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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by 【고동엽】 2022. 11. 19.
요1:29-34

오늘 예배는 성찬예배로 드려지고 있습니다.

이 예식은 주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마가요한의 다락방안에서 행하셨던 처음 성찬을 모범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란다. 하셨고 예수께서 또한 잔을 주시며 받으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신 그대로 우린 오늘 주님의 살과 피를 받는 성찬예배을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의 감격의 외침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오심을 보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외친 것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나사렛 예수로 보이는데 목수의 아들로 보이는데 보이는대로 말하는데 세례요한의 눈에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보이고 그 본 것을 입술로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처음부터 이렇게 보고 이렇게 외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31절 33절에 반복해서 강조하는 말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보인 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세례요한이 알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나이 고향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친척이었습니다. 사람으로서 알 수 있는 정도는 세례요한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새롭게 알았다는 것이요 새롭게 보인다는 것이요 새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영적 눈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세례요한이 영적이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누구입니까?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 앞서 길 닦는 자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랬던 요한에게 어느날 또 하나의 눈이 열렸습니다. 보이는 것입니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외치는 것입니다. 29절을 읽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례요한이 본다는 것입니다. 감격입니다. 감탄입니다. 나도 이제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열린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속에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보이는 것입니다. 기적의 예수 병든 자를 고치시는 예수 가난에서 부요를 주시는 예수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예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에게 또 다른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감추었던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29절)

29절에 요한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하는 말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합니다. 여기서 논리적으로 표현한다면 지금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심을 보고 하는 소리이기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오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지금 자기에게 오고계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으로 보고 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요한은 지금 자기에게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신 목적 바로 십자가에 죽음으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오시는 모습속에서 가시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지금 오고 계시는 예수님의 어깨에 무엇인가 끙끙거리며 메고 가시는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 죄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고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세상 죄안에 내 죄가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세례요한만 보았던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 또한 눈이 열려 보았습니다. 사53: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을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놀랍지 않습니까? 세례요한은 보고서 알았지만 이사야는 보지도 않고 본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고도 이것만 보았지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의 사건만 보았지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 보았지 나사로를 살게 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예수님 이 땅에 3년 반의 공생애를 사시면서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고난을 받으러 왔단다, 나는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러 왔단다. 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많은 말씀들로 제자들을 가리치셨지만 사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기적을 행하시며 표적을 보이셨지만 예수님이 진짜 말씀하고 싶은 것은 나는 세상 죄를 지고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왔단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본래의 모습은 기적의 예수 치료의 예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셨던 목적 그대로 고난을 받으셨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문제는 기적만 보았던 사람들 치료의 예수만 보았던 사람들 저들 모두도 배반하며 저주하며 떠나 버린 것입니다.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본래의 예수를 보아야 예수를 가슴에 품고 본래의 예수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어린양은 가장 순결한 희생제물을 의미합니다. 어린양의 피는 유월절의 죽음 사망의 그늘을 물리친 능력입니다. 구약의 제사 중에 대표적인 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이 제사에는 분명히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물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잡기 전에 예식을 합니다. 안수합니다. 제물의 머리위에 안수합니다. 그리고 죄를 전가시킵니다. 나를 대신해서 죽는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감격입니다. 무엇을 보았기에 감격일까요? 세례요한이 단순히 십자가로 향하시는 희생의 주님만 보았다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아픔과 함께 감격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 속에서 바로 나의 죄의 짐을 몽땅 지고 내 죄의 모든 허물을 모두 전가 받아 걸어가시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단순히 나를 위로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내 모든 죄를 해결하시는 주님을 본 것입니다.

은혜에는 아픔과 감격이 함께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며 아픔은 무엇이며 주님의 고난 곧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감격은 무엇입니까? 용서와 구원과 자유입니다. 이런 말 들이 있었습니다. 성찬 때 꼭 울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기쁨과 감격으로 해야지 축제처럼 해야지 무슨 슬픈 일을 당했서 울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에는 아픔과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사람은 울음이 가슴이 시원해지는 울음 바로 감격의 울음입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성경말씀 속에서 우리는 기적의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 속에서 우리는 치료의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 속에서 축복의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를 향하여 또 하나 주님의 원하심이 있습니다. 요한에게 있어 나도 그를 몰랐으나 이제는 알게 되었다 했는데 저와 여러분에게나 이런 영적인 눈이 열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32절)

언제 요한은 눈이 열린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요단강 예수님의 세례시에 임한 성령의 임재입니다. 1:31-33절에 보면 31절에 나도 그를 알지 못했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32절에 요한이 또 증거하되 가로되 내가 보며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내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말씀합니다. 성령의 임하심으로 요한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물론 성령충만의 역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는 치료의 광선을 말합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는 방언을 말하게도 합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예수그리스도를 바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3년 반을 배우고 따르면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잘 몰랐던 이들에게 오순절 성령의 강림의 역사는 예수그리스도를 바로 보게 되었고 들었던 말씀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성령강림의 역사가 있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망이요 좌절이었습니다. 무엇인가 얻을 것 같았지만 무엇인가 이룰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보게 한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로 요한이나 제자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깨달을 자도 알자도 없다했습니다. 성령이 임하고 눈이 열린뒤에 비로소 저들은 참 그리스도인 참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에 무엇을 받을 것인가가 아니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에 무엇을 드릴까가 되었습니다.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여기에서 몇가지 성경적 지식을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임재를 받으셨습니다. 요단강에 임하신 성령의 사건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요한을 위한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성령의 실체입니다. 따로 성령의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성령의 사건은 예수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의 출발이 신호이기도 했지만 이 성령의 임재는 세례를 주고 있는 요한으로 하여금 영적인 눈이 열려 예수님을 바로 보게 한 것입니다. 요한이 보니 하늘로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 했는데 이 말씀 또한 성령의 나타나심이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특성을 보단 메시야 된 예수님의 사명을 본 것이니 비둘기는 가장 가난하고 연약한자가 드릴 수 있는 희생제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한자와 비천한 자의 희생제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희생제물입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세례 주실 예수님을 소개하며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행19장에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질문합니다. 엡5: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물세례를 통하여 외적성도가 되고 성령세례를 통해 내적성도가 된다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로부터 오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요한이 보았던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는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합니다.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충만의 역사가 아니면 요한은 그는 사명자요 전도자였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방법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참 예수를 본 자의 사명은(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입니다. 참 예수를 본 자의 사명은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본 것에 대해 또 다른 사람을 보게 했으면 하는 열망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발견한 은혜에 대해서 나누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느날 은혜를 체험하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 깨달은 것이 있으면 나누고 싶어합니다.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은혜되는 원리입니다. 내적으로 은혜가 있어도 표현되지 않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전하고 싶고 말하고 싶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요한은 담대한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쳐버립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요한은 예수에 미친 자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요한은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미련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헤롯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았다면 결코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데 너무 생각이 많습니다. 저 사람이 혹 어떻게 생각할까 등등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내가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일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찬의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전11:26절에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주여 내 안에 은혜가 넘쳐 또 다른 나에게 향하게 하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성찬의 은혜를 전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성찬속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보여지는 은혜가 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출처/유재명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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