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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서신

2012년 바울 서신 강의안1

by 【고동엽】 2023. 2. 26.

2012년 바울서신 강의안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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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 사항》
1. 바울의 교육적 배경은 헬라적인가, 유대적인가, 아니면 양쪽 다인가?
2. 바울은 다메섹사건 이전에 왜 크리스천들을 핍박하였는가?
3. 다메섹사건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다메섹사건은 바울에게 있어서 회심인가, 소명인가, 아니면
양쪽 다인가?
4. 바울의 선교전략은 무엇인가?
5. 바울은 어떻게 순교를 하였는가?
6. 우리는 바울을 어떤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2012학년도 봄학기 바울서신 강의안 1
간략한 사도 바울의 생애: “바울/사울은 누구인가?”
바울은 누구인가?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든지 바울에 대해 얼마간의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 바울은 예수님 다음으로 많이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바울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했으며, 그의 핵심적인 메시지와 신
학/사상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1)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출생, 삶, 사역 그리고 그의 죽음은 어떠했는가?2) 그가 남긴 서신
1) 바울에 관한 최근의 중요한 국내외적 자료는 다음과 같다: 김세윤, 『예수와 바울』(서울: 참말사, 1993); 『바울복음
의 기원』 (서울: 엠마오사, 1995); 존 드레인, 『바울』 (서울: 두란노서원, 1989); 윌리암 람세이, 『사도바울』 (서울: 생명
의 말씀사, 1994); 리처드 N. 롱거네커, 『바울의 선교 메시지』 (서울: 기독교서회, 1992); 헤르만 리델보스, 『바울신학』
(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1); 『바울과 예수』 (서울: 로고스 연구원, 1988); 그레샴 메이천, 『바울 종교의 기원』 (서울:
로고스, 1988); J. 크리스챤 베커, 『사도 바울』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1); 웨인 A. 믹스, 『바울의 목회와 도시사회: 1세
기의 기독교인들』, 황화자 옮김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1992); 권터 보른캄, 『바울』 (서울: 이화여자대학 출판부, 1987);
F. F. 부루스, 『바울』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바울과 예수』 (서울: 아가페, 1988); E. P. 샌더스, 『바울, 율
법, 유대인』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5); 이한수, 『바울 신학연구』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4); 『언약신학에서
본 복음과 율법』(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3); 전경연, 『원시 기독교와 바울』 (서울: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91); 최갑종,
『바울연구 1, 수정 증보판』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바울 연구 2』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3); 『사도 바
울』(서울: UCN, 2001);『바울연구 3』(서울: UCN, 2011); V. P. 퍼니쉬, 『바울의 신학과 윤리』 (서울: 대한기독교 출판사,
1987); 로버트 E. 피킬리, 『사도바울』 (서울: 솔로몬, 1994); 홍인규, 『바울의 율법과 복음』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6);
크렉 S. 키너, 이은순역, 『바울과 여성』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J. Becker,
Paul. Apostle to the Gentiles
(Louisville: Westminster Press, 1993); T. L. Donaldson,
Paul and the Gentiles. Remapping the Apostles' Convictional
World (Minneapolis: Fortress, 1997); Martin Hengel,
The Pre-Christian Paul (London: SCM, 1991);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Louisville: John Knox, 1997); G. Luedmann,
Paul Apostle to the Gentile (Philadelphia:
Fortress, 1993); Rainer Riesner,
Paul's Early Period Chronology, Mission Strategy,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8); Alan F. Segal,
Paul the Convert (New Haven: Yale University, 1991); David Wenham,
Paul
Follower of Jesus or Founder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95); John Knox,
Chapters in a Life of
Paul (Macon: Mercer University Press, 1987); N. 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Grand Rapids: Eerdmans,
1997); James D.G. Dun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Grand Rapids: Eerdmans, 1998); Calvin Roetzel,
Paul.
The Man and the Myth (Minneapolis: Fortress, 1999); Ben Witherington III,
The Paul Quest. The Renewed Search
for the Jew of Tarsus (Downers Grove: IVP, 1998); John G. Gager,
Rethinking Paul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Thomas R. Schreiner,
Paul. Apostle of God's Glory in Christ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1); James D. G. Dunn, ed.
St Pau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J. Paul Sampley, ed.
Paul in
the Greco-Roman World (New York: Trinity Press International, 2003); Jerome Murphy O'Connor,
Paul His St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Udo Schnelle,
Apostle Paul. His Life and Theology (Grand Rapids:
BakerAcademic, 2005).
2) 바울의 생애에 대한 역사 비평적 접근의 연구를 위해서는 Jerome Murphy-O'Connor,
Paul: A Critical Lif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Paul His St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Ben
Witherington III,
The Paul Quest. The Renewed Search for the Jew of Tarsus (Downers Grove: IVP, 1998)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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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어떤 것들이며, 무슨 내용을 갖고 있으며, 어떤 목적으로 기록되었는가? 바울의 서신들은 초
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그 다음 시대의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바울이 출생하고
활동했던 주후(AD) 1세기의 헬라-로마 사회는 어떠했으며, 그의 혈통과 신앙과 사상의 뿌리였던
유대교는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 그의 가정과 교육 배경은 어떠한가? 그의 전 삶을 이끌어간 핵심
적인 사상은 무엇인가? 왜 그는 10대의 청소년 시절에 그의 고향 다소를 떠나 예루살렘의 랍비 가
말리엘 문하에 들어가서 철저한 바리새인 랍비 교육을 받아 자기 동년배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율
법학자가 되었는가?(행 22:2-3; 26:3-10; 갈 1:13-14; 빌 3:5-8). 그는 바리새인 랍비교육을
받은 후 율법의 가르침(창 2:18)대로 결혼하였으며, 그리고 무슨 활동을 하였는가? 왜 그는 초대
기독교 신자들을 그렇게 핍박했는가?(행 9:1-9; 갈 1:13-14; 고전 15:5) 그가 바리새인으로서
초대 기독교인 신자들을 극렬하게 핍박했을 때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무엇이 그로 하여
금 극렬한 기독교 박해자가 아닌 열렬한 기독교 복음 전파자로 살아가게 했는가?(행 9:19-30; 갈
1:13-21) 왜 그는 유대인이면서 유대교를 비판했으며, 결국 유대교를 떠났는가?(빌 3:4-9)3) 왜
그는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의 핵심적인 심볼인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비판하였는가? 왜 그는 안디
옥, 에베소, 데살로니가, 빌립보, 고린도 등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행 13-21장), 이들 교회에 편지를 보냈는가? 왜 그는 선교 사역 기간 중에 여러
적대자들을 만나게 되었는가? 이 적대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이방인인가, 아니면 유대인인가? 왜
그는 자신이 세운 교회들로부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모았으며, 왜 그 헌금을 갖고 자신
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직접 방문했는가?(롬 15:22-28; 행 21장) 왜 그는
로마 교회 방문을 그토록 원했으며, 왜 온갖 핍박을 감수해 가면서 아시아와 유럽과 나아가서 당시
땅 끝이라고 불렸던 스페인에까지 복음을 전하려 했는가?(롬 15:28) 왜 그는 로마에서 네로황제에
의해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른 곳으로 피신을 떠나지 않고 로마에 있었으며, 결국
체포되어 네로에 의해 목배임을 당하는 순교를 하였는가? 그는 과연 우리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사도요, 복음 전도자요, 목회자요, 선교사요, 교육가요, 신학자요, 문필가인가?4) 그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는 과연 예수님의 참된 제자인가? 아니면, 어떤 학자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임의로 해석하거나 예수님과는 다른 교훈을 가르쳤는가?5)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의도하
지 않았던 기독교를 창설했는가?6) 아니면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고 확장시킨 충실한 예수님
의 제자요 계승자인가?
1. 바울에 관한 역사적 자료
과거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에 관한 역사적 자료의 양과 신임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아무리 잘 알려져 있었다 할지라도, 그에 대하여 믿
을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남아 있지 않는 한, 우리는 그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
게 남아 있는 바울에 관한 믿을 만한 역사적 자료는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예수님은 단 한편의 글도 남기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믿을 만한 역
사적 자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적어도 30년이 지나서 쓰여 진 것으로 알려진 마
3) 물론 다메섹 사건 후에 그가 전에 열렬하게 헌신했던 유대교를 떠났다고 해서 바울이 자신의 유대인 됨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빌립보서 3:5과 로마서 11: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메섹 사건 이후에도 바울은 여전히 자신의 유대인 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4) 메이쳔은 그의 책, 『바울 종교의 기원』, 29에서 “기독교는 신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최초의 위대한 신학
자는 바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시 최근에 James D. G. Dun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Grand Rapids:
Eerdmans, 1998), 2에서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다”고 말하고 있다.
5) 예를 들어, 다음의 학자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왜곡했으며, 예수님이 의도하지 않았던 기독교를 창설했다고 보
고 있다: H. Maccoby,
The Mythmaker: Paul and the Invention of Christianity (London: Weidenfeld and Nicholson,
1986); J. Klausner,
From Jesus to Paul (London, 1946).
6) 이 문제에 관한 토의를 위해서는 David Wenham,
Paul. Follower of Jesus or Founder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95)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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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마가, 누가, 요한 등 사복음서밖에 없다.7) 그러나 예수님과 달리 바울은 주후 40년대에서 60
년대 사이에 있었던 그의 목회와 선교 활동을 통해 세워진 교회들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들을
남기고 있다. 또한 누가복음서의 저자인 누가가 쓴 사도행전 역시 믿을 만한 자료로 볼 수 있다.8)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오순절의 성령 강림 이후 사도들의 복음 전파와 교회의 확장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내용의 반 이상이 바울의 선교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행
13-28장). 그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에 대하여는 상당히 신뢰할 만한 역사적 자료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바울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고 있다. 학자들마다 바울
에 대하여 의견이 다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바울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르게 보일 만큼 천(千)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에 관한 역사적 자료의 규정과 그 신임성과 해석에
있어서 제각기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자료 사용과 그 해석에 있어서 의견이 서로 다르기 때
문이다.10) 예를 들면 오늘 날 전통적인 바울연구가들과 새 관점 운동(the New Perspective on
Paul)가들 사이에 동일한 바울자료들을 사용하면서도 바울과 유대교와의 관계, 율법과 의의 해석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바울에 관해 우리가 믿을 만한 역사적 자료는 주후
40년대에서 60년대 사이에 바울이 기록했다고 간주되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
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 등 13서신11)과, 누가
가 쓴 사도행전 외에는 없다.12)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자료를 제외하고는 바울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주후 1세기의 그 어
떤 역사적 자료도 갖고 있지 않은 셈이다. 그의 가정과 가계(家系)를 밝혀 줄 수 있는 족보나 호적
등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교육 배경을 보여 줄 수 있는 생활기록표나 성적표도 갖고 있지 않
다. 더욱이 그의 선교일지나 일기는 물론 그가 개척하고 목회한 교회의 당회록도 없으며, 심지어
그의 무덤에 세워졌을지 모르는 비석조차 남아 있지 않다. 주후 2세기와 3세기에 걸쳐 쓰여 진 바
울행전, 라오디게아서신, 세네카와 바울의 교환 서신, 바울의 제자 디도의 서신, 바울의 순교, 바울
과 베드로의 행전 등이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대부분 정경의 어떤 부분이나 교회 전설 등을 헬
라-로마의 소설 양식에 맞추어 쓴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13)
따라서 바울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했으며, 그의 사상과 신학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결국 우
리가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서신들을 얼마나 믿을 만한 역사적 자료로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이들
자료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해석하고 종합하는지에 달려 있다.14)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특별히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보수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바울에
대한 견해가 현격하게 다른 주된 이유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들의 역사적 신임성과 해석에 대한
7) 자세한 논의는 최갑종, 『나사렛 예수: 예수의 선포와 행위』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예수 그리스도』(서
울: UCN, 2005); John P. Meier,
A Marginal Jew: 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 Volume One, Two, Three and
Four (New York: Doubleday, 1991, 1994, 2001, 2009)을 보라.
8) John Knox,
Chapters in a Life of Paul, rev. edition (Macon: Mercer University Press, 1987), 3-16.
9) David A. DeSilva,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Contexts, Methods & Ministry
Formation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477.
10) Knox, “The Use of Our Sources,” in
Chapters in a Life of Paul, 17-28.
11) 바울이 남긴 13서신들의 중요성에 관해 F. F. Bruce, 박문재 역, 『바울』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28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울의 서신들은 바울의 삶과 사역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일차적인 자료가 된다. 사실 그것들
은 기독교의 초기 역사에 관한 일차적인 자료이다. 왜냐하면 이 서신들은 가장 초기의 기독교 문헌들이며, 그 가운데 가장 중요
한 것들은 예수의 죽음 이후 18년 내지 30년 사이에 쓰여 졌다.”
12) 베드로 후서 3:15-16과 1세기 말엽에 쓰여 진 로마의 클레먼트의 편지와 익나티우스의 에베소 서신 가운데 바울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나타나 있으나 바울을 이해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한다. 그리고, M. Hengel,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Louisville: John Knox, 1997), 2-3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정경적 자료들도 바울
이 초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시절부터 그의 로마 여행까지 약 30년간의 바울의 생애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정경적 자료를
통해서 완전한 바울의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3) 이들 문헌들에 대한 평가에 관해서는 Wilhelm Schneemelcher,
New Testament Apocrypha, Volume Two:
Writings Relating to the Apostles: Apocalypses and Related Subjects, Rev. ed. (Louisville: John Knox, 1992),
42-270를 보라.
14) Hengel,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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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음적이며 보수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
은 누가가 쓴 사도행전을 사실에 충실한 역사적 자료로 받아들이고,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신약
성경의 13서신도 바울에 의해 쓰여 졌다고 믿는다. 반면에, 대다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사도행
전의 역사성을 대단히 낮게 평가할 뿐 아니라, 바울의 13서신 중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
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등 일곱 개의 서신만을 진정한 바울의 서신으로, 그리고
이 서신들만을 바울과 관련해 믿을 수 있는 일차적이고 역사적인 문헌으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에
베소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등은 바울의 제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본다.15)
이처럼 자료 문제부터 서로 차이가 있으니, 바울에 대한 견해도 많은 점에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
다. 그러므로 오늘날 바울을 보다 더 자세히 알고자 하거나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역사
적 자료 문제와 관련해 자신이 어느 입장에 서서 시작할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우리의 바울 연구는, 근본적으로 복음주의적이며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따른다. 우리는 바울의 이름
으로 기록된 13서신이 진정(眞正)한 바울의 서신들이며, 누가가 쓴 사도행전이 역사적 신임성(信
任性)을 갖고 있다는 확신 아래 시작하고자 한다.16) 이와 같은 우리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
들에게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증명의 부담은 바울의 13서신들을 신뢰할 수 있는 바울의 서신
으로, 누가의 사도행전을 역사적 신임성을 갖는 문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3서신 자체가 바울의 저작임을 밝히고 있는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
런데 문제는 바울의 13서신이 모두 바울의 진정한 서신이 아니라는 것과 누가의 사도행전이 역사
적 신임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나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가 바울이 쓴 13서신과 누가가 쓴 사도행전의 역사적 신임성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곧 바울 연구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17) 때로 우리는
바울의 서신들 간의 차이점,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 사이의 차이점, 그리고 심지어는 사도행전
내에서의 차이점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율법 문제와 관련해 바울이 갈라디아서보다
도 로마서에서 더 긍정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또한 갈라디아서 2장 1-10절
에 기록된 바울의 예루살렘 공의회 방문은 바울 서신에서는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으로 소
개되는 반면에, 누가가 쓴 사도행전 15장에서는 그의 세 번째 예루살렘 방문으로 되어 있다. 즉 사
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11장의 바울의 부조헌금 전달 방문이다. 또한
사도행전에는 바울의 다메섹 사건에 대한 서술이 세 번에 걸쳐 나타나는데(9장, 22장, 26장), 이
들 세 번의 방문 사건들이 모든 면에서 정확하게 동일하지는 않다.
우리가 바울 서신들 사이에, 바울 서신들과 사도행전 사이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사도행전 내
부에서 때로 만나게 되는 차이점들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
를 위한 목적으로 쓰여 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비록 바울 서신들과 사도행전이 역사적 신임성
을 갖고는 있을지라도-상기시켜 준다. 엄밀한 의미에서 바울의 모든 서신들은 도서관이나 연구실
에서 순전히 객관적인 역사를 위해서 쓰여 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여
직접 개척했거나 자신과 깊은 관계가 있는 개인이나 교회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들을 해
15) 예를 들어, E. Hanchen,
The Acts of the Apos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1971), 327; 퀀터 보른캄,
허혁 역, 『바울: 그의 생애와 사상』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1991), 10-11.
16) 만일 우리가 누가가 쓴 사도행전의 역사적 신임성을 받아 드릴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바울의 유대적 이름이 과연
사울인지, 그의 고향 땅이 다소인지, 그가 로마의 시민권자인지, 그의 예루살렘에서의 선생이 가말리엘인지, 그가 과연 3번에 걸
친 선교 여행을 했는지, 그가 과연 로마에 도착했는지에 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의 서신들은 이 문제에 관해 결
코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참조, John Knox, “The Use of Our Source,”
Chapters in a Life of Paul,
24-25.
17) 예를 들어,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바울 자신의 삶에 대한 자서전적인 기록을 별로 만날 수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바울의 자서전적인 기록으로는 갈라디아서 1-2장, 빌립보서 3:3-9 등을 제외하고는 별로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 이것은 우리
가 바울의 서신을 근거로 하여 바울의 삶에 대한 전체적인 재구성을 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
것은 바울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바울은, Hengel,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16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세운 교회 공동체에게 이미 자신의 삶에 대한 이
야기를 했으며, 따라서 편지의 수신자들이 바울의 삶의 여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서신에서 그 이야기를 되풀
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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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하기 위해 쓰여 진 목회적이고 상황적인 서신들이다.18) 이 점에서 누가의 사도행전도 예외가 아
니다. 설령 사도행전이 초대 교회의 역사서로 분류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사도행전이 오늘
우리 시대의 역사-과학적인 방법으로 쓰여 진 것이 아니라, 누가 자신의 신학적, 목회적, 변증적,
선교적인 관점에서 쓰여 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19)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서신들과
누가가 쓴 사도행전을 통해 바울의 생애와 그의 신학을 재구성하기 위해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
전에 대한 통시적(diachronic)이고 공시적(synchronic)인 양면적 접근을20) 필요로 한다.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이 쓰여 진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이들 문헌들이 갖고 있는 문학적 구조나 장르나
내용에 대한 엄정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아무리 우리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연구 방법을 동원할지라도, 연구의 대상에 대한 신뢰의 정도가 우리의 연구 자체에 지대
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21)
2. 바울의 가정과 교육 배경
바울의 출생과 그의 부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사적 자료는 사실상 전무(全無)하다. 우리
는 바울의 부모나 조부모, 형제 및 자녀들에 대한 일체의 역사적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사도행전 21:39과 22:3에 근거해22) 바울은 팔레스틴 유대 본토가 아니라 길리기아 지역에
위치한 대학 교육 도시이며, 당시 동서양의 가교가 되었던 다소에서 다소성의 시민으로,23) 그리고
사도행전 22:25과 28절에 근거해24) 그가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자로 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25) 그리고 우리는 빌립보서 3:5, 고린도후서 11:22, 로마서 11:1, 사도행전 23:6 등
에 근거해26) 바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베냐민 지파의 후손이며,
18) Jerome Murphy-O'Connor,
Paul the Letter-Writer. His World, His Options, His Skills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5).
19) 우리는 누가가 쓴 사도행전의 정확한 기록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주후 60대 후반인 바울의 사후에 기록되었
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순교문제나 그의 서신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에 대하여
사도행전의 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는 누가가 바울의 순교나 그의 서신에 대하여 일체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언급하고 있지 않
은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누가 자신의 사도행전 목적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언급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우리는 신중하게 생
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참조, Robert F. O'Toole,
The Unity of Luke's Theology: An Analysis of Luke-Acts
(Wilmington: Glazier, 1984); Hengel, “The Historian Luke and the Geography of Palestine in the Acts of the
Apostles,” in
The Book of Acts in Its First Century Setting 4. The Palestine Setting, ed. R. Bauckham (Grand
Rapids: Eerdmans, 1995); Ben Witherington III,
The Acts of the Apostles.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98), 1-104; I. H. Marshall & D. Peterson, ed.,
Witness to the Gospel. The Theology of Acts
(Grand Rapids: Eerdmans, 1998).
20) 통시적 접근 방법(Diachronic)은 주로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을 이들이 쓰여 진 역사적, 사회적, 신학적, 문화적
배경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공시적 접근 방법(Synchronic)은 이들이 쓰여 진 문학적, 수사학적 배경을 중심으
로 접근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보다 자세한 문제는 J. C. de Moor, ed.
Synchronic or Diachronic? A Debate on Method in
Old Testament Exegesis. OTS 34 (Leiden: E.J. Brill, 1995); Daniel H. Ryo,
Zephaniah's Oracles Against the
Nations: Its Synchrony and Diachrony (Leiden: E.J. Brill, 1995)을 보라.
21) 그 밖의 자료 문제에 관한 논의는 Hengel,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15-23을 보라.
22) 행 21:39: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
락하라 하니”;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
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23) 현재 터어키 지역 중남부 해안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다소는 1세기에 40만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적지 않
은 규모의 도시였다. W.M. Ramsay, The Cities of St. Paul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07), 97.
24) 행 22:25-28: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
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 이는 로마사람이라 하니 천부
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
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25)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바울 자신이 쓴 서신들은 이 점에 관해 전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26) 빌 3: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
는 바리새인이요”; 고후 11:22: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
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롬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
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행 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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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 배경을 가진 뼈대 있는 유대인 이민자 가정(디아스포라)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27) 바울이 유대 이름인 사울과 로마 이름인 바울을 갖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28)
우리는 유대인인 바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다소성은 물론 당시 유대인으로서
는 좀처럼 얻기 어려운 로마 시민권을 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바울이 선교하
면서 천막 기술자로 일했던 점에 비추어(행 18:3; 고전 4:12; 고후 11:27), 바울의 집안이 다소에
서 천막을 생산하는 중소기업가였으며, 바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다소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에
천막을 공급하는 등 로마 제국에 공헌을 하여 시민권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29) 어쨌든
바울이 출생할 때부터 다소와 로마의 시민권자였다는 것과, 그 집안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이민자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예루살렘에 유학을 보내어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공
부하게 했다는 점을 보아, 바울의 집안이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부유하고 뼈대 있는 유대인 가정이
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30) 그리고 바울의 출생 연대를 확실하게 밝혀 줄 자료는 없지만, 그가 주
후 30년대 초반에 이미 스데반을 위시하여 초대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데 앞장 설만큼 당시 유대
바리새파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부각된 점을 감안해 볼 때, 기독교운동과 처음 관련을 맺을 당
시 바울의 나이는 적어도 25살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주전 4-6년경에 출생한 것으
로 보이는 예수님보다 6-7년 뒤인 주후 2-3년경에 출생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31)
어떤 학자들은 사도행전 22:3에 나오는 바울의 말,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
고, 이 성(예루살렘)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한 교훈을 받았고”에 근거해 바울의 유아
시절에 그의 가정이 이미 예루살렘으로 이주했으며, 따라서 바울은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성장했다
고 주장한다.32) 그러나 바울 서신에 나타난 여러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다른 견해를 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6:4에서33) 바울이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말하는
점, 바울이 헬라어를 모국어처럼 완벽하게 사용하고 그의 서신에서 수사학과 헬라적 문체를 자유롭
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34) 그가 다메섹 사건 후 고향인 길리기아에 가서 7, 8년간 선교 사역을 했
다는 점(갈 1:21-24절 참조), 그가 3차에 걸쳐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도시들을 중심으로 선교했다는 점, 특별히 그의 서신에 나타난 구약 인용이 대부분 희랍어 성경인
심문을 받노라.”
27) Murphy O'Connor,
Paul His Story, 2에서 교부 Jerome의 자료에 근거에서 바울의 가정이 본래 유대 갈릴
리 출신임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을 역사적으로 확인해 줄 수 있는 자료는 없다.
28)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바울의 본래 이름이 사울이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핍박 시절의 이름인 사
울을 버리고 바울이라는 이름을 쓴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적, 역사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것이다.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유대 이름인 사울과 로마 이름인 바울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에 이민 간 한국 교포들의 자녀들
이 미국 이름과 한국 이름 두 가지를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사도행전 11:25,30; 12:25; 13:2, 9에 따르면, 바울은 안디옥 교회
에 목회할 때에도 여전히 유대 이름인 사울로 불리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헬라-로마의 도시에 본격적인 선교 사역
을 하면서부터 유대 이름이 아닌 로마 이름인 바울로 통용된 것 같다(행 13:13). 따라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도 단 한 번도
유대적 이름인 사울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29) Bruce, 『바울』, 51은 바울의 가계가 폼페이나 안토니우스 등 길리기아 지역을 통치했던 로마 장군들로부터 로마
시민권을 받게 되었을 것으로 보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아마도 바울의 아버지, 할아버지 또는 증조부께서 로마를 위해
눈부신 공헌을 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테면, 장막을 만드는 제조업은 전투하는 지방 총독에게 아주 유용했을지도 모른다.”
30) W. M. Ramsey, St.
Paul the Traveller and the Roman Citizen (London, 1908), 34; 『사도 바울』, 박우석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8), 40: “바울은 우선 로마 시민이었다. 로마 시민이라는 특징은 법 앞에서, 그리고 사회의 일반적인
여론에서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를 어느 지방에서든지 귀족의 신분에 처하게 했다. 시민권이 여전히 철저
하게 제한되어 있던 1세기에 로마 시민이라는 것은 그의 가족이 뛰어난 가문 중의 하나요 최소한 상당한 부를 누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역시 G. Clark, “The Social Status of Paul,”
ExpT 96 (1985), 110ff; Bruce, 『바울』, 49을 보라.
31) 누가가 사도행전 7:58에서 바울을 ‘청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당시 청년이란 25-40살 미만의 사람을 가리키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이 때에 바울은, Hengel,
The Pre-Christian Paul, 67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 30살 정도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32) 예를 들어, Van Unnik, “Tarsus or Jerusalem. The City of Paul's Youth,”
Sparsa Collecta 1, NovTS 29
(1973), 259-320.
31) 행 26: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34) G.A. Kennedy,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through Rhetorical Criticism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84); B.L. Mack,
Rhetoric and the New Testament (Minneapolis: Fortress, 1990). 고대 헬라 지질학
자 Strabo(54 BC-AD 24)는 다소에서의 헬라철학의 연구는 아덴과 알렉산드리아를 넘어 모든 헬라 도시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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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인역(LXX)에서 왔다는 점, 바울 자신이 자기를 가리켜 ‘다소 사람’으로 부르는 점, 본격적인
율법 공부가 만 12살 이후부터 시작한다는 점 등을 감안해 볼 때, 바울의 가정이 그의 유아 시절
에 예루살렘으로 이주했으며, 따라서 바울은 유아 시절부터 예루살렘에서 자랐다는 주장은 설득력
이 약하다.35) 오히려 바울이 만 십대 중반까지 다소에 있으면서 그곳에서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사
용할 수 있을 만큼 헬라의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어 보
인다.36)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바울이 다소에 있는 동안에는 유대적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37) 바울 자신이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자신이 유대인들의 모국어인 아
람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임을 주장하고 있고,38) 실제로 그가 예루
살렘 성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말한 것과(행 22:2),39) 바울 자신뿐만 아니
라 그의 집안까지도 당대 유대교 보존에 가장 앞장 선 바리새파라고 한 것 등(행 23:6)은, 바울의
부모가 바울이 다소에 있을 때부터 가정이나 회당에서 유대인들의 모국어인 아람어를 사용하도록
했으며, 율법 등을 철저하게 가르쳐 이교도 헬라 문화의 아들이 아닌 유대교의 정통파 바리새인의
아들로 성장하게 했음을 보여 준다.40) 물론 바울이 본격적인 율법과 바리새인 교육을 받은 것은
10대 후반에 다소로부터 약 800km 떨어진 예루살렘에 유학 가서 가말리엘 문하에 있을 때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갈라디아서 1:14에 나오는 바울의 말,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는 바울이 가말리엘 문
하생 중에서 성적이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으며, 누구보다도 율법과 구약성경에 정통하고 유대 민족
의 정체성과 종교와 문화를 보존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음을 말해 준다.41) 이처럼
35) 존 드레인, 이중수 역, 『바울』 (서울: 두란노서원, 1989), 14-17; 최갑종, “바울/사울의 역사적 자리,” 『바울 연
구 2』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7), 21-22.
36) Calvin Roetzel,
Paul. The Man and the Myth (Minneapolis: Fortress, 1999), 11-14; 로버트 E. 피키릴리, 배
용덕 옮김, 『사도 바울』 (서울: 솔로몬, 1993), 16-17; O'Connor,
Paul His Story, 3-7에서 바울은 10대 후반에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으로 추론한다.
37) 한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헬라화된 유대교를 신봉하는 반면에 팔레스틴 유대인들은 히브리적 유대교를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헬라화된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간주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적지 않은 연구들을 통
해 예수님과 바울 당대 팔레스틴 유대교도 상당하게 헬라화되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이와 같은 이분법은 타당성을 잃어
버렸다. 다시 말하자면, 디아스포라 유대인 가운데서도 팔레스틴 유대인 이상으로 보수적이고 엄격한 유대교를 보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팔레스틴 유대인 가운데서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보다도 더 헬라화된 유대인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문
제에 관한 자세한 토론을 위해서는 Martin Hengel,
Judaism and Hellenism, 2 vols (Philadelphia: Fortress, 1974)을 보라.
38) 예수님과 바울 당대에 팔레스틴에서는 4가지 언어가 혼용으로 사용되었다. 일상 생활어는 주로 아람어였고, 종교적 언
어는 히브리어였고, 그밖에 헬라어는 교육적 언어로, 라틴어는 관공서 언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팔레스틴에 이주해 온 디아스
포라 유대인들은 아람어 대신 헬라어를 생활 언어로 사용했다. 언어 문제에 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John P. Meier,
A
Marginal Jew. 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 (New York: Doubleday, 1991), 255-315를 참조하라.
39) 행 22:2: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아람어를 뜻함)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40) 바리새파는 사두개파, 에센파와 함께 예수님과 바울 당대의 유대교 안의 3가지 대표적인 종파 중의 하나였다. 사두개
파가 주로 당시 소수의 종교, 정치 지배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에센파는 주로 쿰란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지나치게 비현실적
인 종말론과 함께 일반 대중들로부터 격리되어 있었음에 비해, 바리새파는 유대 종교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일종의 종교
-사회적 운동을 표방하고 있어 일반 대중들로부터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언약의 형제들’이라고 칭하
면서, 기록된 모세 오경과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불리어지는 구전 율법을 다같이 유대 종교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근간
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철저히 준수하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 대중들에게도 가르치고 확신시켰다. 따라서 예수님과
바울 당대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이 된다는 것은 유대인 종교 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요, 유대 민족 중에서 엘리트가 되는
것이었다. John Kampen,
The Hasidean and the Origin of Pharisaism (Atlanta: Scholars, 1988); A. I. Baumgarten,
“The Pharisaic Paradosis,”
HTR 80 (1987): 63-77.
41) 예수님 당대에 유대교 안에는 율법을 가르치는 두 학교가 있었는데 하나는 랍비 Hillel이 세운 진보적인 율법학교이
고, 또 하나는 랍비 Shammai가 세운 보수적인 율법학교다. 지난 1970년만 하더라도 적지 않은 학자들은 바울의 선생이었다고
보이는 가말리엘이 랍비 Hillel의 손자이며, 따라서 바울이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유대교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기독교인이 되어서도 이방인 선교에 앞장 설 수 있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가말리엘이 Hillel의 손자였음을 입증할 수 있는
그 어떤 역사적 자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은 가말리엘의 가르침이나, 회심 전 바울의 행동을 볼
때 바울과 그의 스승 가말이엘은 Hillel학파보다 오히려 Shammai학파에 속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그러나 보다 최근에
는 바울이 그의 스승 가말리엘과 함께 Hillel에게 속했다는 주장도 다시 제시되고 있다. J. P. Arnold, “The Relationship of
Paul to Jesus” in
Hillel and Jesus. Comparisons of Two Major Religious Leaders, ed. J. H. Charlesworth and L. L.
Johns (Minneapolis: Fortress, 1997), 256-288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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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다소와 예루살렘, 헬라문화와 유대문화의 다중 지역과 다중문화권에
서 생활하였고, 이것이 그의 삶과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바울은 젊었을 때 이미 결혼해 가정을 가졌었는가? 바울이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하면서 독신
으로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고전 7:7-8 참조), 이것은 바울이 예수님처럼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가? 우리 중 그 누구도 바울의 결혼 여부에 관해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말하기는 어렵
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 준수에 힘쓰는 바리새인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그 자신 바리새인이 되려고
하는 율법학도로서 독처(獨妻)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율법(창 2:18) 역시 필수적 의무사항으로 알
고 지켰을 것이라는 것,42)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 에베소서 5장 등에 나타나는 것처럼 바울이 부
부생활을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점 등을 미루어 보건대, 바울이 평생 독신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때 결혼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43) 하지만 바울 자신이 자기의 자녀들에 대해 일
체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아 그가 한때 결혼은 했으나 일찍이 아내와 사별했거나, 아니면 빌
립보서 3:8의 언급처럼,44)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직업과 유산은 물론 여전히 바리새파
집안으로 남아 있고자 하는 부모를 포함해 가정까지 포기하였을 가능성도 있다.45) 그러나 거듭 말
하지만 여기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없는 이상 우리가 절대적 확신을 갖고 바울의 결혼여부를 말하
기는 어렵다. 우리가 다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계속 독신으로
있었다는 사실뿐이다(고전 7:8).
3. 바울이 초대 기독교인을 핍박한 이유
왜 바울은 초대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을 섰는가? 누가는 사도행전 7:58
(참조 22:20)에서 유대인들에게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하고, 그 대신 유대교의 중
심인 율법과 성전을 비판했던 스데반이 순교할 당시 바울을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 사람들
의 옷을 지켜 주는 청년”으로 묘사하고 있으며,46) 9장에 가서는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자로 소개하고 있다. 누가에 따르면, 바울은 집에 숨어 있는 기독교인들
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으며(행 8:3), 회당에서 그들을 때렸으며(행 22:19), 심지어 그들을 죽이
는 일에 관여하였다(행 22:4; 26:10; 9:1). 바울이 초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을 섰다는
사실은 바울의 서신 여러 곳에서도 증언되고 있다(고전 15:9; 갈 1:13-14; 딤전 1:13).47)
바울은 무슨 이유로 초대 기독교 신자들, 특별히 스데반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헬라계 유대인 신자
들을 박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가?48)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그 자신이
42) 탈무드 MKid 4:13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43) 피키릴리, 『사도 바울』, 52-53. O'Connor,
Paul His Story, 14-15에서 바울은 한 때 결혼했으며, 자녀까지 두었
으나 사고로 아내와 자녀들을 잃었을 것으로 본다.
44)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
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45) 윌리암 람세이, 『사도 바울』, 45: “유대인의 역사 전체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
게 나아가기까지 했을 때 그의 부모, 형제, 자매들의 감정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모독되었다. 그
의 가족이 바울을 배교자로, 하나님과 택함받은 백성의 원수로, 그리고 가문의 수치로 취급했으리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친척들은 그의 최대의 원수들이 되었을 것이다.” 역시 F. F. Bruce,
Paul Apostle of the Heart Set
Free (Grand Rapids: Eerdmans, 1977), 269; 최갑종, “바울과 여성, 결혼,” 『바울 연구 1』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108. n26을 보라.
46) 만일 스데반이 바울처럼 디아스포라 출신인 헬라계 유대인이었다면, M. Hengel,
The Pre-Christian Paul (London:
SCM, 1991), 68-69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스데반은 예루살렘에 사는 헬라계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기독교 운동
의 대변자로, 바울은 정통적 유대교 보존의 대변자로 자처하여 서로 라이벌 관계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47)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
할 자로라”; 갈 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
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48) 예수님과 바울 당대에 예루살렘에는 바울의 경우처럼 본래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이었는데, 종교적 이유 때문에 예
루살렘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쿰란 문헌과 당시 예루살렘의 비문들의 일부가 헬라말로 기록된 것을 보아 바울 시
절에 이미 예루살렘 인구의 10%정도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아람말 보다 헬
라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으로 불리어졌다. 바울이 핍박한 초대 기독교 교인들은 주로 헬라계 유대인들이었다.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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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배 중 누구보다도 조상들의 유전, 말하자면 유대 종교의 핵심인 율법에 대한 지나친 ‘열
심’(zhlwthv")을 갖고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갈 1:13; 빌 3:5-6). 즉 과거에 자신의 율법에 대
한 지나친 열심과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행했던 핍박 사이에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었다는 것이
다.49) 우리는 바울 자신이 사용했던 ‘열심’이란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열심’은 바
울 자신이 한때 갈릴리를 중심으로 유대 독립을 위해 일어났던 열심당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뜻하
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열심당의 일원이었다는 어떠한 기록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
‘열심’은 일찍이 민수기 25:1-18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하
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이방 여인과 부정한 행위를 하는 이스라엘 남자를 창으로 찔러 죽인 것
과 맛디아 형제들이 유대인으로서 유대적 신앙을 저버리고 헬라 제국에 동조하는 배교자 동족들을
쳐서 죽인 그런 종교적인 열심을 뜻한다(참조, 시 106:31; 제 1 마카비서 2:21, 26, 54; 제 2 마
카비서 6:13; 제 4 마카비서 18:12).50) 말하자면 사도행전 22:3에 나타나는 것처럼,51) 바울은 유
대종교에 대한 열심, 곧 바리새인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 이스라엘 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
시킬 메시야에 대한 신앙, 율법 준수가 유대인의 정체성의 보존은 물론 의(義)에 이를 수 있는 수
단이라는 율법주의적 신앙,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며, 이방인은 죄인이라는 선민신앙
에 대한 열심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와 같은 유대 종교(특히 성전, 율법)와 신앙
에 도전하는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강한 증오감을 갖고 있었고, 이로 인해 만일 필요하다면 그들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유대 종교와 신앙을 고수하려고 했던 것이다.52) 바울은 특별히 그가 바리새인
으로 있었을 때, 빌립보서 3:5-9에 나타나는 것처럼,53) 율법에 대한 자신의 열심이 크면 클수록,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그런 행위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쌓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54)
이 같은 바울의 종교적 열심은 결국 그로 하여금 유대 종교 안에 일어난 새로운 기독교 공동
체를 박멸하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불러일으켰다. 갈라디아서 1:13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잔해하다’(ejpovrqoun)라는
말이다. 이 말은 갈라디아서 1:22과 사도행전 9:21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사실상 이 말은 강하고
거센 폭력을 동반하는 잔악한 행동을 가리킨다. 특별히 이 말이 ‘핍박하다’(ejdivwkon)라는 말과
함께 헬라어 원문상으로 행동의 계속성을 강조하는 미완료 과거시제로 사용되는 것은, 바울의 교회
핍박이 일시적이 아니고 교회가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를 목표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
다.55) 그래서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이외
행전 6:1 이하는 이미 초대 예루살렘 교회 안에 아람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신자들과 헬라말을 사용하는 헬라파 신자들이 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자신이 헬라파 유대인 공동체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스데반을 위시하여 헬라파 신자들을 우선적으
로 핍박했던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바울이 아람말을 쓰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전혀 핍박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49) 어떤 학자들은(예를 들어, 보른캄) 당시 바울은 유대교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 선 유대교 선교사였기 때문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데 앞장 선 스데반과 정면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그러나 주후 1세기 유대교에서 선
교사를 파송했다는 어떤 기록도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
50) N. T. Wright, “Paul, Arabia and Elijah,”
JBL 115 (1996): 683-92; T. L. Donaldson, “Zealot and
Convert: The Origin of Paul's Christ-Torah Antithesis,”
CBQ 51 (1989): 655-82.
51)“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3).
52) Richard N. Longenecker, “A Realized Hope, A New Commitment, and A Developed Proclamation: Paul and
Jesus,” in
The Road from Damascus. The Impact of Paul's Conversion on His Life, Thought, and Ministry, ed. R.N.
Longenecker (Grand Rapids: Eerdmans, 1998), 20-23.
53)“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
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5-9).
54) 요한복음 16:2에 보면 유대교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인 신자를 출교하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55) F. F. Bruce,
Galatians (Grand Rapids: Eerdmans, 1982), 90f; H. D. Betz,
Galatians (Philadelphia: Fortress,
1979),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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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신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고 보도한다(행 8:1).
그렇다면 바울이 그토록 초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그는 초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을 섰는가? 왜 그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조상들의 유대교적 전승에
대한 강한 열심을 갖게 되었는가? 바울이 초대 기독교인들 핍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그가 누구 못지않게 초대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신앙에 관해 상당한 이해가 있었고, 또한 그것을 전
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56) 그가 모르고서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1:23에서 바울 자신이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
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아, 바울이 초대 기독교인들의 기본적인 신앙에 대해 몰랐다고 보
기는 힘들다.57) 적어도 그는 초대 기독교회의 핵심적인 메시지(케류그마), 곧 초창기 크리스천들이
믿고 전하였던 핵심적인 내용들인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그
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가 죽음에서 다시 부활했다는 것과, 그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
과, 이제 성전이나 율법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종과 신분과 성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
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율법의 행위들에 의해서가 아닌 예수 그리
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 등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인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모두 거짓된
것으로, 또한 그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유대교에 심히 위협적인 것으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
다. 특별히 스데반을 중심으로 한 헬라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유대 민족의 신앙과 생활의 중심이
던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에 도전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파멸을 예고했을 때, 당시 유대의 정치와 종
교 지도자들이 이것을 예수님을 처형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삼았던 것처럼(막 14:58; 마 26:51; 요
2:19),58) 주로 신앙적 동기 때문에 외지에 살다가 본토에 돌아온 헬라계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유
대 종교 보존에 힘쓰는 바리새파 출신인 바울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성전과 율법을 비판하고 나사렛
예수를 좇는 스데반을 중심으로 한 헬라계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은 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
던 것이다.59)
또한 바울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이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미혹하고 유대교를 위협
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처형한 나사렛 예수를 유대 민족이 기다리는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주님으로 고백하고 전파하는 것을 볼 때, 더더욱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잘 알고
있는 신명기 21:22의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에 근거할 때, 십
자가 처형을 받은 예수는 단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에 불과한데,60) 자기 당대 기독교 신자들
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오히려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전파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
성모독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61) 후일 그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
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았다”(갈 3:13)라는 사실을 깨달았
지만, 그전에 그가 생각했던 나사렛 예수는 백성들을 거짓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생이요,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한 청년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는 초
대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로 확신하고 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 설 수 있었던
56) 바울이 예수님께서 공적 사역을 하셨을 당시 그의 나이가 적어도 20대 후반이상이었다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
을 만난 적이 있는가?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자세한 논의는 메이천, 『바울 종교의 기원』, 73-86을 보라.
57) 김세윤, 『바울 복음의 기원』 (서울: 엠마오, 1994), 87: “바울의 교회 핍박은 그가 회심 전에 적어도 헬라파 유대
기독교의 케류그마의 일부를 알고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58)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최갑종, “예수의 성전청결 사건과 그 의미” 『나사렛 예수』, 291-343; 김세윤,
“예수와 성전” 『예수와 바울』 (서울: 참말사, 1993), 119-165을 보라.
59) A. J. Hultgren, “Paul's Pre-Christian Persecutions of the Church: Their Purpose, Locale, and
Nature,”
JBL 95 (1976): 97-111.
60) 쿰람 문헌 1QTemple 64:7-12는 바울 당대에 이미 십자가 처형을 당한 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61) 김세윤, 『바울 복음의 기원』, 80-81.
- 10 -
것이다.62)
4. 다메섹 사건: 바울의 회심과 소명
초대 기독교 공동체를 말살하려 했던 바울이 어떻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확장시키
는 데 앞장을 서는 사도가 되었는가? 사도행전 9장에 따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 공동
체를 매우 핍박했고, 그것도 모자라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230km나 떨어진 다메섹으로 피
신한 기독교인들까지 붙잡아 오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부터 체포할 수 있는 공문을 받
아 그 곳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자신
의 모든 삶과 사고와 사상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사건인 소위 ‘다메섹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가 그토록 저주했던 거짓된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고 생각했던
그 나사렛 예수가, 이제 오히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찬란한 빛 가운데서 바울에게 직접 나타났기
때문이다(고전 15:8; Cf. 행 9:3-5; 26:16-18).63) 단순히 심리적 환상 가운데 나타난 것이 아니
라 일찍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경우처럼 가시적으로 바울에게 직접 나타
나신 것이다.64) 특별히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서 다메섹에서 자신에게 나
타나신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보이셨다’(w[fqh)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사실을 설명하면서 사용했던 단
어(고전 15:5, 7)와 일치한다. 바울은 이처럼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본 것을 부활하신 예수를 친히 본 제자들과 동일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고전 15:5-12).
우리는, 고린도전서 9:1에서도 바울이 주님을 직접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예수
님을 직접 만났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사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
접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초기 기독교에 대한 격렬한 핍박자인 그가 기독교복음의
열렬한 전파자로 바뀐 사실을 설명하기 어렵다. 바울은 오히려 자신이 한때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스스로를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생각해 핍박했던 그 예수를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에게 그의 아들로 계시하셨다”(갈
1:16)고 증언하고 있다. 자신이 핍박했던 그 나사렛 예수가 이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구약 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되어 왔던 ‘메시야’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이스라
엘 백성은 물론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할 ‘종말론적인 구원자’로, 십자
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시는 ‘그 주님’으로 그에게 계시되었다는 것
이다.6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온 세상에 나타내실 결정적인 구원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그에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66)
62) Hengel,
The Pre-Christian Paul, 79-84.
63)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
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5: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
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26:15-1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
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
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64) 바울이 사도로 불리어질 수 있는 근본 이유도 그가 다른 사도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으며, 그로부터 직접
복음 전파의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87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나타났다고 하고 있
는 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과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이 동일한 것임을 강조한다.
65) 유대교 묵시사상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인자로 불리는 자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인들까지도
구원하기 위하여 역사의 마지막 때에, 오는 세대에 나타나실 것으로 예언되었다(4Qflor on 2 Sam 7:14; 4Q246; 4 Ezra
7:28-29; 13:32,37,52; 14:9; Sirach 4:10; 1 Enoch 10:21; 108:10-11; Pirke Avot 3:16; T. Simeon 7:13; T. Levi
18:2,9; T. Zeblum 9:8; T. Naphatali 8:1,3).
66)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메섹 사건이 바울에게 있어서 새로운 기독론의 확립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바
울 서신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호칭으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주,’ ‘구원자’ 등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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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 순간 자신이 지금까지 핍박했던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메시지
가 옳았으며, 반면에 자신이 신뢰해 왔던 유대교 바리새파 신앙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67) 하나님은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또한 이방 사람들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우주적인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는 단순히 로마 제국의 속박을 받고 있
는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메시야가 아니라, 율법의 저주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그들의 죄
를 대신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대속자, 구원자, 고난의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68)
그리하여 지금까지 자신과 자기 동족에게 배척과 걸림돌이 되어 왔던 나사렛 예수와 그를 믿고 따
르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이 오히려 이제는 그 자신과 모든 유대 민족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는 근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곧 율법에 의한 의/구원을 추구하는 자신의 바리새파 신학이
산산이 부서지고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구원을 추구하는 십자가의 신학
이 그 자신의 전 존재를 이끌어 가는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빌 3:7-9; 고후 4:6).69)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전부터 자신의 율법주의적 유대종
교에 대하여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자신이 기독교산자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
을 선 것에 관하여 심한 자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다메섹사건 이전에 바울에
게 있어서 일종의 심리적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전혀 역사적, 성
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빌립보서 3:6에서 바울이 스스로 그가 율법으로는 험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점과 갈라디아서 3:13에서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초기 기독교신자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을 섰다고 말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이와 같은 심리적 해석은 전혀 설득력
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예기치 않았던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율법의 사람인
바울을 복음의 사람으로 바꾸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70)
다메섹 사건을 통해 참된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율법이 저주의 상징으로 규
정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갈 3:13),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이
그동안 유대교에서 주장해 온 것처럼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죄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
하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며,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세우신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되었다(고전 15:3-5).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울은 비로소
죄의 권세 앞에서 인간을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 줄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 및 인간의 절망적 상황
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은총과 의와 구원의 길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
것이다.71)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의해 지금까지 유대인과 이방인을 종교적으로, 사
회적으로 나누었던 율법의 분리 기능이 사실상 끝났고(롬 10:4),72) 옛 언약시대가 새 언약시대로
전환되었으며(렘 31:31-33), 따라서 구원 문제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롬 3:27-28).
또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갖
게 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율법과 육(肉)을 그 중심으로 삼고 있는 옛
세계가 심판을 받고, 또한 그의 부활과 함께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고
후 5:17; 갈 6:15).7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두지 않으
67) 물론 바울이 빛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이시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되었다(참조 갈 4:4-6; 고후 4:6).
68) Terence L. Donaldson, “The Origin of Paul's Gentile Mission,” in
The Road from Damascus. The Impact
of Paul's Conversion on His Life, Thought, and Ministry, ed. R.N. Longenecker (Grand Rapids: Eerdmans, 1997),
66-72.
69) J. Louis Martyn, “Apocalyptic Antinomies in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NTS 31 (1985): 410-24.
70) 역시 Hengel,
Pre-Christian Paul, 79; D. A. DeSilva,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481을
보라.
71) James D. G. Dunn, “‘A Light to the Gentiles' or ‘The End of the Law'? The Significance of the
Damascus Road Christophany for Paul,” in
Jesus, Paul and the Law (Louisville: Westminster, 1990), 89-107.
72) T. L. Donaldson, “The Origin of Paul's Gentile Mission,” 71.
73) 이처럼 다메섹 사건을 통해 바울은 자신의 과거의 바리새파 신앙에서 다메섹에서 계시된 예수님과 초대 기독교 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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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며,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임은 물론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롬
3:26-30; 4:16-24; 10:12; 갈 3:28). 그는 일찍이 철저한 바리새파 신학자로서 죽은 자의 부활
과 이방인도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되는 새 시대의 도래를 믿고 있었다. 또한 그는 죽은 자의 부활
과 새 시대의 도래는 현 시대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미래에 나타날 일,
곧 현재의 역사가 끝나는 마지막 때에 주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4Q246; Sirach 4:10; 4
Ezra 7:28-9; 13:3,37,52; 14:9).74)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가 부활하
신 몸으로 그에게 직접 나타났을 때, 즉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것으로 생각한 그 종말론적인 부
활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일어난 것을 보았을 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 세
상’이 ‘오는 세상’으로 바뀌게 되며, 옛 세계 안에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이미 일어났다는 사실
을 깨닫게 된 것이다(고후 5:17).75) 즉 미래에 올 것으로 약속되었던 종말이 현재에 이미 일어났
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세계 역사의 대전환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다메섹 사건에서 바울은 또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갈 1:15-16; 고전 9:1; 15:8-10; 행 9:15; 22:10; 26:16-18).76) 마치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
지자처럼(사 42:7; 49:1,6; 렘 1:5), 그는 다메섹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에게 전파하
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이전에 그가 그토록 거부했던 그 복음, 곧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그리
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불경건한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은혜로운 소
식을 이제 자신의 입으로 전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구태여 사도행전의 증언에로 돌아가
지 않는다 하더라도(행 26:11-18),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서 1:16 하반 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자신에게 계시하신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로마서 1:1,5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되고 은혜와 사도직을 받았
다고 한 것(역시, 살전 2:4; 고전 1:17) 등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77)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
이 바울에게 나타남과 동시에 새로운 사명이 그에게 주어졌을 때, 지난날의 율법에 대한 그의 강한
열심이 이제는 복음에 대한 열심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가 추구했던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
가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의’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지난날 자신이 추구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실로 다메섹사건은 바울
에게 있어서 놀라운 체험인 동시에 전혀 다른 가치를 얻게 된 계기였다(빌 3:6). 지난날 그가 행한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크면 클수록 그의 변화와 회심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는
체의 신앙에로 이동하는 경험을 가졌다고 볼 때 우리는 바울의 다메섹 사건을 ‘회심’(conversion)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고 본다. 참고, A. F. Segal,
Paul Convert: The Apostolate and Apostasy of Saul the Pharise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0), 117-125; Longenecker, “A Realized Hope, a New Commitment, and a Developed
Proclamation: Paul and Jesus”, 27-29.
74) 비록 바울 당대의 바리새파 유대교가 이방인들을 구분하는 강한 배타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유대교 안
에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중간 시대의 유대교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인 구원 사상, 곧 역사의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시온을 찾아오실 때 그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우상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
인들도 구원하신다는 사상이 현존하고 있었다(사 2:2-4; Tobit 14:5-7; Sibylline Oracles 3:716-20).
75) L. E. Keck, “Paul as Thinker,”
Interpretation 47/1 (1993): 29-33; E.P. Sanders,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 (Philadelphia: Fortress, 1983), 171.
76) 적지 않은 학자들, 예를 들어, W. Wrede,
Paul (London: Green, 1907), 122-28; Stendahl,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7-12; J. Knox,
Chapters in a Life of Paul (Macon: Mercer University Press, 1987), 97-98; H.
Räisänen, “Paul's Conversion and the Development of His View of the Law,”
NTS 33 (1987): 406-408은 바울의
다메섹 사건을 지나치게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소명에서만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비록 다메섹 사건이 바울에게 소명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소명에 앞서 바울에게 그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주어졌다.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사건을 회상하는 갈
라디아서 1:16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 안에 자기 아들을 계시하시고, 그 다음에 계시된 그 아들을 이방인에게 전파하도록 하
셨다고 말하고 있다. 소명의 내용이 먼저 주어지지 않고 어떻게 소명이 주어질 수 있겠는가?
77) 전통적으로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바울의 다메섹 사건을 회심 또는 개종으로만 보려고 했다. 그러나 K. Stendahl,
Paul Among Gentiles and Jews (Philadelphia: Fortress, 1976)에서 바울의 다메섹 사건을 개종이라기보다는 소명으로 보아
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바울의 다메섹 사건을 회심이나 소명 등 한 측면에서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양면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다메섹 사건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Richard N. Longenecker, (ed.),
The Road from Damascus. The Impact of Paul's Conversion on His Life, Thought, and Ministry (Grand Rapids:
Eerdmans, 1997)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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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핍박자가 아닌 전파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왜냐하면 복음의 원수였던 그를 부르시
고 오히려 복음의 옹호자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진정한 복음의 실제를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자신의 부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의 진수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고전 15:10).78)
5. 다메섹 사건 후 선교 여행 전까지
바울의 다메섹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연대를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도행전 저자가 바울의
다메섹 사건을 초대 교회 역사 초기에 두고 있으며, 바울 자신도 그의 서신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동시에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때(고전 15:3-8), 다메
섹 사건이 AD 30년 4월에 있었던 예수님의 부활과 시간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이 다메섹 사건 3년 후를 가리키는 갈라디아서 1:18과, 그로부터 다시 14년
후를 말하는 갈라디아서 2:1의 예루살렘 공의회에 근거해, 다메섹 사건 연대를 AD 32년 전후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79) 만일 여러 학자들의 주장처럼, 바울의 회심과 소명이 주후 32년경 이
루어졌다면,80) 또한, 사도행전 13장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이 주후 46년
경에 시작되었다면, 약 14년 동안 바울은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이 문제에 관해 바울은 갈라디아
서 1:17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3년 만에 내가 게바(베
드로)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일을 유할새 …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 십사년 후에 내가 (안디옥으로부터)81)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
고 예루살렘에 올라 갔노니.”
갈라디아서 1:17-2:10에서 바울은 친히 자신의 초기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거기서 다
메섹 사건이 있은 후, 즉시 아라비아와 다메섹에 가서 3년을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후 그는 예
루살렘에 올라가서 15일을 체류하면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으
며,82) 그 후 자기 고향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도 방문했고, 그 후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서 14
년간 목회를 한 후 14년째 되는 해에,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가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들을 만났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9-12장은 이 문제와 관련해 다
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즉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직후 잠시 소경이 되어 다메섹에 내
려갔으며, 그 곳에서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
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으며(행 9:8-22), 그러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바나바의 도
움으로 사도들을 만났다. 그런 다음 바울은 자신의 고향 다소로 갔다(9:23-30).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로 파송을 받은 바
78) 최갑종, 『바울 연구Ⅰ』, 208-9.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의 다메섹 사건이 특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울이 종종 그의 서신에서 신자들을 향해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보아 바울의 다메섹 사건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종의 패러다임의 역할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79) 바울의 회심 연대 문제에 관한 최근의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알기 위해서는 Rainer Riesner,
Paul's Early Period.
Chronology, Mission Strategy,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8), 3-28을 보라. Riesner는 이 책 322에서 울의 연대 문제와 관련해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스데반의 순교와 바울의 회심(AD 31/32);

예루살렘 베드로 방문(33/34); 

수리아와 길리기아 체류(34-42); 

안디옥 교회 목회(42-45); 

예루살렘 교회 부조 방문(44/45); 

바나바와 함께 제1차 선교 여행(45-47); 

예루살렘 회의(48); 

제 2차 선교여행(49-52); 

제3차 선교여행(52-56); 

예루살렘 방문과 가이사랴에서의 투옥(57-59); 

로마 압송과 체류(59-62).
80) Hengel,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26-27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바울의 개종 연대의 간격을
아무리 길게 잡아도 3년 이상을 잡기는 어렵다고 결론 내린다.

81) 안디옥이란 말은 본문에 직접 나타나지 않지만, 2:11 이하는 당시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82) 갈라디아서 1:18에 따르면, 바울은 다메섹 사건 3년 뒤에 비로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처음으로 사도 베드로를 만나
그와 함께 15일을 유했다. 바울이 베드로와 함께 15일을 유하면서 무엇을 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이 때에 바울은 자신
의 다메섹 경험과 자신의 이방인 복음 전파에 관해 말했을 것이며, 베드로로부터 예수님의 지상 사역, 특별히 예수에 관한 여러 사도적 전승들에 관해 들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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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가 다소에 가서 바울을 자신과 함께 안디옥 교회의 동사목회자로 초청했으며(11:25-26),  나바와 바울은 본격적인 해외 선교 여행을 떠날 때까지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했다. 만일 이것이 바울이 다메섹 사건 후 본격적인 선교 여행을 하기 전까지의 그의 생애의 주요 궤적이라면, 우리는바울이 아라비아와 다메섹에 거주하는 3년 동안,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 목회자로 초청받기 전까지 그의 고향 다소에 머문 동안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 목회하면서 무엇을 했는지에 관한 의문을 갖게 된다. 

 

사실상 이 14년이라는 기간은 바울의 제3차에 걸친 선교 여행 및 로마 체류 기간과 맞먹는 긴 기간이며, 바울의 신학 형성에 대단히 중요한 기간으로 볼 수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동안의 바울의 사역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83)

 

다메섹 사건 이후 바울은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3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어떤 주석가들은 바울이 다메섹 사건 직후 아라비아로 간 것은 그에게 있어서 다메섹 사건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그 곳에 가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84) 물론 아라비아에 가서 바울이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보냈을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지만, 바울이 그 일을 목적으로 아라비아로 갔다고 보기는 힘들다. 갈라디아서 본문은 다메섹 사건 후 바울이 광야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아라비아(현재의 요르단 북쪽과 시리아지역)로 갔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이 그 곳에 간 것은 다메섹에서 받은 복음을 이방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85)이에 대해 두 가지 근거를 들 수 있다.

첫째, 바울은 고린도후서 11:32에서86) 자신이 당시 아라비아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나비티아 왕국 아레다 왕(BC 9-AD 40)의 박해를 받았던 것을 언급하는데,87) 만일 그가 아라비아에 가서 조용히 기도와 묵상이나 했더라면, 그는 아레다왕으로부터 그런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그 곳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둘째, 사도행전 9:22은 바울이 다메섹 사건 직후부터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임을 열심히 전파했다고 말하는데, 그가 다메섹에서 그렇게 했다면 인접한 지역인 아라비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88) 바울이 다메섹과 아라비아에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은 또한 그가 그 후 고향 다소 지역에 가서도 복음을 전파했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갈라디아 1:21 이하에 나오는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는 바울의 증언과, 사도행전 11:25-26에 기록된 바나바가 바울을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안디옥 교회 목회자로 초청하기 위해 다소로 찾아갔던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이미 다소 지역에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음을 전제하게 한다.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유대 지역에 그와 같은 소문도 나지 않았을 것이고, 바나바가 다소까지 바울을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아라비아 지역에서 3년 동안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한 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사도 베드로를 만났다(갈 1:18; 행 9:26). 바울이 왜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 베드로를 만났는지, 그가 베드로를 만나서 15일을 그와 함께 있으면서 무엇을 하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베드로를 만나서 날씨 이야기나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아라비아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더욱 더 예수님의 구체적인 생애와 그의 가르침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권위 있는 목격자이며, 예수님에 관한 구
83) 최근에 Hengel이 쓴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The Unknown Year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7)은 이 기간 동안의 바울의 사역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84) 예를 들어, Burton,
Galatians, 55; Ridderbos,
Galatians, 65; 박윤선, 『바울서신』 (서울: 영음사, 1985), 23.
85) J. Murphy-O'Connor,
Paul His Story, 25-26.
86) 고후 11:32-33: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
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87) 당시 아라비아는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을 가리지 않고, 다메섹 인근지역을 가리켰으며, 이 아라비아가 아레다
4세가 통치하는 나비타 왕국에 소속되어 있었다.
88) Bruce,
Galatians,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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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전승들을 통제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로부터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사도베드로를 만났고,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15일을 체류하면서 예수님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고향 땅이었던 수리아와 길리기아지역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약 6-7년을 체류하였는데 우리는 이 기간 동안 바울이 무엇을 하였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나중에 안디옥교회의 목회자인 바나바가 함께 사역하기 위해 바울을 찾아 왔다는 것은 바울이 이곳에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바울이 본격적인 선교 여행을 떠날 때까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한 기
간이 얼마인지, 또한 그 곳에서 목회하는 동안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사도행전 11:25-30에 근거해89) 우리는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열심히 무리들을 가르쳐 주위의 사람들이 이들을 유대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부를 만큼 기독교회의 정체성을 확립시켰고,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교회와는 달리 이방인 신자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 AD 41년경 이미 길리기아와 수리아지역에서 이방인 선교 사역을 활발히 하고 있는 바울을 안디옥 교회의 동사 목회자로 초청한 것 같다. 어쨌든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 옴으로써 안디옥 교회가 내적으로, 외적으로 크게 부흥했음은, 주후 43년경 예루살렘 지역에 큰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웠을 때 안디옥 교회가 부조 헌금을 모아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한 것과(행 11:28-30;12:25),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최초의 해외 선교사로 파송한 일과(행 13:1-3), 모세의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가르치는 유대주의 교사들이 안디옥 교회에 찾아 왔을 때 이를 거부하고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나바와 바울을 예루살렘에 파송한 일(행 15:15:1-29; 갈 2:1-10)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모름지기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된 복음을 목회 현장을 통해 더욱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감화 아래 구약성경으로부터 자신의 신학, 특별히 인종과 신분과 성별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할례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신학을 더욱 체계화시키는 기회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6. 바울의 선교 여행90)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자신의 선교 여행에 관해 자세히 기술하지 않고 있다.91) 우리는 다만 갈라디아서 1장 22-23절에서 바울이 한 때 수리아와 길리기아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하고 있는 점,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그가 선교활동을 하는 동안 엄청난 핍박과 고생과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11:23-27)을, 그리고 로마서 15장을 통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지중해 전 연안 지역에 선교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누가가 쓴 사도행전은 전체의 반 이상이 되는 13장부터 마지막 장인 28장까지 전폭적으로 사도 바울에 관해, 특별히 그의 3차에 걸친 아시아와 유럽 지역의 선교 여행과 로마 방문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92) 바울은 왜 선교 여행을 떠89) 행 11:25-30: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90) 바울의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에 관해서는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요약하고자 한다.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F. F. 부루스, 『바울』과 람세에, 『사도바울』을 보라.
91) 우리는 바울 자신이 그의 서신에서 자신의 선교 여행에 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바울의 선교 사역을 결
코 과소평가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바울의 선교 여행이 없었다면, 그의 교회 설립도 없었을 것이고, 그의 교회 설립이 없었다면, 그의 서신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서신이 기록되지 않았다면, 기독교 신학의 형성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Hengel,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2-3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문필가로서의 바울과 목회자, 교회 개척자, 그리고 선교사로서의 바울을 서로 분리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시 David J. Bosch, "Mission in Paul," in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Maryknoll: Orbis, 1996), 123-179.
- 16 -
났는가? 왜 그가 서유럽에 속하는 스페인을 그의 마지막 선교지역으로 삼고 있는가? 누가는 사도
행전 13장에서 바울의 선교 여행이 성령의 지시에 의해 시작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즉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도록 지시하신 것이다(행 13:2; 참
조 16:6-7)). 아마도 이미 다메섹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아라비아와 다소 지역에서
10년 이상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했던 바울이기에 그가 목회했던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했음이 분명하다.93)
바울이 고린도전서 9:16 이하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
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또한 로마서 1:14
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증언하는
것을 볼 때,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통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직후부터 모든 사람들, 특별
히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파하는 것을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다메섹 사건 이후 그는 바로 이방인들에게 이 복음 전파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의 교회의 핍박자였던 자신을 은혜 가운데서 부르셨다고 생각한 것 같다(갈 1:16). 그래서 그는
다메섹 사건 직후부터 복음 전파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하는 동
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고 보는 것은 충분한 개연성을 지닌다. 이제 10
년 가까운 개인적 선교 경험과, 4-5년간의 안디옥 교회 현장목회를 통해 바울의 복음 이해와 신학
이 보다 성숙해졌을 때, 주님은 성령을 통해 안디옥 교회 지도자를 감동시켜 바울을 바나바와 함께
해외 선교사로 파송하도록 한 것 같다. 이때가 Riesner의 주장처럼, 주후 46년경이었을 것이다.94)

 

1) 제1차 선교 여행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에 따르면, 바울 일행은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
시 실루기아에 내려가서 거기서 배타고 약 155km 거리에 있는 구브로 섬으로 갔다. 구브로 섬에
가서 살라미와 구브로 지역의 수도인 바보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주로 그 곳에 있는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했다.95) 그 때 그 곳의 총독 서기오 바울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
었다(행 13:4-12).96) 그런 다음 바보에서 배타고 현재의 터어키 남쪽에 있는 버가로 갔고,97) 버
92) 바울이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은 시간상으로는 약 11년, 거리상으로는 적어도 2만km(한국-미국=1,1000km) 이상에 이른다. Murphy
O'Connor는 그의 책,
Paul His Story, viii에서 바울은 하루 평균 32km을 걸었다고 보고 있다. 때때로 바울은 마차와 배편을
이용하기도 했으나 육지 여행에서는 로마 제국이 건설한 도로를 통해서 주로 도보로 다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11:23-27로부터 바울의 선교 여행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단편적으로 알 수 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
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93) David, J. Bosch,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New York: Orbis, 1996),
133-139.
94) 우리가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 시기를 주후 46년경으로 잡는 것은, 바울이 갈리오가 주후 51년 아가야 총독으로 부
임하기 전에(Gallio 비문 참조) 이미 고린도 지역에 선교 사역을 시작했으며, 이 때가 적어도 주후 48/49년경에 개최된 것으로 보이는 예루살렘 공의회로부터 3년 뒤가 될 것이며, 또한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은 예루살렘 공의회로부터 적어도 2,3년 전이었을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95) 바울 당대 헬라 로마 사회 곳곳에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유대 팔레스틴 땅에 사는 유대인들이 5,6십만 명을 넘어
서지 않았지만, 헬라-로마 제국내에 사는 전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적어도 3,4백 만을 넘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느 지
역이든지 유대인 성인 남자 10명만 넘으면 그 지역에 유대인 회당을 세울 수 있었다. 바울은 그의 선교 여행시에 이 유대인 회
당을 많이 활용했다.
96) W. M. Ramsay,
The Bearing of Recent Discovery on the Trustworthiness of the New Testament, 2d ed.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15), 150 이하에서 이 사람의 딸과 손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본다.
97) 이곳에서 요한 마가는 바울과 그의 삼촌인 바나바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바울은 이 때문에 그의 제2차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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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서 다시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 안식일 회당에 참석한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관심을 갖고 회
당에 찾아온 이방인들(이들을 누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을 대상으로 복
음을 전파했다(행 13:14-41).
이곳에서 바울이 전파한 핵심적인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
세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겠다고 약속한 그 메시야이며, 그럼에도 예
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십자가에 처형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주님은 사
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온 세상의 구원자가 되셨다. 따라서 누구든지, 인종과 신분과 성별과 관
계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께서 이루신 그 의를 우리가 덧입게 되어 구원에 이른다.
이처럼 바울은 이미 1차 선교에서 율법과 관계없이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교리를 설교했다. 이것은 바울 신학의 핵심적인 교리인 이신칭의가,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98) 바울의 이방 선교를 통해 발달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선교 여행 전에 확
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다시 말해서 바울 신학의 핵심인 이신칭의 메시지는 이방 선
교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신칭의 교리가 바울로 하여금 이방 선교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
다.99)
바울은 두 번 째 안식일에 온 성(城)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13:44),
이 때에 그 곳에 사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선교 사역을 반대하게 되어 바울은 이방인 선교에 더 주
력하게 되었다(13:45-51). 그 후 바울 일행은 안디옥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유
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여기에서도 유대인들의 저항을 받았다(14:1-6). 그래서 바울 일
행은 다시 그 곳을 떠나 루스드라와 더베 등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14:6-18).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 곳까지 찾아와서 바울을 돌로 쳐서 성 밖에 내던졌다.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이와 같은 심한
박해를 받았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더베에서 복음을 전해 많은 제자를 삼았으며(14:19-21), 그
런 다음 복음을 전했던 지역들, 곧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 교회들을 돌아보고
첫 출발지였던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다. 지리적으로 안디옥에서 구브로 섬을 거처 제 1차 선교지역
의 제일 마지막 장소였던 비시디아 안디옥까지의 거리가 824Km였음을 감안한다면 바울은 제 1차
선교여행에서 적어도 1,700km 이상을 여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100)
바울의 첫 선교 여행지와 관련해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이들 지역에 세운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냈는가 하는 문제다. 물론 바울의 서신 가운데 이들 교회의 이름을 직접 거명
하여 보낸 편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적지 않은 학자들은 바울의 초기 서신중의 하
나인 갈라디아서를 바울이 제1차 선교 여행시에 세운 이들 교회에 보낸 편지로 본다.101) 왜냐하면
바울 당시 이들 지역이 로마 행정 구역상으로 갈라디아 지역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바울이 일반적
으로 교회를 호칭할 때 로마 행정구역상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감안할 때(고전 16:19), 이와 같
은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더구나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가 바울이 첫 선교
여행시에 전파했던 이신칭의 메시지이며,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반대자들이 유대주의자들임
을 감안할 때, 갈라디아서를 바울의 첫 선교 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로 보는 것은 타
당성을 지닌다.102)
2) 제2차 선교 여행
여행시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행 15: 37-39).
98) 예를 들어, Wrede, Schweitzer 등
99) 참조, J. G. Machen,
The Origin of Paul's Religion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21), 278: “

이방인 선교가 바울로 하여금 이신칭의 교리에 전념하도록 한 실제적인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사실은 그 반대이다. 바울은 이신칭의 교리때문에 이방인 선교에 전념하게 되었다.”
100)Murtphy-O'Connor,Paul His Story, 47.101) F. F. Bruce,Galatians, 3-18; Longenecker,Galatians, lxi-lxxii.
102) 이 문제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F. F. Bruce, “Galatian Proble, 2. North or South Galatians?”BJRL 52
(1970) 243-66; Longenecker,Galatians, lxi-lxxii; J. M. Scott,Paul and Nations: The Old Testament and Jewish
Background of paul's Mission to the Nations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Destination of Galatians (Tübingen:J.C.B. Mohr, 1995), 186-187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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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은 주후 48/49년경에 개최된 것으로 보이는 예루살렘 공의회와 안디
옥 사건 직후에 이루어졌다. 나중에 우리가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
울이 안디옥 교회와 그의 1차 선교 여행지에서 전파한 이신칭의의 교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지
만(갈 2:1-10; 행 15:7-11), 안디옥 사건을 통해 베드로와 바나바는 이신칭의 교리에 배치되는
행동을 했다(갈 2:11-15). 그래서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은 바나바의 동행 없이 바울 단독으로 이루어졌다.


바울은 마가 대신 실라를 선교 조력자로 삼은 후 안디옥을 떠나 먼저 자신이 안디옥 교회에
부름 받기 전에 복음을 전파했던 자신의 고향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에 가서 그 곳에 세운 교회
들을 돌보았다. 그런 다음 제1차 선교 여행시에 복음을 전파했던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등 여
러 지역을 방문해 교회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파하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부
탁한 규례를 가르쳐 준수하게 했다(행 16:1-5).103) 그런 다음 바울은 소아시아 북쪽 지역에 가서
계속 복음을 전파하려 했으나, 성령께서 아시아보다 유럽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것을 지시했
다(행 16:6-10). 그래서 바울은 실라와 그리고 루스드라에서 새로운 선교 조력자로 선택된 디모
데와 함께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 성에 들어갔다.104) 빌립보 성에서 바울은
자주 장수 루디아 가정과, 귀신들린 여자와, 그리고 옥에 갇힌 바울105) 일행을 지켰던 간수 가정에
복음을 전했다.106) 아마도 이들이 빌립보 교회의 모체가 되었을 것이다.107)
빌립보를 떠나 바울은 로마의 대로를 따라 빌립보로부터 남쪽으로 약 150km떨어진 데살로니
가로 갔고, 거기 있는 유대인 회당에서 3주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유대인 회당에 참여했던 많은
이방인들, 특별히 그 지역의 귀부인들이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했다(17:1-9).108) 그래서 바울은 베뢰아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파한 복음을 받아들였다(17:10-12). 그러나 유대인들
이 이곳까지 찾아와서 바울을 반대했기 때문에 바울은 헬라의 고도 아덴을 거쳐109) 고린도에 갔다
(17:16-18:1).110)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그 곳에서 로마 교회의 신자이며, 바울처럼 천막업을
103) 바울은 제2차 선교 여행시 루스드라에서 그 부친은 헬라인이며, 어머니는 유대인인 디모데를 자신의 선교 조력자로
선택했다.
104) 드로아에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바울과 합류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바울의 선교여행은 ‘우리’라는 말로 설명
되고 있다.
105) 바울은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 그에게서 귀신을 쫒아냈는데, 오히려 이일로 인해 돈벌이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
각한 여종의 주인이 바울을 고소해 옥에 갇히게 되었다.
106) 바울은 빌립보에 가서 먼저 유대인의 기도처를 찾았다고 언급되고 있는데(16:13 이하),이것은 당시 빌립보에는 유
대인이 거의 살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 유대인 성인 10명이 있으면, 회당을 세울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기도처를 세우도록
했다.
107)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95), 25-26.
108) 물론 이 말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정확하게 3주 동안만 있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바울 일행이 유대인 회당을
떠나 야손의 집에 머물렀으며, 따라서 야손의 집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회집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야손의 집에서 바울이 얼마 동안 체류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빌립보서 4:16에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빌립보 교회가 한 두 차례 선교 후원금을 보내 주었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데살로니가 체류 기간이 적어도 3주 이상 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09) 바울은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헬라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으나,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17:16-34).
110) 사도행전 18:1-18에 따르면,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시인 AD 50년경 아덴을 거쳐 아가야 지역의 수도인 고린도에
왔다. 본래 고린도는 고대 헬라 제국의 도시 중의 하나였으나 주전 146년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주전 44년 로마 제국의
쥴리어스 시저 황제에 의해 동서와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상업 및 무역 중심의 항구도시로 재건되었다. Strabo,
Geography,8.6.20; Ben Witherington III,Conflict & Community in Corinth.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on 1 and 2Corinthians (Grand Rapids: Eerdmans, 1997), 8-11를 보라.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에서 천막장사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R. F. Hock,The Social Context of Paul's Ministry [Philadelphia: Fortress, 1980], 20ff.)

그렇기에 바울이 고린도에도착했을 때 고린도는 문화적으로는 강한 헬라 문화의 영향 아래에 있었고, 행정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었으며, 아가야 지역의 행정상의 수도로 총독이 거주하는 도시였으며, 그리스 지역에서 가장 크고 번창한 도시였다(Cf. D. Engels,RomaCorinth: An Alternative Model for the Classical C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1990]; J. Murphy-O'Connor,
“Corinth,”
ABD 1, 1134-39). 당시 고린도 인구는 약 7-8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므로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 서울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거주지와 이 곳에서의 성취 등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동시에 고린도에는 당시 사랑과 미와 출산의 여신인 Aphrodite의 유명한 신전이 있어 순례자들과 종교적인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음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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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가정에 머물면서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파하고 고린도 교회를 설립
했다. 고린도에서 복음 전파 사역을 하는 동안 적지 않은 유대인들의 도전을 받았으나 바울은 좌절
하지 않았다(18:2-17). 그후 바울은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에베소로 건너왔고, 다시 에베소에서
배편을 이용하여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을 거쳐, 선교 출발지였던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바울
의 2차 선교여행의 개괄이다. 1차와 2차선교의 특징을 말한다면 1차 선교여행은 주로 아시아지역
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면에 2차 선교여행은 동유럽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3) 제3차 선교여행
2차 선교여행 후 바울은 얼마 동안 안디옥에서 머물었다가 다시 그의 1차 선교지인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을 돌보기 위해서 세 번 째 선교 여행을 떠났다. 바울은 먼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잠시 둘러 본 후 그가 2차 선교 여행시 염두에 두었던 에베소로 갔다.111) 

에베소에서 바울은 일찍이 세례 요한을 따랐던 12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으며(행 19:1-7),112)
그 곳에 있는 유대인 회당과 두란노 서원을 중심으로 2년 동안 복음을 전파하고 많은 이적을 행했
다.113)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아데미 신전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백성들을 충동하여 바울을 반대하고 도전했다(19:23-41). 그래서 바
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 지역에 가서 그 곳에 세운 교회들을 돌보면서 석 달을 체류했다. 그
런 다음 바울은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드로아에 왔고, 밀레노에 가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잠깐
만난 다음, 배편을 이용해 두로로 가서 2년 동안 그 곳에서 머물었다. 그런 다음 가이사랴를 거쳐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많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갔다(20:1-21:17). 이처럼 바울의
3차 선교여행은 당시 소아시아로 불리어졌던 에베소와 그 인근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아마도
이때에 에베소교회 뿐만 아니라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다른 여섯 교회의 설립에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4) 죄수로서 로마 압송과 로마에서 바울의 활동
바울은 3차 선교여행 후 예루살렘에 와서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을 만나 그들에게 그
동안의 선교 보고를 했다(행 21:15-19).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에 체류하는 동안 그 곳에 사는
유대인들의 강한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대제사장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고소를 받아 당
시 로마 총독 벨렉스에 의해 2년 동안 가이사랴에서 감옥생활을 했다(21:20-24:27). 벨렉스의 뒤
를 이어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이 다시 바울을 고소했다(25:1-2).
그래서 바울은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특별한 잘못
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석방하려 했으나,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로서 자신의 문제를 로마 황제
에게 직접 호소했기 때문에, 바울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배편으로 로마로 압송되었다(25:3-27:1).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는 동안 유라굴라라는 큰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는 등 죽음의 위험을 당하
기도 했으나,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다(27:2-28:16). 사도행전 저자 누가에 따르면, 바울은 로마에
도착한 후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행동에 제재를 받지 않고 2년 동안 유대인들과 자기를 찾아오는
범람했으며, 그밖에도 예언의 신으로 알려진 Apollo의 신전과 치유의 신인 Asklepion의 신전과, 결혼의 여신 Hera Argae의 신
전과, 로마 황제 숭배를 위한 제단이 세워져 있을 만큼 각종 종교적인 제사 행위가 범람하기도 했다.
111) 바울 당시 에베소는 로마가 지배하는 아시아 지역의 행정상 수도였으며 로마 제국 내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로서 인
구가 적어도 25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R. E. Oster Jr., “Ephesus,”
ABD Ⅱ, 542-549).
112) 이들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 같으나 예수가 오신 메시야라는 것과 오
순절 성령의 강림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했고, 이들은 복음에 응답하여 세
례와 함께 성령을 받게 되었다. 이들이 에베소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이 된 것 같다. 참고 Johe B. Polhill,
Paul & His Letter,
C. Nashville: Broadman & Hohnam, 1999), 222.
113) 사도행전 서방 본문(The Western Text)은 바울이 매일 오전 11시에서 오후 4시까지 두란노서원에서 강론하였다
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담대하게 전파했다(28:17-31).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거주한 지 2년 후인 AD 62년 이후 그가 네로 황제에 의해 순교를
당했을 AD 65년까지 약 4년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전혀 기록하지 않고, 바울 자신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정확한 역사적 언급을 할 수 없
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그 후 바울은 자유로운 몸이 되어, 그가 로마서에서 언급한
대로(롬 1:11-15; 15:14-32), 스페인에 가서 잠시 복음을 전했고(I Clem. 5:5-7), 그런 다음
로마에서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다시 체포되어 주후 65년경 네로 황제 때에 순교했다(Eusebius,Church History 2.22).114) 만일 우리가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등 목회서신과 빌레몬서 등을 바울
자신의 기록으로 본다면, 아마도 이 기간 동안 스페인 선교는 물론 잠시 시간을 내어 그의 제 2차,
3차 선교지였던 고린도, 에베소, 빌립보등을 방문하였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115) 이
렇든 저렇든 분명한 것은 바울은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고 그로부터 복음전파의 소명을 받은 이
후 일 순간도 다른 길을 가지 않고 오직 복음전파와 교회설립 및 양육을 위해 헌신하였고, 바로 이
일 때문에 마지막에 순교까지 하였다는 사실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바울은 참으로
디모데후서 4:7에서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다메섹 사건 이후 오직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만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자”라고 할 수 있다.116)
114) 바울의 순교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H. W. Tajra는 그의 책,
The Martydom of St. Paul. Historical and
Judical Context. Traditions and Legends (Tübingen: J.C.B. Mohr, 1994)에서 이와 같은 고대의 전승이 역사적 사실에 근
거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115) 역시 Murphy-O'Connor,
Paul His Story, 218-234를 보라.
116) 주후 2세기의 서머나 감독 폴리갑은 바울을 가리켜 “복음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희생한 영광스러운 자”라고
불렀다(Poly. Phil 3:2; 9:1).

 

출처 : https://cafe.daum.net/bkt6707.net/bchb/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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