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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믿음과 행위

by 【고동엽】 2022. 11. 19.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만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입으로는 믿는다고 외쳐도, 그의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거짓이다.
이처럼 진정한 믿음은 행위가 나오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 순서가 뒤바뀌거나 행위를 믿음으로 말하면 안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진실로 믿었기 때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이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 자체가 믿음이라고 하면 안된다. 당시에 갈대아 우르를 떠난 사람은 아브라함 만이 아니었다. 그의 조카 롯도 떠났다. 사실 더 잘 살기 위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난 사람이 어찌 아브라함 뿐이었을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기 아들 이삭을 드렸다. 진정한 믿음이 있기에 아들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 이후로 수 많은 왕들과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드렸지만, 오히려 가증한 일이었다. 그들은 흉내를 낸 것이고, 아브라함은 진정으로 믿은 것이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믿음이 없는 행위는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그 후속 행위가 나오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들에게 항상 진정한 믿음을 가질 것을 권해야 한다.
결코 믿음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면 안된다.
그것은 그럴싸하지만, 사실 행위없는 믿음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의 위험은,

첫째는,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규정하여 자신이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 너는 그런 믿음으로 구원은 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믿음으로는 안된다. 행위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구원을 지속할 수 있다.'
그 말은 마치 복음인듯 하지만, 결국 믿음은 처음 구원받을 때만 의미가 있고, 그 후에는 전적으로 내 노력, 내 힘으로 살아가야 함을 은근히 암시한다. 이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서 이탈하여 다시 율법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게 유도한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법에서 율법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 경계했던 미혹이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만일 우리가 율법적인 삶으로 사람들을 이끈다면, 약간의 도덕적 우위의 삶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에 따른 '자랑'이 그를 완고하고 교만한 종교인으로 만들게 할 것이다.

이것이 오래 신앙생활했다는 사람들이 처음 믿을 때보다 성화되기는 커녕 더 완고하고 정죄하기 좋아하는 타락한 종교인이 되는 이유다.

둘째는, 사도 바울의 복음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

당시에 율법주의자들은 사도 바울의 복음에 절대 반대했다. 아무리 봐도 복음은 사람을 방종으로 이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 중에 가장 사악한 것이 '교만'임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는지를 깨닫는다.  그 이유는 '자랑치 못하게 하심'이다.


이렇게 명백한 성경구절 앞에서 율법주의자들은 이렇게 방어한다.

'그래, 처음 구원받기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없고 오직 믿음뿐이야. 그러나 구원받고 난 뒤에는 당연히 행위가 필요하지'
그 말은 너무나 그럴싸하다.
그런데 우리가 원래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인데, 이제 구원받았으니 스스로 구원을 유지할 능력은 된단 말인가?


우리가 담장도 못넘는 닭이었는데, 이젠 창공을 나는 독수리가 되었단 말인가?
사실 독수리가 되었다고 외치는 설교를 무수히 듣는다. 그러나 막상 우리의 삶은 독수리는 커녕 뚱뚱한 닭에 불과하다.
아직도 연습이 부족하다고 외치며 도전하는가?
우리가 나는 이유가 독수리 날개를 달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예수그리스도라는 비행기를 탔기 때문인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이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롬 1:16-17)
복음은 결코 믿는 자들을 타락으로 이끌지 않는다. 거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행위를 가지지 못한 자에게 '믿음만 가지면 안되고 행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진실로 믿어야 할 것'을 권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자신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믿음의 정도에 달려있다. 주님을 믿으면 믿을 수록 주님을 그 만큼 알게 되고 주님을 그만큼 닮아가게 되어있다.

만일 우리의 행위가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게 되면 그의 행위는 한마디로 외식이고 자랑거리일 뿐이다.


아직도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다.
약간의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마치 선지자가 된 것처럼 개혁을 외치는 것은, 한마디로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는 주님의 의도를 묵살하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겸손하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만큼만 성화될 수 있다. 딱 그만큼이다.
그러므로 착한 마음으로 더욱 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를 배우려고 해야 한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자들의 방탕과 더러운 욕심으로 행하는 자들을 본받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엡 4:17-20)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같이 우리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습관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영적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자. 더욱 주님을 믿을 때 믿음이 있는 만큼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더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아! 주 예수님,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참으로 진정으로 주님을 믿어서 주님의 그 사랑과 용서와 진실하심을 제가 알고 배우고 실천하기를 원합니다.


<최야곱>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2pw/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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