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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7장11-17 /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심

by 【고동엽】 2022. 11. 19.
■2022년 11월15일(화)■
 
(누가복음 7장)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묵상/눅 7:11-17)


◆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일명 '혜경 스님'으로 알려진 김성화 씨는 불교계에서 꽤 영향력 있던 승려였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무척 혐오했었다. 그렇지만 기독교계의 여러 장점들을 불교에 잘 접목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한불교 정토종 교육국장을 하면서 불교 대학, 동네 사찰, 찬불가 등 기독교를 모방한 획기적인 의견을 많이 냈다. 그런데 5공화국 시절에 불교계의 정치 분쟁에 휩쓸리면서 감옥에 잠깐 간 적이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염불을 외우면서 속상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는데, 아주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꺼려서 던져 버렸지만, 호기심이 발동하여 한번 읽어보게 되었다. 조금도 미혹되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하고 마태복음, 마가복음 이렇게 순서대로 읽어나갔다. 그리고 누가복음까지 별문제 없이 잘 읽다가 오늘 본문에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과부의 독자가 죽은 이런 사건은 불경에도 있는데, 해결 방법이 너무나 대조되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에게 독자를 잃은 과부가 와서 살려달라고 하소연하자, 석가모니는 그 여자에게 동네에 내려가서 한 번도 죽음을 겪지 않은 집에서 쌀 한 줌을 얻어서 미음을 쑤어 아들에게 먹이면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이 여자는 크게 기뻐하면서 동네를 뒤졌지만 한 번도 죽음을 당하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어깨가 처져서 돌아온 그 여자에게 석가모니는 위로하면서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 인연 따라 일어나서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하며 위로했다. 이에 여자는 크게 깨달음을 얻어서 내려갔다. 불교는 매우 철학적이고, 얼핏 심오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멋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언가?
독자를 잃은 과부는 절망 속에서 심히 슬퍼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시더니 독자를 덜컥 살려놓지 않으시는가? 장례를 망쳐놓으셨다. 전혀 철학적이 아니다. 무모할 정도로 파격적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이 기록되어있는 것에 김성화 씨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게 정말 사실일까? 만일 사실이라면 정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난을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심리적인 위로만 추구하던 불교에 익숙해 있던 자가 갑자기 고난을 극복하고, 실제적인 위로와 평화를 주시는 실체를 만나자 당황했다. 그는 그때부터 심마에 빠졌다. 소위 미혹(?)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 절에서 아무리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워도 잡념(?)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는 무수한 번민 끝에 결국 법복을 벗고 개종하였다. 이제 그는 목사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다. 이것은 말로 전하는 심리적인 위로가 아니다. 실제적 위로다. 이 기쁨, 이 충격.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은 단순히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서만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16).


과부는 설사 다시 아들이 죽을지라도 전처럼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보다 더 강력한 능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경험한 이상, 더는 죽음에 절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은 잠깐의 위로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알리심이며, 하나님 나라에서는 병도, 죽음도, 고난도 모두 극복이 가능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단순히 말로만 이루어진 심리적 위로가 아니라, 실체를 가진 위로다. 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풍 병자에게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시는 위로다.


믿는 자에게 임하는 평화는 단순히 철학적 깨달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평화며, 하나님의 실제적 능력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면 이런 평안과 능력의 실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없는 돈을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사려고 하면 망상가가 된다. 그러나 있는 돈을 사용하지 못함으로써 굶고 있다면 그는 멍청한 사람이 된다. 대통령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고 행세하면 그는 망상가다. 그러나 대통령이 자기가 대통령이 아니라고 믿어도 망상가인 것은 똑같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 시민인데,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은 멍청이거나 망상가다. 오, 주님 제가 이런 자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신분을 얻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신분에 걸맞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지혜롭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이런 신분을 진짜로 믿어본 적이 있는가?다른 것을 구하지 말자. 나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믿음에 굳게 서려고 하자. 


우리가 속한 세계는 말로 그럴싸하게 꾸민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적 세계만큼이나 분명한 영적 세계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아멘, 주 예수여.
제가 믿습니다.
주님은 부활이시며 생명이십니다.
주님의 생명이 제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의 시민입니다. 이 신분을 잊지 않겠습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흔들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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