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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예화모음 12편

by 【고동엽】 2023.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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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 TO HAVE OR TO BE? 소유냐 존재냐? >에서 소유론적 삶과 존재론적 삶의 차이를 두 편의 시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소유론적 삶을 상징하는 시로 테니슨의 시를 소개하고, 존재론적 삶을 상징하는 시로 일본의 하이꾸 시인 바쇼의 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테니슨의 시
< 갈라진 벼랑에 핀 한 송이 꽃
나는 너를 바위 틈에서 뽑아낸다
나는 너를 뿌리 채 들고 본다
너 작은 꽃 한 송이
너의 뿌리, 너의 줄기, 너의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신은 무엇이며 인간은 또 무엇인가를 알 수 있으련만! >

바쇼의 시
< 가만히 살펴보니
냉이 꽃 한 송이 피어 있다
울타리 옆에! >

이 두 시는 놀랄만 합니다. 테니슨의 반응은 그 꽃을 소유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신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하여 꽃을 뿌리채 뽑아듭니다. 꽃 자체는 꽃에 대한 시인의 깊은 관심 때문에 그 생명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쇼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는 꽃을 뽑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꽃에 손 조차 대지 않습니다. 그는 꽃과 함께 있을 뿐입니다. 그는 소유하지도 않고, 소유하려 하지도 않으며, 다만 꽃과 더불어 즐거워 하며 하나 되는 존재론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는 에리히 프롬의 이 설명을 들으면서 이를 보다 잘 나타내고 있는 시는 < 일곱 송이 수선화 >로 번안 되어 불려진 Seven Daffodilds라고 생각하였습니다.

Seven Daffodild

< I do not have a mansion,
I have any land, not even a paper dollar to crinkle in my hand.
But I can show you morning on a thousand hills, and kiss you,
and give you seven daffodilds.

나는 그대에게 드릴 맨션 아파트는 없습니다. 땅 한 조각도 없습니다. 그리고 내 주머니 속에는 빤짝 거리는 달라 한 장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저 아침 햇살에 빛나는 수 많은 언덕들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나의 진실한 사랑의 키스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황금 빛 수선화 일곱 송이도 드릴 수 있습니다 >

To Have or To Be That is Question! 

 

 
 

최후의 전범" 파퐁의 20년 구형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 (시 1: 5-6)
전 보르도 지역 경찰 책임자인 모리스 파퐁(87세)이 반인류적 범죄로 징역 20년을 구형 받았다.
파퐁은 2차 세계대전 중에 프랑스 내 유태인 1,500여명의 나치 강제수용소 추방을 주도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는 지난 81년 희생자 가족들에 의해 처음으로 고발된 후 작년 9월 재판회부가 최종 결정되었다. 파퐁은 나치의 프랑스 지배가 끝난 뒤에도 샤를 드골 대통령의 후원 하에 파리 경찰국장을 지냈으며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시절에는 예산장관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려왔다. 그가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 계기는 81년 한 신문에 의해 유대인들을 대거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 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실을 입증하는 서류들이 공개되면서부터이다.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 그이지만 유태인 희생자 가족과 단체들의 고발에 따라 지난 83년 정식으로 기소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의 반인류 범죄로 프랑스 전직관리가 법정에 선 것은 파퐁이 처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은 그들의 범죄 사실이 은폐될 수 있다는 과신에서 비롯되며, 역사는 흐른다는 단순한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들의 권력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믿으며, 그 믿음 위에 더욱 더 악을 행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고 계신다. 반드시 악의 실체는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우리는 두려워하여야 할 것이다. 

 
 
 

원칙의 ‘인사’

진나라 기해가 나이 많아 수상자리에서 물러날 때 진왕 도공이 그에게 후임 수상을 천거하도록 했다.그때 기해는 평소 자신의 정적이었던 해호를 추천했다.왕은 깜짝 놀라 “해호는 그대의 원수가 아닌가. 어찌 그를 후임 수상으로 추천하는가”라고 물었다.

그 말에 기해는 “왕께서 신에게 물은 것은 이 나라의 수상될 재목이 누구냐는 것이요,신의 원수되는 이가 누구냐를 물은 것이 아니므로 신은 왕께서 물으신 뜻에 합당한 자를 추천한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그 말에 왕이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해호 이외의 적임자는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기해는 “그 다음은 오가 적임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다시 한번 놀랐다.이유는 오는 기해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기해의 아들 오는 당대 최고의 재상감이었다.왕은 기해의 공평무사에 탄복하고 기해의 조언과 충언을 훗날에도 수용했다고 한다.

세상사의 성패여부는 ‘인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공평 공정 무사의 원칙만 제대로 지켜진다면 우리 사회는 한결 밝아지게 될 것이다.

 

 
 

1440만원

어떤 사람이 은행으로부터 이상한 전화를 받게 되었다.“당신 앞으로 어떤 분이 1440만원을 예금해놓았습니다.그 돈은 반드시 오늘 다 쓰실 수 있으나 유익하게 쓰셔야 합니다”

이 사람은 어리둥절하며 그 돈을 쓰지 못했다.그런데 이튿날 또 전화가 걸려왔다.

“1440만원이 입금되었습니다.그 돈을 쓰시면 당신 것입니다.그런데 어제 예금된 돈은 쓰지 않았으므로 주인이 도로 찾아갔습니다”

그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 돈을 찾아 ‘기분이나 한번 내보자’며 기분좋게 써버렸다.그 이튿날 아침에도 전화가 걸려왔고 이 일은 매일 반복됐다.이 사람은 매일 이 돈을 쓰면서 기분은 좋았지만 마음속에 자꾸만 불안감이 싹텄다.“어느 날 갑자기 이 일이 멈추어지거나 혹시 무엇을 요구하면 어쩌지?”

공평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루 24시간 1440분을 주셨다.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에게 주신 시간에 대해 심판하실 것이다.“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마 25:19) 

 

 
 

노벨상의 기원

노벨(Alfred B. Nobel)은 1833년에 스웨덴에서 태어나 화학자와 발명자가 되었는데 1866년에는그 유명한 다이나마이트폭약을 발명했다.노벨이 나이가 많이 든 시절의 어느날 신문을 펼치던 그는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간 신문의 일면에는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했다."라고 큰 제목이 나왔고 그 기사를 읽어보니 자기를 표현해서 "다이나마이트의 왕이 죽다"라고도 쓰고 또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라고도 기록이 되어있었다.
물론 그 신문 보도는 불란서의 한 기자가 동명이인(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이 죽은 것을 잘못 보도 발송한 것에 의한 착오였지만 이 사실은 노벨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즉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사람들이 자기의 발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결론지을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로서 자기의 일생을 끝내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그 무엇을 기여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자기의 거대한 재산을 바쳐 평화화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노벨상 제도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해마다 전 세계의 평화와 인류복지에 공헌한 사람들을 뽑아서 시상하는 노벨상이 탄생된 것이다.
또, 1917년 겨울 레닌의귀국으로 공산혁명 군대가 모스크바를 쳐들어와 세상이 뒤집히고 기독교 왕족과 부자와 승려와 군벌등 125만명이 피난가다 죽고, 기독교의 뿌리가 뽑히는 마당에 모스크바의 한 사제(사제)회의에서는 성직자 가운의 후드색을 붉은 색으로 할것인가 황금색으로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와, 축도할 때 손가락을 어떤 모양으로 펼 것인가에 대해 두시간 반을 싸웠습니다. 
 

 

 
 

도토리 나무에 호박 열매

어느 마을에 항상 불평불만에 쌓여 있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하루는 지게를 지고 나무를하러 가던중에 시골 울타리와 지붕에 호박과 박이 주렁주렁 달린 것을 보고 열매에 비해서 넝쿨이 너무작고 약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하려고 보니 큰 도토리가 많이 달린 것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은 공평치도 못하지, 왜 약한 넝쿨에는 큰 호박과큰 박들이 주렁주렁 열리게 하고, 아름드리큰 나무에 작디 작은 도토리가 달리게 할까? 차라리 바꾸어서 달려야 공평할텐데"하고 불평하였다.

그는 나무를 하다가 힘이 들어 도토리 나무 밑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한참 자는 중에 도토리 하나가 툭 떨어지면서 그 사람의 이마를 때리고 떨어졌다. 잠이 깬 그 사람은 "이제 생각하니 조물주 하나님은 공평 하시다"라고 생각하며 범사에 감사를 드리게 되었다. 

 

 
 

공의를 따라 삽시다

요한복음 7장 14 절-24 절

우리는 앞에서 장막절을 기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권하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예수님 사 이의 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생각과 그 형제들의 생각이 너무 다른 것을 보았습 니다.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의 차이가 그러합니다. 이사야 55장 8∼9절에도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자 기에게 제시하시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자기의 생각을 하지 아니하 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였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명절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보통 장막절은 8일 동 안 지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흘이 지났을 때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의 분위기는 벌써 예수 님께 대하여 심상치 않았습니다. 이런 장막절 중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셨습 니다.여기서 3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첫단계로, 14∼24절은 유대인을 상대하여 율법에 비친 그 리스도를 증거하셨습니다. 둘째 단계로, 25∼31절은 예루살렘 주민을 상대로 하여 하나님께로부 터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셋째 단계로, 32∼36절은 제사장과 바리새인을 상 대하여 돌아가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여 명절 중간에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 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 게 글을 아느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2 장 46∼47절에 보면 예수님의 부모가 유월절을 당하여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려고 올라가는 데, 예수님도 나이 12살이므로 전례를 따라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모 든 의식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부모는 어린 예수가 따라오는 줄로만 알고 하룻길을 갔는데, 동 행한 친척 중에서 예수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는 염려하며 다 시 하룻길을 걸어 예루살렘성전에 올라가 예수를 찾았습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예수를 만났는데 어린 예수가 나이 많은 선생님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가 운데 앉아 성경에 대해 토론하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선생들도 어린아이가 뜻밖 에 성경에도 대해서 잘 알고 있으므로, 평생 처음 보는 일이므로 하도 신기해서 자리를 떠날 줄 모르고 예수님과 토론에 열중하면서 그 지혜와 대답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 님은 이렇게 어릴 때부터 성경에 통달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교육제도를 보면 6살부터 회당에서 율법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좀더 공 부하려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야만 하였습니다.거기에는 초등교육으로 서책의 집(Beth Hassepel), 고등교육으로 설명의 집(Beth Hattalmud), 전문교육으로 연구의 집(Beth Hamidrach) 라는 교육 기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어떤 정규적인 교육을 받으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여 기 본문에 배우지 않았다 는 말은 어떤 저명한 선생의 문하에서 배운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세상 사람의 표준으로 생각하면 너무 쓸쓸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는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나 학교도 다녀본 적이 없고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목수방에서 일하며 뼈가 자랐습니다. 그는 저서 한 권 남긴 것이 없습니다. 가정도 가져본 적이 없고 자기의 집이란 것 도 없었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기는 커녕 요샛말로 초등학교도 다닌 적이 없는 분이었습니 다. 큰 도시에 자주 다녀본 적도 없습니다.
난 곳에서 200마일 밖의 곳을 여행해본 적도 없었습 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가난한 집 자손, 배운 것도 없는 사람, 아 무런 경험도 없는 청년으로만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은 배운 것이 전혀 없 는 사람인데 어떻게 글을 읽나? 라고 말하며 의아해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6절).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유명한 랍비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세 상의 과학도는 인간적인 선생에게서만 배웁니다.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셨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앞에 섰을 때 그들을 똑같은 내용으로 비 난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들이 본래 학문이 없는 범인(凡人)으 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느 랍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습니다. 그 당시 관례로는 랍비들 가운데서도 우수 하다고 인정된 제자들 한두 사람만이 성경과 율법을 가르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갈릴리 목수는 어떤 교육도, 훈련도 받은 일이 없는데 감히 그들에게 모세의 말을 인용하고 설 명하였습니다. 그러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군거리며 그들이 인간적인 표준에서 보는 예수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때 보통 사람 같으면 나는 선생이 필요 없다. 나는 스스로 배웠다 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 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나의 선생을 누구라고 믿느냐? 너희는 무슨 권세로 내가 말하고 성경을 해석하는가를 묻느냐?


 나의 교훈과 나의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라고 분명히 말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배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반복되는 주장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 이 나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훌륭한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오직 겸손하게, 감사하는 마음 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해 주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배 운 것을 자랑하거나 우리들이 이룩한 발견이 그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아니한 독자적인 것이 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자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대한 인물은 자기 자신의 재주 나 능력을 염두에 두지 아니합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행할 수 있도록 자기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인간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진리를 계속 규명해 주십니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참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뿐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17절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했습니다. 전에 바울의 선생이던 가말리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 님의 뜻을 내 뜻처럼 이행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 뜻을 당신의 뜻처럼 행할 것이다. 이것은 신자적(信者的)적인 진리가 아니고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행함으로써 배웁니다(We learn by doing). 의사가 교과서를 통해서 수술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는 모든 가능한 수술 방법을 이 론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수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실제 수 술하는 실습을 통해서 외과 수술을 배워야만 합니다. 행함으로 배우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모든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믿 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 는 대로, 믿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진리는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성경을 모두 믿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면 당신이 믿을 수 있는 것부터 그 대로 행하여 보세요.


그렇게 되면 믿을 수 없던 부분까지 믿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 습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19절에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 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실 모세를 공경하였습니다. 그 러나 저희들은 모세를 통해 준 율법은 지키지 않았고, 안식일에 병 고친 것 때문에 예수를 죽이 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 18절에 베데스다 못가에 38년 된 환자를 불쌍히 여겨 고쳐주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여 안식일을 범 했다고, 더구나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하나님과 동일시한다 하여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본문은 그 사건의 연속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을 향한 예수님의 역습입니다. 너 희는 내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 때문에 안식을 범하였다고 하지만 너희는 안식일에 나를 죽 이려 하지 않았느냐? 이것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냐? 이미 너희는 정신적으로 안식일을 범 하고 있다 고 지적하였습니다. 이때 무리들은 입을 모아 당신은 미쳤소 하고 외치며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오? 하며 달려들 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피해망상증 환자이든지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2∼24절을 보면 귀신 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었더니 뭐라 했어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8장 48절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 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0절에도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 하되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고 하였습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의 아 들 메시야를 죽이면서도 당연한 줄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메시야를 미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무리들에게 차분히 논리를 펴 나갑니다. 22절에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 를 주었으니 너희가 안식일에도 할례를 주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난 것입니다(창 17:10∼14). 모세의 율법에도 할례란 난 지 8일만에 이스라엘 남자의 양피를 자르는 예식인데(레 12:3), 8일이 안식일인 경우에는 안식 일에도 할례를 주었습니다. 랍비 아키바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안식일 전 저녁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할례만은 7일째이어서 안식 전야에 못하면 안식일에 할 수 있다 (미시나 숍 20:1). 이렇게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 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즉 모세의 율법에 할례에 대한 조문도 폐하지 아니하려고 안식일에 할례를 주어 도 괜찮은데 내가 죽어가는 사람의 전신을 고쳐서 건전케 한 것을 왜 부당하다고 노하느냐? 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24절에 결론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 라. 우리는 누구나 평화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갈망한다고, 원한다고 평화가 반드시 오는 것은 아닙니다. 평화는 한 결과인데, 평화를 조성할 수 있는 원인이 있기 전에는 평화가 올 수 없습 니다. 그러면 그 조건은 무엇입니까? 공의입니다. 정의입니다. 이사야 32장 17절에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니라 하였습니다. 평화와 안전을 원하지 않는 사람 이 누구겠습니까? 그러나 먼저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시편 85편 10절에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춘다 고 하였습니다. 공 의는 평화의 전제 조건입니다. 의가 없이 참된 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공의는 평화의 기초가 됩니다. 평화는 공의의 터 위에만 건설될 수 있습니다.


불의의 터 위에 건설된 평화의 기구나 어떤 정권이나 어떤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래 위에 선 것 같아서 언제 넘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화산 위에 세운 것 같아서 화산이 폭발할 때에 다 폭발되어서 없어질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하였습니다. 우리 국가의 안녕과 질서도 역시 이 공의의 법칙에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헌법 정신에 근거 해서 입법, 사법, 행정이 모두 공의에 의해 집행될 때에만 우리 국내에 진정한 불행이 없는 평 화가 올 것입니다.
특히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법 아래서 평등의 원칙이 잘 준수 될 때에만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불의한 방법으로 하려 할 때 거기서 불행이 생기고, 불행이 생기는 곳에 불안이 조성되고, 결국 난국에 처하게 되고, 끝이 나고야 말 것입니다. 잠언 14장 34절에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의 번영은 결국 공의를 시행할 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는 오직 공 법을 물과 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게 할지니라 고 외쳤습니다. 우리 나라가 이대로 살 때에 만 기관이나 단체나 사회가, 국가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국가만이 아닙니다. 가정도, 개인도 그렇습니다. 


 

 

 
 

공의로운 심판

1. 의의 심판
1) 이스라엘의 원수를 멸망케 함(사11:4, 사34:8, 사59:16-18, 학2:22,23)
2) 의를 세우기 위해 죄인을 벌주실 것임(출23:7, 왕상8:32, 대하6:23, 시51:4, 애1:18)
3) 의로운 자의 원수를 벌할 것임(시7:6-9, 시7:11-13, 시58:10,11, 시129:4)
4) 만민을 심판하실 것임(사51:5)
5) 큰 음녀를 심판하실 것임(계19:2)

2.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
1)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심(신10:17, 골3:25)
2) 불의나 치우침이 없으심(대하19:7)
3)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벌하심(렘9:25)
4) 악을 행하는 모든 자를 심판할 것임(롬2:9, 벧전1:17) 

 

 
 

공평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 는데 어떤 사람은 부자집에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살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고생만 하다가 삶을 마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태어나 할짓 못할짓 다하며 사는데,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남의 도움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장애인인가? 어찌 이것을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라고 말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평생토록 찾아 헤매는 것은 "행복" 입니다. 행복하고 싶어서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지위도 얻고 지식을 쌓습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해 보면 "행복"은 돈이나 지위나 물질이나 지식으로만 얻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됩니다. 가난하고 장애인으로 태어났어도 행복할 수 있고, 천하를 다 얻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행복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행복을 돈이나 물질로만 얻을 수있다면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물질과는 상관없이 누구든 행복을 얻을
수 있게 하셨으니 그것이 공평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공의로 갚아주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39장 15-18절

오늘 본문에는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시드기야 왕에게 간청하여 예레미야의 목숨을 살려 준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약속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배웁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몇 가지 살펴볼까요?

1. 항상 의롭고 양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 내가 가는 길이 소수만이 가는 길이라도 그 길이 정말 의로운 길이라면 의로운 소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배척하여 죽이려고 할 때 에벳멜렉은 예레미야를 살리는 극소수의 편에 섭니다. 소수가 가는 길에 동참하려면 어렵기에 솔직히 힘 좀 써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소수의 의로운 길로 가려면 갈등도 각오해야 하고, 청빈도 각오해야 하고, 고독도 각오해야 하고, 자기 부정의 아픔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수가 가는 길이라도 그 길이 정말 선한 길이라면 그 길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진정 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사람의 정의가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에벳멜렉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복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벳멜렉은 무슨 대단히 큰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보기에 예레미야에게 한 방백들의 조치는 불법적인 태도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예레미야를 살리는 길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양심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기 양심에 충실하게 살면 됩니다.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양심적으로 살면 그것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비방하는 사람들로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벧전 3:16). 우리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은 '불의의 자리'이지 '소수의 자리'가 아닙니다.

2. 선을 행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보상을 해 주십니다.
에벳멜렉이 복을 염두에 두고 예레미야를 살려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레미야를 살려 준 덕택에 복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선으로 행하는 자의 선행을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3장 13-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최선을 다해 선행을 해야 합니다.
구로공단에 있는 어떤 대기업 회장으로 있는 장로님은
일년 동안 성경공부에 개근하고 성경도 많이 읽습니다.
그런데 그 구로공단에서 가장 봉급을 적게 주는 분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지탄의 대상이 되다가
공단 내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공장이 가장 시끄럽습니다. 평소에 선을 심지 않는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면 외로워집니다. 그러나 평소에 많은 것을 심은 사람은 보통 때에도 적절한 보상이 있지만 특히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특별한 돌보심과 보상이 있게 됩니다. LA 폭동 때 평소에 친절했던 가게는 흑인이 스스로 지켜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을 행하는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선을 선으로 갚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가 예레미야를 통해서 에벳멜렉에게 온 것은 예레미야에게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있었다는 증거도 됩니다.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면 감사하게 받고 자기도 최선을 다해 도우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은혜를 항상 잊지 말고 사십시오.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도움 받은 것도 항상 잊지 말고 사십시오. 우리는 선을 선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차원 더 나아가기를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선을 선으로 갚아야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 믿은 사람들은 악을 선으로 갚는 모습까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정말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가장 깊고 아름다운 영성은 바로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라..."
미운 사람과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라는 영적 병법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매력적인 모습은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3. 항상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느끼며 사십시오.
하나님의 보상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손길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렇게 살면 불평할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불평과 원망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이 된다면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한 점도 유익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한 점도 유익이 없을 수 있습니까? 정말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불평과 원망은 정말 시간 낭비요, 인생 낭비요, 정말 내 인생에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과 원망이 마음 속에 생기려고 하면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간섭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이 연약한지라 불평과 원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간섭하신다고 생각하면
기도하고 하나님의 창조적 손길을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에게 한가지 탁월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처지와 사정을 보면 정말 할 말이 많을 텐데...
부잣집 앞에서 매일 연락하는 것을 보면서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국에 가서도 말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지옥에 가서도 얼마나 말이 많습니까?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탓을 많이 하고, 불평과 원망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나사로보다 훨씬 형편이 나은 데도 그렇습니다.
왜 나사로가 말이 없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섭리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삶, 나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려운 세상에서도 능히 그 환경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생각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뇌물과 공평

성경: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잠28:21)

송나라 때 어느 재상의 이야기입니다. 하나 사람이 보석을 들고 재상을 찾아갔습니다. 어렵게 구한 값비싼 보석을 뇌물로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석은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보석입니다. 재상님께 드리려고 가져왔으니 받아주십시오."
그러자 재상은 대답했습니다. "나에게도 그에 못지 않은 보석이 있습니다. 이런 값비싼 보석을 보고도 탐낼 줄 모르는 내 마음입니다. 만약 내가 그대의 보석을 받게 되면 그대도 값비싼 보석을 잃게 되고, 나도 내 마음의 보석을 잃게 되니, 어서 도로 가져가십시오. 나는 내가 가진 보석으로도 충성합니다." 라고 말하며 보석을 가지고 온 사람을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은 차별 대우하는 것을 말합니다. 혈연, 지연, 학연 등의 관계를 통해 연줄을 댄 사람이라 해서 보아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이와 한가지입니다. '한 조각 떡'은 적은 뇌물을 가리킵니다. 뇌물을 받고 눈감아주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범법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재판을 하거나 어떤 일을 결정하고 처리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공평하고 의롭고 정직하며 적법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묵상: 당신은 많은 유혹으로부터 당신의 마음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사랑의 주님,공의의 주님

출애굽기 15:7∼12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5;11)

술고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이 사람의 동생이 형님을 전도했습니다. “형님,교회에 나갑시다”“이놈아 교회에 나가면 술을 주냐,밥을 주냐”“형님,주일에 교회에 나가기만 하면 제가 술 한잔씩 사지요!”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형님이 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갔다가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야,이제 약속대로 술 사라” 그날 술을 먹은 형이 탈이 났습니다. “형님,아무리 그래도 그렇지,교회에서 나오는 길에 그렇게 술을 먹으니 탈이 난 거예요”“무슨,아무리 그랬을라고…”
이 고주망태 마음속에 은근히 오기가 생겼습니다. ‘좋다, 다음 일요일에 교회에 갔다오는 길에 또 술을 먹어보자’ 그런데 또 배탈이 났습니다. 전엔 아무리 술을 먹어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몇 주 그런 일이 계속되자 덜컥 겁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계시는구나!’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된 형은 참으로 훌륭한 인격을 가진 분으로 변했고 장로까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며 진노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또 다른 표현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며 불처럼 태워버리십니다. 바닷속에 집어던지며 땅을 열어 대적자를 삼키게 하십니다.
영화 ‘레이더스’의 한 장면은 하나님의 진노를 이렇게 영상화합니다. 나치 비밀 조직원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엽니다. 갑자기 궤안에서 빛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그 빛이 날카로운 화살과 창이 되어 사방으로 휘돌아서 뻗칩니다. 그 빛에 닿은 사람은 모두 죽어 넘어지고 온 몸이 녹아서 없어집니다.
경외의 감정은 신앙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최고의 공경심을 가지고 그 앞에서 조심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온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세상이 하나님의 권능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나와 우리 가정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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