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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복음적 삶의 방식(2)

by 【고동엽】 2022. 11. 19.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 5:16-18)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고 난 뒤에 우리는 어떻게 거룩한 삶을 이어가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구원 받고 난 뒤에의 삶에서는 의견이 갈린다. 
여전히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이제는 율법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과연 어떤 것이 옳은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도덕적 삶'이 믿음의 궁극적 목표인 줄 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무릎이 그리스도에게 꿇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는 것이다.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을 들어보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을 무척 많이 한다.
오늘날 개신교인들도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반대하는 자가 이렇게 많은데, 하물며 바울 당시에 유대인들이 바울의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경악했을까? 바울의 말은 마치 방종을 부추키는 무서운 말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비밀을 아는 자들은 바울이 얼마나 놀라운 경지를 우리에게 전해주는지 공감할 것이다.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단순히 우리가 의식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비밀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영원한 미스테리가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이란 종교적 규례를 지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를 의식법의 유무로만 구분하는 것이다.
 
복음이 거듭나지 못한 일반인들의 반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복음은 상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은 계시다.
 
구원 이후에는 율법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의지에 호소한다.
얼마만큼 강한 의지로 율법을 지켜내느냐고 곧 믿음의 척도로 간주한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상당부분 선천적인 기질과도 연관되어서, 의지가 강한 사람도 있지만 어려서 부터 의지가 박약한 사람도 있다. 
 
구원 이후의 삶은 의지가 강한 사람만이 가능한 삶인가?
의지가 약한 자는 결국 신앙생활이 불가능한가?
그렇다면 은헤의 복음은 단지 처음 믿을 때만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적용되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은혜의 복음은 의지가 약한 자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신다.
 
의지가 박약한 자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 
의지가 박약한 자도 자신이 '갈망하는 것'이나 '재미있어 하는 것'은 매우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한다. 
인간의 갈망은 의지를 이끈다.
그리고 더 큰 갈망이 작은 갈망을 집어삼킨다.
 
직장 동료 중에서 고스톱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주말만 되면 동료들과 어울려서 약간의 돈을 걸고 하는 고스톱을 했는데 이것이 그를 얼마나 즐겁게 하는지, 그는 주말만 되면 콧노래를 부르면서 기분 좋은 얼굴이 되었다.
이런 자에게 고스톱은 좋은 것이 아니니 그만 두세요라고 말하면 그가 그만 둘 수 있을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고스톱을 그만 두었다고 했다.
나는 놀랬다. 어떻게 그렇게 좋아하는 고스톱을 하루 아침에 끊어버렸을까?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내게 한마디로 대답했다
'마작이 더 재미가 있더구만...'
 
우리가 거듭났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성령은 우리에게 거룩한 갈망을 일으키셨다.
예배에 대한 갈망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영적인 기쁨의 갈구,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리스도의 평화와 영생에 대한 갈망...
이런 갈망이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고,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했다.
성령의 갈망이 육체의 욕심을 이기게 한다. 이런 갈망이 우리의 의지를 이끈다.
 
교사 신우회 모임에서 돌아가면서 자신의 변화를 말하기로 했다. 최근에 모임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은 행정실 직원이 말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서 매일 마시던 술을 끊었습니다. 매일 세상을 비관했는데, 이제는 감사하며 삽니다. "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 분이 어떻게 술을 단번에 끊을 수 있었을까? 술보다 더 좋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곧 이어서 역시 최근에 예수님을 믿은 한 여선생님 차례가 되었다.
그 자매님은 한참 망서리다가 말을 꺼냈다.
"저는 솔직히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별 차이가 없어요. 원래 술도 안 먹고, 크게 고쳐야 할 나쁜 습관도 없는데..."
사람들은 조금 실망했다. 예수님 믿고서 변화가 없다니!
내가 그 선생님에게 물었다.
"세상을 보는 눈, 삶의 가치관은 어떠세요?"
그러자 그 여선생님은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맞아요. 가치관이 바뀌었어요. 과거에 내가 갈망하던 것이 이제는 관심이 없어지고, 이제는 새로운 갈망이 생겼어요"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지는 순간, 우리에게는 새로운 갈맘이 생긴다.
이 갈망이 우리로 예배드리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예수의 증인으로서 살게 한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에게 율법을 들이대는 것은, 마치 동쪽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에게는 서쪽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권하는 것과 같다.  동쪽으로 뛰는 사람에게는 서쪽의 경계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동쪽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주어야 한다.
지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충만한 사람에게 '살인하지 마십시오'라며 권면하고,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계명인지에 대해 설명하면 어떨까? 물론 살인하면 안된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나 세상을 추구하는 자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무서운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갈망을 더욱 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갈망은 우리의 의지를 이끈다.
이런 자들에게 이웃 사랑을 권하고, 교회를 섬길 것을 권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런 권고가 기쁨의 격려가 된다.
아무런 갈망이 없는 자들에게 협박하면서 율법을 강요하는 것은 외식하는 자들을 양산시킬 뿐이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갈망을 따라 행하면, 각종 성령의 열매가 맺혀진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하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힘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면 열매가 맺혀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성령의 갈망을 따라갈 수는 있다. 
 
사람이 어떤 갈망을 좇는 것은 대단한 의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제대로 포착만 하면 된다. 
성령이 갈망이 어떤 자에게 임하는가?
바로 믿는 자에게 임한다.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예배가 지겨운가? 성령의 갈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에게 성령의 갈망이 없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믿음이 없다는 증거다. 눈물로 회개해야 할 때다.
 
만일 당신이 거듭났다면, 당신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다. 우리가 주님을 착한 마음으로 믿고 묵상한다면, 즉시 성령의 갈망이 내 안에 있음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저기 잘난체 하고, 인간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목표였던 자가 더 이상 그것이 쓰레기 같은 것에 불과함을 깨닫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목표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오! 주님, 우리 안에 성령의 갈망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것을 체험케 하소서!
 
<최야곱>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2pw/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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