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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복음적 삶의 방식(1)

by 【고동엽】 2022. 11. 19.




(갈라디아서 5장)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1절)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종의 멍에란, 율법을 가리킨다. (행 15:10)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종은 '두려움'으로 움직이지만, 아들은 '경외'와 '사랑'으로 움직인다.
종의 방식은 '제대로 못 살면 구원을 잃어버린다'라는 두려움이 행동의 동인이다.
아들의 방식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어떻게 기쁘시게 할까'가 동기다.
따라서 우리는 아들의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3절)'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이 율법을 반대한 것은 '할례'와 같은 의식이지, '도덕법'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너무 그럴싸한 말이다.
 
그러나 바울이 반대한 것은 단순히 '할례'만은 아니다.
사실 할례 받는 것이 그렇게 목숨을 걸만큼 반대할 사항이 되지 않는다. 할례받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는가?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서 할례(포경수술)을 자진해서 받기도 한다. 그게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만한 일인가?
심지어 바울은 이방인 디모데에게는 오히려 복음을 위하여 할례 받게 하였다(행 16:1-3)
 
바울이 반대한 것은 단순히 '할례'나 '제사법'같은 의식법만이 아니다. 그것은 번거로울지언정 죄성있는 인간이 지키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사도바울이 반대하고 경계한 것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받아들이게 되는 율법적 삶의 방식이다. 
율법적 삶의 방식이란, 즉 우리가 어떤 것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하자면, 회사에서 사장과 나는 어떤 일을 행함으로서 관계가 유지되지만,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존재 자체로 관계가 유지된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행함으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집에서 어머니의 아들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머니가 하는 일, 즉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을 돕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그것이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면 좋겠지만...
 
(4절)'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 구절은 너무나 중요한 구절이다.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 
맞다. 그것은 감사드려야 할 하나님의 복음이다. 
할렐루야! 그래서 나는 의롭다함을 얻었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일단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 우리의 삶의 방식이 율법적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추구했던 그 삶의 방식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복된 복음을 다시 먼지 속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경고하는 것은 바로 이런 주장이다. 
그런 방식으로 살다가 실패를 맛보았던 바울이 복음을 깨닫고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방식'(갈2:20)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전했는데, 어리석은 갈라디아 성도들은 유대인들의 꾀임에 넘어가서 바울이 버린 방식을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다.
 
만일 이런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다면,
오늘 이 경고를  깊이 새겨야 한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한다' 
끊어진다는 말은 현재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처음 믿는 자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데, 이제 그 아들된 은총을 나의 노력과 행위로 유지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율법의 방식대로 살 것 '을 주장하는 사람은 오히려 진짜 구원을 잃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다. 
사단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복음을 믿지 않게 하고 율법으로 돌아가게 만드려고 애쓴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은 어떻게 다른가?
이 차이를 쉽게 설명해보자.
율법 하에 있는 사람은 '도둑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이 그것을 금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도둑질'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람을 '섬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율법은 '용서'를 말하지 않는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용서'를 배웠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까지 하신다.
 
율법은 끊임없이 나를 반성하고 나를 점검하게 한다. 
이것이 나를 성화시킨다고 믿는가?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나는 잘 안다.
교만한 사람에게 반성해보라고 하면, 그는 결코 교만을 반성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1시간 밖에 기도하지 못하는 것, 재산의 반을 헌금하지 못하는 것 등을 반성한다. 그의 반성을 듣고 있노라면, 이것이 반성인지 자랑인지 조차 구분이 안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교만할 수 없다.
큰바위 얼굴의 이야기 처럼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묵상한 자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율법적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그런 자들은 신앙생활 오래할수록 예수님을 닮기는 커녕 더 고집스럽고 교만하며, 완악해진다.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고 비판이 많다. 현대판 바리새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갓 예수 믿은 사람이 더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한다.
 
즉 율법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은혜에서 떨어진다'는 사도바울의 경고가 사실인지 알고 싶다면, 율법으로 오랫동안 신앙생활한 사람을 살펴보면 된다. 종교적 열정은 있지만, 사람을 사랑함은 없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잘하면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그들의 열정은 '자랑'에서 나온다. 그 자랑의 힘으로 남을 비판하는 데 열심을 낸다.
솔직히 비판하는 것이나 트집잡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다. 나는 오랫동안 주님을 사랑해온 사람들의 눈빛들을 잊을 수 없다. 상대방을 꿰뚫어보는 눈빛이 아닌,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눈빛이다.
내가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된 것도 그런 성도들의 믿음에서 나온 거룩함과 진실됨의 모습때문이었다.
 
율법적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종교적 교만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께서 표준이시기 때문에 결코 교만할 수가 없다.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셨는데, 내가 어찌 다른 사람의 발을 씻는다고 교만할 수 있을까?
아, 주님, 우리의 눈을 여셔서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법을 보게 하소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
오! 주님, 제가 이런 믿음의 비밀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하소서!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2pw/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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