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해도 희망이 있다 (창세기 4장 9-15절) < 형제 사랑의 원리 >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물은 받고 형식적으로 드린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다. 그러자 선을 행하지 않고 죄를 다스리지 못한 가인이 아벨을 들에서 쳐 죽였다(8절). 그 후에 있었던 하나님과 가인의 대화를 통해 형제 사랑과 관련해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1. 형제를 시기하지 말라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이 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그 말을 보면 가인의 열등감과 시기심이 살인의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심은 살인 이전에 있었던 타락한 인간의 핵심적인 죄다. 그 시기심을 잘 극복하도록 남과 비교하며 살지 말라. 남의 성공을 보고 나에 대해 실망하지도 말라. 내가 그가 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
남보다 나아지려는 건전한 꿈과 목표는 가지되 남보다 나아지려고 집착하거나 잘못된 수단방법을 쓰지는 말라. 또한 앞선 사람에 대한 부당하고 지나친 비난도 삼가라. 큰 교회나 성공한 사람의 잘못에 대해 정당한 비판은 해도 되지만 그저 크거나 성공했다는 것 때문에 욕하는 것은 시기심이 표출된 부당한 비난이 된다. 남을 경시하는 앞선 자의 명예욕도 버려야 하지만 남을 시기하는 뒤진 자의 명예욕도 버려야 한다. 남의 성공을 너무 사모하며 동경하지도 말고 반대로 너무 시기하며 깎아내리지도 말라.
성공과 명예가 행복의 기준은 아니다. 시기심으로 표출된 명예욕을 잘 극복하면 그것이 행복이다. 명예가 있어도 명예욕이 여전히 심한 사람은 작은 사람이다. 반면에 명예가 없어도 명예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큰 사람이다. 더 나아가 명예가 있어도 감추고 조용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기 사명에 매진하는 사람은 가장 큰 사람이다. 하나님이 주신 자기 사명을 따라 명예롭게 살라.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특징과 성공의 길이 있다. 기죽을 필요도 없고 우쭐할 필요도 없다. 자기답게 살면 된다. 은혜 받은 삶이란 비교의식을 극복한 삶이다.
2. 형제를 힘써 지켜주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가인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이 대답하셨다면 “그렇다.”고 대답하셨을 것이다. ‘내 아우’는 ‘나보다 약한 사람’이란 뜻도 있다. 약한 사람을 지켜주고 돌봐주라. 왜 하나님이 내게 강한 믿음을 주셨는가? 믿음이 약한 사람을 도우라는 뜻이다. 왜 교회에 먼저 있게 하셨는가? 나중에 온 사람을 돌봐주고 섬기라는 뜻이다. 왜 내게 물질을 주셨는가? 선교와 나눔에 힘쓰라는 뜻이다. 리더의 축복을 원하면 십자가를 앞서 실천하면서 남을 힘써 배려하라.
다만 배려가 너무 지나쳐서 정당한 발걸음까지 주저하고 남의 시선을 의식해 바른 말도 못하는 ‘염려’의 단계까지 가지는 말라. 사탄의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들이 더 사람을 배려하는 것처럼 가면을 쓰고 나오는데 그 미혹에 속지 말라. 예를 들어, 동성애의 쾌락성에 한번 맛들이면 헤어 나오기 힘드니까 선천적 성향으로 믿어버릴 때가 많다. 그 강력한 쾌락성을 강력한 혐오성이 제동장치 역할을 했는데 사탄의 인본주의자들은 인권과 인본주의를 내세워 그 혐오성을 교묘하고 집요하게 걷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탄의 인류 말살 전략은 다방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총성도 없으면서 인권이란 아름다운 겉포장과 강력한 쾌락성이란 내적인 흡인력을 바탕으로 인류 말살과 가정 말살을 순조롭게 진행시키는 사탄의 첨단무기가 동성애다. 그런 동성애를 하나님은 죄로 혐오하도록 말씀했는데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염려다. 힘써 배려하되 너무 염려하지 않고 용기 있게 바른 길을 가면 주위에도 든든한 믿음을 준다. 그런 믿음을 통해 삶의 안정감을 선물하는 것도 형제를 지켜주는 삶이다.
3. 형제를 희생시키지 말라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말씀했다(10절). 그 호소를 듣고 하나님이 아벨을 도로 살려주시지는 않았지만 가인이 저주를 받고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11-12절). 하나님은 의인의 억울한 희생을 묵과하지 않고 다 지켜보신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자기 자리를 힘써 지키라. 산을 끝까지 지키는 못생긴 것 같은 나무가 결국 거목이 된다.
남을 희생시키고 혼자 성공하려고 하면 상처뿐인 영광만 얻는다. 늘 평화를 앞세워 성공의 길로 가라. 하나님이 모든 역사를 섭리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를 중심으로 섭리한다는 신앙적인 역사관을 분명히 가지라. 하나님은 의인의 선행을 반드시 기억해서 은밀하게 갚아주신다.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일하심을 알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왜 내게는 내 행위 이상의 고난이 즉시 올까? 남들은 저렇게 많은 죄를 지어도 멀쩡한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게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신 증거다. 내게 관심이 없다면 추수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만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그렇게 무관심할 수 없다. 자녀가 천국만 잘 가기를 원하지 않고 이 땅에서도 바르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고난 중에도 형제를 탓하지 않고 어려움이 예상되어도 형제를 희생시키지 않으려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은 반드시 부활의 은혜를 허락하실 것이다.
4. 형제를 용서하라
어떤 사람은 “예배는 드려도 용서는 못하겠다.”고 한다. 그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다. 먼저 용서하라. 개인적으로 만나서 “용서해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때로는 교육 목적이나 묵상 목적으로 떨어져있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참된 용서다. 그때 참된 은혜도 주어진다. 용서는 남 좋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는 더욱 좋은 일이다.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이다. 남을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서서히 자기를 죽이는 행위다. 진심으로 용서해야 내 영혼도 살고 축복과 행복도 얻는다.
남을 미워하지 말라. 싸워야 할 대상은 남 이전에 나 자신이다. 가인은 아벨을 경쟁상대로 알고 죽였지만 사실 가인이 싸워야 할 대상은 자기 내면의 불신과 시기와 미움과 분노였다. 사울의 싸움 상대도 다윗이 아니라 자기 시기심이었다. 야곱의 총애를 얻지 못할 때 레아의 할 일은 남편 마음을 얻으려고 라헬과 다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예배자로 드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면 시간의 문제일 뿐 사람의 마음도 얻는다. 사랑 받는 경쟁에 너무 몰입하지 말라.
하나님은 “사랑하라.”고 명령했지 “사랑 받으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남의 사랑에 연연하는 나를 극복해야 행복할 수 있다. 내가 불행한 처지에 빠진 이유는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욕망과 죄 때문이라고 여기라. 믿음의 능력은 남을 이기는 능력이 아니라 내 안의 불신앙적인 요소를 쳐서 복종시키는 능력이다. 내 안의 소돔과 고모라와 가룟 유다를 힘써 제거하라. 죄의 대표적인 표시는 시기하는 것이고 선의 대표적인 표시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형제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도 나타나게 하라.
< 부족해도 희망이 있다 >
형제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은 밭을 갈아도 효력이 없고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된다고 하셨다(12절). 그때 가인이 자기의 큰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너무 벌이 큽니다. 저를 만나는 자가 저를 죽일 것입니다.”라고 하자 하나님은 “동생을 죽이고도 너무 뻔뻔하구나.”라고 냉정하게 반응하지 않고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다(15절).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면서도 사랑의 여지를 남겨두셨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 가지는 꼭 기억하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은 나를 사랑하기에 허락하신 고난이란 사실이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매를 댈 때 아이들은 울고불고 생각한다. “엄마아빠! 미워요. 날 사랑하면 왜 이렇게 때려요? 제가 미워서 그러지요?” 그러나 부모는 아이에게 징계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해도 아이는 대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중에 크면 그 징계의 의미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때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벼랑에서 밀지만 그때 하나님께 항복하면 벼랑 밑에서 받아주고 독수리처럼 더욱 높이 날아오르게 하신다. 힘들 때는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 항복할 때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면 믿음과 말씀에 대해 회의가 들고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열등감에 빠져 인생이 끝났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 진심으로 하나님께 항복하면 그 다음에는 놀라운 축복이 기다린다.
최근에 <월간새벽기도> 사역에 재정적인 압박이 있으니까 누군가 염려하며 말했다. “목사님! 요새 어려워서 어떡해요?” 필자가 말했다. “아마 큰 은혜의 폭풍이 불기 직전인 것 같아요.” 이제까지의 체험을 통해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실제로 지난 사역을 보면 심한 고난이 있을 때 염려를 버리고 감사하니까 필요도 채워지고 오히려 사역 지경이 한 차원 더 확장되었다. 믿음과 감사를 잃지 말고 계속 버티면서 치열하게 기도하고 준비하라. 그러면 은혜의 때가 반드시 온다. 새벽이 오기 전에는 가장 어둡다가 곧 밤이 끝나고 어둠이 걷힌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의 죄와 허물보다는 하나님이 덜 힘들게 하셨다고 믿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변함없이 확신하며 참된 예배자의 고백을 하라.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 잃어도 좋습니다.” 욥은 다 잃었지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참된 예배자의 고백을 했다. 그 고백을 통해 욥은 다 얻었을 때보다 다 잃었을 때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을 돌렸고 후일에 결국 2배로 회복되었다.
늘 참된 예배자의 고백이 입술에서 습관처럼 나오게 하라. “하나님! 제 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요리하세요. 물질, 자녀, 재능, 시간, 그리고 제 목숨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마음대로 요리해 사용하세요.”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부족해도 늘 넘치는 희망이 있다. 그런 고백이 없이 다 자기 것인 줄 알고 살면 불행과 저주와 사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참된 예배자의 고백을 가지고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면 잠시 고난이 있어도 그 고난은 축복 전령으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곧 사라질 것이다.
극도로 힘들 때도 아직 내게 남은 것을 꼽아보라. 찬송가 429장에 이런 찬송이 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하나님은 가인에게도 사랑의 여지를 남겨두셨다. 내게는 더욱 사랑의 여지를 남겨두실 것이다. 하나님은 가인의 탄원도 들어주셨다. 나의 탄원은 더욱 들어주실 것이다. 늘 잃은 것보다 남은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찬란한 미래를 설계하며 더욱 자신감 있게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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