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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7장1-10 / 백부장의 선구자적인 믿음

by 【고동엽】 2022. 11. 19.
■2022년 11월14일(월)■


(누가복음 7장)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묵상/눅 7:1-10)
 
◆ 백부장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백부장은 문자대로라면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지휘관인데, 실제로는 부하가 50명에서 100명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계급으로는 장교 밑의 하사관급이고 현장에서 발로 뛰는 군인이다.
 
실제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는 자라서 백성들과는 자주 접하는 군인이며, 당시 로마의 속국이 된 이스라엘에서 백부장은 꽤 힘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로마의 백부장들은 거칠고 무자비하여 백성들과 사이가 안 좋은 데 비해 이 백부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칭찬을 들었고, 심지어 백성을 위한 회당까지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놀랍다. 아마도 이 백부장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던 것 같다.
 
신약성경에는 백부장이 다섯 명이 언급되어 있는데, 신앙을 가진 자는 오늘 본문의 백부장과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다.
 
◆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의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어있다(마 8:5-13).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대신 간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이 직접 나아와서 중풍에 걸린 자기 하인을 위해 간구하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마태는 사건을 간략히 줄여서 기록한 데 비해 누가(Luke)는 보다 세밀하게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께서 백성 장로들의 하소연을 듣고 직접 고치러 가실 때, 백부장은 자기 친구들을 보내어서 말씀만으로 고쳐주실 것을 구했다.
 
얼핏 보면 백부장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렇게 사람만 보내서 이것 저것 요구하는 것 같아서 매우 건방져 보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백부장이 속국의 일개 백성에게 굽실거릴 만한 위치는 아니기도 하지만,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이 직접 나아오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자신이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려진 분을 자신이 감히 맞닥뜨릴 수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부족하고, 죄인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어떻게 이방인 백부장이 이렇게 겸손할 수 있을까?
 
또한 예수께서 말씀만으로도 자기 하인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마도 그는 구약성경에서 선지자 엘리사가 자기 종을 문둥병이 걸린 나아만 장군에게 보내어서 치료한 사실(왕하 5:10)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이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
백부장의 하인은 즉시 고침을 받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훈을 얻는다.
이 백부장이 요청하지 않았어도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말씀으로 고치실 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런 쉬운 방법을 몰라서 직접 고치러 가셨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인간들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백부장의 믿음이 커지자 주님께서는 거기에 걸맞는 놀라운 반응을 하셨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지만, 언제나 문제는 사람의 믿음이다.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건만, 그 믿음이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무한하시다고 습관처럼 말하지만, 실은 무한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모른다. 무한은 거대한 유한이 아니라, 아예 유한과 속성 자체가 다르다. 무한은 전 인류에게 무한을 나누어주어도 무한이 조금도 줄지 않는 특이한 속성을 가진다. 칸토어 같은 수학 천재도 무한을 연구하다가 우울증에 걸릴 정도였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찬양하는 기도가 여러 번 있다.
주님,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하게 하소서! (시 40:16)
 
'광대하시다'는 말씀은 히브리어 '가달'인데, 이것은 아주 크게 증가시킨다는 의미를 가진다. 아브라함에게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창 12:2)라고 할 때 사용하신 단어다.
 
'하나님은 광대하시도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최대한으로 확대해서 상상하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KJV성경은 이 단어를 'magnify(확대하다, 과장하다)'로 번역했다. 
 
'광대하시도다'라는 말을 개역개정 성경이 단순히 '위대하시다'라고 고쳐서 번역한 것은 크게 잘못한 것이다. 오히려 '무한히 크신 분이시다'라고 번역했어야 한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는 말은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하나님을 네 상상력을 동원해서 최대한 과대평가해라. 그래도 아직 한참 과소평가한 것이다. 마치 우물가의 개구리가 소의 크기를 상상할 때 자기 배를 크게 불리면서 이 정도면 되겠니? 라고 질문하자, 진짜 소를 보고 온 개구리가 비웃는다. 당신 배가 터져도 아직 멀었습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시도다라고 함은 당신 상상을 찢을 정도로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성경에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믿음의 영역을 개척한 선구자들의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오늘 본문의 백부장, 예수님의 옷을 만져서 고침을 받은 혈루증 여인, 골리앗을 겨우 매끄러운 조약돌 몇 개로 맞선 다윗...
 
그들이 바로 믿음의 선진들이며, 우리가 본받을 사람들이다. 남보다 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알게 될 때, 그는 믿음의 선구자가 될 수 있다.
 
종종 하나님을 자기 지식에 가둔 신학자들보다 초신자들이 더 큰 믿음을 가진 것을 본다. 더 큰 믿음은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광대하십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더욱더 알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더 깊고 큰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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