 기적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눈물로 회개하였을 것”(마 11:20-24)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 두로와 시돈은 바알숭배 중심지로 예부터 이방문물의 중심을 이루던 곳입니다. 본문은 이 이방인도 저렇게 믿음이 좋은데 왜 내 백성들은 이렇게 무지하고 믿음도 없고 고집스러우냐는 말씀입니다.
“백부장의 전인적 믿음 보여줌”
이 백부장은 이방인이고 군인이고 백부장입니다. 당시로서는 얼마든지 거드름을 떨고 교만하고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군인이 전인적 인격과 신앙을 갖춘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 사람이 예수께 찾아와 “내 종이 중풍 병에 걸려 누워있으니 고쳐 주소서”하고 청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 집으로 가자”고 하니까 “말씀만 하소서, 그러면 낫을 줄 믿습니다”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감탄하십니다. 그때 감탄하신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백부장의 모습에서 감탄하십니다. 여기 백부장은 자기의 하인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당시 하인은 주인의 재산입니다. 가치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이 하인의 병을 위해서 예수께 찾아와서 고쳐 달라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감동받을 일입니다. 또 백부장의 믿음에서 감탄하십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나을 줄 믿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감탄을 받으신 것입니다. 또 백부장의 겸손한 모습에서 감탄을 받으십니다. 지배자가 한낱 하인의 건강을 위해서 예수께 찾아와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다고 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일은 종합적 인격 즉 전인적 인격의 신앙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백부장은 진정으로 양질의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 백부장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믿는 사람들 중에도 상당한 이기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인격이 미성숙한 신앙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도 자기 유익을, 자존심을, 체면을 따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세계에도 있을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문제들 하나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나누이고 찢기고 반목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태가 여기서 이 백부장의 모습을 장황하게 열거하고 있는 이유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전인적인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싶어서 기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 백부장은 믿음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전인적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
이 일은 단순한 인격이나 믿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십자가를 지는 용기의 삶이 필요함을 메시지로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매사 불화하고 갈등하고 다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불화와 갈등과 다툼이 해결되는 곳에 가 보면 누군가 용기 있게 십자가를 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하인 중풍병자가 마침내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 하인 중풍병자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중풍병자 하인이 고침 받은 것은 순전히 주인 백부장의 믿음과 용기와 수고 때문입니다. 이런 수고와 용기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는 곳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고 화해가 이루어지며 회복이 일어납니다. 여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오늘 이 시대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거기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신앙의 삶은 회복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가신 곳 마다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목마른 사람들이 해갈하게 되었습니다. 눈먼 자들이 시력을 회복하였습니다. 앉은뱅이들이 회복되어 일어났습니다. 멸망 받을 사람들이 천국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회복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회복의 사역을 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회복되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이 세상은 다 어그러지고 뒤틀리고 찢어지고 불화되고 있습니다. 가정들이 다 뒤틀리고 찢어지고 있습니다. 관계들이, 신앙들이, 감정들이 다 뒤틀리고 찢어지고 상해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한 우리의 삶에 천국도 조화도 행복도 회복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화해자로 회복자로 나서라고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 이 시대의 화해자이고 회복 자들입니다. 그 일을 하려면 거기에 십자가를 지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백부장처럼 자신이 직접 예수를 찾아가는 용기와 노력과 수고와 진지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십자가는 가장 어려운 짐입니다. 십자가는 용기가 있어야 질 수 있고 수고가 있어야 질 수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 이 십자가가 주어진다면 주저하지 않고 용기 있게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내 주변에서 회복이 일어나고 화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런 십자가가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십자가를 회피하면 기회를 잃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내가 회피한다고 섭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다른 사람이 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영광도 그 사람에게 주어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용기 있게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의가 이루어져서 그 시대를 향한 메시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백부장이 예수께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그 종은 영원히 고침 받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 백부장이 예수께 찾아가는 수고 때문에 고침을 받고 그 하인은 천국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백부장이 십자가를 짐으로 한 사람의 인격이 회복되고 삶이 회복되고 영혼이 회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용기 있는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지난 아프칸 사건 때 20여명이 인질로 잡혔습니다. 온 나라가 걱정하고 비난하고 왜 그곳에 갔느냐 하고 난리를 떨었습니다. 그때 기독교 지도자들 모여 의논하면서 “기독교가 무너진다”며 우려하고 걱정하며 방안을 강구하였습니다. 그 때 우리 중 누군가가 가서 대신 인질로 잡히고 저들을 풀려나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하고 말했습니다. 참 좋은 방안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가자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러면 누가 가서 인질로 잡혀 있을 것입니까. 제안은 좋았는데 누가 그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그런데 놀란 것은 서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분위기에 나 자신도 떠밀려 가야할 사람으로 인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면서 속마음으로 “내가 가야 한다면 가야지“ 하고 다짐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나 자신이라도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가서 십자가를 지면 많은 사람들이 풀려난다면 갈 수 밖에 없지 않느냐 하고 자신에게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물어 보았습니다. “내가 가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랬더니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더니 하는 말이 “왜 하필 당신이냐” 고 물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이렇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큰 십자가는 물론이고 오늘은 작은 십자가도 서로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자기의 부모 모시는 일도 하기 싫어합니다. 자식이 몇이 있는데도 서로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노부모들이 거리를 헤매다 죽거나 노인 요양시설로 보내어지거나 노숙자로 살아가고 있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교회건축도 십자가를 지는 일일 수 있습니다. 당장 헌금해야 하고 고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슬그머니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는 동안 오늘은 그렇게 좋던 것, 중요하던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덜 중요한 것 때문에 이 난리를 떨고 있고 돈 몇 푼 때문에 자기가 다니는 직장의 건물을 부수고 불 지르고 자기를 낳은 부모를 모른 체 내다 버리고 형제간에 돈 때문에 원수가 되고 아이들은 어른을 구별하지 못하고 버릇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누구도 이 십자가를 지려고 안합니다. 그래서 오늘 가정들이, 관계들이, 도리가 없어지고 온갖 불화와 갈등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엊그제 저는 어느 가정 때문에 한참동안 마음에 천국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62세 된 아버지가 간암 말기로 빨리 간을 이식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있는 분이 있습니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며느리 하나가 있습니다. 그중 누군가가 간을 내 놓아야 아버지가 소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내 간을 내 놓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누가 내 놓아야 하겠습니까. 그런 경우가 발생하면 오늘은 다 회피합니다. 서로 안하려고 합니다. 한 아들이 용기 있게 하려고 하면 며느리가 한사코 반대합니다. 어떤 며느리는 간을 떼어주려고 하자 차라리 이혼하고 하라고 막무가내로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때 누가 십자가를 져야하겠습니까. 누가 내 간을 떼서 아버지에게 주어야 합니까. 그 일은 어쩌면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이런 경우는 서로 회피합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의 생명은 자꾸만 꺼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죽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에 그 가정은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회복이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참 건강한 가정이었습니다. 지난주 새벽기도 때에 그 부인 권사가 찾아와 어쩌면 좋으냐고 와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주일 예배드리고 온 가족이 모여서 의논하던 중 한바탕 싸워 난리를 피웠다고 합니다. 왜 싸움이 일어났는가 하면 서로 자기의 간을 떼어 내겠다고 싸운 것입니다. 부인은 내가 부인이니까 내가 해야 한다고 하고 큰 아들은 내가 장남인데 내가 해야 한다고 나섰고 작은 아들은 자기도 할 권리가 있다고 했고 며느리는 자기 남편이 해야 한다고 서로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 난리를 피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부인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회하면서 이런 일들만 있다면 얼마나 재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일은 하나님이 무엇인가 기적을 주시려고 이러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이 가정은 완전히 회복된 가정입니다. 아주 건강한 가정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 같지만 오늘 이 시대는 이 일이 가장 어려운 시대입니다. 오늘은 서로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백부장에게는 하인이 병을 고친다고 해도 아무 이익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앞으로 진급하는데, 출세하는데 아무런 유익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 찾아가 하인을 고쳐달라고 애원을 해서 고침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 본문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뜻이 상실된 시대입니다. 진정한 헌신과 수고와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기적이 없는 것입니다. 있다면 원망과 불평만 있는 세상입니다. 오늘 이런 일을 회복하려면 누군가 십자가를 질 때만 가능합니다. 내가 조그만 십자가를 지면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악화된 관계도 내가 십자가를 지는 용기만 있으면 다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회복의 십자가를 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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